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초기화

전체 인물 2390명

레프 페트로비치 페옥티스토프

Лев Петрович Феоктист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28–2002 ○ 자연사

핵무기 설계자에서 핵군축의 비판자로

그는 핵무기 경쟁을 두고 “폭탄 하나에도 쓸모를 찾지 못하겠다”고 썼다.

레프 페옥티스토프는 소련의 핵·열핵무기 개발을 이끈 이론물리학자이자, 훗날 핵군축과 원자로 안전을 주장한 과학자였다. 아르자마스-16에서 슬로이카를 바탕으로 한 열핵무기 연구에 참여했고, ‘제3의 아이디어’로 불린 2단계 설계의 돌파를 목격한 증언을 남겼다. 그는 무기 개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핵실험과 군비경쟁의 무의미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고, 말년에는 레이저 핵융합과 본질적으로 안전한 원자로를 연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5–195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에서 핵물리학 전공
  • 1951–1955KB-11 이론부, 아르자마스-16 연구원
  • 1955–1978VNIITF, 첼랴빈스크-70 이론물리학자
  • 1966사회주의 노동 영웅, 소련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78–1988쿠르чатов 원자력연구소 연구자, MEPhI 교수
  • 1988–200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레이저 핵융합 부서장
  • 2000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카멘체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аменцев

소련 수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이끈 기술관료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사상 처음으로 각료 인준 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카멘체프는 거부된 극소수 부총리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14세에 강선박 화부로 노동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수산공업연구소를 졸업하고 무르만스크의 트롤어선 기지에서 엔지니어로 성장하여, 1979년 소련 수산장관에 올랐다. 재임 7년간 소련 원양어업은 세계 최대 어획량을 기록했고, 어획·가공·선단 건조를 아우르는 수직 통합 체계를 확립했다.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자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로 승진했으나, 1989년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4모스크바강 선박회사 화부·선반공·기관사
  • 1950–1957무르만스크 트롤어선단 기술자·국장·공장 수석기사
  • 1957–1962무르만스크 국민경제회의 수산공업 총국장·부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수산위원회 부위원장·제1부위원장
  • 1965–1979소련 수산부 제1차관
  • 1979–1986소련 수산장관
  • 1986–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 1993–2003전러시아 수산기업협회 회장·러시아 산업가연맹 부회장

제르멘 미하일로비치 그비시아니

Джермен Михайлович Гвишиани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그루지야 1928–2003 ○ 자연사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을 연결한 철학자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1–1955소련 해군 복무
  • 1955–1965국가신기술위원회(이후 GKNT) 근무
  • 1965–1985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
  • 1976–1992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 소장
  • 1985–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부의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이고리 세르게예비치 벨로우소프

Игорь Сергеевич Белоусов

소련 해군 전략균형을 건조한 조선장관

1974년 12월 4일, '비공개' 최고회의 간부회의 칙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국가 최고 훈장조차 기밀로 처리될 만큼, 그가 지휘한 전략원잠 계획은 소련의 가장 은폐된 사업이었다.

이고리 벨로우소프는 발트 조선소의 현장 기술자에서 소련 조선공업 장관까지 오른 선박 엔지니어이자 국가 지도자다. 1970년대 소련 해군 전략미사일 잠수함 전력의 핵심을 설계·건조한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667B/BD/BDR 계열 잠수함과 미국 트라이던트에 대응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잠 체계를 기술적으로 총괄하며 미소 간 해양 전략균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88년부터는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군수복합체 전체를 조정했고, 이후 전환기 방산 컨설팅과 수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63발트 조선소에서 현장 기술자·콤소몰 서기·조립용접공장장·생산부장 역임
  • 1963–1967발트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7–1969아드미랄테이스키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9–1976소련 조선공업 차관
  • 1976–1984소련 조선공업 제1차관
  • 1984–1988소련 조선공업 장관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 2000–2005로소보론엑스포르트 수석고문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리지체프

