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피폭을 감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벨리호프는 과학아카데미에서 핵실험 검증 국제회의를 주재하며 참사를 군축의 계기로 바꾸려 했다.
핵융합 플라스마 물리학과 MHD 발전을 개척한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1959년 자기회전불안정성을 발견해 현대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1962년 전열불안정성도 규명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1973년부터 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1978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에 올라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잇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에서 고르바초프의 과학보좌역으로 방사능 차단 작업에 참여했고, 냉전 말기 핵군축 과학외교를 주도했다. 소련 해체 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존속시키고 ITER 국제핵융합실험로 창립의장으로서 미·소·유럽·일본 공동 핵융합 연구의 틀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벨라루스 소비자협동조합의 현장 회계원으로 출발해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소련의 마지막 무역장관(1986~91)까지 오른 경제 관료였다. 계획경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연방의 소비재 유통을 책임진 그는, 배급과 부족이 일상이 된 소비 위기의 최전선에 선 인물이다.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쿠데타 준비를 알리는 쪽지를 건네 파블로프·크류치코프·야조프·루키야노프의 이름을 적었고, 이 경고는 워싱턴을 거쳐 고르바초프에게 전달되었으나 매틀록은 회고록에서 허위 경보였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아조프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1936년 10월 31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로,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3년 경제학 후보, 1970년 박사, 1971년 교수가 되었다. 모스크바국립대에서 관리학 연구실장과 주임교수, 학장을 지냈으며(학장 시작은 1977년설과 1978년설이 있다), 1988~1990년 『경제문제』 편집장으로 '명령-행정 체제' 개념을 확산시켰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옐친 등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을 맡았고, 1991년 6월 12일 65.3% 득표로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동안 절대 접근할 수 없었던 사료가 마침내 열리자, 그는 역사가로서 '완전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고 회고하며, 다만 그것이 오십 대 중반에야 왔음을 아쉬워했다.
소련 역사학자로 유고슬라비아 현대사와 냉전기 동유럽 국제관계를 전공했다. 1966년부터 인슬라브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1980년대 말 아카이브 개방 이후 스탈린과 유고·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회담 기록을 발굴해 스탈린-티토 결별의 기원에 대한 탈냉전기 재평가의 토대를 놓았다. 노먼 네이마크와 공동 편집한 『동유럽 공산정권의 수립』(1997)을 비롯한 수백 편의 저작과 코민포름 회의록 출판으로 국제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60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졸업 (남·서슬라브사 전공)
1962–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 연구소 아스피란투라
1966–2022슬라브학 연구소 연구원, 선임연구원, 국제관계사 부문장(1990–1993), 수석연구원
체르노빌 현장에서 60일을 보내고, 은폐된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자
“나는 빈에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으로서 1986년 4월 26일 저녁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위원회에서 과학적 수습을 이끌며 붕소·모래 투하를 제안했고, 빈 IAEA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보고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원자로 설계 결함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사고 2주기 다음날인 1988년 4월 27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으며, 유서처럼 남긴 오디오 테이프에는 소련 원자력 체계의 은폐와 부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 담겼다.
상세 이력 보기
1961–1964엔지니어 → 교대조장, 시베리아 화학콤비나트 (톰스크-7)
1964–1972연구원, 쿠르차토프 연구소; 1967년 화학 후보박사, 1972년 화학 박사
1972–1983과학 담당 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3–1988제1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방사화학·화학기술 학과장, 모스크바 국립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중국의 사하로프」, 1986년 학생 시위와 1989년 미국 대사관 피신으로 알려진 천체물리학자
“사상의 억압이 과학과 사회를 함께 해친다”라고 주장한 천체물리학자이자 중국의 반체제 지식인.
베이징 출신 천체물리학자로 1957년 우파로 몰렸다가 복권되어 중국과학기술대학 부총장이 되었다. 1986년 강연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권위와 당의 지도를 공개 비판해 그해 말 학생 시위의 정신적 지주로 지목되었고, 1987년 당적 박탈과 함께 후야오방 실각의 빌미가 되었다. 1989년 1월 덩샤오핑에게 웨이징성 석방을 청원하는 공개서한을 보냈고, 6월 4일 진압 뒤 아내 리수셴과 미국 대사관에 피신해 13개월을 보낸 뒤 출국이 허용되었다. 애리조나대학 교수로 지내다 2012년 사망했다.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관료로,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에서 소련 해체기 고르바초프 대통령 비서실장(대통령장)으로 옮겨가며 당권에서 대통령제로 넘어가는 행정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5년 키예프 주당위 제1서기, 1986년 CPSU 중앙위 위원이 되었다. 1990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을 거쳐 1991년 8월 대통령장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측근 비서실장 역할을 했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상세 이력 보기
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상세 이력 보기
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
1981년 12월 2일 해임되어 체포됐으나, 12월 5일까지 총리·당 서기장직을 유지했다. 같은 날 헹 삼린이 당 서기장이, 찬 시가 총리 대행이 됐다.
