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1939년 1월 14일, 옛 상관이 자신을 음모에 끌어들였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은 그의 오랜 비서에게서 나왔다.
1898년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여름 키슬로봇스크의 휴양지에서 예조프를 처음 만났고, 1926년부터 당 중앙위 기구의 기술서기로 일했다. 1930년 예조프가 중앙위 부서장이 되자 그의 비서가 되어 1936년까지 곁을 지켰으며,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로 옮긴 뒤에는 잠시 NKVD 비서국에서 일하다 중앙위로 돌아갔다. 남편은 예조프 밑에서 내무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미하일 리조프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17일 체포되어 베리야가 직접 심문했고,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는 1931년부터 반혁명 음모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진술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를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0년 1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반혁명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총살되었고, 1956년 9월 복권되었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1932년 11월 8일 밤 보로실로프의 만찬에서, 스탈린이 그녀에게 오렌지 껍질을 던지며 '이봐!'라고 부르자 알릴루예바는 '나는 당신의 "이봐"가 아니에요!'라고 응수하고 자리를 떠났다.
올드 볼셰비키 가문의 막내딸로, 1917년 7월 봉기 당시 아버지 세르게이 알릴루예프는 자택에 레닌을 은닉했고, 대부는 아벨 예누키제였다. 1918년 당 입당 후 레닌 비서실과 선동선전부에서 일했고, 1929년 산업아카데미에 입학해 합성섬유 공학을 공부하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당 셀 동료가 되었다. 스탈린과의 결혼은 그녀를 크렘린 중심에 두었으나, 독립적 정치 주체로 서려는 열망과 아내 역할 사이의 긴장 속에서 1932년 3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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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1918–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비서
1919–1921V.I. 레닌 비서실 근무 (리디야 포티예바 지휘 하)
1921당 숙청으로 제명, 레닌의 개입으로 후보당원 복권 (1924년 정식 복권)
1924–1929선동선전부 국제농업연구소 보좌관
1929–1932모스크바 산업아카데미 섬유학부 학생 (합성섬유 전공), 니키타 흐루쇼프와 동문
1941년 10월 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20km 앞까지 진격해 시민들이 공황에 빠지자, 셰르바코프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모스크바를 위해 끈질기게, 치열하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호소하며 도시의 질서를 되살렸다.
스탈린의 전시 최측근으로, 1938년부터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부터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으로서 대외선전과 국내 언론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을 겸해 군 정치교육과 사기 진작을 책임졌다. 1934년 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을 당의 문학 정책 도구로 정비했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로서 전시 방공·피난·군수 생산을 조직했고, 1945년 승리 직후 43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스탈린 말년 「의사들 음모」를 촉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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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1적위대 입대, 1918년 볼셰비키당 가입, 리빈스크에서 청년 조직 활동
1921–19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
1930–1932적색교수양성소 역사-당 과정 수료, 이후 중앙위 조직지도부 및 문화선전부 근무
1934–1936소비에트 작가동맹 창설 참여, 고리키 아래 조직서기로서 문학 행정 장악
1936–1938레닌그라드 제2서기 →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 제1서기 → 스탈리노(도네츠크) 제1서기로 연쇄 이동
1938–1945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1941년 중앙위 서기 겸 소비에트정보국장, 1942년 총정치국장 겸 국방부인민위원
1941–1945정치국 후보위원(1941), 중앙위 서기(1941), 대장군 계급(1943), 전시 선전 및 군 정치사업 총괄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인사 서류를 쥐고 1939년부터 중앙위 서기로, 1948년부터 후계 서열 1위로 올라섰다.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과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1952년 유대인 작가 13인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 스탈린 사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로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는 노선을 폈다. 1957년 「반당그룹」 주모자로 실각해 카자흐스탄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1961년 제명되었다. 1988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콤소몰 총서기에서 물러난 직후, 그는 가짜 이름으로 원양 화물선 갑판 선원이 되어 독일·영국·벨기에·포르투갈·터키를 돌았다. 함께 갑판을 닦던 선원들은 그가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줄 몰랐다.
농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스몰렌스크 학교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을 세웠다. 1922년 전연방 피오네르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어 소비에트 아동·청소년 대중운동의 틀을 놓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청년 농민학교, 공장견습학교(FZU), 정치교육 체계를 통해 콤소몰을 당의 간부 양성 기구로 전환시켰다. 청년의 교양과 지식을 강조한 그의 노선은 크룹스카야와 루나차르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콤소몰 지도부를 떠난 뒤 상선 선원으로 위장해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 트란스캅카스 당 기관과 철도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수슬로프가 출장을 가면 키릴렌코가 서기국을 대신 주재했다. 돌아오자마자 수슬로프는 자신의 부재 중 내려진 결정을 모조리 뒤집었다.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사라토프현 샤호프스코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의 당·국가 인물로, 스탈린 시대부터 두각을 나타내 1921년 입당했다. 1947년 5월부터 죽는 날까지 중앙위 서기를 지냈고 1949~1950년에는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았으며, 1965년부터는 서기장 브레즈네프 아래 제2서기로 당의 이인자였다. 이념·선전·문화·검열·교육을 관장하며 '회색 추기경'으로 불렸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참여했다.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 묘역에 안장됐다.
1965년 6월, 스탈린 격하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고 스탈린의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1902년 9월 7일(구력)/9월 20일(신력) 쿠타이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공장에서 일했고, 1924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1927년 당에 입당했다. 1937년 레닌그라드 군사정치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군사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대조국전쟁 중에는 제42군·제2충격군·제21군 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53년 9월 20일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년간 공화국을 이끌었고,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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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증언: "아버지가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에 대해 실망을 표하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었다. 사업 얘기를 꺼내면, 그는 매번 낚시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스트라한 빈농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금속공학자에서 당 기구로 진입하여 스탈린 말기 프레지디움 위원과 중앙위 서기에 발탁되었다. 말렌코프 집권 직후 실각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1957년 반당 그룹 격파 후 다시 프레지디움에 진입, 러시아공화국 당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랴잔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1961년 폴란드 대사로 좌천시켰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플레넘에선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문구를 결의안에 삽입할 것을 정식 제안했다.
「이게 무슨 개인의 비극이란 말인가?! 당과 인민의 비극 — 그게 진짜 비극이다!」 —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 『로지나』 1995년 제8호
야로슬라블 출생, 15세 볼셰비키. 모스크바대학 화학과·적색교수양성원 철학과 졸업. 1947년 『철학의 제문제』 창간 편집장. 돌턴·멘델레예프·과학 분류론 중심 1000여 편 저술, '케드로프 삼각형' 제시. 1940년대 말 반공명이론 캠페인 주도. 이후 과학사연구소 소장(1962–1972)·철학연구소 소장(1973–1974) 역임하며 과학사·방법론 제도화. 흐루쇼프 비밀연설 비판으로 진급 지연,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1966년 아카데미크, 1985년 사망.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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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