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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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당 지도 인물 286명

디파 누산타라 아잇

Dipa Nusantara Aidit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세계 3대 공산당으로 키운 조직가

“마르크스주의는 행동의 지침이지 경직된 도그마가 아니다.” — PKI 간부들에게 반복한 말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서기장(1951–1965). 수카르노의 마르해니즘 노선 아래서 노동자·농민·여성·청년·문화 부문 대중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했고, 1955년 총선에서 PKI를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으로 만들었다. 당원 300만 명에 이르는 세계 3위 공산당을 이끌었으나, 1965년 9·30운동 직후 수하르토의 반공숙청 속에서 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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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2게린도(인도네시아 인민운동) 청년조직 활동
  • 1943인도네시아 공산당 입당
  • 1944–1945지하 반파시스트 조직 '자유 인도네시아 운동' 지도부
  • 1947–1948PKI 중앙위원 → 정치국원
  • 1951–1959PKI 서기장
  • 1959–1965PKI 중앙위원회 의장
  • 1959–1965최고자문회의 위원, 임시국민협의회 부의장, 무임소장관 겸직
  • 1965.11.22중부자바에서 체포되어 즉결처형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Wojciech Jaruzelski

계엄령과 원탁회의 사이의 폴란드 지도자

1989년 원탁회의는 억압적 통치의 책임과 평화적 체제 이행이 한 인물의 경력 안에서 충돌한 사례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지도자다.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해 연대노조를 탄압했으나, 1989년에는 야권과의 원탁회의 및 부분 자유선거를 받아들여 체제 전환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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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계엄령 선포
  • 1981–1989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 1989원탁회의·부분 자유선거 수용
  • 1989–1990전환기 폴란드 대통령

니에르시 레죄

Nyers Rezső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개혁을 밀어붙인 당 지도자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니에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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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 1956식품산업부 장관
  • 1960–1962재무부 장관
  • 1968신경제메커니즘 개혁 설계
  • 1974–1981헝가리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고문
  • 1987–1988국회 개혁위원회 위원장, 국무상
  • 1989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 헝가리 사회당 초대 의장

아밀카르 카브랄

Amílcar Cabral

농업 기술자에서 아프리카 해방 이론의 거장으로

“거짓을 말하지 말라. 쉬운 승리를 주장하지 말라.” — 당 지침(1965)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의 반식민 혁명가, PAIGC 창립자. 농업 조사로 식민지 현실을 파악하고 무장 투쟁과 문화 해방을 결합한 전략으로 포르투갈 식민 통치에 맞섰다. 1973년 독립 직전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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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2리스본 농업대학 — 아프리카 민족주의 학생 서클 조직
  • 1952–1954포르투갈령 기니 농업 조사 — 나라를 마을 단위로 파악
  • 1956기니-카보베르데 독립아프리카당(PAIGC) 창립
  • 1963–1973무장 해방 투쟁 지도 — 해방구에 학교와 진료소
  • 1966제1차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회의에서 《이론이라는 무기》 발표
  • 1973.1독립 선언 몇 달 전 코나크리에서 암살

파트리스 루뭄바

Patrice Lumumba

취임 연설 하나로 제국의 표적이 된 콩고의 초대 총리

“역사는 언젠가 말할 것이다… 아프리카는 자신의 역사를 쓸 것이다.” — 옥중에서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1960)

콩고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초대 총리. 1960년 독립 기념식에서 보두앵 국왕 앞에서 식민 폭력을 고발한 연설로 세계적 상징이 되었고, 석 달 만에 쿠데타로 축출되어 이듬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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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콩고민족운동(MNC) 창립
  • 1960.5총선 승리 — 초대 총리
  • 1960.6독립기념식에서 식민 폭력을 고발하는 즉흥 연설
  • 1960.9모부투 쿠데타로 축출·연금
  • 1961.1카탕가로 이송되어 살해 — CIA·벨기에 공모

라미즈 알리아

Ramiz Alia

호자 이후의 알바니아

호자가 의사에게 알리아를 소개하며 말했다. "이 친구 같은 젊은 동지가 이어받을 겁니다."

