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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류민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Рюмин

의사들 음모 조작자, NKVD 회계사 출신 부역장

베리야가 류민에게 남긴 마지막 말: '더 이상 당신과 나는 서로 보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당신을 청산할 것이오.' 1953년 3월 28일.

NKVD 회계사에서 MGB 부역장까지 오른 인물. 아바쿠모프를 고발해 '의사들 음모'를 조작, 스탈린 말기 반유대 숙청을 주도했다. 스탈린 사후 체포·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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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NKVD 회계사로 입문
  • 1948MGB 특별중요사건부 배속
  • 1951MGB 특별중요사건부장 → 부역장, 의사들 음모 조작
  • 1952해임
  • 1954재판 후 총살형

니키타 아르카디예비치 크리먄

Никита Аркадьевич Кримян

서른한 살에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이 된 수사관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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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5자캅카스 GPU 경제부 견습, 이어 담당관
  • 1935–1937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선임요원, 이어 과 부책임자
  • 1937–1938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과장
  • 1938–1940그루지야 NKVD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리보프주 NKVD 관리국 부국장
  • 1941–1943야로슬라블주 NKGB·NKVD 관리국 부국장
  • 1943–1945야로슬라블주 NKGB 관리국장
  • 1945–1947아르메니아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7–1950울리야놉스크주 MGB 관리국장
  • 1951–1953아르메니아 식품공업부 인사부장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

Николай Романович Миронов

흐루쇼프 축출을 조직한 당의 '권력 부처' 담당자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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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 1951–1956MGB·KGB 제3총국(군 방첩) 부국장, 소장 진급
  • 1956–1959레닌그라드주 KGB 국장
  • 1959–1964중앙위 행정기관부장 — KGB·내무·군·검찰·법원 감독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밀리온시코프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Миллионщиков
정부·행정 소련 러시아 1913–1973 ○ 자연사

핵무기를 만들고 핵군축을 외친 과학자-정치가

1968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소련 과학자의 입장에서 핵군축을 주창했지만, 동시에 쿠르차토프연구소에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원심분리기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그로즈니 출신으로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에서 기체 원심분리법에 의한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해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1964)의 과학적 책임자였다. 1962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과학의 제도적·국제적 좌표를 설정했고, 1964년부터 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을 맡아 1968~1969년 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으로서 핵군축과 과학 협력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쿠르차토프연구소 부소장으로 핵기술 개발을 지휘하면서도 1967년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과학자와 정치가를 겸한 독특한 경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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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60제813콤비나트 부과학지도자 · 가스원심분리 농축
  • 1960–1973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연구부소장
  • 1962–1973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4세계 최초 핵반응로-변환기 '로마시카' 과학책임자
  • 1964–1973소비에트 파그워시 위원회 의장
  • 1967–1973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68–1969국제 파그워시 운동 의장

소련에서 온 고려인 장군,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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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소련에서 교사·교육 공무원으로 근무, 소련군 대위로 독소전 참전
  • 1946–1950조선 북부 파견, 교육성 부상까지 승진
  • 1950–1953조선인민군 총참모장,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
  • 19537월 27일 정전협정 조선인민군 측 서명
  • 1953–1959외무상
  • 1957–1976내각 부수상
  • 1966–1972철도상·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 1972–1976정무원 부총리·국가경공업위원회 위원장

자보르 라술로비치 라술로프

Джабар Расулович Расул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타지키스탄 1913–1982 ○ 자연사

21년간 타지키스탄을 이끈 농학자 출신 지도자, 검소와 청렴의 공산주의자

라술로프 사후 금고를 열자 저축 통장에 4,200루블과 수년치 개인 경비 영수증 뭉치가 나왔다. 보좌관은 '자동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돈으로 21년간 공화국을 다스렸다'고 회고했다.

