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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8–1918 ✕ 처형

전제(專制)를 신이 맡긴 의무로 믿은 마지막 차르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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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차르 즉위
  • 1904–05러일전쟁 패배, 1905년 혁명
  • 1906기본법 공포, 제한된 두마 체제 출범
  • 1915총사령관을 자임하고 전선으로, 패전 책임이 왕좌로 직결
  • 1917.3퇴위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포크롭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окровский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이자 사후 부정된 혁명적 역사가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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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 1905–1907모스크바 볼셰비키 강연단·신문 ≪보르바≫ 편집; 12월 봉기 참가; RSDLP 제5차 런던대회 대의원·중앙위 후보위원
  • 1908–1917망명: '전진파'·이후 반파벳적 입장; 1차대전 때 국제주의자로 복귀; ≪고대 이후의 러시아사≫ 5권 집필(1910–1913)
  • 1917–1918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7.11–1918.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대표단 위원
  • 1918–1932계몽인민부위원(루나차르스키 대리); 고등교육·과학·기록보관소 개혁 주도; 공산주의 아카데미·적색교수양성원·이스트파르트·레닌연구소·중앙기록보관소장
  • 1920–1923≪가장 간결한 러시아사≫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의 표준 교재
  • 1929–1932소비에트 아카데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회원 선출(1929);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1930–1932); 암으로 사망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슐리흐테르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Шлихтер
농업·토지정책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제정 러시아 신민권 취득, 문서화된 혈통은 독일계·우크라이나계) 1868–1940 ○ 자연사 ( 키이우 사망)

첫 농업인민위원에서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이 된 볼셰비키 농정가

1905년 10월 키이우의 대규모 혁명 집회를 이끌었고 10월 17일 칙령 이후 군중이 시두마 청사를 파괴했다. 10월 18일 발코니 연설은 1908–09년 재판의 기소 사유가 되었으며, 핀란드로 피신한 뒤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1868년 8월 20일(구력)/9월 1일(신력) 폴타바현 루브니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일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조부는 뷔르템베르크에서 1818년 러시아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목수, 어머니는 몰락한 폴란드계 지주 가문 출신이다. 1882년 가족이 러시아 신민권을 취득했고 본인도 대학 시절 이를 취득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 학생 서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07년 제5차 RSDLP 대회(런던) 대의원이었다. 1917년 11월 RSFSR 농업인민위원, 1917년 12월–1918년 2월 식량인민위원으로 곡물 독점과 징발을 집행했다. 1920–21년 탐보프 주 집행위원장으로 반란 진압에 실패해 해임된 뒤 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1927–29)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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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하르키우 대학 학생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 1898RSDLP 입당; 볼로그다 유형 (5년, 결핵으로 사마라 요양)
  • 1902–1905키이우 RSDLP 위원회 위원,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 철도노조 전국대회 의장
  • 190510월 키이우 혁명 집회 주도, 시두마 발코니 연설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1908RSDLP 제5차 대회(런던) 대의원;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 1917.11RSFSR 농업인민위원 대행 (11월 13–24일)
  • 1917.12–1918.2RSFSR 식량인민위원 — 곡물 독점과 징발 체제 주도
  • 1918–1919시베리아, 페름, 뱟카, 우파, 툴라 식량 비상위원; 우크라이나 식량인민위원
  • 1920–1921탐보프 주 집행위원장 — 농민 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
  • 1922–1923소련 오스트리아 외교대표 겸 통상대표
  • 1923–1927우크라이나 외교인민위원부 전권대표 겸 합동위원
  • 1927–1929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 — 농공복합단지 구상 주도
  • 1931–193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겸 VUAMLIN 의장

얀 퇴니손

Jaan Tõnisson
정부·행정 에스토니아 국가기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868–1941? 실종 · 사망 추정

