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1953년 7월 3일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4월 몰다비아 전권대표로서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를 지냈다. 1953년 7월 3일 동독 출장 중 체포되어 그해 12월 23일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됐다. 2002년 러시아 연방 대법원 군사재판부는 그를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로 지목해 복권 대상이 아닌 자로 결정했고, 일부 2차 자료가 주장하는 2004년 복권은 확인되지 않는다.
「자베냐긴은 강인하고 결단력 있으며 지나치리만치 주도적인 책임자였다. 과학자들의 의견을 잘 경청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한 지성의 소유자였고, 동시에 완전히 스탈린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회고)
1930년 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를 용광로 전문으로 졸업한 광산·야금 기술자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을 거쳐 1938년부터 노릴스크 광산·야금 콤비나트 건설을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력으로 지휘했고, 1941년 3월부터 1946년 8월까지 NKVD 부인민위원으로 굴라그의 산업건설 기구들을 총괄했다. 원자력 계획에서는 1944년 12월 우라늄 탐사 책임을 맡았고, 1945년 8월부터 제1총국 제1부책임자 겸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특수수용자 노동력을 감독했으며 1949년 첫 핵실험을 앞두고 RDS-1 조립을 책임졌다. 1955년 중형기계공업 장관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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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3RKP(b) 입당, 붉은 군대 사단 정치위원, 우크라이나 당 활동
1923–1930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졸업, 용광로 기술자
1930–1933기프로메즈 소장, 카멘스코예 제철공장 지배인
1933–1937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 콤비나트 소장
1938–1941노릴스크 건설 총책임자, 노릴라그 수용소 노동으로 최초 니켈 생산
1941–1946NKVD 부인민위원, 산업건설·광산·수로 굴라그 총국 지휘
1945–1953원자폭탄 계획 제1총국 제1부책임자, 우라늄·폐쇄도시·RDS-1 조립 책임
20차 당대회 직후, 파데예프는 오랜 친구 유리 리베딘스키에게 털어놓았다. "양심이 나를 괴롭힌다. 피 묻은 손으로 살기란 힘들구나, 유라."
내전 소설 《괴멸》로 1920년대 소비에트 문학의 정점을 찍은 소설가이자, RAPP 조직을 거쳐 작가동맹을 20년 가까이 이끈 문학 행정가였다. 대조국전쟁 직후 집필한 《젊은 근위대》는 전후 세대의 교과서가 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를 집행하면서도 몰락한 작가들을 개인적으로 도왔고, 스탈린 사후 이중적 역할이 낳은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195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46년, 흐루니체프와 야코블레프가 영국제 제트엔진 구매를 건의하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자기 비밀을 우리에게 팔겠는가?' 노동당 정부는 기꺼이 롤스로이스 닌 엔진과 청사진을 넘겼고, 이를 복제한 RD-45가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민병대·공장 관리직을 거쳐 소련 항공공업 장관(1946~1953)까지 오른 산업 행정가. 전시에는 탄약 제1부인민위원으로서 포탄·항공폭탄 증산을 지휘했고, 종전 후 항공공업 수장으로서 쇠퇴한 소련 제트 기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1946년 야코블레프와 함께 스탈린을 설득해 영국 롤스로이스 닌 엔진을 도입, 이를 역설계한 클리모프 RD-45가 MiG-15에 탑재되며 소련은 단숨에 제트 전투기 시대에 진입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 흐루니체프 우주센터에 남아 있다.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1964년 가을, 이그나토프가 자신의 다차에서 고주파 전화로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논의하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창가에 서서 모든 대화를 들었다. 경호원이 흐루쇼프의 아들 세르게이에게 경고했지만 흐루쇼프는 웃어넘겼다. «그 애송이들이 나한테 맞서? 말도 안 돼!»
목수 아들로 태어나 체카-OGPU에서 11년 복무하고 대숙청 시기 쿠이비셰프 당 책임자로 급부상했다. 1957년 6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조직해 반당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했고, 그 대가로 중앙위 서기와 당 간부국(프레지디움) 정위원이 되었다. 이후 흐루쇼프에게 밀려나자 1964년 음모의 핵심 조직자로 돌아서 흐루쇼프 축출을 주도했다. 러시아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으로서 해빙기 최고 권력투쟁의 양면에 모두 깊이 관여한 역설적 인물이다.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로, 전쟁과 망명 속에서 농민의 대표성과 폴란드 국가의 주권을 함께 지키려 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며 카틴 학살과 동부 국경, 전후 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소련과 연합국에 맞섰다. 바르샤바 봉기 때 그는 국내 지하운동의 행동과 망명정부의 외교를 연결하려 했지만, 군사적 현실과 스탈린 및 서방의 협상력 앞에서 선택지는 좁아졌다. 전후 귀국해 폴란드 농민당을 이끌었으나 1947년 부정선거와 탄압 뒤 다시 망명했다.
