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제하는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1959년 4월 10일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1893년 오렌부르크에서 스웨덴·핀란드·독일계 루터교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9년 잠수함 판테라의 항해장으로 영국 구축함을 격침한 뒤 군 통신 연구와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다. 1937년 12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1940년 석방되었고, 1991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55년 제독-기사,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를 이끌며 생물학적·기술적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1922년 반란 때 남아 쑨원의 탈출을 엄호하며 '중국은 나 없이도 되지만 당신 없이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81년 5월 16일, 죽기 몇 주 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주석이 되었다.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1951년 5월 15일 의회 증언에서 브래들리는 전쟁 확대를 주장한 맥아더를 향해 '이 전략은 잘못된 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상대로 치르게 할 것입니다'라고 일갈했다.
오마르 브래들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육군 고위 지휘관으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과 서유럽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기존의 제1미군집단 본부가 연합군의 기만작전에서 허구의 지휘부로 활용되는 과정을 거쳤고, 실제 전선에서는 제1군과 제12군집단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육군참모총장과 초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며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군사정책을 조정했다.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리가 공격에서 그는 소부대를 이끌고 다우가바 다리를 건너 수백 명의 포로가 갇힌 성채로 돌진했고, 이 돌격에서 쓰러졌으나 부대는 성채에 이르러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쿠를란트의 발트 독일계 남작으로 1차 대전에서 바이에른군 창기병 장교로 싸웠고, 1919년 발트 향토방위군의 참모 장교 겸 돌격대장이 되었다. 4월 16일 리예파야에서 울마니스 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이끌었고, 5월 22일 붉은 군대에서 리가를 탈환하는 공격 중 스물다섯 살에 전사했다.
홀로 무장해제한 채 러스키섬 사관생도들 앞에 선 라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러시아 땅을 위해 우리는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몰도바 보야르 가문 출신의 러시아 제국군 장교로 1917년 혁명에 합류하여 시베리아와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끈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자바이칼 전선 사령관으로 그리고리 세묘노프의 백군과 싸웠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지하활동과 유격전을 거쳐 1920년 1월 봉기를 조직해 콜차크의 극동 통치를 무너뜨렸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증기기관차 화실에서 불태워졌으며, 소련에서 가장 널리 기념된 내전 순교자 중 한 명이다.
「군사 문제에서 그에게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트리안다필로프는 언제나 활기와 에너지, 창조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 『평생의 일』 (1975)
카르스주 출신의 폰토스계 그리스인으로, 차르군 대위에서 붉은 군대 부참모총장까지 오른 군사 이론가이다. 『현대군의 작전 규모』(1926)와 『현대군 작전의 성격』(1929)을 저술하여 전략과 전술을 잇는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종심작전 교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구상은 붉은 군대의 전간기 교리 개혁을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 승리의 교리적 기반이 되었다. 1931년 근무 중 항공 사고로 37세에 사망, 유해는 크렘린 성벽에 안치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4–17차르군 입대, 모스크바 준사관학교 졸업 후 제6핀란드소총연대 중대장·대대장, 참모대위
1917–18혁명 후 병사들에 의해 연대장·제7군 사령관 선출, 케렌스키·페틀류라 정부로부터 법외 선언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한 농민 혁명가로, 1927년부터 벨라루스 공화국 정부수반을 10년간 맡아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꾸어 놓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아카데미 학자 추방 결의에 직접 서명한 그 자신도 1937년 '폴란드 간첩'으로 체포되어 민스크 NKVD 심문 중 투신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매년 키예프에서 아버지가 낡은 가죽 장화를 청하러 왔지만, 가마르니크는 끝내 거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장화를 보면, 아들이 군대에서 도둑질한다고 생각할 게 아닙니까."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이끌고 극동 지역의 산업화를 진두지휘한 혁명가. 1929년부터 8년간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으로서 소련군 정치장교 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었으며, 투하쳅스키의 기계화·항공 중심 군 현대화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했다. 1929년 중앙위원회에서 부하린 '우익 반대파' 숙청을 공개 지지했으나, 1937년 5월 자신이 '군사-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해임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55년 복권.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1936년 7월 14일, 스탈린의 집무실. 고스방크 총재 마랴신이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자 스탈린은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는 반대파도 아니잖나. 우리의 붉은 은행가야. 뭐가 두렵나?" 일주일 뒤 그의 집무실은 봉인되었다.
모길료프의 법률고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 혁명기 모스크바 군관구 교육기관 정치위원을 시작으로 내전기 전러시아 총참모부에서 보편군사훈련 부서를 이끌었다. 1920년대 당 조직국과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통계부를 거쳐 1927년 볼셰비키 전당 중앙위원회 조직배치부 부장에 올랐으며, 이 시기 니콜라이 예조프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930년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하고 국가은행에 입행하여 1934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고스방크 총재를 지내며 재정부인민위원과 노동국방평의회 위원을 겸임했다. 해임된 지 5개월 만에 체포되어 1938년 8월 총살되었으며, 한때 '료부시카'라 부르던 예조프가 직접 고문을 지시했다.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1918.11RKP(b) 입당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오데사 유대인 지구의 이야기꾼으로, 부됸니 기병대를 따라 폴란드 전선을 달리며 『기병대』를 썼다. 혁명의 잔혹을 너무 정직하게 그려 부됸니가 격노했다. 예조프의 아내와의 인연까지 겹쳐 1939년 체포되었고, 원고를 돌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1940년 총살당했다. 압수된 원고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1941년 11월 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는 가운데 푸르카예프는 쿠이비셰프에서 열린 혁명기념일 군사 퍼레이드의 사령관을 맡았다. 외교단 앞에서 펼쳐진 이 퍼레이드는 소련이 아직 건재함을 연합국과 잠재적 적국 모두에 과시하는 무력 시위였다.
모르드바인 출신으로, 차르군 소위에서 붉은 군대의 대장까지 오른 소련의 군사 지휘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르제프 공방전을 지휘했으며, 1943년 극동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2극동전선군을 이끌었다. 이 작전은 소련이 참가한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주요 전역이었다. 전후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지냈으나, 칼리닌 전선군 시절 보급 실패로 병사들이 아사한 책임을 물어 해임된 이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