타르투 강화를 체결한 에스토니아 총리, 「포스티메스」의 발행인

1940년 6월 소련의 점령이 닥치자 그는 페츠 대통령에게 상징적으로라도 무장 저항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포스티메스」를 이끈 에스토니아 자유주의 민족운동의 대표로 1919~1920년 총리를 지내며 타르투 강화를 체결했다. 1934년 페츠의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해 밀려났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체포되어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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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포스티메스」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민족운동의 기관지로 키움
  • 1906러시아 제1두마 의원, 비보르크 호소 서명
  • 1917에스토니아 임시지방의회(마패브) 의원
  • 1919–1920총리로 타르투 강화 조약 체결
  • 1923–1925리가코구 의장
  • 1927–1928국가원로
  • 1931–1932외무장관
  • 1933국가원로(마지막 정부)

제임스 코놀리

James Connolly

노동자의 깃발과 공화국의 깃발을 한 깃대에 올린 사회주의자

총상으로 설 수 없어 의자에 묶인 채 총살당했다 — 킬마이넘 감옥(1916.5.12)

마르크스주의와 아일랜드 민족해방을 하나의 투쟁으로 통합한 사회주의 혁명가. 아일랜드시민군을 창설하고 1916년 부활절 봉기에서 더블린 사령관으로 싸웠으며, 봉기 진압 후 영국군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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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아일랜드사회주의공화당 창립
  • 1903–1910미국에서 IWW 조직가로 활동
  • 1910–1914ITGWU 지도 — 1913년 더블린 직장폐쇄 투쟁
  • 1910《아일랜드 역사 속의 노동》 출간
  • 1913아일랜드시민군(ICA) 창설
  • 1915《아일랜드의 재정복》 출간
  • 1916.4부활절 봉기 — 더블린 사령관, 공화국 선언 서명자
  • 1916.5킬마이넘 감옥에서 총살

이오시프 솔로모노비치 블레이흐만

Иосиф Соломонович Блейхма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러시아 러시아 제국, 유대계 1868–1921 ○ 병사

1917년 위기의 무정부주의적 도화선

“거리가 우리를 조직할 것이다.”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장인 출신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혁명가로, 노동자 조직과 병사 집회에 자신의 정치를 밀어 넣었다. 2월혁명 뒤 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 되어 산업의 사회화와 지주 재산의 수탈, 코뮌 건설을 임시정부 밖에서 주장했다. 1917년 7월 3일에는 제1기관총연대에 무장하고 행진하라고 촉구해 위기를 무장한 7월 시위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 운동은 볼셰비키 지도부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10월 뒤에는 구체제에 맞선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 국가를 비판했고, 그 결과 거듭된 체포와 강제노동, 병을 겪다가 192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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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혁명운동 참가
  • 1904미국에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수용
  • 1906드빈스크 무정부주의 그룹 조직
  • 1913–1914페테르부르크 노동조합 선동가
  • 1917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자연맹 서기·《코뮌》 편집자
  • 19177월 시위 때 제1기관총연대 선동가
  • 1917–1919페트로그라드 무정부주의 그룹연맹 서기
  • 1920–1921모스크바 노동조합 평의회 활동가, 체포되어 강제노동

체렌도르지 발링 발링기인

Балингийн Балин Цэрэндорж
정부·행정 몽골 국가기관 몽골 몽골 1868–1928 ○ 재임 중 병사

몽골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 구체제의 외교관

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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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90허레 만주 행정청 서기
  • 1890–1904러시아 영사관 통역학교 교사
  • 1904–1911허레 만주부 중국어 통역관(6품)
  • 1913–1915자치 몽골 외무차관
  • 1915–1919외무부 수석장관
  • 1923–1928몽골 총리(1924년부터 인민공화국 총리)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리티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иттих

