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서론·노동조합·의회제)
인물안톤 판네쿠크, 블라디미르 레닌, 실비아 팽크허스트, 카를 라데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라브르 코르닐로프, 파울 레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카를 레기엔, 아서 헨더슨, 필리프 샤이데만, 구스타프 노스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아르투어 크리스피엔,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에밀 반데르벨데, 램지 맥도널드, 필리포 투라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용어좌익 공산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코민테른, 제2인터내셔널, 독일 공산당 (KPD),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USPD) 사건코민테른의 창설
머리말
레닌 동지, 이 편지가 러시아군이 바르샤바로 승리의 진군을 하던 동안에 쓰였다는 점에 동지와 독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주기 바랍니다.
또 되풀이가 많은 데 대해 동지와 독자들께 양해를 구하고 싶습니다. 「좌익」의 전술이 대부분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아직 알려져 있지 않으니, 되풀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H. G.
1. 서론
친애하는 레닌 동지!
나는 공산주의 운동 안의 급진주의에 관한 동지의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동지의 모든 글이 그렇듯 나는 이 책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틀림없이 다른 많은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 점을 고맙게 여깁니다. 의심할 바 없이 내 안에도 깃들어 있는 이 소아병의 흔적과 싹을 이 책은 적잖이 몰아냈고, 앞으로도 몰아낼 것입니다. 혁명이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일으킨 혼란에 관해 동지가 하는 말도 전적으로 옳습니다. 나도 그것을 압니다. 혁명은 그렇게 갑자기, 그리고 우리가 기대한 것과 그렇게 다르게 왔습니다. 그리고 동지의 글은 내가 전보다 더욱, 혁명 속에서도 전술의 모든 문제에 관한 판단을 오직 현실, 곧 정치적·경제적으로 드러나는 실제 계급 관계에만 기대게 하는 새로운 자극이 될 것입니다.
동지의 소책자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다 옳다. 그러나 그 뒤 자리에 앉아 이제 이 「좌익」을 더는 지지하지 말아야 할지, KAPD와 영국의 반대파 당에 글을 더는 쓰지 말아야 할지 오랫동안 생각해 본 끝에,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지, 그것은 소책자에서 동지의 출발점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 동지는 서유럽 혁명이 러시아 혁명과 같다는 점, 서유럽 혁명의 조건, 곧 계급 관계를 옳게 판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동지는 좌익, 곧 반대파가 생겨나는 근거를 잘못 판단합니다. 그래서 동지의 출발점을 받아들이면 소책자는 옳아 보이지만, 그 출발점을 버리면(그래야 마땅합니다) 소책자 전체가 틀린 것이 됩니다. 동지의 옳지 않은 판단, 부분적으로 옳지 않은 판단, 그리고 일부는 분명히 완전히 틀린 판단이 모두 모여 좌익 운동, 특히 독일과 영국의 좌익 운동에 대한 동지의 단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도자들이 아는 대로 이 운동과 모든 점에서 의견이 같지는 않지만 이 운동을 변호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으므로, 동지의 글에 좌익의 변론으로 답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좌익이 생겨나는 근거를 보이고 지금 여기 서유럽에서, 이 단계에서 좌익이 옳고 낫다는 것을 증명할 뿐 아니라, 이와 똑같이 중요할 터인데, 특히 러시아에서 서유럽 혁명에 관해 지배적인 잘못된 생각과 싸울 기회도 얻을 것입니다. 서유럽의 전술도 러시아의 전술도 서유럽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으므로 둘 다 중요합니다.
이 일을 모스크바 대회에서 했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갈 수 없었습니다.
먼저 동지들과 독자들의 판단을 그르칠 수 있는 동지의 지적 두 가지를 반박해야겠습니다. 동지는 독일에서 「지도자의 독재냐 대중의 독재냐」, 「위로부터냐 아래로부터냐」 따위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헛소리라며 비웃고 조롱합니다. 이런 것이 물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는 우리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비웃음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불행히도 서유럽에서는 이것이 아직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서유럽의 많은 나라에는 아직 제2인터내셔널에 있던 것과 같은 지도자들이 있고, 우리는 대중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대중을 배신하지 않는 올바른 지도자를 아직 찾고 있습니다. 그런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모든 일을 아래로부터, 대중 자신의 독재로 하려 합니다. 산 안내인이 나를 낭떠러지로 이끈다면 나는 차라리 안내인 없이 가겠습니다. 올바른 지도자를 얻는 대로 우리는 이 찾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그때에는 대중과 지도자가 참으로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일과 영국의 좌익과 우리가 이 말로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고, 다른 것이 아닙니다.[1]
지도자가 계급 및 대중과 하나의 통일된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동지의 둘째 지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동지와 전적으로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참으로 대중과 하나인 그런 지도자를 찾아내고 길러 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런 지도자를 찾아내고 길러 내는 일을 대중과 정당과 노동조합은 오직 가장 혹독한 투쟁, 안을 향한 투쟁까지 거쳐야만 할 수 있습니다. 강철 같은 규율과 가장 엄격한 중앙집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지도자를 얻은 뒤에 원하지, 그 전에는 아닙니다. 공산주의 실현에 가장 가까운 나라인 독일과 영국에서 지금 이미 온 힘을 기울여 벌어지고 있는 이 가장 혹독한 투쟁에 동지의 비웃음은 해만 끼칠 수 있습니다. 동지는 이 조롱으로 제3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 분자들을 거들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단과 영국사회당(BSP)의 일부 분자들,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 공산당의 분자들이 대중과 지도자에 관한 문제 전체가 터무니없는 물음, 「헛소리이고 유치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노동자들을 현혹하는 수단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로 그들은 자신들, 곧 지도자들이 비판받는 것을 피하고, 또 피하려 합니다. 강철 같은 규율과 중앙집권이라는 이 문구로 그들은 반대파를 짓뭉갭니다. 동지는 이 기회주의 분자들을 거들고 있습니다.
