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ismo · 1961–1979

오페라이스모

Operaismo

196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생긴 이단적 마르크스주의 흐름으로, 이름은 ‘노동자주의’라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노동자 투쟁을 낳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투쟁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앞서 이끌고 강제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내세웠고, 공산당과 노동조합의 지도보다 공장 노동자들의 자율적 투쟁과 노동 거부에서 혁명의 출발점을 찾았다. 판치에리의 《붉은 노트》(1961), 트론티의 《클라세 오페라이아》와 『노동자와 자본』(1966)에서 이론을 세웠고, 노동자 권력(1969~1973)과 1970년대 아우토노미아 운동으로 이어졌다. 1979년 4월 7일의 대량 체포 뒤 조직된 흐름으로서는 무너졌지만, 가사노동 임금 운동과 네그리·하트의 이론 같은 갈래를 남겼다.

상세

오페라이스모는 무엇을 뒤집었나?

오페라이스모(operaismo)는 이탈리아어로 ‘노동자주의’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산업 노동자만 지나치게 바라본다고 비판하던 쪽이 붙인 깎아내리는 말이었는데, 그 흐름에 선 사람들이 나중에 스스로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평의회 공산주의나 스탈린주의의 노동 숭배 같은 앞선 ‘노동자주의’와 달리, 이탈리아의 오페라이스모는 노동자라는 처지를 찬양하거나 늘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없애려 했다. 그래서 ‘노동에 맞선 노동자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흐름이 뒤집은 것은 자본과 노동의 순서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제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그 모순이 쌓이면 노동자들이 맞서 싸운다고 보았다. 오페라이스모는 거꾸로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본주의 발전을 움직이는 주된 힘이라고 보았다. 자본은 자기 법칙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저항에 떠밀려 생산 방식과 경영과 국가까지 끊임없이 고쳐 짜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오 트론티는 1964년 1월 잡지 《클라세 오페라이아》(노동계급) 창간호 사설 「영국의 레닌」에서 이렇게 썼다. 자기들도 자본주의 발전을 먼저 보고 노동자 투쟁을 그다음에 보았지만, 그것은 잘못이며 “문제를 뒤집고, 부호를 바꾸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처음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다.” 이것이 흔히 오페라이스모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는 명제다.

오페라이스모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노동계급 투쟁의 눈으로 다시 읽는 ‘정치적 독해’였다. 트론티의 말로 하면, 마르크스주의가 늘 써 온 자본의 내부 역사 대신 ‘노동계급의 내부 역사’를 방법의 원리로 세우려 한 것이다. 훗날 하트와 네그리는 오페라이스모를 정의하면서 마르크스의 한 대목을 끌어왔다. 1830년 이후 오로지 노동계급의 반란에 맞서 자본을 무장시키려고 발명된 기술 혁신만으로도 역사 한 권을 쓸 수 있으리라는 『자본』 1권 15장의 지적이다. 자본은 반응하고, 노동계급은 먼저 움직인다는 것이다.

1950년대 이탈리아 좌파는 어떤 처지였나?

오페라이스모는 1950년대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위기에서 나왔다. 전쟁이 끝난 이탈리아는 ‘경제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공업화를 겪었다. 다른 서방 나라들과 달리 이탈리아에서는 1950년대에 와서야 테일러주의(작업을 잘게 쪼개고 시간을 재서 통제하는 관리법)와 포드주의(컨베이어 벨트 위 대량생산)가 제대로 자리 잡았다. 농촌인 남부에서 공업 지대인 북부로 사람들이 대거 옮겨 왔고, 노동조합이나 좌파 문화를 겪어 본 적 없는 젊은 공장 노동자 세대가 생겨났다.

주류 좌파는 이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팔미로 톨리아티가 이끄는 이탈리아 공산당은 국민 통합과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을 걸으며 계급 충돌보다 생산성과 경제 재건을 앞세웠다. 노동조합은 정치적으로 갈라졌고 고용주들은 작업장에서 공세를 폈다. 그 상징이 1955년 공산당 계열 노동조합이 피아트(FIAT) 공장에서 과반을 잃은 일이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진압과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은 많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공산당은 ‘사회주의로 가는 이탈리아의 길’을 내세워 버텼지만, 이탈리아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동맹에서 떨어져 나와 중도좌파 연립 정부 쪽으로 옮겨 갔다.

