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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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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인물 424명

에메 두멩크

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8 ○ 등산 사고사

수송·기계화·모스크바 협상의 장군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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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 1907–1909고등전쟁학교 수학
  • 1916–1918자동차수송국 지휘, 베르됭 보급·교대 조직
  • 1925리프 전쟁 참전
  • 1928독립 기갑사단 구상 제시
  • 1938최고전쟁위원회 위원
  • 1939모스크바 프랑스 군사대표단 단장
  • 1940–1942육군 총사령부 소장, 국가재건 총감, 현역 이탈

조지 C. 캐틀릿 마셜

George C. Marshall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59 ○ 자연사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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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 1945.12–1947.01중국 특사, 국민당-공산당 연립정부 중재 실패
  • 1947–1949국무장관, 마셜 플랜 제안 및 NATO 창설 추진
  • 1950–1951국방장관,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 및 군부 재건
  • 1953노벨평화상 수상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64 ○ 자연사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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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5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35–1941필리핀군 원수 겸 군사고문
  • 1941–1945미 극동군 사령관 / 남서태평양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45–1951연합군 최고사령관, 일본 점령통치
  • 1950–1951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쟁
  • 1952–1964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

레지널드 드랙스

Reginald Plunkett-Ernle-Erle-Drax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0–1967 ○ 자연사

군사개혁을 주장했으나 외교 협상 권한 없이 파견된 제독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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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영국 해군 입대, HMS 브리태니아에서 훈련
  • 1909『현대 해군 전술』 출판, 참모교육 연구
  • 1914–1918대전함 HMS 라이언에서 복무, 주요 해전에 참가
  • 1919–1922왕립 해군참모대학 교장
  • 1923–1924독일 연합국 해군통제위원회 위원장
  • 1932–1934아메리카·서인도 제도 전대 총사령관
  • 1935–1938플리머스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39영국 군사사절단장으로 모스크바 협상 참가
  • 1939–1941노어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43–1945대서양 수송선단 준장
  • 1939『모스크바 사절단』 출판

세묜 이바노비치 아랄로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Ара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0–1969 ○ 자연사

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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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코톱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от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881–1925 ✕ 살해

제정 무법자에서 소비에트 내전 영웅으로 전환한 베사라비아의 붉은 로빈 후드

1917년 5월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카르멘' 공연 중 사형수에서 풀려난 코톱스키가 등장하자 관객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혁명 연설을 했고, 경매에 부쳐진 그의 수갑과 족쇄는 1만 루블에 낙찰되었다.

베사라비아 출신 혁명 지휘관. 제정 시기 빈민 편의 약탈자로 명성을 쌓고, 내전에서 붉은 기병대를 이끌며 몰다비아 자치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생전에 소비에트 민속의 전설이 되었으며 1925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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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베사라비아와 오데사에서 무장 강도단 지도자, 반복적 체포·탈옥; 1916년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9172월 혁명으로 사면; 루마니아 전선에서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좌익 사회혁명당 입당
  • 1918–1919티라스폴 분견대 기병대 지휘,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방어; 오비디오폴 군사위원, 제45소총사단 제2여단장
  • 1920적기훈장 수훈, 러시아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 지휘
  • 1921제17체르보노예카자크기병사단장; 마흐노·안토노프 봉기 진압 중 중상; 명예혁명무기·두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2–1924제2기병군단장; 몰다비아 ASSR 수립 기여; 세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4–1925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우크라이나·몰다비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амен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1–1936 ○ 심장마비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 총사령관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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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동부전선 사령관
  • 1919–1924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 1924–1925붉은 군대 감찰관
  • 1925붉은 군대 참모총장
  • 1925–1926붉은 군대 총감찰관
  • 1926–1927붉은 군대 총국장
  • 1927–1934군사·해군 담당 부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 1934–1936붉은 군대 방공국장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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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야마다 오토조

山田乙三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인 1881–1965 ○ 자연사

제국 육군의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 뒤 관동군의 항복을 명령했다.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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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12육군대학 졸업
  • 1934–1937참모본부 총무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 1937–1939제12사단장, 제3군 사령관,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 1939–1944교육총감, 군사참의관
  • 1944–1945관동군 총사령관,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 1949–1950하바롭스크 전범재판 피고인, 25년형
  • 1956소련 억류에서 귀환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

Климент Ефремович Вороши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이견 있음) 1881–1969 ○ 자연사