1985년 호자 사후 알바니아 노동당의 지도자가 됐다.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 하면서 제한적 대외 개방을 추진했으나 경제위기와 대중 시위 속에서 다당제 전환을 수용했다. 1991년 대통령이 되었고 1992년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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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알바니아 공산당 입당
  • 1948중앙위원회 위원
  • 1956정치국 후보위원
  • 1961정치국 정식 위원
  • 1982인민의회 상임위원회(국가원수) 의장
  • 1985알바니아 노동당 제1서기
  • 1991알바니아 공화국 대통령
  • 1992대통령직 사임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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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미에치스와프 프란치셰크 라코프스키

Mieczysław Franciszek Rakowski

1989년 선거에서 국민이 거부한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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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폴리티카』 편집장
  • 1972–1989세임 의원
  • 1981–1985야루젤스키 내각 부총리
  • 1988–1989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
  • 1989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 낙선
  • 1989–1990PZPR 마지막 제1서기, 당 해산 주재
  • 1990–2008『지시』 월간지 편집장, 회고록 집필

누온 체아

នួន ជា
정치·당 지도 캄푸치아 공산당 캄보디아 캄보디아 1926–2019 ○ 복역 중 병사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2인자'

2018년 11월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 계류 중이던 2019년 8월 4일 복역 중 사망했다. 최고재판부는 판결을 무효로 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원심 판단 기록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혁명가로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주)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였다. 폴 포트의 '2인자'로 불렸고 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과 정부수반 대리를 지냈다. 2014년 반인륜범죄로, 2018년 11월 16일 베트남인·참 집단학살과 제네바협약 중대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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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98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
  • 1970북베트남의 캄보디아 개입 교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 1976–1979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 정부수반 대리
  • 199812월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079월 19일 체포되었다
  • 20148월 7일 사건 002/01에서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6년 11월 23일 항소가 기각되었다
  • 201811월 16일 사건 002/02에서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등 유죄를 선고받고 두 종신형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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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장쩌민

江泽民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26–2022 ○ 자연사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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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2002중공 중앙 총서기
  • 1993–200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Stanisław Kania

타협을 모색하다 당권을 잃은 당 지도자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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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폴란드 노동자당 입당
  • 1948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창립대회 대표
  • 1968–197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 1971–198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5–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5폴란드 국가평의회 위원

하피줄라 아민

حفیظ‌الله امین

4월 혁명을 설계하고 3개월 만에 소련군의 총구 앞에 쓰러진 칼크파 실세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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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5컬럼비아·위스콘신 대학 유학, 마르크스주의에 경도
  • 1966PDPA 입당, 칼크파 합류
  • 1969칼크파 유일의 국회의원 당선
  • 1973–1978당 군사조직 책임자, 장교망 구축
  • 1978.044월 혁명 지휘
  • 1978–1979부수상 → 외무장관 → 총리 → 국방장관 겸임
  • 1979.09타라키 축출·처형, 총서기·혁명평의회 의장 취임
  • 1979.12.27슈토름-333 작전으로 소련 특수부대에 피살

바브라크 카르말

ببرک کارمل

소련 침공으로 집권했으나 국민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얼굴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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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PDPA 창립, 파르참파 결성
  • 1965–1973하원의원
  • 1978.4–6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8.7–9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 1979.12–1986.11혁명평의회 의장 겸 PDPA 사무총장
  • 1979.12–1981.6각료평의회 의장
  • 1986–1996모스크바 망명
정치·당 지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앙골라 앙골라 1929–2016 ○ 루안다에서 사망

앙골라 해방운동의 이데올로그, MPLA 창립자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당시 니투파의 「변론 13개 테제」는 라라를 '사회민주주의자'이자 MPLA의 우경화를 이끈 인물로 비난했다. 이후 대규모 숙청의 책임은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와 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된다.