후잔트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타슈켄트 중앙아시아면화대학을 졸업한 농학자다. 바흐시 계곡 개간에서 출발해 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1941~1945)과 각료회의 의장(1946~1955)을 지내며 전후 복구를 지휘했고, 소련 농업부 제1차관과 초대 주토고 대사를 역임한 뒤 1961년 4월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사망까지 21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기 누레크 수력발전소, 알루미늄 제련소 등 400여 개 공업 기업이 세워져 농업 중심 구조가 다부문 산업 구조로 전환했다. 9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평생 양복 두 벌만 소유하고 출장에 도시락을 싸 다닌 청렴한 인물로 동시대인의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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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타지크 SSR 바흐시 계곡 면화 재배 농업국 농학자
  • 1938–1940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부 곡물관리국장
  • 1940–1941타지크 SSR 농업부인민위원
  • 1941–1945타지크 SSR 농업인민위원
  • 1946타지크 SSR 공예작물인민위원
  • 1946–1955타지크 SSR 각료회의 의장, 외무장관 겸임
  • 1955–1958소련 농업부 제1차관
  • 1958–1960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0–1961주토고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61–1982타지크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포크리시킨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Покрыш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3–1985 ○ 자연사

소련 전투기 전술을 다시 쓴 에이스, 전시에 세 번의 영웅 금성을 단 유일한 군인

참모 아카데미에서 한 동기가 1941년 아군 Su-2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 이야기를 하자 포크리시킨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나였소."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최고 득점 에이스이자 최초의 세 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항공 정비사로 입대해 39통의 전입 신청 끝에 조종사가 된 집요함으로, 1941년 구식 전술에 무너지는 공군을 보며 공중전 데이터를 기록·분석해 '고도-속도-기동-사격' 공식과 3층 '쿠반 계단' 편대, 진자 순찰 등 수직 전투 교리를 정립했다. 1943년 쿠반 공중전에서 입증된 이 전술은 소련 전투기 교리의 전환점이 되었다(공식 전과 650회 출격 53기 격추). 솔직하고 완고해 상관과 평생 마찰을 겪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장성 진급. 방공군 부총사령관·DOSAAF 의장을 지냈으며 브레즈네프의 전쟁 역할 과장을 끝내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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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제3페름 항공기술학교 졸업, 항공 정비사
  • 1934–1938제74소총병사단 항공통신대 선임 항공기술사
  • 1939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제55전투항공연대 전입
  • 1941–1944제55(→제16근위)전투항공연대 비행대장·부연대장
  • 1944–1945제9근위전투항공사단장, 베를린·프라하 작전 참가
  • 1948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 1949–1955제33(→제88)전투항공군단 부사령관·사령관 (르제프)
  • 1955–1956북캅카스 방공군 전투항공 사령관
  • 1957참모 아카데미 졸업
  • 1958–1968제52전투항공군 사령관 → 제8독립방공군 사령관 겸 키예프 군관구 방공부사령관
  • 1968–1972소련 방공군 부총사령관
  • 1972–1981DOSAAF 중앙위원회 의장
  • 1976–1985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79–1984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위원회 위원
  • 1981–1985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고문

도나트 페렌츠

Donáth Ferenc
정부·행정 헝가리 국가기관 헝가리 헝가리인 1913–1986 ○ 사후 복권, 1989년

혁명과 개혁을 잇고 독재의 상처를 짊어진 정치가

1956년 11월 4일, 나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나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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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헝가리 공산당 입당, 지하 활동
  • 1937–19393월 전선 조직 참여, 국민농민당 창립 참여
  • 1945–1948국가토지정착위원회 부위원장, 농업부 정치차관
  • 1948–1951헝가리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사무국·농촌부문 지도
  • 1951–1954숙청 재판으로 15년형, 1954년 복권·석방
  • 1956나지 임레 주변 개혁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
  • 1958–1960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 1960년 특별사면 석방
  • 1976–1985협동조합 연구자, 민주 야당 연대와 모노르 회의 조직
  • 1989나지 임레 재판 판결 무효화로 사후 복권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플료로프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Флё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0 ○ 자연사

스탈린을 깨운 편지 한 통, 주기율표에 이름을 새긴 핵물리학자

1949년 RDS-1 개발 당시, 플료로프는 플루토늄 임계질량을 직접 손으로 측정하는 실험을 자청했다. 동료들은 방사능 피폭을 우려했지만 그는 '데이터를 믿으려면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실험대에 올랐다.