이 무렵 사회당의 이견파 라니에로 판치에리가 오페라이스모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떠올랐다. 그는 사회당 이론지 《몬도 오페라이오》(노동자 세계)를 함께 이끌며 『자본』 2권을 옮겼고, 스탈린주의가 굳힌 ‘노동계급과 당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계급 행동을 착취당하는 이들의 자율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9년 사회당 대회 뒤 공동 편집장 자리에서 밀려난 그는 토리노로 옮겨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일하며 젊은 활동가와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공장의 노동 조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지적 원천은 공산당 철학자 갈바노 델라 볼페였다. 그는 당에서 우세하던 역사주의적 해석과 달리 마르크스의 방법을 엄밀한 유물론적 과학으로 읽었고, 그의 제자 트론티는 이를 발판으로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의 공인된 전통, 특히 공산당이 퍼뜨린 그람시 해석에서 멀어졌다.

《붉은 노트》는 무엇을 했나?

오페라이스모가 처음 집단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1년 판치에리와 트론티 등이 만든 잡지 《콰데르니 로시》(붉은 노트)다. 공산당과 사회당에서 떨어져 나온 지식인과 노동조합원들이 모였고,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여섯 호를 냈다(마지막 호는 1964년 판치에리가 죽은 뒤에 나왔다). 이 잡지는 기술이 저절로 진보하는 중립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판치에리는 1호의 글 「신자본주의에서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에 대하여」에서 자본이 기계를 쓰는 방식 자체가 계급 지배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기술 발전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편 것이다.

이 모임은 ‘노동자 조사’(inchiesta operaia)로 이름을 얻었다. 사회학의 설문과 면담을 공장 안 정치 활동과 결합한 연구 방법이다. 지식인이 노동자에게 의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함께 착취의 구체적 현실과 이미 자라나고 있는 저항의 형태를 찾아낸다는 뜻에서 ‘공동 연구’(conricerca)라고도 불렸다. 로마노 알콰티는 피아트와 올리베티 공장을 조사해, 남부에서 올라온 젊은 반숙련 조립 라인 노동자, 곧 회사에도 기성 노동조합에도 마음을 두지 않지만 새로운 형태의 자율적 투쟁을 키우던 ‘대중 노동자’(operaio massa)를 처음으로 분석했다.

트론티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어떻게 나왔나?

1962년 7월 토리노의 스타투토 광장에서 피아트의 젊은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따로 협약을 맺은 노동조합에 분노해 며칠 동안 경찰과 충돌했다. 판치에리와 그 지지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머뭇거렸지만, 트론티를 중심으로 한 더 급진적인 쪽은 노동계급이 공식 노동운동에서 정치적으로 독립해 가고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1963년 트론티, 알베르토 아소르 로사, 마시모 카차리 등이 갈라져 나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잡지 《클라세 오페라이아》를 냈고, 안토니오 네그리도 여기에 함께했다. 오페라이스모의 ‘고전기’가 이렇게 시작된다.

두 사람이 갈라선 까닭은 두 겹이었다. 이론적으로 판치에리는 노동계급이 곧바로 혁명적 주체라는 트론티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실천적으로는 아직 잡지 편집진의 활동을 정치 조직으로 옮길 때가 아니라고 보았다. 판치에리는 트론티의 한 연설을 두고 “지금 노동자 좌파가 저지를 수 있는 일련의 오류 전체를 매혹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것은 아주 헤겔적인, 새로운 역사철학이고 ‘노동계급의 철학’일 뿐이라는 것이다.

트론티는 이 생각을 1966년 『노동자와 자본』(Operai e capitale)으로 정리했다.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책은 그 뒤 청년 반란과 노동자 동원의 물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트론티는 이 관점에서 당시 중도좌파 정부의 경제 계획을 사회주의로 가는 걸음이 아니라, 자본이 자기 지배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정치적 위험인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읽었다. 그래서 임금 투쟁은 그 자체로 정치 투쟁이 된다. 또 공장의 생산과 명령의 논리가 사회 전체로 퍼져 국가까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행자가 되는 상태를 ‘사회적 공장’이라고 불렀다.

트론티는 1967~68년 무렵 노동자들의 자발성이 패배하리라고 내다보고 네그리와 갈라섰다. 그 뒤 그는 정치적 지도와 매개의 문제로 눈을 돌려 ‘정치의 자율성’을 이론화했고, 공산당에 다시 가까워져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시기에는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훗날 상원의원을 지냈다. 아소르 로사와 카차리 같은 다른 오페라이스모 지식인들도 공산당으로 돌아갔다. 오페라이스모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결국 그것이 맞섰던 당으로 돌아간 셈이다.