Алексей Дмитриевич Лизич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8–2006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도 군 정치기관을 수호하려 했던 마지막 총정치국장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체레포베츠 보병학교 졸업, 콤소몰 정치업무 시작
  • 1957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통신)
  • 1960–1965총정치국장 보좌관 (콤소몰 담당, 대령)
  • 1965–1971제13근위군단 정치부장 → 모스크바 군관구 정치국 제1부국장 (소장)
  • 1971–1980주독소련군 정치국 제1부국장 → 자바이칼 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 1980–1985총정치국 부국장 (상장) → 주독소련군 정치국장
  • 1985–1990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 (대장, 1986)
  • 1990–1992국방성 총감찰단, 퇴역

레프 알렉세예비치 보로닌

Лев Алексеевич Воронин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의 수호자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1959스베르들롭스크 제356공장 작업반장 → 작업장장
  • 1959–1963카멘스크-우랄스키 및 스베르들롭스크 방산 기업 수석기사
  • 1963–1965중우랄 소브나르호스 무선전자공업 국장
  • 1965–1968국방공업부 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장
  • 1968–1979국방공업부 국장 → 계획생산총국장 → 차관
  • 1979–1980소련 국방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12 리시코프 입원 시 의장 대행
  • 1991유럽공동체 주재 소련 상임대표

칭기즈 토레쿨로비치 아이트마토프

Чингиз Торекулович Айтматов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새긴 소비에트 키르기스 작가이자 외교관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6수의사로 일하며 첫 작품 발표
  • 1956–1958모스크바 고리키 문학대학 수료
  • 1959–1967『프라우다』 키르기스 특파원
  • 1966–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제7~11기)
  • 1985–1991고르바초프 문화 고문,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86–1991키르기스 작가동맹 제1서기
  • 1990–1993소련·러시아 룩셈부르크 대사
  • 2000–2008키르기스스탄 EU·NATO·유네스코 대사

게르만 아르세니예비치 곤차로프

Герман Арсеньевич Гончар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8–2009 ○ 사망

사하로프 팀에서 출발해 소련 수소폭탄 역사의 수석 기록자가 된 물리학자

사하로프조차 비밀에 부친 '제3의 아이디어'의 수수께끼에서, 곤차로프는 그 실마리가 푹스의 1948년 보고서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하로프의 이론 부서에서 출발해 RDS-6s, RDS-37, 차르 봄바 개발에 참여하고 메가톤급 신형 전하 설계를 제안한 소련의 핵물리학자다. 냉전 후기 옐친 정부 아래 소련 핵무기 문서고의 수석 해제자로서 다권본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를 편찬했으며, 클라우스 푹스의 1948년 보고서와 '제3의 아이디어'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으로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의 기록 작업은 1955년 방사선 내파 설계가 독자적 성취인지 간첩 정보에 힘입은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의 실증적 토대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KB-11(아르자마스-16) 실험원자로부 선임연구보조원, 이후 엔지니어
  • 1953KB-11 이론부서 정식 연구원(사하로프 휘하)
  • 1955RDS-37 2단계 열핵전하 설계·계산 공동 수행
  • 1961차르 봄바(RDS-220) 물리 설계 참여
  • 1965메가톤급 열핵전하 신설계 방향 제안, 1966년 시험 성공
  • 1967–2004VNIIEF 이론부서장
  • 1990년대–2009『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다권본 책임 편찬자, 핵무기사 연구
  • 2002–2009VNIIEF 이론·수리물리연구소 수석연구원

테드 소렌슨

Ted Sorense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8–2010 ○ 뇌졸중

쿠바 위기에서 케네디의 펜을 잡은 연설문 작성자, '격리'라는 길을 낸 사람

'그 유명한 구절을 당신이 썼습니까?'라는 질문에 소렌슨의 평생 대답은 '묻지 마시라(Ask not)'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수석 연설문 작성자이자 측근 보좌관으로, 케네디는 그를 '나의 지적 혈액은행'이라 불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합동참모본부의 공습 주장에 맞서 해상 봉쇄를 지지했고,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을 초안하며 '봉쇄(blockade)' 대신 '격리(quarantine)'라는 용어를 선택해 전쟁 선포의 법적 함정을 피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했으며, 흐루쇼프와의 비밀 서한 초안도 작성했다. 케네디 암살 후 린든 존슨의 '계속 나아갑시다' 연설을 기초하고 1964년 사임, 이후 변호사와 저술가로 활동하며 2008년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1961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
  • 1961–1964대통령 특별고문 겸 수석 연설문 작성자
  • 1964–1966저술가 (『케네디』 출간, 국제적 베스트셀러)
  • 1966–2010국제 변호사, Paul, Weiss 로펌
  • 1977CIA 국장 지명자 (인준 철회)