곡물 강제 징발로 빵 위기를 폭발시킨 마지막 차르 체제 농업장관

1917년 2월 17일 두마 연단에서 곡물 징발의 정당성을 역설했으나 야당의 냉소만 샀다. 닷새 뒤 페트로그라드의 빵 가게 앞에 선 여성들이 혁명을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농업장관으로, 1916년 11월 29일 곡물 강제 징발령(продразвёрстка)에 서명했고 1917년 1월 말 페트로그라드의 제분소 공급을 하루 3만 5천 푸드로 제한했다. 이는 빵 부족과 줄서기 공황을 촉발해 2월 혁명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원래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핵심 설계자였던 유능한 관료였으나, 전시 경제의 수송 붕괴와 인플레이션 앞에서 도구를 잘못 쥔 개혁가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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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알렉산드르 관립학교(리체이) 금메달 졸업
  • 1888–1905내무성 지방국·경찰국·이주관리국 근무, 농업문제 특별회의 서기
  • 1905–1912토지정리·농업총국 국유지부장, 스톨리핀 개혁 입법 설계
  • 1912–1916농업차관, 궁정 시종장(1913), 원로원 의원(1916)
  • 1916.11–1917.02농업장관 — 곡물 징발령 서명(11.29), 페트로그라드 제분 제한(1917.1)
  • 1919–1930영국 망명, 런던 소재 러시아 은행장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68–1936 ○ 자연사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바로 이것이 진리다!" - 『밑바닥에서』(1902)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목수 막심 페시코프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세이 페시코프는 부두 노동자와 방랑자로 러시아의 밑바닥을 떠돌다 1892년 단편 「마카르 추드라」로 막심 고리키가 되었다.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최대 후원자였으나 1917~1918년 자신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때 이른 생각들」을 연재하며 레닌의 폭력을 비판했고, 그 논쟁은 최종 결별이 아니었다. 1921년 결핵 때문에 이탈리아로 떠나 소렌토에 머물렀고, 널리 퍼진 서술은 1932년 10월 귀국으로 보지만 바신스키는 1933년으로 본다. 귀국 뒤 스탈린을 미화하고 집단화와 노동수용소 체계를 옹호했고, 1936년 6월 18일 고르키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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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학술·연구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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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2–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판텔레이몬 니콜라예비치 레페신스키

Пантелеймон Николаевич Лепешинский

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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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 1935–1936국립역사박물관 관장, 이후 혁명박물관 관장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정부·행정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68–1948 ○ 자연사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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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샤를 모라스

Charles Maurras

악시옹 프랑세즈의 두뇌, 「통합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공화국 자체를 부정한 왕당파 이론가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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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90마르티그 출생, 청력을 잃고 파리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99–1908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악시옹 프랑세즈에 합류, 1908년 일간지 창간
  • 1908–1939「통합민족주의」의 이론가로 프랑스 극우 전체에 영향
  • 1926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 2월 6일 시위 호소
  • 1938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선출
  • 1940–1944비시 지지,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
  • 1945.01대적 협력으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 선고
  • 1952병으로 석방된 해에 투르에서 사망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문학·예술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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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W. E. B. 듀보이스

W. E. B. Du Bois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인 1868–1963 ○ 자연사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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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34–1944애틀랜타대 교수, 『미국의 흑인 재건』(1935) 출간
  • 1944–1948NAACP 특별연구국장; 유엔 창설 회의 참석
  • 1950–1951평화정보센터 의장;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기소, 무죄
  • 1961–1963미국 공산당 입당; 가나로 이주,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 착수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утин
정치·당 지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9–1916 ✕ 살해

제국의 침실까지 들어온 시베리아의 「성자」

1905년 11월 1일,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4시에 세르기옙카로 갔다. 밀리차 및 스타나와 차를 마셨다. 하느님의 사람 — 토볼스크 출신 그리고리와 알게 되었다."