오페라이스모의 핵심 개념은 무엇인가?

첫째는 ‘계급 구성’이다. 자본이 노동력을 조직하는 물질적 짜임, 곧 분업과 숙련도, 기계의 종류, 임금 구조를 ‘기술적 구성’이라 하고, 노동계급이 실제로 싸우는 방식, 문화, 욕구,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법을 ‘정치적 구성’이라 한다. 어떤 기술적 구성은 특정한 정치적 구성이 나타날 조건을 만들고, 그 정치적 구성이 힘을 얻으면 자본은 노동계급의 힘을 흩어 놓으려고 기술적 구성을 바꾼다. 계급을 고정된 사회학적 범주가 아니라 투쟁과 갈등의 움직이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개념으로,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 구분을 거부했다.

둘째는 ‘노동 거부’다. 오페라이스모는 임금과 노동 조건을 높이려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넘어, 노동자라는 처지 자체에 맞서 싸우려는 노동계급의 경향을 찾아내고 이론화했다. 결근, 사보타주, 태업, ‘돈은 더, 일은 덜’ 같은 요구가 정치와 무관한 일탈이 아니라 자본 관계에 대한 적대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파업을 거부하는 신참 노동자들의 무관심마저 착취를 함께 관리하는 기성 노동조합에 대한 거부로 읽었다.

셋째는 앞에서 본 노동자 조사이고, 넷째는 ‘대중 노동자’다. 대중 노동자는 포드주의 조립 라인의 반숙련 노동자로, 옛 숙련공 같은 직업적 정체성과 장인의 자부심이 없고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존재였다. 흔히 남부에서 올라온 젊은 이주민이었다. 기술적으로는 숙련을 빼앗기고 기계의 리듬에 묶였지만, 바로 그 동질성과 공통된 소외가 평등한 요구와 생산 조직에 대한 직접적 반대를 내건 새롭고 더 급진적인 대중 투쟁의 바탕이 되었다. 트론티는 이 새 주체를 “이상도, 믿음도, 도덕도 없는 거친 이교도 족속”이라고 불렀다. 공식 노동운동이 그리던 영웅적이고 점잖은 노동자상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뜨거운 가을 뒤 노동자 권력은 무엇을 하려 했나?

오페라이스모의 이론은 1968년부터 이탈리아를 휩쓴 산업 분규, 특히 1969년 ‘뜨거운 가을’에서 현실의 확인을 얻은 듯 보였다. 공식 노동조합의 통제를 벗어난 기층 통일위원회(CUB) 같은 자율 조직이 살쾡이 파업과 공장 점거와 대중 집회를 이끌었고, 토리노의 피아트와 밀라노의 피렐리가 그 중심이었다. 투쟁을 이끈 것은 대중 노동자였고, 모두에게 같은 액수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평등주의와 작업 속도와 조직에 대한 경영의 통제에 맞서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때 오페라이스모는 잡지 중심의 흐름에서 혁명 조직의 이론으로 옮겨 갔다. 그 대표가 1969년 네그리, 오레스테 스칼초네, 프랑코 피페르노가 세운 노동자 권력(포테레 오페라이오)이다. 노동자 권력은 트론티의 명제, 곧 계급투쟁이 공장의 대중 노동자를 중심으로 짜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였고, 노동 거부와 ‘노동자 자율’을 행동의 뼈대로 삼았다. 즐겨 쓴 구호는 “돈은 더, 일은 덜”, “덜 일하고, 모두 일하자”였다. 같은 해 피사를 중심으로 생긴 로타 콘티누아(계속 투쟁)는 오페라이스모에서 나온 경쟁 조직이었다.

그러나 뜨거운 가을의 공장 투쟁이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적 도전으로 이어지지 않자 노동자 권력의 분석은 점점 비관적으로 변했고, 교착을 깨려면 ‘무장한 당’과 봉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1971년부터 이 조직은 ‘불법 활동’(Lavoro Illegale)이라는 비밀 무장 기구를 두었다. 1973년 4월 로마 프리마발레에서 노동자 권력 주변 인물들이 신파시스트 정당 지역 간부의 집에 불을 질러 그의 두 아들이 숨졌다. 이 사건과 네그리·피페르노 사이의 대립 속에 노동자 권력은 1973년 6월 해산했다.

