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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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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국가기관 인물 1086명

보리스 미로노비치 펠트만

Борис Миронович Фельдма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 8인 중 하나, 고문 아래 자백의 연쇄를 시작한 인사국장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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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정 러시아군 사병, 1차대전 참전
  • 1918–21내전: 제55소총사단장,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
  • 1922–28제17·제19소총군단장
  • 1928–34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4–37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
  • 1937.04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
  • 1937.05.15체포; 심문에서 동료 40여 명 지목
  • 1937.06.12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1957년 복권

스타니스와프 아다모비치 메싱

Станислав Адамович Мессинг

제르진스키의 폴란드 전우, 체카의 초석을 놓고 야고다의 조작에 맞서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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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 1931–1937전연방 상공회의소 의장, 소·몽·투바 무역회의소 의장
  • 19376월 15일 체포, 9월 2일 총살 — '폴란드 간첩' 혐의

아르투르 카를로비치 스타솁스키

Артур Карлович Сташевский

스페인 공화국 금을 모스크바로 보낸 소련 무역대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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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4베를린 합동 레지덴투라(INO·군사정보) 책임자
  • 1925–1926소프토르그플로트 이사
  • 1926–1932푸시노토르그·소유스푸시니나 부이사장
  • 1932–1934토르그신 이사장
  • 1934–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글라프푸시니나 국장
  • 1936–1937주스페인 소련 무역대표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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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레프 나타노비치 크리츠만

Лев Натанович Крицман

전시공산주의를 이론화한 농업마르크스주의자

『영웅적 시기』에서 전시공산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본질에서 그것은 개인이나 계급의 오류가 아니었다. 비록 순수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미래의 예기요, 미래가 현재로 돌입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의 선취적 돌파로 분석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고스플란 간부로 계획경제 제도화에 참여했고, 차야노프를 비판하며 삼층계급분화론을 주창해 집단화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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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 청년활동가로 혁명운동 참여, 오데사대학 제적 후 취리히대학 졸업
  • 1918귀국 후 RKP(b) 입당, 최고경제회의(Vesenkha)에서 경제정책 실무
  • 1920–1921최고경제회의 이용위원회 위원장, 자원 중앙배분 체계 구축
  • 1921–1925고스플란 간부회원, 『프라우다』 편집위원, 공산아카데미 간부회원
  • 1925–1930농업경제연구소장·공산아카데미 농업연구소장, 『농업전선에서』 책임편집자
  • 1926–1936『대소비에트백과사전』 경제 부문 편집위원, 『경제백과사전』 편집장
  • 1928–1933중앙통계국 부국장, 소련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8지병으로 공직 사임, 연구에 전념하다 신장병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8 ✕ 옥사

「적기 훈장 제1호」: 내전의 영웅이자 첫 원수 5인 중 하나, 레포르토보에서 스러지다

산재한 적위대를 규합해 54일간 우랄 산맥 1,500㎞를 싸우며 돌파했다. 이 불멸의 행군으로 블류헤르 동지에게 적기 훈장 제1호를 수여한다.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1918.9.28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대장정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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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두 차례 게오르기 훈장, 중상으로 제대
  • 1916볼셰비키당 입당
  • 1918우랄 1,500㎞ 대장정 — 적기 훈장 제1호
  • 1919–1920제51소총사단장: 시베리아 전역, 페레콥 돌파로 크림 점령
  • 1921–1922극동공화국 군사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볼로차옙카 승리
  • 1924–1927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 — 국민혁명군 북벌 입안
  • 1929중동철도 분쟁: 만주군 격파, 적성 훈장 제1호 수훈
  • 1929–1938특별극동군 사령관 — 소비에트 극동 방위 총괄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투하쳅스키 사건 특별재판부 참여
  • 1938하산 호 전투 후 해임, 체포, 루뱐카에서 사망
  • 1956사후 복권