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외교·국제활동 소련 국가기관 소련·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사망

냉전을 끝낸 소련 외무장관, 그루지야 대통령이 되다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외무장관직 사임과 탈당을 선언했다. 일부 기록은 이 연설을 12월 21일로 적어 날짜가 엇갈리며,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28년 그루지야 마마티의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1965년 그루지야 내무장관을 거쳐 1972년 당 제1서기가 되어 대규모 부패 단속과 아바샤 실험을 벌였고, 1985년 외교 경험 없이 소련 외무장관에 발탁되어 군축과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을 협상했다. 1990년 12월 20일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며 사임했고, 1992년 조국으로 돌아가 국가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으로 2003년 장미혁명 때까지 이끌었다. 2014년 7월 7일 트빌리시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8–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 1957–61그루지야 콤소몰 제1서기
  • 1992–2003국가평의회 의장, 의회 의장, 국가수반, 대통령

빅토르 아타나시에 스턴쿨레스쿠

Victor Atanasie Stănculescu
군사·지휘 루마니아 국가기관 루마니아 루마니아 1928–2016 ○ 살인죄 15년형, 2014년 가석방

혁명의 아침에 편을 바꿔 독재자를 무너뜨린 장군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시비우 포병장교학교 졸업
  • 1952–1981포병·군수 참모, 대령까지 승진
  • 1981–1986국방차관
  • 1986–1989국방제1차관
  • 1989.12.17–20티미쇼아라 봉기 진압 지휘차 파견
  • 1989.12.22국방장관 임명 직후 「명령 38호」로 군 병영 복귀, 혁명 합류
  • 1989.12.25차우셰스쿠 부부 즉결재판·처형 조직
  • 1990–1991국가경제장관 → 국방장관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폴란드 1928–2017 ○ 자연사

소련을 아프간 늪으로 끌어들인 카터의 국가안보보좌관

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7–1981국가안보보좌관
  • 1973–19763극위원회 디렉터
  • 1966–1968국무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 1960–1972컬럼비아대학교 교수, 공산권연구소 소장
  • 1953–1960하버드대학교 교수
  • 1981–2017존스홉킨스대학교 SAIS 교수, CSIS 고문

야코프 페트로비치 랴보프

Яков Петрович Рябов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43–1944제9공장 선반공
  • 1946–1960스베르들롭스크 터보모터 공장 기술자·설계국장·공장장·당위서기
  • 1960–1963CPSU 스베르들롭스크 오르조니키제 구당위 제1서기
  • 1963–1966CPSU 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2서기
  • 1971–1976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6–1979CPSU 중앙위원회 서기 (국방·군수산업 담당)
  • 1979–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3–1984소련 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 1984–198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화학공업 담당)
  • 1986–1990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리펑

李鹏

1989년 5월 계엄을 선포한 총리, 「베이징의 도살자」라 불린 저우언라이의 양자

수력발전 기술자에서 1987년 총리가 되어 1989년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3~4일 군사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로 지목된 인물이다.

쓰촨 출신으로 아버지가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저우언라이 부부의 보호 아래 자랐다. 모스크바 동력학원에서 수력발전을 배워 전력 관료로 성장했고 1987년 자오쯔양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989년 5월 18일 학생 대표들과의 텔레비전 대화가 결렬된 뒤 5월 20일 베이징 계엄을 선포했고 6월 4일 진압의 정부 측 책임자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삼협댐 건설을 밀어붙였고 1998~200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2019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87–1998국무원 총리
  • 1998–200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발렌틴 카르포비치 메시야츠

Валентин Карпович Месяц
농업·토지정책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8–2019 ↓ 퇴임 1985

정체 말기의 농업장관

1978년 소련은 사상 최대 2억 3,700만 톤의 곡물을 수확했다. 메시야츠는 회고했다: "우리는 헥타르당 1센트너의 비료를 썼고, 유럽은 10센트너였다."

