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인물 182명

이반 파블로비치 톱스투하

Иван Павлович Товстуха

스탈린의 첫 비서, 그 기록 보관자이자 첫 전기 작가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 1917–18적위대 중앙참모부 감찰부 서기
  • 1918–21민족인민위원부 서기·간부, 스탈린과 결합
  • 1921–24중앙위 기구 책임일꾼, 스탈린 개인 사무국 조직·운영
  • 1922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 최초 공식 전기 집필
  • 1924–26레닌연구소 부소장,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참여
  • 1926–30중앙위 비밀부장 겸 서기장 제1보좌관
  • 1930–31레닌연구소 부소장,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위원
  • 1931–35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부소장 겸 기록보관소장
  • 1934–35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후보위원,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아카키 비사리오노비치 코바히제

Акакий Виссарионович Кабахидзе

그루지야 문제의 옛 볼셰비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년(10월설·11월설)오르조니키제와 충돌해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음
  • 1922년 12월레닌의 민족문제 비판과 연결된 인물
  • 1904당 입당, 구볼셰비키협회 회원
  • 1922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
  • 1936–1937체포(1936)되어 사형 선고 후 처형(1937)
  • 1957복권됨

스타니스와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Стан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

가브릴 일리치 먀스니코프

Гавриил Ильич Мясников

레닌에게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먀스니코프주의'를 촉발한 노동자 볼셰비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 1918–1920미하일 대공 처형 조직, 제16사단 정치위원, 페름 현당위원장
  • 1921–1923'노동자 그룹' 결성, 언론자유 요구로 레닌과의 공개 논쟁 — '먀스니코프주의' 논쟁, RCP(b) 제명·체포
  • 1928–1944이란·터키 경유 프랑스 망명, 『최근의 사기(Ocherednoy Obman)』 집필 —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 1944–1945소련 대사관 초청으로 귀국, 직후 체포되어 1945년 11월 16일 총살 (2001년 12월 25일 복권)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아르튜히나

Александра Васильевна Артюхина

제노트델을 전성기로 이끈 유일한 여성 조직국·서기국원

1927년 국제회의 연단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조차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며 당내 편견을 직시했다.

방직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서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전성기로 이끌며 여성의 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유일한 여성 조직국원·서기국 후보위원(1926~1930)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4상트페테르부르크 방직·금속 노동자, 노조 조직, 프라우다에 '금속노동자 슈라' 필명 기고
  • 1914–1917체포되어 유형
  • 1917–1924비시니볼로초크 당위원, 노동위원, 트베리현 여성부장, 프롤레타르카 공장위원장
  • 1924–1929당 중앙위 여성노동부(제노트델) 부장, 잡지 《라보트니차》 편집장
  • 1926–1930중앙위원, 조직국 위원, 서기국 후보위원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8섬유(면방직)노동자노조 중앙위원장
  • 1938–1951모스크바 방직 공장장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마르테먄 니키티치 류틴

Мартемьян Никитич Рютин

「류틴 강령」으로 스탈린 독재에 마지막 당내 저항을 조직한 우익 반대파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914–17멘셰비키 입당,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
  • 1918–21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 이르쿠츠크 당위원장
  • 1923–24다게스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5–28크라스나야프레스냐 구당서기, 중앙위원 후보
  • 1928–30『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부편집장, 소유즈키노 의장
  • 1930당 제명, 체포 후 석방
  • 1932「류틴 강령」 집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 1937군사재판 25분 만에 사형, 당일 총살

V.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6–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크료비셰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крёбышев

스탈린의 그림자: 25년간 정보를 걸러내고 헌법과 당사를 쓴 비서실장

딸 나탈리야의 증언: 「아버지는 거의 24시간 일하셨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오전 10-11시에 다시 출근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스탈린의 개인비서로 25년간 특별섹터를 이끌며 모든 정보를 여과했다. 1936년 헌법과 『당사 소사』를 집필했으며, 아내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베리야의 음모로 해임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21펠트셰르 → 투르케스탄군 정치부 → 즐라토우스트 현 혁명위 의장
  • 1922–1928중앙위 업무관리국장 → 서기장(스탈린) 보좌관
  • 1928–1934스탈린 개인비서, 중앙위 비밀부 부장 → 비밀부장
  • 1934–1952중앙위 특별섹터장 — 25년간 스탈린 비서실 총괄
  • 1939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최고회의 대의원
  • 1941–1945전쟁기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회·국장단 서기 → 베리야 음모로 해임