로베르트 인드리코비치 에이헤

Роберт Индрикович Эйхе

시베리아 대숙청의 설계자, 고문 속에서도 자백을 철회하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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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08–11영국 망명: 탄광부·선박 화부
  • 1917–19리가 소비에트 간부 → 라트비아 소비에트 식량인민위원
  • 1920첼랴빈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25–29시비르 변경 집행위원회 의장
  • 1929–30시비르 당 제1서기
  • 1930–37서시비르 당 제1서기 — 집단화·쿨라크 숙청 지휘
  • 1935정치국 후보위원
  • 1937NKVD 트로이카 위원 → 농업인민위원
  • 1938–40체포 → 고문 → 자백 철회 편지 → 총살

올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슘스키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Шумский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46 ✕ 살해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선구자, '슘스키즘'의 원형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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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1–1923폴란드 주재 우크라이나 SSR 전권대표
  • 1924–192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두 번째 임기); 우크라이나화 정책 주도
  • 1927'슘스키즘'으로 규탄받고 전보; 레닌그라드 국민경제연구소·공업대 학장
  • 1933–1946체포·수감·유형; 석방 직후 NKVD에 암살됨 (1958년 복권)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쿨리크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улик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0–1950 ✕ 처형

차르친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대장, T-34·카추샤를 거부한 원수

로켓포가 뭐가 필요하단 말이냐? 중요한 건 마차 견인포다.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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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제1기병군 포병대장
  • 1926–1929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2–1936제3소총군단장 겸 군사위원
  • 1937–1941적군 포병총국(GAU) 국장
  • 1939–1941소련 국방 제1인민위원 대리
  • 1941제54군 사령관
  • 1943제4근위군 사령관
  • 1944–1945군 편성·충원 총국 부국장

비탈리 그리고리예비치 흘로핀

Виталий Григорьевич Хлоп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0–1950 ○ 사망

라듐연구소를 이끌며 소련 핵물리학의 제도적 토대를 놓은 방사화학자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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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베르나츠키의 초청으로 과학아카데미 방사선연구소에서 연구 시작
  • 1921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 획득
  • 1922–1935라듐연구소 부소장 겸 화학부장
  • 1936–1950라듐연구소 소장
  • 1940과학아카데미 우라늄 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43, 1946, 1949스탈린상 3회 수상
  • 1945레닌그라드대학에 소련 최초의 방사화학 강좌 개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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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49, 1953–56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1984출당, 그리고 22년 뒤 복당

V.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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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6–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파벨 예브게니예비치 라지미르

Павел Евгеньевич Лазими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1–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봉기에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을 빌려준, 이름뿐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917년 10월 21일 밤 라지미르는 두 동료와 함께 군구 사령부에 찾아가 수비대에 대한 최고 권한을 선언했고, 폴코브니코프 대령은 그들의 위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을 어기면 체포하겠다고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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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군 병원 위생병; 사회혁명당원으로 병사 선전 활동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병사부 의장·군사부 부의장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MRC 규정 초안 기초
  • 1917.11–1918내무인민위원부·군사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보급·위생 조직 총괄

아르투르 흐리스티아노비치 아르투조프

Артур Христианович Артузов

소련 첩보·방첩의 창립자, '트레스트' 작전의 두뇌

1925년 모스크바의 한 안전가옥에서 시드니 라일리가 GPU 요원들에게 둘러싸이자, 아르투조프는 옆방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체카 방첩부(KRO)를 창설하고 백군 망명 조직을 무력화한 '트레스트' 작전을 설계했다. 1931년부터 해외첩보부(INO)를 이끌며 대외 불법 첩보망을 확장했고, 대숙청 속에서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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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육해군 동원해제 관리국 근무
  • 1918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정보국장, 군사통제부 활동부장
  • 1919–1922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 특별부 작전과장 → 부부장
  • 1922–1927GPU·OGPU 방첩부(KRO) 부장 — '트레스트', '신디카트-2', '타란텔라' 작전 지휘
  • 1927–1930OGPU 비밀작전국(SOU) 부국장 보좌관
  • 1930–1931OGPU 해외부(INO) 부부장
  • 1931–1935OGPU·GUGB-NKVD 해외부(INO) 부장 — 소련 대외첩보 총괄
  • 1934–1937적군참모부 제4(정보)국 부국장 겸임
  • 1937NKVD 기록보관부로 좌천, 5월 체포, 8월 총살