쿠즈바스 광부의 아들로 1976~1985년 소련 농업장관을 지내며 침체기 식량난 속에서 농업을 책임졌다. 이후 고르바초프 체제 모스크바주당 제1서기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3–1958MTS 농업주임·소장 (모스크바주)
  • 1958–1961체호프 지구 집행위원장·볼로콜람스크 지구당 제1서기
  • 1965–1971러시아공화국 농업부 제1차관
  • 1971–1976카자흐스탄 공산당 제2서기
  • 1976–1985소련 농업장관
  • 1985–1990모스크바주당 제1서기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탸젤니코프

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Тяжельников

브레즈네프 시대 청년 간부 파이프라인의 전형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조교
  • 1950–1952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콤소몰 위원회 비서
  • 1952–1954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56–1961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선임교원, 당위원회 비서
  • 1961–1964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
  • 1964–1968첼랴빈스크 주 CPSU 위원회 이념담당 비서
  • 1968–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7–1982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 1982–1990주루마니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체르나빈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ав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8–2023 ○ 자연사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최초로 북극 빙하 아래를 항해한 원자력잠수함 장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충각 작전을 지시하며 주저하던 흑해함대 사령관에게

소련 해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을 지낸 원자력잠수함 장교. 1962년 11월급 공격원잠 K-21 함장으로서 소련 원자력잠수함 최초의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를 성공시켜 북극 작전교범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후 델타급 전략원잠 사단장, 북방함대 사령관, 해군 총참모장을 거쳐 1985년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랐다. 재임 중 소련 해군은 전성기를 맞아 상시 200척 이상의 함정을 세계 해양에 배치했으며, 1988년 흑해에서 미군 순양함에 대한 충각 작전 '나발'을 승인하고 직접 책임을 졌다. 소련 해체 후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해군의 유일한 사령관을 지냈고, 퇴역 후 잠수함장 연합을 창설해 2014년까지 이끌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M.V. 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졸업, 북방함대 잠수함 부대 배치
  • 1956–1959S-347 함장 (위스키급), 북대서양 30일 자율항해 성공
  • 1959–1962K-21 함장 (11월급 공격원잠), 소련 최초 북극 빙하횡단 자율항해 수행 및 빙하작전교범 작성
  • 1969–1972제19잠수함사단장 (델타급 전략원잠), 북방함대
  • 1973–1974제3잠수함전단 사령관, 북방함대
  • 1977–1981북방함대 사령관, 전략원잠의 남대서양·인도양 상시 배치 주관
  • 1981–1985소련 해군 총참모장 겸 제1부총사령관, 1983년 해군원수 진급
  • 1985–1992소련 해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1992년 2월–8월 독립국가연합(CIS) 해군 사령관
  • 1992–2014러시아 잠수함장 연합 창설 및 회장, 2014년부터 명예회장

아르놀드 뤼텔

Arnold Rüütel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주권 선언을 밀어붙여 에스토니아를 제국 밖으로 이끈 농학자

루키야노프가 '반헌법적 행위'로 10년형을 경고하자, 뤼텔은 버티며 말했다. '우리는 최고회의를 소집해 독립 선언을 표결에 부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권 선언'이 아닌 '독립 선언'이라고 말해 버렸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에스토니아 사레마 섬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로,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과 공산당 간부를 거쳐 1983년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투옥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 선언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소련 해체의 첫 균열을 냈고, 1990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소련 통치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독립 회복 이행기를 이끌었다. 1991년 독립 후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년까지 재임하며 NATO와 EU 가입을 성사시켰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1950사레마 집행위원회 농업부문 수석 농학자
  • 1955–1957타르투 농업기계화학교 교사
  • 1957–1963수의학·축산연구소 실험농장 주임 수의사 겸 농장장
  • 1963–1969타르투 기준국영농장장
  • 1969–1977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
  • 1977–1979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서기
  • 1979–1983에스토니아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83–1990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장
  • 2001–2006에스토니아 공화국 대통령

안드리얀 그리고리예비치 니콜라예프

Андриян Григорьевич Никола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추바시인) 1929–2004 ○ 심장마비

보스토크 3호로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한 소련 우주비행사

보스토크 3호가 궤도에 오르자 니콜라예프는 의자에서 몸을 풀고 기내에 떠올랐다: 가가린티토프도 해내지 못한, 인간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중력의 속박을 벗어난 순간이었다.