마리야 아키모브나 볼로디체바

Мария Акимовна Володичева

레닌의 업무서기, 마지막 구술의 기록자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 1924–1928V.I. 레닌 연구소(후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혁명 군사평의회의 젊은 반대파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21혁명·내전기 당과 군사 지도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
  • 1937체포와 처형

카를 야노비치 바우만

Карл Янович Бауман

집단화를 밀어붙인 당 조직가

1930년 그는 집단농장 편입률 82.4%를 보고받고도 “너무 적다”고 답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불법 정치활동 시작
  • 1917키예프에서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3쿠르스크 губерния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쿠르스크 губком 책임서기
  • 1928–1930중앙위원회 농촌사업 담당,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 1929–1930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31–1934중앙아시아국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 1934–1937중앙위원회 과학·기술 및 계획·재정·무역 부서 책임자
  • 1937체포 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 1955년 복권

멘델 마르코비치 하타예비치

Мендель Маркович Хатаевич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893년 6월 17일(구력 5일) 토볼스크에서 유대계 가정의 소상인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루벤 게르셰비치 폴론스키다. 선원과 미숙련 노동자, 페테르부르크 전기기사로 일하다 1913년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이 되었고, 1914년 체포되어 1915년 토볼스크 현으로 행정 유배되었다. 1917년 3월부터 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로 10월 무장투쟁에 참가했고, 내전기에는 서부·남부 전선 사단 군정위원과 남동철도 군정위원을 지냈다. 1920~1924년 광부노조 중앙위 서기, 1930~1933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35~1937년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지냈으며 1937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 니콜라예바

Клавдия Ивановна Николаева

인쇄공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노조 지도부에 오른 프롤레타리아 여성혁명가

1918년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 레닌이 입장하자 니콜라예바는 일어나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고 1,147명의 대의원들이 따라 불렀다.

인쇄공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1917년 《라보트니차》 편집장,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여성부를 이끌었다. 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위원까지 오른 소비에트 체제 최고위 여성 간부.

상세 이력 보기
  • 1909RSDLP(b) 입당, 인쇄노조 활동
  • 1908–15반복적 체포·유배, 혁명 선전 지속
  • 1917《라보트니차》 편집장, 10월혁명 참여
  • 1918–19페트로그라드 여성부·선전부장, 제1차 전러시아 여성대회 의장
  • 1924–26오르그뷰로 위원·서기국 후보위원·제노트델 책임
  • 1930–33중앙위 선동대중부장
  • 1936–44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
  • 1942영국 파견, 귀환 중 공습 하 부상자 구조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Лазарь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스탈린의 강경 집행자 '아이언 라자르'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24조직지도부, 임명과 배치 실무
  • 1928–39중앙위 서기,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 지원
  • 1957반당 그룹으로 실각
  • 1925–28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
  • 1935–42, 1943–44철도 인민위원
  • 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61당 제명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바레이키스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Варейкис

집단화와 대숙청의 지역당 보스, 스탈린에게 '간첩이 너무 많다'는 핀잔을 듣다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91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01–1918.06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인민위원 · 당 지역위 서기
  • 1918.06–1920.08심비르스크 현당위원회 위원장
  • 1920–1921비텝스크 현집행위원회 위원장 · 식량인민위원
  • 1921–1923바쿠 소비에트 부의장
  • 1923.08–1924.02키예프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4.02–1924.10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책임서기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4.10–1926.01중앙위 출판부장 ·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편집장
  • 1926.01–1928.04사라토프 현당위원회 서기
  • 1928.08–1934.06중앙검은토지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30–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
  • 1934.06–1935.03보로네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5.03–1936.12스탈린그라드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01–1937.10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10체포
  • 1938.07.29사형선고 후 총살 (코무나르카)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

관 뚜껑을 연 사람, 침대에서 죽은 첫 지도자

1956년 11월 18일, 모스크바 폴란드 대사관 리셉션에서 서방 대사들에게 말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가 당신들을 묻어버릴 것이다!」 열두 NATO 국가 대사와 이스라엘 대사가 자리를 떴다.