예브게니 브로니슬라보비치 파슈카니스

Евгений Брониславович Пашуканис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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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 1922스투치카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 공동 창설
  • 1924『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출간 — 법의 상품형태론 정립
  • 1927–1930공산아카데미 정회원 → 부원장
  • 1931–1936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
  • 1936–1937소련 법무부인민위원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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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체르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ернов

곡물조달에서 VDNKh까지, 2차 5개년 농업을 이끈 인민위원

1935년 2월 17일, 콜호스 충격노동자 대회에서 체르노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시회 조직 포고령에 서명했다. 훗날 VDNKh의 출발이었다.

직공 가정 출신으로 1909년 멘셰비키로 시작해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곡물조달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34년 야코프 야코블레프의 뒤를 이어 농업인민위원이 되었고, 콜호스 체제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농정을 주도했다. 1935년 전연방농업전시회(VDNKh)를 제안해 조직 준비를 총괄했으며, 농업아르텔 모범정관 제정도 이끌었다. 1937년 체포되어 21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총살,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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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3–1925도네츠크 현집행위원회 의장
  • 1925–1928우크라이나 SSR 국내무역인민위원
  • 1930–1932소련 공급부인민위원
  • 1933–1934농산물조달위원회(KomzagotSTO) 의장
  • 1934–1937소련 농업인민위원 · 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벨로보로도프

Александр Георги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로마노프 처형에 서명한 좌익반대파 내무인민위원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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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우랄 지역 당위원회 위원
  • 1918우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9–1920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정위원 · 중앙위원
  • 1919–1920제9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RSFSR 내무부인민위원
  • 1923–1927RSFSR 내무인민위원
  • 1930–1936조달위원회 · 국내무역인민위원부 근무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총살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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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 1907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7.4'독일 첩보기관 요원'과 반소련 파괴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2.26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에서 사형 판결, 당일 총살; 1955년 복권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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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페틀랴코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Петляков
산업·생산 운영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42 ✕ 항공사고

샤라슈카에서 태어난 Pe-2: 소련 최고의 전술폭격기를 만든 죄수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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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11–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 1921–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 1936–37항공공장 수석설계자, ЦАГИ 부소장
  • 1937–40체포·수감, NKVD 샤라슈카에서 VI-100 → Pe-2 설계
  • 1940–42석방, 제22공장 수석설계자 — Pe-2 대량생산, Pe-3 개발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

Сергей Иванович Вави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51 ○ 심근경색

초기 원자력 시대 과학아카데미를 이끈 물리학자-행정가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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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복무, 공병·기술 부대
  • 1918–1932모스크바대학·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 강사, 물리·생물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32소련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45국립광학연구소(GOI) 과학 지도자
  • 1934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 공동 발견
  • 1934–1951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
  • 1945–1951소련과학아카데미 총재,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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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크료비셰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крёбышев

스탈린의 그림자: 25년간 정보를 걸러내고 헌법과 당사를 쓴 비서실장

딸 나탈리야의 증언: 「아버지는 거의 24시간 일하셨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오전 10-11시에 다시 출근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스탈린의 개인비서로 25년간 특별섹터를 이끌며 모든 정보를 여과했다. 1936년 헌법과 『당사 소사』를 집필했으며, 아내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베리야의 음모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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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펠트셰르 → 투르케스탄군 정치부 → 즐라토우스트 현 혁명위 의장
  • 1922–1928중앙위 업무관리국장 → 서기장(스탈린) 보좌관
  • 1928–1934스탈린 개인비서, 중앙위 비밀부 부장 → 비밀부장
  • 1934–1952중앙위 특별섹터장 — 25년간 스탈린 비서실 총괄
  • 1939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최고회의 대의원
  • 1941–1945전쟁기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회·국장단 서기 → 베리야 음모로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