동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서유럽의 우리는 아직 예비 단계에 있습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지배하는 사람보다 싸우는 사람의 편을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는 지나가는 말일 뿐입니다. 편지를 써 나가면서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동지의 소책자에 동의할 수 없는 데는 더 깊은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지의 소책자와 논문과 책을 읽을 때, 동지가 쓴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감탄과 동의 한가운데서도 언제나 한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 읽다가 갑자기 몹시 조심스러워졌고, 더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으며, 그것을 찾지 못하면 나중에 곰곰이 생각한 뒤에도 아주 큰 유보를 달고서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동지가 노동자와 빈농에 관해 말하는 대목이었습니다. 동지는 이 말을 아주, 아주 자주 합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이 두 범주를 온 세계에서 혁명적인 요소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읽은 한에서는, 이 문제에서 러시아(그리고 동유럽의 몇몇 나라)와 서유럽(곧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와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어쩌면 이탈리아까지) 사이에 있는 아주 큰 차이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강조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노동조합 문제와 의회 문제의 전술에 관한 동지의 견해와 서유럽의 이른바 좌익의 견해가 갈라지는 근거가 바로 이 점에서의 러시아와 서유럽의 차이에 있습니다.
물론 동지도 나만큼 이 차이를 잘 압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읽은 동지의 저작에서는, 동지는 거기서 서유럽 전술에 대한 결론을 끌어내지 않았습니다. 동지는 이 결론을 고려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이 서유럽 전술에 대한 동지의 판단은 틀린 것이 됩니다[2]. 서유럽 어디서나 모든 공산당에서 동지의 이 명제를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 생각 없이 따라 되뇌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위험했고 지금도 위험합니다. 모든 공산주의 신문, 잡지, 소책자와 공개 집회에서 마치 서유럽에서 빈농의 반란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의 큰 차이는 지적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판단까지 그릇됩니다. 동지는 러시아에 거대한 빈농 계급이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이겼기 때문에, 서유럽의 우리도 이 도움을 얻으리라는 듯이 그립니다. 동지는 러시아에서 오직 이 도움 덕분에 이겼기 때문에, 여기서도 이 도움으로 이기리라는 듯이 그립니다. 이 문제가 서유럽에서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동지는 그렇게 그리고 있고, 동지의 전술 전체가 이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진실이 아닙니다.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혁명적 요소로서 빈농의 의의는 점점 작아집니다. 아시아, 중국,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라면 그곳에서 혁명이 일어날 경우 이 계급이 절대적으로 결정적일 것이고, 러시아에서는 이 계급이 혁명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요소의 하나이며, 폴란드와 동남유럽 및 중부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아직 혁명에 중요하지만, 서쪽으로 갈수록 이 계급은 혁명에 더욱 적대적이 됩니다.
러시아에는 700만~800만 명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농은 약 2500만 명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서둘러야 해서 기억에 의지해 인용하니, 숫자에 틀린 데가 있더라도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케렌스키가 이 빈농들에게 땅을 주지 않았을 때, 동지는 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대로 곧 동지에게 올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유럽에서는 그렇지 않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든 서유럽 나라들에는 그런 상황이 없습니다.