〈10월의 레닌〉 시나리오 작업 중 머물던 모스필름 부감독의 아파트가 NKVD에 급습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동료가 체포되어 총살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시간에 영화를 완성해 스탈린에게 개인 시사회를 올렸다.
미하일 롬은 스탈린의 직접 주문으로 〈10월의 레닌〉(1937)과 〈1918년의 레닌〉(1939)을 연출하여 수십 년간 지속될 레닌의 영화적 정전을 창조한 감독이다. 이르쿠츠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화로 전향, 모스필름에서 5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소비에트 사운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4천만 명 이상이 관람한 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1965)으로 나치즘의 작동 원리를 해부하며 해빙기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대변했고, VGIK 교수로서 타르콥스키·슉신·미할코프 등 차세대 감독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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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VKHUTEIN 조각과 졸업, 조각가·번역가로 활동
1934감독 데뷔작 〈팡파르 부인〉 발표
1937–1939〈10월의 레닌〉·〈1918년의 레닌〉 연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1)
1936년 겨울, 부상과 병고 속에 매령에서 포위된 천이는 죽음을 각오한 시 세 수를 옷 속에 숨겨 두었다. 「이 몸은 황천으로 가 옛 부하를 모으리니, 십만 깃발로 염라대왕을 베리라.」
쓰촨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뒤 입당했고 난창 봉기 잔여 부대를 주더와 함께 징강산으로 이끌었다. 대장정에 참여하지 않고 남방에서 3년 유격전을 버텼으며 1941년 완난 사변 뒤 신4군 대리군장이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화둥 야전군(제3야전군)을 지휘해 회하이 전역에 참전하고 상하이를 점령해 초대 시장이 되었다. 1955년 원수, 1958년 외교부장이 되어 반둥 노선의 아시아·아프리카 외교를 이끌었다. 문화대혁명에서 「2월 역류」로 비판받았고 1972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마오가 장례에 참석했다.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42년 11월 로콥소프스키가 전했다: "당신의 성 '지도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꾸길 바란다." 유대인 비하 표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철자 하나를 바꾸자 스탈린은 "아주 좋다"고 결재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1919년 붉은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세력과 싸웠다. 1942년 가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66군 사령관으로 북쪽 방어를 지휘하며 독일군 측면 공격을 좌절시켰고, 이 공로로 부대는 제5근위군으로 개칭되었다. 쿠르스크의 프로호롭카 전차전, 우크라이나 해방, 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제5근위군을 지휘하며 대조국전쟁의 결정적 전역을 관통했고, 1945년 4월 엘베 강에서 미 제1군과 조우했다. 전후 지상군 제1부사령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중앙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하고 1955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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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2붉은군대 입대, 제46소총사단·제1기병군에서 내전 참전 — 브랑겔·마흐노·바스마치 토벌, 중상
스테판 비신스키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사회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와 민족 정체성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국가와의 공개 대립만이 아니라 1950년 협정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신자 공동체와 교회 제도의 활동 공간을 보존하려 했다. 1953년 체포되어 1956년까지 억류되었지만, 석방 뒤에는 교회의 장기적 조직력과 도덕적 권위를 재건했고, 기에레크 시기에는 국가와 공존하면서도 독립된 사회 세력으로 남았다. 1980년 연대노조가 출범하자 정부와 파업 노동자 모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1937년, 야로슬라블 주당 제2서기 대행이던 오르가노프는 NKVD 특별트로이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 법정도, 변호도, 항소도 없는 세 사람의 서명이 곧 사형선고였다.
니콜라이 오르가노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러시아 공화국의 국가원수로 활동한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5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후 프리모르스키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당 제1서기를 거쳐 당내에서 꾸준히 승진했다. 대숙청 시기인 1937년에는 NKVD 특별트로이카 위원으로 임명되어 약식재판과 즉결처형에 가담했으며, 이는 훗날 국가원수 자리에 오른 인물의 전력으로서 냉혹한 모순을 남겼다. 흐루쇼프 시기 말에는 불가리아 주재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산하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1943년 2월 스탈린 앞에서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그에게 첫 개편 전차군을 맡기며 "당신이 직접 증명해 보시오"라고 말했다.