스탈린의 원수, 군사적 무능을 정치적 충성으로 버티다

1937년 5월 28일, NKVD가 넘긴 붉은 군대 지휘관 26명 명단에 직접 펜으로 썼다: "예조프 동지에게. 모든 악당을 잡아들이시오. 1937년 5월 28일. K. 보로실로프." 142명 명단에는 더 짧게 "체포하라. K. V."라고 적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현의 철도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금속노동자다. 1918년 스탈린과 함께한 차리친 지휘로 스탈린 인맥의 군사적 상징이 되었고,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전쟁인민위원과 국방인민위원으로 붉은 군대를 이끌며 소련 시기 누구보다 오래 그 자리에 있었다. 대숙청의 책임을 함께 진다. 그의 서명은 185개 처형 명단에 남아 있고 그 명단으로 18,000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1940년 3월 5일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5,700명 처형 결정에도 서명했다. 겨울전쟁 후 해임되었으나 1941~1944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과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일했고, 1960년까지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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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차리친 방어와 내전 지휘, 스탈린 인맥의 군사 상징으로 부상
  • 1925–1940전쟁·국방인민위원, 붉은 군대의 정치적 충성 노선 대표
  • 1937–1938군 대숙청 국면에서 최고 군사지도부로 숙청을 승인
  • 1939–1940겨울전쟁 실패 뒤 티모셴코에게 국방인민위원 자리를 넘김
  • 1941–1945전시 원로 지휘관이지만 실전 지휘능력 한계를 드러냄
  • 1953–1960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상징적 국가원수로 이동
  • 1940–1953인민위원회 부의장,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 1945–1947헝가리 연합통제위원회 의장
  • 1941–1944국가방위위원회 위원, 북서방면군·레닌그라드 전선 지휘, 빨치산 총사령관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샤포시니코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오렌부르크 카자크 출신 가문) 1882–1945 ○ 병사

스탈린이 이름과 부칭으로 부른 유일한 장성, 『군대의 두뇌』의 저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흰 셔츠에 멜빵 차림으로 지도를 펼쳐 두고 일하던 샤포시니코프는 찾아온 젊은 대령을 다정하게 맞았다. 보고가 어긋나도 고함 대신 "자네, 이게 뭡니까, 귀여운 친구(голубчик)?"라고 되물었다.

제정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1918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한 군사 이론가. 3권의 『군대의 두뇌』(1927–1929)는 현대전에서 참모본부의 기능과 구조를 분석한 저작으로 지금도 러시아 참모 아카데미 교과 과정에 남아 있다. 1937년 6월에는 투하쳅스키 등을 사형에 처한 특별재판부에 참여했고, NKVD는 동시에 그에 대한 공작 진술을 수집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반격 계획 수립에 관여했고, 1945년 3월 폐결핵으로 죽기까지 스탈린의 군사 고문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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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7제국군 복무, 1차대전 참전, 대령
  • 1918–21붉은 군대 입대, 내전 중 작전국장으로 주요 작전 기획
  • 1925–27레닌그라드 ·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8–31참모총장 (1차), 『군대의 두뇌』 출간
  • 1932–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원장 겸 교수
  • 1937–40참모총장 (2차), 원수 진급, 겨울전쟁 기획
  • 1941–42참모총장 (3차), 모스크바 반격 설계
  • 1943–45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스탈린 군사 고문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美治郎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82–1949 ○ 옥사

제국군의 명령과 항복 사이에 선 참모총장

1945년 9월 2일, 그는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요시지로 우메즈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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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육군 소위, 보병 제1연대
  • 1919–1921스위스 주재 무관
  • 1934–1935지나 주둔군 사령관
  • 1939–1944관동군 사령관·총사령관
  • 1944–1945일본 육군참모총장
  • 1945대본영 대표로 항복문서 서명
  • 1948–1949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복역 중 사망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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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두샨 시모비치

Душан Симовић

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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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3–1942.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휴 다우딩

Hugh Dowding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82–1970 ○ 자연사

레이더 방공체계의 설계자

“시카고의 갱스터들이 차에 방탄유리를 달 수 있다면, 우리 조종사들도 같은 것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 공군 장교 휴 다우딩은 전투기 중심의 방공을 일찍 중시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전투기지휘부에서 레이더, 관측망, 습격 plotting, 무선통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소수의 전투기로 독일 공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1940년 영국 전투에서 예비 전력과 조종사를 보존한 신중한 운용은 방어의 지속성을 높였지만, 전후에는 대형 편대 전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지휘권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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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영국 육군 왕립수비포병대 장교
  • 1914왕립비행단 조종사 및 비행지휘관
  • 1915왕립비행단 제16비행대 지휘관
  • 1929영국 방공 전투지역 사령관
  • 1930공군위원회 보급·연구 담당 공군위원
  • 1936영국 공군 전투기지휘부 사령관
  • 1940영국 전투 방어 지휘
  • 1943남작 서임

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

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
군사·지휘 러시아 백색운동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스웨덴계) 1883–1920 ○ 동상 · 폐렴

백군 최고의 '병사들의 장군', 얼음 행군을 이끌다 사라진 카잔의 정복자

“병사들에게 전하라, 내가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죽는 것이 그 증거라고.”