시베리아 농민 출신 신비가. 황태자의 혈우병을 진정시켜 황후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고, 전시에 장관 인사까지 좌우했다. 1916년 12월 군주제를 구하려던 귀족들에게 살해되었으며, 왕조는 두 달 뒤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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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시베리아 순례자에서 페테르부르크 살롱으로
  • 1905–07황실에 소개되어 황태자의 발작을 진정
  • 1911–16인사 개입 스캔들, 전시의 「장관 도약」
  • 1916.12유수포프 저택에서 살해

예브노 피셸레비치 아제프

Евно Фишелевич Азеф
사회운동·조직 사회혁명당 러시아 제국 러시아 (유대계) 1869–1918 ○ 신부전

오흐라나의 월급을 받으며 혁명 테러를 지휘한 이중간첩

1902년 6월 아제프는 오흐라나에 500루블을 테러 활동에 기부했다고 보고하며 '당 내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적었다. 경찰과 혁명 양쪽에 동시에 장부를 올린 셈이었다.

사회주의혁명당(SR) 전투조직의 수장으로 플레베 내무장관(1904)과 세르게이 대공(1905) 암살을 지휘하며 혁명 테러의 정점을 찍었지만, 동시에 1893년부터 오흐라나의 유급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들을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은 이중간첩이었다. 게르슈니의 후계자이자 보리스 사빈코프의 상관으로서 전투조직을 중앙집권적 정예 부대로 재편했고, 암살 성공으로 쌓은 신임을 배신의 밑천으로 삼았다. 1908년 부르체프에게 정체가 폭로되어 SR당 전체가 궤멸적 타격을 입었으며, 독일로 도주한 아제프는 혁명운동과 비밀경찰 사이 가장 어두운 접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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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9독일에서 전기공학 수학, 오흐라나 정보원 활동 시작
  • 1899러시아로 귀국, 사회주의혁명당 운동에 합류
  • 1901–1902통합 SR당 창립 참여, 게르슈니의 부관으로 전투조직 합류
  • 1903–1908SR 전투조직 수장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조직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조직
  • 1906가폰 신부 암살 지시
  • 1908부르체프에게 정체 폭로, 독일로 도주
  • 1909–1918베를린에서 알렉산더 노이마이어 가명으로 은거

보그드 칸

Богд хаан
정부·행정 몽골 국가기관 몽골 몽골 (티베트 출생) 1869–1924 ○ 자연사

티베트 출신 환생 라마로 즉위한 마지막 몽골 대칸

제후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티베트 라싸 출신의 제8대 젭춘담바 쿠툭투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다음가는 몽골 불교의 최고 환생 성직자였다. 1911년 청이 무너지자 몽골 귀족들이 그를 '보그드 칸'으로 즉위시켜 신정 국가를 세웠다. 1919년 중국이 자치를 폐지하며 권력을 잃었다가 1921년 인민혁명 뒤 제한군주로 복위했고, 1924년 5월 후두암으로 죽어 몽골의 군주제를 끝냈다. 17세기 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몽골의 대칸으로, 격동 속에서 종교적 카리스마로 몽골인들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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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우르가(이흐 후레) 도착, 몽골 불교 수장으로 승인
  • 191112월 29일 보그드 칸으로 즉위
  • 1919중국의 자치 폐지로 권력 상실
  • 1921인민혁명 후 제한군주로 복위
  • 1924후두암으로 사망, 군주제 종식

미하일 오시포비치 게르셴존

Михаил Осипович Гершензон
학술·연구 소비에트 러시아 1869–1925 ○ 결핵

《베히》를 기획하고 인텔리겐치아의 정신적 자각을 촉구한 러시아 문화사가

1909년 《베히》 서문에서, "우리는 총검과 감옥으로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바로 그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고 썼다.