본명 루시우 호드리구 레이테 바헤투 드 라라, 별칭 치웨카. 앙골라의 혁명가·물리수학자이며 MPLA 창립 구성원이자 지도자다. 1955년 앙골라 공산당에 들어갔고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해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의 주된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1962년 조직·간부 담당 서기,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다. 1975년 11월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네투 사망 후 1979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2003년 건강상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1977년 5월 27일 분파주의 사건 이후의 대규모 숙청 책임은 역사가와 증언자들이 네투의 명령 아래 라라·이쿠 카헤이라 등에게 귀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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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8리스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해 1952년 졸업하고, 1954년 코임브라 대학에 들어가 물리화학을 배우다 1958년 학업을 중단했다.
  • 1955–1956앙골라 공산당에 입당하고 포르투갈 공산당과 함께 활동했으며, 1956년 12월 MPLA 강령에 창립 서명자로 참여했다.
  • 1959정치경찰 PIDE의 추적을 피해 리스본을 떠나 동·서독과 이탈리아, 튀니지, 모로코를 거쳐 코나크리에 MPLA 최초의 해외 사무소를 마련했다.
  • 1962–19651962년 12월 제1차 전국회의에서 조직·간부 담당 서기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1964~65년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964년부터 당의 실질적 2인자였다.
  • 1974–19751974년 11월 8일 MPLA 대표단을 이끌고 루안다에 들어갔고, 1975년 11월 10일 헌법을 공포하고 아고스치뉴 네투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시켰다.
  • 1977–19851977년 12월 10일 MPLA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어 네투에 이어 정치국 서열 2위 및 당 부총재로서 조직과 이데올로기 부문을 맡았고, 1985년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에 의해 정치국에서 제외되어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 1979네투 사망 후 9월 10~20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9월 11일 제2차 MPLA 대회를 소집해 9월 20일 주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의 선출을 이끌었다.
  • 1975–2003독립 직후부터 2003년까지 앙골라 의회 의원을 지냈고, 2003년 11월 건강상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국방부는 2004년 그를 육군 대장으로 예편시켰으나 본인은 이 계급을 쓰지 않았다.

그로스 카로이

Grósz Károly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동요한 공산당 말기의 과도기적 서기장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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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14세)
  • 1954–56Borsod-Abaúj-Zemplén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1974–79MSZMP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84–87부다페스트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89MSZMP 정치국 위원
  • 1987.6–1988.11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88.5–1989.10MSZMP 서기장, 카다르 후임
  • 1989.12–1990재창당된 MSZMP 대행 의장, 총선 낙선

즈데녜크 믈리나르시

Zdeněk Mlynář

사회주의를 민주화하려 한 개혁 공산주의자

옛 룸메이트 고르바초프를 1967년 찾아가 개혁 구상을 설명했을 때, '그가 내 말을 아주 잘 이해하는 듯했다'고 믈리나르시는 회고했다.

즈데녜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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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
  • 1955–1956프라하 검찰총국에서 근무
  • 1956–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연구자
  • 1967–1968공산당 정치체계 개혁 연구팀 및 행동강령 작성 참여
  • 196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프레지디엄 위원
  • 1970공산당에서 제명, 국립박물관에서 곤충학 연구
  • 1977–1997헌장 77 서명 뒤 오스트리아 망명, 인스브루크대학교 정치학 교수

몰타 회담 직전 10개항 통일 계획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을 쥔 총리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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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 (최연소)
  • 1969–1976라인란트팔츠 주총리
  • 1973–1998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
  • 1976–1982연방의회 CDU/CSU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
  • 1982–1998독일연방공화국 총리
  • 1989.11.28연방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 1990.10.03독일 재통일
  • 1998연방선거 패배, CDU 당수 사임

차우셰스쿠의 후계자에서 그의 처형을 명한 혁명 지도자

'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요했다': 즉결재판과 처형에 대해 훗날 일리에스쿠가 내린 평가.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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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65–1971공산당 중앙위원·선전부장·청년장관
  • 1971차우셰스쿠와 대립하며 지방으로 좌천
  • 1984–1989중앙위에서 제명, 기술출판사 국장
  • 1989.12민족구국전선(FSN) 창설·지도, 임시 대통령
  • 1990–1996루마니아 대통령 (제1·2기)
  • 2000–2004루마니아 대통령 (제3기)