로타 펨미니스타는 왜 갈라져 나왔나?

오페라이스모가 그린 계급투쟁의 주인공은 공장의 남성 노동자였다. 여성 활동가들은 노동자 권력 같은 조직에 퍼져 있던 남성 우월주의를 비판했고, 이것이 여성 회원들이 떠나고 독자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6월 파도바에서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와 동료들이 만든 여성 모임이 그 출발이다. 달라 코스타는 파도바 대학에서 네그리의 조교로 일했고, 포르토 마르게라 공업 지대에서 노동자 권력과 함께 정치 경험을 쌓은 활동가들 사이에 있었다. 노동자 권력 사무실에서 연 여성 모임에서 그는 보수 없는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의 구조적 요소라는 글의 초고를 내놓았다.

이 자리에는 미국 출신 활동가 셀마 제임스도 왔다. 그는 열다섯 살에 C. L. R. 제임스와 라야 두나옙스카야가 이끈 미국의 존슨-포레스트 경향에 들어갔던 사람이다. 이탈리아어판 위키백과는 프랑스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과 함께 이 존슨-포레스트 경향을 미국판 오페라이스모로 꼽는다. 노동자 스스로의 경험과 자율을 앞세운 대서양 양쪽의 흐름이 파도바에서 만난 셈이다.

모임은 1972년 로타 펨미니스타(여성 투쟁)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해 7월 로마에서 이들이 연 여성만의 회의에 노동자 권력 로마 지부 활동가들이 몰려와 여성들을 폭행했고, 아직 노동자 권력에 적을 두고 있던 회원들도 9월에 조직을 떠났다. 이때부터 로타 펨미니스타는 투쟁의 무게중심을 공장에서 ‘사회’로 옮겨, 집과 동네를 생산과 전복의 새 장소로 보았다. 트론티의 ‘사회적 공장’을 집 안까지 밀고 들어간 것이다. 이 분석은 국제 가사노동 임금 운동으로 이어졌고, 영어권에서는 이를 오페라이스모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 그 한계를 안에서 드러낸 ‘내재적 비판’으로 설명한다. 실비아 페데리치도 이 운동에서 나왔다. 오늘날 이탈리아 연구자들은 로타 펨미니스타를 오페라이스모의 여성판으로 볼지, 페미니즘의 독창적 표현으로 볼지를 여전히 묻는다.

오페라이스모는 어떻게 아우토노미아로 넘어갔나?

노동자 권력이 무너지던 무렵 네그리는 오페라이스모를 크게 고쳐 썼다. 대중 노동자의 투쟁에 맞선 자본의 재편으로 사회 전체가 자본을 위해 일하는 ‘사회적 공장’이 되었으니, 정치의 중심 주체는 더는 공장에 갇힌 대중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노동자’(operaio sociale)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에는 공장 노동자만이 아니라 학생, 실업자, 서비스 부문의 불안정 노동자, 그리고 보수 없는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이 모두 들어간다. 알콰티는 대학을 연구하며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린 학생들, 곧 ‘지적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먼저 짚었다.

이 이론은 1970년대 중반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노동자 자율)라는 정치 운동의 틀이 되었다. 아우토노미아는 정당이 아니라, 노동자 권력과 1976년 해산한 로타 콘티누아의 활동가들이 모인 느슨한 집단들의 연결망이었다. 이들은 공장 밖에서 집세 거부, 빈집 점거, 그리고 대중교통과 전기와 식료품 값 인상분을 공동체가 함께 내지 않는 ‘자율 인하’ 운동을 벌였고, 볼로냐의 라디오 알리체 같은 자유 라디오를 거점으로 삼았다. 같은 오페라이스모 안에서도 비판이 있었다. 세르조 볼로냐는 네그리가 공장에 대한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분석을 버리고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주의주의적인 통일 주체론으로 갔으며, 대중 노동자가 실제로 겪고 있는 분열과 패배를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1977년의 이른바 ‘77년 운동’은 아우토노미아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때이자 끝의 시작이었다. 그해 3월 볼로냐에서 로타 콘티누아 소속 학생이 경찰에게 살해되자 전국의 대학이 점거되었고, 정부는 장갑차를 보내 볼로냐 대학 구역을 정리했다. 장폴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같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탄압을 규탄하는 선언을 냈다. 운동의 대결적 방식과, 붉은 여단 같은 무장 집단의 활동을 포함한 정치 폭력의 확산이 위기를 깊게 했다.