소련 핵물리학자. 1940년 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함께 우라늄 자발 핵분열을 공동 발견했고, 1942년 전선에서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소련 원자폭탄 계획 재개를 촉구했다. RDS-1 개발 과정에서 직접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을 수행했으며, 1957년 두브나에 핵반응연구소(FLNR)를 설립해 102번부터 106번까지 초중원소 합성을 주도했다. 그의 이름은 114번 원소 플레로븀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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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쿠르차토프 연구실
  • 1940콘스탄틴 페트르자크와 우라늄 자발 핵분열 공동 발견
  • 1942스탈린에게 서한 — 서방 핵과학 침묵 경고, 원자폭탄 계획 재개 촉구
  • 1943–1954소련 원자폭탄 프로젝트 참여, RDS-1 플루토늄 임계질량 실험 직접 수행
  • 1957–1990두브나 핵반응연구소(FLNR) 설립자 겸 과학지도자, 102~106번 원소 합성 주도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세르게이 미트로파노비치 코발료프

Сергей Митрофанович Ковалёв

프라우다 지면에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정식화한 소련 이념가

각 공산당은 자기 인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과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모스크바철학문학역사연구소와 고등당학교를 거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을 지낸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론가이다. 1965년부터 『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으로 재직하며 1968년 9월 26일 「사회주의 나라들의 주권과 국제적 의무」를 기고,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사회주의 공동체 수호'라는 국제주의적 의무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 글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최초이자 가장 권위 있는 정식화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그는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과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를 역임하며 윤리학·공산주의 교양론 분야의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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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8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선전부장
  • 1948–1951전연방공산당 쿠르스크주위원회 서기
  • 1951–1956국영정치출판사(고스폴리티즈다트) 사장
  • 1960–1965『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편집자
  • 1965–1971『프라우다』 선전부문 편집위원
  • 1971–1980『소비에트 대백과사전』 제1부편집장
  • 1980–1990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지미 듀랜트

James Thom Durrant

장거리 공수의 한계를 감수한 전시 지휘관

1944년 바르샤바 공수작전을 앞두고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없고 손실이 클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작전은 계속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장교 제임스 톰 듀랜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프리카와 지중해 전선의 폭격·정찰 부대를 지휘한 조종사였다. 그는 1944년 이탈리아의 영국 공군 제205그룹을 맡아 바르샤바 봉기 지원 공수작전을 지휘했으며, 전투적 필요와 정치적 의무가 충돌하는 임무의 한계를 드러냈다. 전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최고 책임자로 복무했지만, 국민당 정부의 탈영국화 정책과 국방장관과의 갈등 속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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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4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상비군 사관후보생 과정을 수료하고 조종사 자격을 취득
  • 1940–1941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40비행대대 지휘관, 동아프리카 전선
  • 1941–1942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24비행대대 지휘관, 서부사막 전역
  • 1942–1944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제3폭격비행단 지휘관, 북아프리카·시칠리아·이탈리아
  • 1944–1945영국 공군 제205그룹 지휘관, 이탈리아 기지에서 바르샤바 공수작전 지휘
  • 1945–1946영국 공군 제231중폭격그룹 항공사령관, 극동
  • 1946–1952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 최고 책임자

구스타우 후사크

Gustáv Husák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두브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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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부의장
  • 1946–1950슬로바키아 행정위원회 의장 — 민주당 해체 주도
  • 1954–1960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 레오폴도프 교도소 수감
  • 1968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 소련 침공 후 반개혁 노선으로 전환
  • 1969–198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총서기 — 정상화 주도
  • 1975–1989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89벨벳 혁명으로 사임

빅토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Виктор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1 ○ 자연사

