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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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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조지 C. 캐틀릿 마셜

George C. Marshall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59 ○ 자연사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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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 1945.12–1947.01중국 특사, 국민당-공산당 연립정부 중재 실패
  • 1947–1949국무장관, 마셜 플랜 제안 및 NATO 창설 추진
  • 1950–1951국방장관,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 및 군부 재건
  • 1953노벨평화상 수상

헨리 뵈우커스

Henry Beeuwkes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계 1880–1959 ○ 자연사

기근 현장에서 의료 구호를 조직한 의사

뵈우커스는 기근 구호를 급식소의 수가 아니라 병원과 위생망의 회복으로 기록했다.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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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 육군 의무대 입대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에서 군의관 복무
  • 1921–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의료국장
  • 1925–1927록펠러재단 서아프리카 황열병 조사단장
  • 1926『러시아 기근의 미국 의료·위생 구호』 출간
  • 1942–1945밸리포지 종합병원 지휘관

아브람 표도로비치 이오페

Абрам Фёдорович Иоффе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제국(폴타바 주 롬니)의 유대인 가정 출신 1880–1960 ○ 자연사 (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물리학 전체를 키워낸 '파파 이오페'

1905년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승 뢴트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 밖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과학에서 만족을 찾는다고 말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고,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냈다. 194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지냈으며, 1950년 12월 반세계주의 공세 속에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2년 반도체 실험실을 세워 1954년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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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실험실장
  • 1918–1921국립방사선·방사선학연구소 물리기술부장
  • 1921–195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소장
  • 1926–1929, 1942–1945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32–1942LFTI 내 핵물리학 연구 주도·원자력 계획 추진
  • 195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반도체연구소 소장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64 ○ 자연사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합참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은 유엔군 사령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 1951년 4월 19일 의회 고별연설에서 한 말.

더글러스 맥아더는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점령을 사실상 통치한 미국의 5성 원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 개입 이후 만주 폭격과 확전을 주장하며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고, 1951년 4월 해임되었다. 그의 해임은 민간 통제와 군부의 관계를 둘러싼 냉전기 가장 첨예한 헌정적 논쟁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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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5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35–1941필리핀군 원수 겸 군사고문
  • 1941–1945미 극동군 사령관 / 남서태평양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45–1951연합군 최고사령관, 일본 점령통치
  • 1950–1951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쟁
  • 1952–1964레밍턴 랜드 이사회 의장

뱌체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카르핀스키

Вяче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Карпинский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0–1965 ○ 자연사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언론인, 68년 당원

1917년 1월, 레닌이 올가 라비치에게 격앙된 편지를 쓰자 카르핀스키는 "이건 욕설입니다"라고 직언했다. 레닌은 후일 이네사 아르만트에게 "카르핀스키가 내 편지를 욕설이라고 하더군. 사과 편지를 써야겠어"라고 털어놓았다.

1898년 입당한 최고참 볼셰비키로, 제네바 망명 시절 레닌 직속에서 당 기관지를 편집했다. 혁명 후 《베드노타》 편집장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농민·대중 선전의 제도적 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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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펜자에서 중등학생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선전 활동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7세)
  • 1899–1902하리코프대학 의학부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 체포·유형
  • 1904–1917제네바 망명, 레닌 지도 아래 《전진》·《프롤레타리》·《사회민주주의자》 편집
  • 1917–1918귀국, 《농촌의 진리》 편집,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교도부장
  • 1918–1922《베드노타》 편집장, 선전선 '붉은 별' 호에서 신문 발행
  • 1918–1927《프라우다》 편집위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1~7기 위원
  • 1936–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근무
  • 1937–1965학술·문필 활동 전념, 레닌·당사 연구, 경제학 박사, 사회주의노동영웅(1962)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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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세계 최대 면화상을 일군 자유무역론자, 유럽 붕괴를 경고한 메모로 마셜 플랜을 촉발한 국무차관

1947년 5월 27일 마셜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모에서 클레이턴은 이렇게 썼다: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입니다.'