1979년 4월 7일 사건에서 무엇이 사실로 확인되었나?

1978년 붉은 여단이 기독교민주당 지도자 알도 모로를 납치해 살해한 뒤 이탈리아는 여러 특별법을 만들었다. 1979년 4월 7일, 파도바 지방검찰청의 피에트로 칼로제로 검사는 아우토노미아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체포를 명령했다. 네그리, 에밀리오 베셰, 스칼초네 등이 체포되었고, 피페르노는 프랑스로 몸을 피했다. 체포 영장의 혐의는 이들이 붉은 여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지도했으며, 무장 집단을 만들어 국가 권력에 맞선 무장 봉기를 꾀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네그리는 모로 납치 당시 모로의 집에 전화를 건 사람이라는 혐의까지 받았지만, 그 전화는 붉은 여단 지도자 마리오 모레티가 건 것으로 밝혀졌다.

재판은 1983년에야 시작되어 1988년까지 이어졌다. 로마 1심(1984)은 네그리에게 30년형을 선고했지만, 항소심(1987)은 12년으로 크게 줄였고 1988년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사실상 확정했다. 파도바 재판(1986)에서는 네그리를 포함한 47명이 무죄를 받았다. 최종적으로 네그리는 반국가 결사 참여, 무장 집단 참여, 경찰관이 숨진 은행 강도 사건의 ‘정신적 공모’로 형이 확정되었다. 1983년 수감 중 급진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풀려난 그는 면책특권을 이용해 프랑스로 건너갔고, 1997년 스스로 돌아와 남은 형기를 치렀다. 판결 기록이 보여 주는 결론은 분명하다. 아우토노미아 지도자들과 붉은 여단 및 모로 사건의 연관은 증명되지 않았고, 붉은 여단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조직이었다. 다만 노동자 권력 출신 가운데 붉은 여단으로 옮겨 간 이들은 있었다.

한편 1970년대의 글과 조직 활동에서 폭력을 정당화한 기록도 남아 있다. 앞서 본 노동자 권력의 비밀 무장 기구가 그렇고, 네그리 자신도 1970년대 말 글에서 무장 투쟁을 다국적 노동자 조직의 “붉은 실”이라고 불렀다. 대법원은 네그리 등 아우토노미아 지도자들이 1971년부터 1979년까지 이어진 반국가 음모를 이끌었다고 보았다.

이 사건의 해석은 지금도 갈린다. 칼로제로의 가설, 곧 아우토노미아 지도자들이 무장 봉기 계획의 조직적 두뇌였다는 주장은 ‘칼로제로 정리(定理)’라는 비꼬는 이름을 얻었다. 국제앰네스티는 긴 미결 구금과 절차상 문제를 비판했고, 급진당, 사회당, 신좌파, 법학자 루이지 페라졸리, 작가 레오나르도 샤샤 등은 이 수사를 사법 남용이자 방어권과 헌법적 자유에 대한 침해로 보았다. 반대로 칼로제로 자신과 언론인 인드로 몬타넬리, 마르코 트라발리오 등은 판결에 따라 수사의 전제가 옳았다고 본다. 베를링구에르가 이끌던 공산당은 처음부터 칼로제로를 지지했다. 어느 쪽이든, 이 대량 체포와 재판이 아우토노미아 운동의 지도부를 사실상 없애고 오페라이스모를 조직된 정치 세력으로서 끝냈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오페라이스모를 어떻게 보았고, 오페라이스모는 공산당을 어떻게 보았나?

두 쪽은 처음부터 서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오페라이스모가 보기에 공산당은 계급을 당에 종속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생산성과 국민 통합을 요구하며, 기술과 경제 계획을 중립적이거나 진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자본이 노동자 투쟁을 길들이려고 내놓은 계획을 사회주의로 가는 길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전통 좌파는 거꾸로 오페라이스모를 ‘극단주의’로, 그 분석을 현실을 끈질기게 외면하는 것으로 깎아내렸고, 공산당 주간지 《리나시타》는 산업 노동자에게만 매달리는 ‘공장주의’라고 비판했다.