스웨덴계 러시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에 참여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맞서 코무치 인민군 소규모 의용대를 이끌고 기동전으로 카잔을 점령, 적군의 동부전선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으며 '작은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콜차크 휘하에서 동부전선 총사령관이 된 후, 붕괴하는 전선을 수습하며 바이칼까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을 이끌었고, 도중 동상과 폐렴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관은 부하들의 손에 끝까지 운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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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니콜라옙스크 기병학교 졸업, 제54용기병연대 코르네트
  • 1913니콜라옙스크 참모아카데미 1등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브루실로프 공세 계획 참여, 중령
  • 1918.6코무치 인민군 제1의용대 지휘관
  • 1918.7–8시즈란·심비르스크·카잔 점령, 대령 진급
  • 1918.11소장 진급
  • 1919제1볼가군단장 → 볼가집단사령관 → 제3군사령관 (콜차크군)
  • 1919.12–1920.1동부전선 총사령관, 대시베리아 빙상 행군 지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쿠즈민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узьм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83–1938 ✕ 처형

크론슈타트의 '폭발'을 예고한 발트함대 정치위원

쿠론슈타트 수병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오히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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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 1917가치나 소비에트 의장, 볼셰비키 군사조직 활동
  • 1918–1919남서전선 정치위원, 북부전선·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발트함대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12군 사령관
  • 1921발트함대 정치국장,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가
  • 1924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부 차석 검사
  • 1925–1932중앙아시아·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장 등 요직
  • 1932북방해로 옴스크 지부장으로 전직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안토노프-옵세옌코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нтонов-Овсеенко

겨울궁전을 접수한 10월 봉기 지휘관, 21년 뒤 스탈린에게 총살되다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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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비서; 겨울궁전 습격 지휘, 임시정부 체포
  • 1917.12–1918.05남러시아 소비에트군 총사령관
  • 1919.01–1919.06우크라이나 전선 사령관
  • 1921.02–1921.07탐보프 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
  • 1922.08–1924.01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 정치총국장(1924년 1월 해임)
  • 1924–1934소련 전권대표: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1923년 중국 파견)
  • 1934–1937러시아 SFSR 검찰총장; 바르셀로나 총영사

알렉산드르 일리치 예고로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Егор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3–1939 ✕ 처형

데니킨을 무너뜨린 남부전선 사령관, 초대 원수 5인 중 마지막으로 이름이 지워진 참모총장

「나는 인민과 당, 붉은 군대 앞에 깨끗하다」 1938년 3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금장 검과 여섯 개의 훈장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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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 1918–19붉은 군대 입대, 제9군·제10군·제14군 사령관
  • 1919–20남부전선 사령관 — 데니킨 백군 격파, 오룔·보로네시·로스토프 탈환
  • 1920남서전선 사령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키예프 탈환 후 르부프 진격
  • 1925–26중국 군사고문: 장제스·펑위샹에게 파견
  • 1927–31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31–37붉은 군대 참모총장 — 기계화군단·탱크전 교리 추진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이후 자캅카스 군관구로 강등
  • 1939/1956군사재판 없이 처형, 1956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

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

Stanisław Bułak-Bałachowicz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폴란드 벨로루시·폴란드계 1883–1940 ✕ 살해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까지 진영을 옮겨 다닌 반소비에트 유격 지휘관

필수드스키는 그를 '도둑이지만 도둑만은 아니고, 오늘은 러시아인, 내일은 폴란드인, 모레는 벨로루시인'이라고 평했다.

