제헌국민의회 (1848–1849)
National Constituent Assembly (France, 1848–1849)
1848년 2월 혁명 뒤 4월 23~24일 남성 보통선거로 뽑혀 1848년 5월 4일부터 1849년 5월 26일까지 열린 프랑스 제2공화국의 제헌 의회. 1848년 11월 4일 헌법을 만들고 행정위원회, 카베냐크 정부, 첫 바로 내각을 차례로 세우고 감독했다. 국립 작업장을 닫아 6월 봉기를 불렀고, 마르크스는 이 시기를 「공화국 수립 시기 또는 제헌국민의회 시기」라 불렀다.
상세
선거는 부활절인 1848년 4월 23일에 치러졌다. 1792년 이후 처음 치른 남성 보통선거였고, 투표율은 84%에 이르렀다. 많은 마을에서 유권자들이 사제를 앞세우고 줄지어 캉통 중심지로 가서 투표했다. 당선자는 거의 모두 부르주아와 귀족이었고, 농민은 한 명도 없었으며 노동자와 장인은 약 800명 가운데 열다섯 명 남짓이었다. 「다음 날의 공화파」로 몸을 숨긴 왕당파도 300명 가까이 되었다. 베리에와 팔루 같은 정통왕조파가 약 100명, 오딜롱 바로와 레뮈자 같은 오를레앙파가 약 200명이었다. 실망한 공화파와 「위장한」 후보 지지자들이 루앙과 리모주 등에서 충돌했다.
5월 4일 문을 연 의회는 임시정부 대신 행정위원회를 세워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과 알베르를 정부에서 밀어냈다. 5월 10일에는 노동부를 만들자는 루이 블랑의 제안을 거부했고, 5월 15일 폴란드 지지 시위가 실패하자 블랑키, 라스파유, 바르베스, 알베르를 체포했다. 6월 4일 보궐선거에서 티에르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뽑혔고, 파리에서는 민주파와 사회주의자인 프루동과 피에르 르루도 당선되었다. 힘을 얻은 보수 다수파가 국립 작업장을 닫자 파리 민중이 들고일어났고, 6월 봉기는 카베냐크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국민방위군, 기동대에 피로 짓밟혔다. 붙잡힌 봉기자들은 재판 없이 알제리로 유형을 갔다. 의회는 카베냐크를 정부 수반으로 세우고 계엄을 이어 갔으며, 8월에는 언론을 옥죄는 법을 만들었다.
의회는 5월에 18명으로 헌법위원회를 꾸렸고, 1848년 11월 4일 헌법을 채택했다. 12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이 이기자 그는 바로가 이끄는 군주파 내각을 세웠다. 대통령과 질서당은 의회가 헌법을 보완할 조직법까지 만들기 전에 해산되기를 바랐다. 1849년 1월 6일 라토 의원이 해산을 제안했고, 군대 이동에 위협을 받은 의회는 1월 29일 스스로 해산하기로 했다. 마지막 몇 달 동안 의회는 로마 원정에 동의했다가 프랑스군이 로마 공화국을 공격하자 4월 30일 정부를 견책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1848년 2월부터 1851년 12월까지를 세 시기로 나누었다. 「2월 시기. 1848년 5월 4일부터 1849년 5월 28일까지, 공화국 수립 시기 또는 제헌국민의회 시기. 1849년 5월 28일부터 1851년 12월 2일까지, 입헌공화국 시기 또는 입법국민의회 시기.」 그는 이 의회의 다수인 부르주아 공화파가 노동자의 요구를 「끝장내야 할 유토피아적 헛소리」로 여겼고, 「제헌국민의회의 이 선언에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는 6월 봉기로 답했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