1970년대 중반 공산당이 유로코뮤니즘과 기독교민주당과의 ‘역사적 타협’ 노선으로 가면서 대립은 더 깊어졌다. 공산당은 아우토노미아의 폭력적 방식을 규탄하고 민주적 제도 안의 투쟁을 내세웠다. 1977년 2월 17일 공산당 계열 노동총연맹(CGIL) 위원장 루차노 라마가 학생들이 점거한 로마 대학에서 연설하다 아우토노미아 쪽과 노동조합 경비대가 충돌한 끝에 쫓겨나자, 베를링구에르는 그들을 ‘붉은 행동대원’(squadristi rossi), ‘역병 퍼뜨리는 녀석들’(untorelli)이라고 불렀다. 앞의 말은 파시스트 행동대를, 뒤의 말은 17세기 밀라노 역병 때 병을 퍼뜨린다고 몰린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두 입장을 가르는 기준은 몇 가지 물음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혁명의 주체는 당이 대표하는 노동계급인가, 당과 노동조합에서 자율적인 계급 그 자체인가? 임금 투쟁은 경제적 요구인가, 그 자체로 정치 투쟁인가? 기술 발전과 경제 계획은 사회주의가 물려받을 진보인가, 자본의 지배 수단인가? 제도 안의 개혁과 동맹은 전진인가, 계급투쟁의 길들이기인가? 정치적 귀결도 갈렸다. 공산당의 길은 의회와 지방정부에서의 영향력, 그리고 기성 체제와의 타협으로 이어졌고, 오페라이스모의 길은 공장과 거리의 자율 투쟁으로 이어졌지만 그 일부는 무장 투쟁의 늪과 국가 탄압 속에서 무너졌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페라이스모를 어디로 가져갔나?

조직으로서의 오페라이스모는 무너졌지만 그 이론은 프랑스와 독일 등지의 자율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어권에서는 잡지 《제로워크》와 가사노동 임금 운동이 그 분석을 이어받았다. 21세기에 이 흐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은 네그리가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하트와 함께 쓴 3부작이다.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에서 이들은 사회적 공장과 계급 구성 같은 오페라이스모의 개념을 ‘다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쓰고, 사적 소유와 국가 소유를 모두 넘어서는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내세웠다. 『제국』은 반세계화 운동의 성경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러나 처음의 오페라이스모 활동가들 가운데 일부는 이 확산을 곱게 보지 않는다. 연구자 지지 로제로는 ‘포스트 오페라이스모’라는 말이 영미권 대학에서 만들어져, 투쟁하는 ‘사유의 운동’을 학계에 맞는 ‘사유의 학파’로 바꾸고 계급 구성과 갈등에서 떼어 냈다고 비판한다. 경제학자 리카르도 벨로피오레와 마시밀리아노 톰바는 후기 네그리의 이론이 사회 현실과의 관계를 거의 잃고 스스로를 되풀이하며, 노동계급을 실체화된 주체로 만들고 자본을 그저 반응하는 존재로 줄여 버렸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노동 과정의 구체적이고 모순된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유물론적’ 오페라이스모를 그에 맞세운다.

오페라이스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오페라이스모에 대한 평가는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오페라이스모와 아우토노미아에 섰던 이들에게 그것은 스탈린주의와 개량주의로 굳어 버린 공식 노동운동을 넘어 마르크스를 ‘노동자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혁명 이론’으로 되살린 시도였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정통 마르크스주의 쪽에서 보면, 그것은 당과 제도를 경시한 극단주의였고 일부는 무장 투쟁으로 미끄러져 노동운동 전체에 대한 탄압의 빌미를 주었다. 판치에리와 볼로냐, 벨로피오레·톰바처럼 오페라이스모 안의 비판자들은 노동계급을 곧바로 혁명적인 주체로 보는 철학적 낙관이 구체적인 계급 구성 분석을 대신할 때 생기는 위험을 지적했다. 로타 펨미니스타와 가사노동 임금 운동의 페미니스트들은 오페라이스모의 개념을 가장 생산적으로 밀고 나가면서도, 그 개념들이 공장의 남성 노동자에 갇혀 있었다는 맹점을 드러냈다.

어느 입장인지 가늠하려면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을 자본의 법칙에서 찾는가, 노동자 투쟁에서 찾는가? 조직의 중심을 당에 두는가, 계급의 자율에 두는가? 노동을 해방해야 할 것으로 보는가, 거부해야 할 것으로 보는가? 혁명의 주체를 공장 노동자로 좁히는가, 학생과 실업자와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까지 넓히는가? 그리고 국가 폭력과 무장 투쟁 앞에서 운동은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하는가? 이 물음들은 오늘날 플랫폼 노동, 돌봄 노동, 공유재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다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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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 centrostudipanzieri.unimi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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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