붉은 군대에서 백군으로 넘어가 1919년 프스코프를 점령하고 유데니치와 갈라져 에스토니아 편에 섰다가 1920년 폴란드로 옮겨 벨로루시 원정을 벌였다. 부대의 반유대인 폭력이 기록되어 있으며 1940년 독일 점령 바르샤바에서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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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차르 군대에 징집되어 게오르기 십자훈장·성 게오르기 훈장 수훈
  • 1918붉은 군대에 입대, 트로츠키의 승인으로 루가 기병연대 편성
  • 1918-11약 4백 명을 이끌고 백군으로 전향
  • 1919대령에서 소장으로 승진, 유데니치 공세에서 프스코프 점령
  • 1920-01유데니치를 체포하고 에스토니아 편에 섬
  • 1920폴란드 군에서 핀스크 점령, 러시아 인민의용군 편성
  • 1920-11소비에트 벨로루시로 침입해 스스로 벨로루시 국가 수반이라 선언, 패배 후 폴란드로 도피
  • 1939바르샤바 방어에 참가, 1940년 5월 살해

루돌프 뤼터스

Rudolf Lüter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83–1945 ○ 옥사

파르티잔전쟁을 지휘한 독일 국방군 장성

뤼터스는 파르티잔의 전투 사기가 “놀라울 만큼 높다”고 평가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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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제국군 제118보병연대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중대·대대 지휘
  • 1920–1933국가방위군 제15보병연대 및 제5사단 복무
  • 1933–1938제1프로이센보병연대 지휘, 보충군관구 감찰
  • 1941–1942제223보병사단 사단장,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3크로아티아 독일군 사령관, 네레트바·수테스카 공세 지휘
  • 1943제15산악군단 초대 군단장
  • 1944–1945군에서 명예 전역, 소련군 포로로 수용 중 사망

베르트람 램지

Bertram Home Ramsay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3–1945 ✕ 추락사

됭케르크 철수를 조직한 해군 지휘관

도버성 아래 지휘부에서 램지와 참모들은 됭케르크 철수를 9일 밤낮으로 조정했다.

베르트람 램지는 영국 해군 장교로, 전시 해상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능력으로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됭케르크에서 그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동원해 포위된 영국·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해군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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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영국 해군에 입대
  • 1915–1919모니터함 M25 및 구축함 HMS 브로크 지휘, 도버 순찰대 복무
  • 1933–1935전함 HMS 로열 소버린 함장
  • 1939–1942도버 지휘관, 해협 방어와 됭케르크 철수 담당
  • 1942북아프리카 침공 부해군 총사령관
  • 1943시칠리아 침공 동부 기동부대 해군 지휘관
  • 1944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해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Αλέξανδρος Παπάγος
군사·지휘 그리스 국가기관 그리스 그리스인 1883–1955 ○ 자연사

알바니아 전선에 승부를 건 그리스 육군 원수

독일군이 북부 국경을 침공했을 때도 그리스군 주력은 알바니아 전선에 묶여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는 그리스 왕정과 메탁사스 독재체제에 충성한 직업군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기 그리스 육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0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방면 침공을 저지하고 반격을 조정했지만, 독일의 개입이 임박한 뒤에도 주력을 알바니아 전선에 남겨 메탁사스 방어선의 방어를 어렵게 했다. 점령기에 저항조직을 만들었다가 체포되어 강제수용되었고, 전후에는 내전에서 정부군을 지휘한 뒤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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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그리스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
  • 1935–1936군사장관, 육군 총감
  • 1936–1940육군 총참모장, 메탁사스 체제의 군사 기반 강화
  • 1940–1941그리스 육군 총사령관, 알바니아 전선과 메탁사스 방어선 작전 지휘
  • 1943–1945점령기 저항조직 군사계층 결성, 독일군에 체포되어 수감
  • 1949–1951내전기 정부군 총사령관, 공산군에 대한 최종 공세 지휘
  • 1952–1955그리스 총리

앨런 브룩

Alan Francis Brooke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아일랜드인 1883–1963 ○ 자연사

제국참모총장으로 연합군 대전략을 세운 영국 육군 원수

그는 1943년 프랑스 상륙이 충분한 병력과 상륙정, 제공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판단은 노르망디 상륙을 1944년 6월까지 늦췄다. 1945년까지 대륙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트라이던트 회의 발언은 전략가로서의 명성을 훼손했다.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녜르드비고르에서 태어나 1963년 6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영국 육군의 야전원수다. 그는 포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해 1929년 라크힐 포병학교 교장을 지냈고 1940년 본토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12월 제국참모총장, 1942년 3월 참모총장위원회 의장에 올라 윈스턴 처칠의 최고 군사고문으로서 연합국의 전략을 조율했고 1944년 1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지중해 항로를 여는 전략을 우선했으며, 영국 본토 출생이 아닌 프랑스 출생이지만 국적은 영국이다. 전쟁일기는 처칠과 다른 지휘관들에 대한 직설적 비판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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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왕립포병대 소위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포병 참모장교
  • 1938–1940대공군단 및 남부사령부 지휘관
  • 1940–1941영국 본토군 총사령관
  • 1941–1946제국참모총장
  • 1942–1946참모총장위원회 의장
  • 1953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영국 최고 치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