클레이턴은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속기사로 출발해 앤더슨·클레이턴 사를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키운 사업가였다. 자유무역을 신봉한 민주당원으로서 1944년 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1946년 경제담당 차관에 임명되었고, 1947년 5월 전후 유럽의 참상을 목격한 후 조지 마셜에게 보낸 「유럽의 위기」 메모에서 '즉각적이고 대규모인 미국의 원조 없이는 경제·사회·정치적 붕괴가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메모는 마셜 플랜 발표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고, 찰스 볼런은 연설문 초안을 쓸 때 클레이턴의 문장을 대거 인용했다. 퇴임 후에도 자유무역과 대서양 동맹을 옹호하며 1961년 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을 공동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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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미시시피주 투펄로 인근 면화 농장에서 출생
  • 1904앤더슨·클레이턴 사 공동 창업,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면화 중개 시작
  • 1916본사를 휴스턴으로 이전, 이후 세계 최대 면화 무역회사로 성장
  • 1918전시산업위원회 면화분배위원으로 제1차 세계대전 정부 봉사
  • 1940–1944재건금융공사·수출입은행·잉여전쟁자산청에서 연이어 근무
  • 1944–1946국무부 경제담당 차관보, 포츠담 회담 경제 고문
  • 1946–1947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유럽의 위기」 메모로 마셜 플랜 촉발
  • 1961크리스천 허터와 애틀랜틱 카운슬 공동 설립

레지널드 드랙스

Reginald Plunkett-Ernle-Erle-Drax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0–1967 ○ 자연사

군사개혁을 주장했으나 외교 협상 권한 없이 파견된 제독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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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영국 해군 입대, HMS 브리태니아에서 훈련
  • 1909『현대 해군 전술』 출판, 참모교육 연구
  • 1914–1918대전함 HMS 라이언에서 복무, 주요 해전에 참가
  • 1919–1922왕립 해군참모대학 교장
  • 1923–1924독일 연합국 해군통제위원회 위원장
  • 1932–1934아메리카·서인도 제도 전대 총사령관
  • 1935–1938플리머스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39영국 군사사절단장으로 모스크바 협상 참가
  • 1939–1941노어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43–1945대서양 수송선단 준장
  • 1939『모스크바 사절단』 출판

세묜 이바노비치 아랄로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Арал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0–1969 ○ 자연사

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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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코톱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от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881–1925 ✕ 살해

제정 무법자에서 소비에트 내전 영웅으로 전환한 베사라비아의 붉은 로빈 후드

1917년 5월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카르멘' 공연 중 사형수에서 풀려난 코톱스키가 등장하자 관객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혁명 연설을 했고, 경매에 부쳐진 그의 수갑과 족쇄는 1만 루블에 낙찰되었다.

베사라비아 출신 혁명 지휘관. 제정 시기 빈민 편의 약탈자로 명성을 쌓고, 내전에서 붉은 기병대를 이끌며 몰다비아 자치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생전에 소비에트 민속의 전설이 되었으며 1925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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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베사라비아와 오데사에서 무장 강도단 지도자, 반복적 체포·탈옥; 1916년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9172월 혁명으로 사면; 루마니아 전선에서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좌익 사회혁명당 입당
  • 1918–1919티라스폴 분견대 기병대 지휘,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방어; 오비디오폴 군사위원, 제45소총사단 제2여단장
  • 1920적기훈장 수훈, 러시아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 지휘
  • 1921제17체르보노예카자크기병사단장; 마흐노·안토노프 봉기 진압 중 중상; 명예혁명무기·두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2–1924제2기병군단장; 몰다비아 ASSR 수립 기여; 세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4–1925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우크라이나·몰다비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루쉰

鲁迅
문학·예술 중국 중국 1881–1936 ○ 결핵

『아Q정전』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작가연맹으로 이어 간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1918년 「광인일기」로 백화문학을 열고,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돌아선 저장 사오싱 출신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 문예운동으로 이어 갔다.

저장 사오싱 출신으로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다 「국민의 정신을 고치겠다」며 문학으로 돌아섰다.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광인일기」는 최초의 백화 단편으로, 이어 「아Q정전」에서 낡은 사회의 정신적 노예상태를 그렸다. 1927년 이후 상하이에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번역하고 1930년 좌익작가연맹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나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1936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마오는 그를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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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6베이징대학 강사
  • 1930–1936중국좌익작가연맹 지도자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амен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1–1936 ○ 심장마비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 총사령관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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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동부전선 사령관
  • 1919–1924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 1924–1925붉은 군대 감찰관
  • 1925붉은 군대 참모총장
  • 1925–1926붉은 군대 총감찰관
  • 1926–1927붉은 군대 총국장
  • 1927–1934군사·해군 담당 부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 1934–1936붉은 군대 방공국장