'위대한 6인' 중 가장 키 크고 말 없는, 소련 로켓의 눈을 만든 자이로스코프의 아버지

동시대인의 회고: "좁은 자리에서 친구들은 그를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 그는 여섯 명의 수석설계자 중 가장 키가 컸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말이 없었다." — 야로슬라프 골로바노프

레닌그라드 공업대학 출신의 자이로스코프 공학자. 2차대전 중 함포 사격통제용 자이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위대한 6인'에 합류해 소련 로켓의 관성항법을 확립했다. R-7(스푸트니크·가가린), R-16, R-36, UR-100 등 모든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살류트·미르 우주정거장, 에네르기야-부란까지, 그의 자이로스코프 없이 발사된 소련 우주로켓은 없다. 1956년부터 이끈 NII-944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응용역학연구소(НИИ ПМ)로 남아 러시아 우주항법의 핵심이다. 가장 키가 컸지만 가장 말이 없었던 그를 동료들은 '비챠-크로슈카(꼬마 비챠)'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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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40레닌그라드 제212공장(전기계기) 연구기사, 함선용 자이로컴퍼스 개발
  • 1940–43모스크바 NII-10 자이로스코프 부장, 함포 사격통제 안정화 장치로 스탈린상(1943)
  • 1943–46MNI-1 특별설계국 수석설계자, 전차 주포용 안정기 개발
  • 1946–56NII-10 수석설계자, '위대한 6인' 합류 — R-1·R-2·R-5 유도장치 개발
  • 1956NII-944(현 응용역학연구소) 주임기사 겸 수석설계자 — R-7 유도장치, 사회주의노동영웅(1차)
  • 1957/1961스푸트니크·보스토크(가가린) 발사 성공, 레닌상, 사회주의노동영웅(2차)
  • 1960s–80sR-16·R-36·UR-100 ICBM, 루나·베네라·마스 탐사선, 살류트·미르·에네르기야-부란 유도장치
  • 1968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58 준회원, 1949 포병과학아카데미 준회원)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보안·정보·치안 나치당·나치 정권 독일 독일계 1913–1991 ○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

나치의 리옹 게슈타포 책임자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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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친위대 입대, 보안방첩대 복무
  • 1940–1941암스테르담 보안방첩대, 유대인·공산주의자 탄압
  • 1942디종 파견, 점령 프랑스 보안 업무
  • 1942–1944리옹 게슈타포장, 레지스탕스 탄압과 유대인 강제이송
  • 1947–1951미군 방첩대 정보원
  • 1951–1983볼리비아에서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활동
  • 1987리옹 재판, 반인도적 범죄 유죄 및 종신형
  • 1991리옹 교도소에서 사망
정부·행정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913–1992 ○ 자연사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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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5나치 독재에 맞선 망명·저항 활동가
  • 1948–1953베를린 주재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1957–1966서베를린 정무시장
  • 1964–1987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 1966–1969외무장관·부총리
  • 1969–197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 1976–1992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사빈킨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Савинкин

브레즈네프 시기 19년간 소련 전력 기관들의 인사 문지기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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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붉은 군대 입대, 무선통신대대 사병 및 하급 지휘관
  • 1937적군 화학연구소 콤소몰 서기
  • 1939–1941군사정치 아카데미 수학, 서부전선 제33군 정치부 선전담당 고등교관
  • 1942–1944자바이칼 전선: 여단 정치부장, 전선 정치부 간부부 차장, 총정치국 간부국 고등교관
  • 1947–1950군사정치 아카데미 복학 및 졸업
  • 195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행정부 교관
  • 1952–1959중앙위 행정부문 육군 부문장, 부문 차장 등 역임
  • 1959–1968중앙위 행정기관부 차장 → 제1차장, 1964년 10월부터 부장 대행
  • 1968–1987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

지리 하예크

Jiří Hájek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지리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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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3–1994 ○ 뇌졸중

데탕트로 소련과 핵무기 제한의 틀을 열고 워터게이트로 무너진 유일한 사임 대통령

1959년 모스크바 미국 박람회의 모형 주방 앞에서, 닉슨은 흐루쇼프를 향해 "우리도 색채 텔레비전에서는 앞서 있다"고 응수하며 즉흥적인 체제 논쟁을 벌였다.