러시아 문화사가이자 수필가로, 1909년 지식인의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한 논쟁적 저작 《베히》(Vekhi)의 발기인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인텔리겐치아가 외적 사회 형태의 재편에 매몰되어 내적 정신의 자각을 외면했다고 보았으며,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총검과 감옥의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는 도발적 문장으로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후에는 전러시아 작가연합 초대 의장과 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을 지냈으며, 푸슈킨 연구(《푸슈킨의 지혜》, 1919)와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연구로 중요한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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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모스크바대학 역사·문헌학부 졸업
  • 1903–1905《나우치노예 슬로보》 문예 평론가
  • 1907–1909《크리티체스코예 오보즈레니예》 문예 편집장
  • 1909《베히》 발기·편집, 서문과 논고 기고
  • 1915–1919《루스키예 프로필레이》(전6권) 편집
  • 1918모스크바 작가연합 초대 의장
  • 1920–1921전러시아 작가연합 의장·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 위원
  • 1922–1925국립예술학아카데미 문학부문장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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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 1918.2–3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지휘,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종 조약 강요
  • 1919–1920폴란드 국경 여단장, 이후 퇴역
  • 1920–1927반소비에트 연합군 개입을 주장하는 호프만 계획 추진, 회고록 집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트레소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тресов
정치·당 지도 멘셰비키 소련 러시아 1869–1934 → 사망

이스크라를 함께 만든 여섯 사람 중 하나, 레닌과 갈라선 멘셰비키 이론가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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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 1914–1917멘셰비키 방어파 지도자, 『나셰 델로』 발행
  • 1925–1934베를린·파리 망명, 『사회민주주의자의 수기』 발행, 『환상의 포로』 저술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남편의 그림자 속에서 소비에트 학교와 도서관을 만든 여성

트로츠키는 『이스크라』 시절의 그녀 방을 이렇게 기억했다. 방에서는 늘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암호 편지를 촛불에 쬐어 읽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 지하 연락원의 가명과 주소가 그녀 머릿속에 있었다.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였지만, 스스로 조직을 세운 혁명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몰락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사이자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했다. 망명지에서 『이스크라』의 서기로서 암호와 가명, 주소로 이어지는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을 묶어냈고, 1917년 이후에는 리크베스 문맹 퇴치와 전국 도서관망으로 소비에트 교육을 세웠다. 1925년 신반대파를 잠시 지지했다가 철회했고, 추콥스키의 동화를 비판한 글은 그를 아동문학에서 사실상 배제했다. '해로운' 도서를 걷어내는 도서관 정화를 주도하면서도 테러의 표적이 된 이들을 위해 탄원했다. 1939년 2월 27일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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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 1927–1939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29–1939RSFSR 계몽인민부위원, 소비에트 교육·도서관·검열 정책 주도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 1937소비에트 최고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

네빌 체임벌린

Neville Chamberlain
정치·당 지도 영국 보수당 영국 영국인 1869–1940 ○ 자연사

전쟁을 피하려다 전쟁의 문을 연 유화정책의 설계자

1938년 뮌헨에서 돌아온 그는 협정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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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5버밍엄 시의원, 도시계획위원회 의장
  • 1915버밍엄 시장
  • 1916–1917국가복무국장
  • 1923–1924보건부 장관, 재무장관
  • 1924–1929보건부 장관
  • 1931–1937재무장관
  • 1937–1940영국 총리
  • 1938–1939뮌헨 협정과 대독 유화정책 주도

에마 골드만

Эмма Гольдман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미국 러시아 1869–1940 ○ 사망

아나키즘을 국제적 정치운동으로 만든 망명 혁명가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9뉴욕으로 이주, 요한 모스트의 지도 아래 아나키스트 활동 시작
  • 1892버크먼의 프릭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체포·심문
  • 1893첫 수감 — 유니언스퀘어 연설로 폭동선동죄 1년형
  • 1906아나키스트 잡지 『마더 어스』 창간
  • 1917징병 반대 조직으로 2년 수감
  • 1919소비에트 러시아로 강제 추방 — '소비에트 방주' 편
  • 1923《러시아에서의 환멸》 출간, 볼셰비키 비판
  • 1936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 혁명 지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