이반 니키티치 스미르노프

Иван Никитич Смирнов

좌익 반대파의 시베리아 볼셰비키

1927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스미르노프는 무일푼으로 노동교환소에 실업 등록을 하러 갔다. 서류의 '마지막 직위'란에 '우편·전신 인민위원'이라고 적자, 창구의 하급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백발의 고매한 거한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1899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로, 일곱 차례 체포와 유배를 겪으며 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내전기 우랄·시베리아의 당 조직가이자 시브레프콤 의장으로 콜차크 백군 분쇄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에는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 제명 후에도 1931년부터 비밀 반대파 조직을 이끌며 베를린을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재개했고, 1933년 체포되어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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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21시베리아·우랄 내전기 당 조직가
  • 1923–1927우편·전신 인민위원, 좌익 반대파 지도자
  • 1927–1930당 제명과 유배
  • 1933–1936재체포,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1–1938 ✕ 처형

레닌 뒤의 총리, 우파 반대파로 몰리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정권이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세우지 않는다는 데 반발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했다. 사퇴 날짜는 11월 16일설과 17일설이 갈리고, 며칠 뒤 철회했다.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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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플라톤 미하일로비치 케르젠체프

Платон Михайлович Керженце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81–1940 ○ 심장마비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스탈린기 예술 검열의 설계자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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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 1938–1940《소백과사전》 편집장·《파리코뮌의 역사》 집필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Władysław Sikorski
정부·행정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계 1881–1943 ✕ 추락사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주권을 지키려 한 장군

1943년 카틴 학살 조사를 요구하자 소련은 시코르스키의 망명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전간기 민주주의와 군부 권위주의의 충돌 속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 망명정부의 수상 겸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방 연합국에 폴란드의 국가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폴란드 포로 석방과 군대 창설의 길을 열었지만, 카틴 학살 조사 요구 뒤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다.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망명정부의 외교적 영향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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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비밀 독립운동 조직 ‘능동투쟁연맹’ 공동 창립
  • 1914–1916최고국민위원회 군무부장, 폴란드 군단 장교학교 지휘관
  • 1920폴란드-소련 전쟁, 바르샤바 전투 제5군 사령관
  • 1922–1923폴란드 공화국 수상 겸 내무장관
  • 1924–1925군무장관, 폴란드군 현대화 추진
  • 1939–1943런던 망명정부 수상,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41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 체결, 소련과 관계 복원
  • 1943카틴 국제 조사 요구 뒤 지브롤터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파벨 이바노비치 레베데프-폴랸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Лебедев-Полянский
이념·선전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81–1948 ○ 자연사

소비에트 검열 기구의 설계자이자 첫 책임자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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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유리예프 대학에서 제적 후 혁명운동
  • 1908–1917제네바 망명, '브페료트' 그룹 서기
  • 191710월 혁명 참여, 성직자회의 및 학술위원회 청산
  • 1919–1922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평의회 의장
  • 1922–1930글라블리트(문학·출판 총국) 초대 책임자
  • 1934–1939『문학 백과사전』 주필
  • 1937–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푸시킨 관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어니스트 베빈

Ernest Bevin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영국 영국 1881–1951 ○ 자연사

노동조합에서 전후 외교로 나아간 현실주의자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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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브리스틀 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브리스틀 지부 서기
  • 1914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전국 조직가
  • 1922–1940운수·일반노동자노조 초대 전국서기장
  • 1940–1945전시 연립정부 노동·국민역무부 장관
  • 1945–1951애틀리 내각 외무장관
  • 1947조르주 비도와 유럽경제협력위원회 조직, 마셜 원조 대응 주도
  • 1949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기여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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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이라클리 게오르기예비치 체레텔리

ირაკლი წერეთელი
정치·당 지도 멘셰비키 그루지야 그루지야 1881–1959 ○ 자연사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의 설계자,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의 상대역

1917년 6월 4일,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체레텔리가 "권력을 우리 손에 달라고 말하는 정당은 러시아에 없다"고 선언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닌이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루지야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를 주창하고 임시정부 내무장관을 지냈다. 레닌의 유명한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 반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10월혁명 후 그루지야 독립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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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2모스크바대 법학부 입학, 학생운동 지도자로 체포·시베리아 유형
  • 1903–1906RSDLP 입당, 멘셰비키파 합류. 주간지 『크발리』 주필. 베를린 수학 후 1906년 귀국
  • 1907제2두마 의원(쿠타이시 현),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두마 해산 후 5년 강제노동형, 시베리아 유형
  • 1915–1917.2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 주도, 『시베리아 잡지』 편집. 이르쿠츠크 혁명위원회 참여
  • 1917.3–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혁명적 수호주의 노선 주도
  • 1917.5–8임시정부 체신장관(5~7월), 내무장관 겸임(7~8월)
  • 1918–1921그루지야 독립선언 서명, 제헌의회 의원, 파리 강화회의 대표
  • 1921–1959프랑스 망명, 제2인터내셔널 집행위원. 1940년 미국 이주, 1959년 뉴욕에서 사망