반공 조사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두 차례의 낙선을 딛고 1968년 대통령에 오른 집요한 정치인이었다. 냉전의 대표적 반공 인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및 중국과의 데탕트를 주도하여,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와 ABM 조약 및 SALT I 잠정협정에 서명했다. 초강대국 간 핵무기 제한의 첫 국제법적 틀이었다. 베트남전을 '명예로운 평화'로 종결시키고 중국 방문으로 미중 관계의 문을 열었으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1974년 8월 9일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퇴임 후 외교 원로로서 이미지를 회복했으나, 그의 유산은 데탕트의 성취와 대통령직을 무너뜨린 불법 사이에 영원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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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50캘리포니아 12구 연방 하원의원;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앨저 히스 사건으로 전국적 명성
  • 1950–1953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 1953–1961미국 부통령 (아이젠하워 행정부), 1959년 모스크바 '주방 논쟁'
  • 1961–1968변호사 개업, 저술, 1962년 주지사 선거 낙선 후 정치적 재기
  • 1969–1974제37대 미국 대통령; 1972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SALT I·ABM 조약 서명, 베트남전 종결, 중국 방문; 1974년 워터게이트로 사임

블라디미르 알렉세예비치 키릴린

Владимир Алексеевич Кирилл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3–1999 ○ 자연사

과학기술혁명기 소련 민간 R&D의 총괄 설계자

1980년 1월, 15년간 이끌어온 GKNT 의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과학아카데미 고온연구 부문으로 돌아갔다. 정치적 축출이 아닌, 연구 현장으로의 자발적 복귀였다.

열물리학자로 스탈린상(1951)과 레닌상(1959)을 수상한 키릴린은, 1965년부터 15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소비에트 민간 R&D 전체를 총괄했다. CPSU 중앙위 과학부장(1955–1962)과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거친 그는, 과학기술혁명기 소련의 국가혁신전략을 입안·집행한 핵심 인물이었다. GKNT가 군산복합체의 R&D 예산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도, 아카데미·산업·정부를 잇는 전방위 조정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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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54모스크바동력학원(MPEI) — 기술자, 대학원, 교수, 부원장
  • 1954–1955소련 고등교육부 차관
  • 1955–1962CPSU 중앙위원회 과학·고등교육·학교부장
  • 1963–196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5–1980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
  • 1980–1988과학아카데미 물리기술학·에너지학부 아카데미크-서기, 이후 상임간부회 고문

페코 다프체비치

Пеко Дапчевић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 이어진 파르티잔 지휘관

1944년 10월 20일, 다프체비치가 지휘한 유고슬라비아군과 소련군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했다.

페코 다프체비치는 스페인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몬테네그로계 공산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몬테네그로 봉기에서 출발해 사단과 군단을 지휘했고, 1944년 베오그라드 해방에서 소련군과 함께 작전한 제1군집단을 이끌었다. 1945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스렘 전선 돌파와 전후 군대의 정규화를 맡았으며,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전투조직이 국가의 상설 군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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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스페인 공화국군 국제여단 자원병, 중대 지휘관
  • 1941로브첸 파르티잔 분견대 사령관, 몬테네그로 봉기
  • 1942제4 몬테네그로 프롤레타리아 충격여단 사령관
  • 1942–1943제2 프롤레타리아 사단 사령관
  • 1943–1944제2 충격군단 사령관
  • 1944제1군집단 사령관, 베오그라드 작전
  • 1945–1949제1군 사령관, 이어 유고슬라비아군 총감찰관
  • 1953–1955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알렉세예프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Алексеев

카스트로의 신뢰를 얻은 소련 정보장교 출신 초대 주쿠바 대사

1962년 5월 크렘린에서 흐루쇼프가 물었다.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받아들일까?' 알렉세예프는 회고했다. '당혹감을 애써 누르며 나는 피델이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을 말했다.'