농촌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소련 최초의 기갑군 원수이자 기갑군 총원수로 올라선 전차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구원을 막은 코텔니코보 전투와 역사상 최대 전차전인 프로호롭카에서 제5근위전차군을 지휘했다. 프로호롭카의 막대한 손실은 평생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반격은 쿠르크 남부 방면 독일군 진격을 결정적으로 멈춰 세웠다. 1943년 초 스탈린에게 전차군에서 보병 사단을 빼고 순수 기갑 편제로 전환하자고 직접 설득해 전선의 주 타격 수단으로 재편시켰고, 자신이 첫 편제의 사령관이 되었다. 코르순-셰우첸콥스키 포위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민스크 해방을 이끌었고, 전후에는 기갑군사학교장과 국방차관보로 소련 전차 교리와 장교 교육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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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내전 참전
1921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부상, 적기훈장 수훈
1924–28제11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1936–37극동 특별붉은기군 사령부 제1부장, 제63연대장
1937–39스탈린 기갑·차량화군사학교 전술교관, 당에서 잠시 제명 후 복권
1940소련-핀란드 전쟁 전차대대장, 제35경전차여단 참모장
1941.5–9제3기계화군단 참모장, 개전 직후 포위망 탈출
1941.9–1942.4제8전차여단(후 제3근위전차여단)장, 모스크바 공세
1942.4–12제7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반격
1942.12–1943.2제3근위전차군단장, 코텔니코보에서 만슈타인 구원 차단
1943.2–1944.8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 프로호롭카, 드네프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바그라티온, 민스크·빌뉴스 해방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1975년 11월, 왕정의 마지막 총리가 이복동생 수파누봉과 함께 국왕 사왕 밧타나를 찾아가 퇴위를 권했다.
라오스 왕실 출신의 정치가로, 중립파를 이끌며 우파와 파테트라오 사이에서 여러 차례 연립정부를 이끈 총리였다. 왕정의 마지막 총리로서 1974년부터 제3차 연립정부 수반을 맡았다. 1975년 11월 수파누봉과 함께 루앙프라방으로 날아가 국왕 사왕 밧타나의 퇴위를 설득했고, 12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직후 사임했다. 공화국 수립 뒤 새 정부의 고문으로 남아 1984년 비엔티안에서 사망했다.
베르만은 테레사 토란스카에게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당에 복무하는 것은 단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내적 필요였다”고 말했다.
야쿠프 베르만은 전후 폴란드에서 이념·문화 정책과 국가보안기구를 감독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힐라리 민츠와 함께 1948년 이후 정권의 핵심 삼두체제를 이루었고,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된 체제를 운영했다. 1956년 비에루트 사망 뒤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이듬해 당에서 제명되어 스탈린주의 청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 대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셰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참모부에 거의 머물지 않고 밤낮으로 최전선에서 보냈다. — 시테멘코 육군대장이 '전진 장군!'이라 부르며 회고한 렐류셴코의 지휘 방식
2차례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육군대장으로, 1941년 10월 므첸스크에서 구데리안의 기갑 집단을 저지하며 모스크바 남쪽 접근로를 봉쇄한 것이 그의 군사적 유산의 정점이다. 모스크바 반격에서 제30군을 지휘하여 클린을 탈환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제3근위군으로 포위망 외곽을 형성했으며, 이후 제4전차군(후에 제4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서 리비우-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프라하 작전을 연속으로 수행했다. 전후에는 자바이칼 및 우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DOSAAF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기갑부대 운용에 관한 군사과학 후보논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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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1붉은 파르티잔으로 참전, 이후 제1기병군 소속 제21기병연대에서 복무, 남북전쟁 전역 참전
1925–1933기병연대 정치지도원·군정위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1933)
1933–1939전차중대장, 기계화여단 작전과장, 훈련전차대대장을 거쳐 제39독립경전차여단장
1939–1940제39독립전차여단장으로 겨울전쟁에 참전, 만네르헤임선 돌파 공훈으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1차 수훈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말렌코프였다. 스탈린은 10월 14일 짧은 폐회 연설을 했을 뿐이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인사 서류를 쥐고 1939년부터 중앙위 서기로, 1948년부터 후계 서열 1위로 올라섰다. 대숙청기의 지방 숙청과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1952년 유대인 작가 13인의 처형에 책임이 있다. 스탈린 사후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로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는 노선을 폈다. 1957년 「반당그룹」 주모자로 실각해 카자흐스탄 발전소장으로 좌천되었고 1961년 제명되었다. 1988년 1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