크메르루주와 결별하고 베트남과 협력한 캄보디아 정치가다. 1978년 캄푸치아 구국 민족 통일전선 창립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1979년 정권 교체 뒤 인민혁명당 서기장으로서 당·행정 체제 건설을 이끌었다. 1981년 6월 총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12월 베트남의 압력으로 해임·체포되어 1992년까지 구금됐다.
「나도, 슈시케비치도, 크랍추크도, 포킨도 그런 문서가 준비되어 서명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만 벨로베시 협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왔다고 주장한 케비치
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민스크 공장들에서 경력을 쌓아 벨라루스 공산당과 각료회의 의장(1990) 자리까지 올랐다. 1991년 12월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 해체의 공동 서명자가 되었고, 훗날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가지고 왔으며 우리는 그 문서가 준비될 줄 몰랐다'고 증언하여 회동의 즉흥성과 준비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94년 대선에서 루카셴코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이후 루카셴코의 친러·개헌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58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1958–1973민스크 자동라인 공장 기술자, 작업반장, 부수석기사
1973–1980민스크 키로프 공작기계 공장 수석기사, 공장장, 생산연합 총책임자
1980–1985벨라루스 공산당 민스크 시당 제2서기, 중앙위 부장, 민스크 주당 제2서기
보이텍 마스트니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로, 냉전과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했다. 계급 배경 때문에 정규 중등교육 대신 공장 노동과 기록관 실무를 거친 경험은 그의 사료 중심 연구 태도와 맞물렸다. 그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처음부터 단일한 군사동맹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협상 수단과 소련의 규율 장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해석했으며, 공개 기록을 통해 그 실제 작동을 추적했다. 평행사 프로젝트를 이끌며 동구권 군 관계자들의 증언과 문서를 국제 연구 공간에 연결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36프라하에서 출생
1950년대공장 기계공으로 일하며 노동자학교에서 수학
1950년대 후반–1962국립박물관 보조 기록관, 카를대학교에서 중세사와 기록학 전공
1962미국으로 이주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
1970년대–현재컬럼비아대학교, 일리노이대학교, 보스턴대학교, 존스홉킨스 국제관계대학원 등에서 역사와 국제관계 강의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1989년 라진스키는 황제 가족 처형자인 야코프 유롭스키의 수기와 참여자들의 증언을 소련에서 처음으로 공개해, 사형 집행자들 스스로가 그 밤을 초 단위로 이야기하게 했다.
에드바르트 라진스키는 러시아의 역사와 비극적 인물을 대중에게 전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방송인이다. 모스크바 역사기록보관소에서 훈련받은 그는 연극으로 경력을 시작한 뒤 니콜라이 2세, 라스푸틴, 스탈린 등의 전기를 썼다. 1997년 스탈린 전기에서 새로 공개된 기록과 증언을 바탕으로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이 주장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쟁의 한 해석으로 남아 있다. 그의 서사적이고 심리적인 역사 서술은 널리 읽혔지만, 사료의 출처와 해석을 둘러싸고 전문 역사가들의 비판도 받았다.
1988년 9월 11일 「에스티마 라울」 무대에서 30만 명을 향해 외쳤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말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예술가이자 캐리커처 작가로, 1988년 6월 탈린 노래 축제 광장에서 벌어진 자발적 밤노래 시위 직후 『시르프 야 바사르』에 「노래 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 역사적 명칭을 만들어 냈다. 그해 9월 「에스티마 라울」 집회에서는 30만 청중 앞에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Ükskord me võidame niikuinii!)"라고 선언해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호를 남겼다.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와 라흐바린네(인민전선)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1991년 8월 22일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에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고 썼다. 발사 순서는 사료가 엇갈리며, 검찰은 그가 먼저 쐈다고, 야블린스키의 목격 진술은 아내가 마지막에 쐈다고 본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가정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콤소몰과 당 사업을 거쳐 1980~1984년 라트비아 KGB 의장, 1984~1989년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12월 소련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법질서 노선을 폈고,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해 내무기관을 그 결정 실행에 동원했다. 쿠데타가 무너진 8월 22일 모스크바 자택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