추바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련 3호 우주비행사. 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회 지구궤도를 선회, 4일간의 인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실현했다. 파벨 포포비치의 보스토크 4호와 첫 동시비행을 이루어 이후 여성 우주비행 임무의 이중발사 선례를 세웠고, 이 비행으로 3일 이상 체공이 가능함을 입증했다. 1970년 소유즈 9호로 18일간 우주에 머물며 장기체류의 생리적 한계('니콜라예프 효과')를 드러냈고, 발렌티나 테레슈코바와의 결혼(1963)은 흐루쇼프가 주례한 냉전기의 대표적 선전극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7–50산림기술자, 카렐리야
  • 1950–54징집, 전투기 비행훈련 (체르니고프·프룬제)
  • 1955–60모스크바 방공전투기 조종사
  • 1960제1기 우주비행사단 선발
  • 1962.8보스토크 3호: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 (64회 선회, 4일)
  • 1963–68소련 우주비행사단 지휘관
  • 1970.6소유즈 9호: 18일 체공 신기록
  • 1974–82가가린 훈련센터 제1부소장, 퇴역

안나 발렌티노비치

Anna Walentynowicz

해고당한 조선소 노동자에서 '독립 폴란드의 어머니'로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 1980-09NSZZ 연대 창립위원회 간부회 일원
  • 1981-12계엄령 후 조선소 파업 공동 조직, 이후 총 19개월 구금·연금
  • 1990조선소 복귀 후 1991년 은퇴, 계속해서 바웬사와 포스트연대 정치권을 비판

귄터 샤보프스키

Günter Schabowski
이념·선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동독 독일 1929–2015 ○ 국경 사망 유죄 · 사면

베를린 장벽을 실수로 무너뜨린 동독 정치국의 대변인

기자회견에서 '언제 발효됩니까?'라는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즉시, 지체 없이.'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47FDGB 기관지 『트리뷔네』 편집자로 언론 경력 시작
  • 1952SED 입당
  • 1967–1968모스크바 CPSU 당학교 수학
  • 1978–1985SED 중앙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 1981–1989SED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후보위원, 1984년 정위원
  • 1985–1989SED 동베를린 지구당 제1서기
  • 1989.11.09기자회견에서 여행규정 즉시 발효 발언으로 장벽 붕괴 촉발
  • 1997–2000국경 사망 사건으로 3년형, 1년 복역 후 사면

율리 야코블레비치 오를세비치

Юлий Яковлевич Ольсевич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929–2016 ○ 자연사

코시긴 개혁의 '두 규제자' 비양립성을 분석한 소련 경제학자

「한 기업에 동시에 두 개의 이질적 규제자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자동차에 두 명의 운전자와 두 개의 핸들이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회고로 본 계획체제』(2000)에서 코시긴 개혁의 실패를 요약하며.

소련 및 러시아의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우랄공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1965년부터 사망까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해외 경제이론 비판적 연구 분과를 이끌었고, 후기에는 경제체제 전환 이론과 러시아 경제사상사 연구에 집중했다. 2000년 폴 그레고리와 공저한 『회고로 본 계획체제』에서 1965년 코시긴 개혁의 핵심 모순을 지령적 계획과 준시장이라는 두 이질적 규제자의 한 기업 내 양립 불가능성으로 분석하여, 개혁 연구의 '두 규제자' 학파를 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1957우랄공대 정치경제학 강사
  • 1957–1962외국문학출판사 경제편집부 편집자·부장
  • 1962–1965IMEMO 선임연구원
  • 1965–1968소련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세계가격분과장
  • 1968–1992경제연구소 해외경제이론비판분과장
  • 1969–2016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교수
  • 1992–2016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주력연구원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문학·예술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9–202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자유의 양립을 시도한 보편적 순간이라고 주장한 체코 소설가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50당에서 제명
  • 1952–70FAMU에서 세계문학 강의
  • 1956당 복당
  • 1967제4차 작가동맹 대회 연설로 프라하의 봄 지적 서막
  • 1968.12「체코의 운명」 발표, 하벨과 논쟁
  • 1970재제명, 저서 금지
  • 1975프랑스로 망명
  • 198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2019체코 시민권 회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