본명은 알렉산드르 시토프.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NKVD에 들어가 이란·프랑스·아르헨티나에서 정보장교로 활동했다. 1959년 TASS 특파원 신분으로 쿠바에 도착해 피델 카스트로 및 체 게바라와 개인적 신뢰를 쌓았고, 1962년 5월 소련의 초대 주쿠바 대사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흐루쇼프에게 카스트로가 핵미사일 배치를 거부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흐루쇼프는 이를 무시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카스트로의 핵 선제타격 주장을 진정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바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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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스페인 내전 소련 군사고문단 통역
  • 1941–1943이란 주재 NKVD 정보장교
  • 1944–1951파리 주재 NKVD/KI 레지던트 (공식 직함: 대사관 아타셰)
  • 1954–1958아르헨티나 주재 KGB 레지던트 겸 대사관 1등서기관
  • 1959–1960쿠바 주재 TASS 특파원 겸 KGB 레지던트
  • 1960–1962주쿠바 소련 대사관 문화고문
  • 1962–1968주쿠바 소련 대사
  • 1974–1980주마다가스카르 소련 대사

서방 차관으로 현대화 10년을 이끌었으나 부채 위기와 연대로 막 내린 PZPR 제1서기

1971년 1월 노동자 집회에서 — 「자, 그럼 동지들, 도와주시겠습니까?」 (약한 박수)

프랑스·벨기에 탄광 노동자 출신, 1970년 노동자 봉기 후 PZPR 제1서기가 되어 서방 차관으로 '사회주의적 소비사회'를 추진했다. 생활수준이 올랐으나 외채 위기와 1980년 파업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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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프랑스 공산당 입당, 랑스 탄광 지구에서 활동
  • 1934레포레스트 탄광 점거 파업 주도, 폴란드로 강제 추방
  • 1937–46벨기에 이주, 벨기에 공산당 및 대독 레지스탕스 '백색여단' 활동
  • 1948–54귀국, PZPR 카토비체 주당 서기, 이후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57–70PZPR 카토비체 주당 제1서기 — '카토비체 공국'의 실리적 통치
  • 1970–80PZPR 중앙위 제1서기 — '기에레크의 10년'
  • 1976–80국가평의회 위원 겸임
  • 1981PZPR 제명, 계엄령 하 인터닝 (1981.12–1982.12)

시중쉰

习仲勋
정부·행정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 중국 중국 1913–2002 ↓ 실각 1962 · 자연사

산베이 근거지의 창건자, 16년 실각 뒤 광둥에서 경제특구를 열어 낸 개혁가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으나 1962년 실각해 16년을 감금·하방으로 보냈고,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경제특구를 열었다.

산시 출신으로 류즈단과 함께 산간 근거지를 세워 대장정의 종착지를 마련했다. 건국 후 서북국 서기와 국무원 비서장·부총리를 지냈으나 1962년 소설 『류즈단』이 가오강을 옹호한 「반당」 작품이라는 캉성의 고발로 실각해 16년 동안 감금·하방되었다. 1978년 광둥 제1서기로 복귀해 홍콩 탈출 문제의 해법으로 중앙에 「선행일보(先行一步)」의 권한을 요구했고, 이는 1980년 선전·주하이·산터우 경제특구로 이어졌다. 1980년대 서기처 서기로 후야오방을 지지했으며 1987년 그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진핑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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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2국무원 부총리 겸 비서장
  • 1978–1980광둥성 당위원회 제1서기

샤를 베텔하임

Charles Bettelheim
학술·연구 프랑스 프랑스 1913–2006 ○ 자연사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정립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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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 1950s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 1958EHESS 산하 CEMI 설립
  • 1963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반대
  • 1966–1977프랑스-중국 우호협회 회장
  • 1974–1982『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전3권 출간,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