윌리엄 Z. 제불론 포스터

William Zebulon Foster
정치·당 지도 미국 공산당 미국 미국 1881–1961 ○ 자연사

1919년 대철강파업 지도자에서 미국 공산당의 최장기 지도자로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은 혁명적 정당뿐이다.” — 『노동자 생활의 페이지들』(1939)

1919년 대철강파업을 지휘한 노동운동 전략가에서 CPUSA 최장기 지도자로 전환했다. 1944년 브라우더의 당 해산에 맞서 당을 재건했고, 『미국 공산당사』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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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국 사회당 입당
  • 1909IWW 가입, 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참가
  • 1912북미신디칼리스트연맹(SLNA) 창립
  • 1917–1918시카고 도축산업 노동자 조직화 — 8시간 노동제 중재
  • 1919대철강파업 지휘 — 25만 노동자 동원
  • 1920노동조합교육연맹(TUEL) 창립
  • 1921코민테른 제3차 대회 참석 후 공산당 입당
  • 1924첫 대선 출마 — 공산당 후보
  • 1929CPUSA 의장 취임, TUUL 창설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44–1945브라우더 당 해산 반대 — CPUSA 재건, 서기장
  • 1948스미스법 기소 — 건강 악화로 재판 연기
  • 1957CPUSA 명예의장 은퇴
  • 1961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1956년 10월 미코얀 면담에서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에 답하며. 같은 대화를 전하는 문헌마다 문구가 다르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1929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아 주필과 자신이 세운 철학연구소 소장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이후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가며 1940~1941년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를 지냈다. 1940년대 말 '세계주의' 공세 속에서 부하 직원들이 해임되었고,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1956년 이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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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22–1930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2~1930)
  • 1922–1930『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1925년부터 사실상 주필, 1930년 말 해임
  • 1924–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1931 초)
  • 1929공산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사회과학부 아카데미서기(1937), 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40~1941),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강의
  • 1943–1949역사연구소 근대사 분과장. '세계주의'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선임연구원으로 복귀, 1949년 반세계주의 캠페인 지지를 거부
  • 1956미코얀 면담, 1956년 10월 18일 미코얀의 당 간부회 결정 초안 제출, 저작 복간 개시

오토 빌레 쿠시넨

Otto Wille Kuusinen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핀란드 1881–1964 ○ 자연사

핀란드 노동운동에서 코민테른을 거쳐 흐루쇼프의 이론가로

1920년 2월 그의 사망설이 퍼지자 핀란드와 러시아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추도 연설을 했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집회 장소를 '쿠시넨 클럽'이라 불렀지만, 그는 헬싱키에 은신한 채 살아 있었다.

핀란드 라우카아의 재봉사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들어가 1911~1913년 당 의장을 지냈고, 1918년 혁명정부의 교육담당 인민위원이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로 국제공산운동을 지도했다. 겨울전쟁기 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을 맡았고, 대숙청기에는 아내 아이나와 아들 에사가 탄압받는 동안에도 자유와 지위를 지켜 1937~1939년 숙청을 살아남은 극소수 코민테른 최고 간부였다.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며 CPSU 중앙위 서기 겸 상임간부회 위원이 되어 '전인민국가' 테제로 탈스탈린화를 이론화했고, 1964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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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핀란드 사회민주당 입당
  • 1905알렉산드로프 대학 철학사
  • 1908–1917핀란드 의회 의원 (SDP)
  • 1911–1913핀란드 사회민주당 의장
  • 1918핀란드 혁명정부 교육담당 인민위원
  • 1918핀란드 공산당 창립 참여
  • 1921–1939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39–1940핀란드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 겸 외무장관
  • 1940–1956카렐로-핀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40–1958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부의장
  • 1952–1953, 1957–1964CPSU 중앙위 상임간부회 위원
  • 1957–1964CPSU 중앙위 서기
  • 1959《마르크스-레닌주의 기초》 편집 책임

야마다 오토조

山田乙三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인 1881–1965 ○ 자연사

제국 육군의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 뒤 관동군의 항복을 명령했다.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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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12육군대학 졸업
  • 1934–1937참모본부 총무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 1937–1939제12사단장, 제3군 사령관,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 1939–1944교육총감, 군사참의관
  • 1944–1945관동군 총사령관,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 1949–1950하바롭스크 전범재판 피고인, 25년형
  • 1956소련 억류에서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