라울 카스트로

Raúl Castro

몬카다에서 대통령까지, 반세기 동안 쿠바 혁명의 2인자로 군림한 조직자

피델은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그를 대체하지 않는 한.” — 대학생 연설, 2006년

7·26 운동 창립 멤버로 몬카다 병영 습격(1953)과 그란마 상륙에 참가했으며,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오리엔테에 게릴라 해방구를 건설한 쿠바 혁명의 핵심 지휘관. 1959년부터 2008년까지 혁명무력부 장관을 지내며 현대 국가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을 기록했고, 쿠바의 군사·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공산당 제도화를 주도했다. 2008년 형 피델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2011년 당 제1서기에 취임, 신중한 시장 개혁을 추진하며 2018년과 2021년 차례로 퇴진하기까지 반세기 넘게 쿠바 혁명의 없어서는 안 될 2인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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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몬카다 병영 습격 참가 — 13년형, 22개월 복역
  • 1956그란마 호 상륙 — 시에라마에스트라 게릴라전
  • 1958사령관 승진,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개척
  • 1959–2008혁명무력부(MINFAR) 장관 —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
  • 2006–2008피델 투병 중 권한대행
  • 2008–2018국가평의회 의장 겸 각료회의 의장
  • 2011–2021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2021당 제1서기 퇴임 — 정치 은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체제를 고치려다 체제를 끝낸 사람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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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78스타브로폴 지방 당 제1서기
  • 1978–85농업 담당 서기, 49세에 정치국원
  • 1985.3서기장 선출
  • 1986–88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체르노빌 대응
  • 1987–89중거리핵조약, 아프간 철군, 동유럽 불개입
  • 1990초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 1991.12.25사임 연설, 소련 국기 하강

1988년 6월 니카라과에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 주권 선언을 이끈 공산당 제1서기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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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 1988–199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1995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

키우 삼판 키우

ខៀវ សំផន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캄보디아 캄보디아 1931–

민주캄푸치아 국가원수

1982년 6월 시아누크·손산과 반베트남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외무를 맡아, 서방의 지지로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이 유지되게 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경제학자다. 스바이리엥주 출신으로 프놈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59년 귀국해 대학 교수로 일했으며 시아누크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년 좌익 탄압 뒤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해 1976~1979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맡았고, 1985년 폴 포트를 계승해 1998년까지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다. 2007년 체포되어 2014년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2018년에는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22년 9월 22일 항소가 기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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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7귀국해 프놈펜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시아누크의 상쾌 정부 각료를 지냈다
  • 1967좌익 탄압을 피해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했다
  • 1973–1974FUNK·GRUNK 대표단을 이끌고 북베트남·중국·조선·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알제리 등을 순방했다
  • 1976–1979민주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 1976비동맹 정상회의에 민주캄푸치아 대표로 참석했다
  •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에서 부주석 겸 외무를 맡아 유엔 의석 유지를 주도했다
  • 1985–1998폴 포트를 공식 계승해 크메르루주 지도자가 되었다
  • 1997폴 포트를 비난하고 크메르 민족연대당을 창당해 크메르루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199812월 누온 찌어와 함께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07체포되었고, 국제적 압력에도 훈 센 총리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 20148월 7일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201811월 16일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참 집단 학살 관여는 무죄로 인정됐다
  • 20229월 22일 항소가 기각되어 유죄가 확정됐다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Vytautas Landsbergis

제국에서 걸어 나간 첫 나라를 이끈 음악학자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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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리투아니아 음악원(현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졸업
  • 1978–1990리투아니아 음악원 및 빌뉴스 사범대학 교수
  • 1988–1990사유디스 평의회 의장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2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국가원수)
  • 1993–2003조국동맹(보수당) 당수
  • 1996–2000리투아니아 세이마스(국회) 의장
  • 2004–2014유럽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