스탈린의 그늘에서 당 간부로 성장해 1953년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당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을 고발하는 비밀연설로 탈스탈린화를 열었다. 1956년 헝가리 봉기를 소련군으로 진압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쳐 미사일 철수와 대가로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을 받아냈다. 1964년 10월 14일 동료들의 표결로 해임되고 은퇴했으며, 회고록을 남기고 1971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38모스크바 당 제1서기, 지하철 건설
  • 1938–49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42–43스탈린그라드 전선 군사위원
  • 1953–64당 제1서기
  • 1954–56처녀지 개간, 비밀연설
  • 1957「반당 그룹」 격퇴
  • 1961제22차 당대회, 스탈린 시신을 묘소에서 이장
  • 1964해임, 연금 생활

보리스 페트로비치 셰볼다예프

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болдаев

대테러 전야에 무너진 아조프-흑해 변경주의 당 주인

1934년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는 키로프를 찾아가 '노인들'이 레닌의 유언대로 스탈린을 다른 자리로 옮기고 그대를 서기장으로 세우자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8–1920국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
  • 1928–1931니즈니볼가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1–1934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4–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쿠르스크주로 격하, 6월 체포, 10월 총살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Андреев

20년간 정치국에 앉아 있던 조직의 사나이, 가장 자주 지방을 숙청하러 파견된 서기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지하 볼셰비키들이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몰렌스크주 쿠즈네초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두 해의 농촌 학교를 다녔고, 1908년 13세에 모스크바로 나가 식당의 접시닦이 소년으로 일했다. 노동자 야학과 프레치스텐스키 노동자 강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고 1911~1912년 사회민주주의 서클에 들어갔으며, 1914년 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0월 혁명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가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대숙청기에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숙청했다. 정치국 정위원으로 20년간 최고 지도부에 있었다. 1937~1962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을 지냈고, 1971년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위원(1915–1916)
  •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 1938–46연방회의(소비에트) 의장
  • 1939–52당 통제위원회 의장, 예조프의 뒤를 이어 당 규율 총괄
  • 1943–46농업인민위원, 전후 복구 계획 참여
  • 1946–53소비에트 각료회의 부의장, 농업·콜호즈 담당
  • 1953–62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위원
  • 1957–62소중우호협회 회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스테츠키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Стецкий

부하린파 '적색 교수'에서 스탈린 편으로 전향한 선전 책임자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 연설: "문학에서 자유로운 창조적 경쟁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노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노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대회는 8월 17일~9월 1일 열렸다.

스몰렌스크주 보로프시나 마을 출신으로 1915년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중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1~1923년 적색교수양성소에서 수학하며 부하린의 '적색 교수' 그룹에 속했다. 1925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주필, 1926~1930년 중앙위 북서부국과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선전부를 맡았고, 1928년 강제 곡물 수매에 반대했다가 스탈린 편으로 돌아섰다. 1930년부터 중앙위 문화선전부를 이끌며 1933년 작가동맹 조직위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1934년 8월 제1차 소비에트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언했으며 1935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맡았다. 1938년 4월 체포되어 8월 1일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공업대학 재학
  • 1917당 선동원, 10월 봉기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란 진압 참가
  • 1918–1920적군에서 군사정치 및 참모 업무
  • 1921–1923적색교수양성소 수학, 부하린파 '적색 교수' 그룹
  • 1925『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초대 주필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작가동맹 조직위 실질적 운영
  • 1934–1938중앙위 조직국 위원, 잡지 『볼셰비키』 주필
  • 1935–1938중앙위 당 선전선동부장, 대숙청기 선전 캠페인 조직
  • 1930–1935중앙위 문화선전부장, 1934년 문화·레닌주의선전부로 개편
  • 1937소련 최고소비에트 제1기 대의원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
이념·선전 소련 공산당·볼셰비키 소련 러시아 1896–1948 ○ 자연사(사인 논쟁)

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표트르 이바노비치 스모로딘

Пётр Иванович Смородин

콤소몰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기치로 내건 노동자 출신 제1서기

제5차 콤소몰 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스모로딘을 "노동청년의 지도자"로 전국에 선전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단상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무슨 까닭에 나를 성상(이콘)으로 만들려는 거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고,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창설을 주도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NEP 시기 청년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콤소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당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했고,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8년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어 1939년 총살당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17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 견습공·노동자
  • 1917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공동 창설자
  • 1920–1921페트로그라드 콤소몰 시위원회 서기
  • 1921–1924콤소몰(РКС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레닌그라드 바실레오스트롭스키·비보르크·모스크바 구당위원회 서기
  • 1937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7–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시당위원회 제1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