서유럽 빈농의 처지는 러시아와 다릅니다. 흔히 끔찍하다 해도 여기서는 거기만큼 끔찍하지는 않습니다. 빈농은 소작인이나 소유자로서 작은 땅뙈기를 갖고 있습니다. 훌륭한 교통수단 덕분에 그들은 흔히 무언가를 팔 수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흔히 스스로 먹고살 수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은 그들에게 얼마간의 개선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전쟁 동안과 그 뒤인 지금 그들은 높은 값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식량은 아주 조금밖에 수입되지 않으므로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계속 높은 값을 매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지원을 받습니다. 자본은 자기가 위에 머무를 수 있는 한 그들을 떠받칠 것입니다. 동지 나라의 빈농의 처지는 훨씬 더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동지 나라의 빈농은 정치적·혁명적 강령도 갖고 있었고, 정치적·혁명적 정당, 곧 사회혁명당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어디서도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에는 나눌 수 있는 막대한 토지, 곧 대토지, 황실 영지, 국유지, 수도원 영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빈농을 혁명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독일에는 (전쟁 전에) 400만~500만 명의 빈농(2헥타르까지)이 있었습니다. 진짜 대경영(100헥타르 이상)에 속한 땅은 800만~900만 헥타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것을 모두 나누어 준다 해도 빈농은 여전히 빈농일 것입니다. 700만~800만 명의 농업 노동자도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모두 나누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들 자신이 그것을 대경영으로 써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3].
그러니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비교적 작은 몇몇 지방을 빼면, 빈농을 끌어들일 수단조차 없습니다. 중경영과 소경영을 몰수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프랑스의 빈농 400만~500만 명도 사정이 아주 비슷하고,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스칸디나비아의 두 나라도 비슷합니다[4]. 어디서나 소경영과 중경영이 지배적입니다. 이탈리아에서조차 사정이 아주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빈농이 10만~20만 명밖에 없던 영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숫자는 또한 서유럽의 빈농이 비교적 아주 적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보조 부대가 있다 해도 아주 적을 것입니다.
공산주의 아래에서는 지대와 저당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도 그들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와 함께 내전, 시장의 소멸, 황폐가 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유럽의 빈농은, 지금 독일보다 훨씬 더 끔찍한 위기, 일찍이 없던 모든 것을 끔찍함에서 넘어서는 위기가 오지 않는 한, 자본주의가 그럭저럭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자본주의 편에 설 것입니다[5].
서유럽의 노동자들은 완전히 홀로 서 있습니다. 하층 중간계급의 아주 얇은 층만이 그들을 도울 것인데, 이 층은 경제적으로 하찮습니다. 노동자들은 완전히 홀로 혁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러시아와의 큰 차이입니다.
레닌 동지, 어쩌면 동지는 러시아에서도 그랬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러시아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혁명을 했다. 빈농은 혁명이 끝난 뒤에야 왔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차이는 여전히 엄청납니다.
레닌 동지, 동지는 농민이 틀림없이, 그리고 빨리 동지에게 오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케렌스키가 그들에게 땅을 주려 하지도 않았고 줄 수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케렌스키를 오래 돕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지에게는 「농민에게 땅을」이라는 마법의 수단이 있었고, 그것으로 몇 달 안에 그들을 곧바로 프롤레타리아트 쪽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당분간 서유럽 대륙 어디서나 그들이 자본주의를 도우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어쩌면 동지는 독일에 도울 준비가 된 빈농 대중은 없지만, 지금은 아직 부르주아지 편에 서 있는 수백만 프롤레타리아가 틀림없이 넘어오리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러시아 빈농의 자리를 여기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리라고. 그러니 결국 도움이 오리라고.
이 생각도 본질적으로 틀렸습니다. 러시아와의 차이는 여전히 엄청납니다.
러시아 농민은 자본주의에 대한 승리가 있은 뒤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직 자본주의 편에 서 있는 독일 노동자들이 공산주의로 넘어올 때, 그때 비로소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빈농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러시아 동지들은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넘어왔을 때 승리는 굳고 강해졌습니다. 독일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대열에 서 있기 때문에 승리는 오지 않고 쉬워지지도 않으며, 그들이 넘어올 때 투쟁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러시아 혁명은 오랜 발전 기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한 뒤인 지금도 무섭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쉬웠습니다. 바로 농민 덕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정이 아주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그 전에는 쉬웠고 그 뒤에도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 자체는 무서울 것입니다. 아마 일찍이 어떤 혁명보다도 무서울 것입니다. 동지 나라에서는 약했고 봉건제와 중세, 심지어 야만 위에 조금 덧붙어 있었을 뿐인 자본주의가, 우리 나라에서는 강하고 거대하게 조직되어 있으며 단단히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강한 쪽에 서는 하층 중간계급과 소농·빈농은 경제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얇은 층을 빼면 자본주의가 참으로 끝날 때까지 자본주의 편에 설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빈농의 도움으로 이겼습니다. 이것을 여기 서유럽에서,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유럽의 노동자들은 홀로 서 있다는 것, 이것을 러시아에서는 늘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홀로 서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술은 바로 이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이 위에 세워지지 않은 전술은 모두 틀렸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엄청난 패배로 이끕니다.
이 주장이 진실이라는 것은 실천으로도 증명됩니다. 서유럽의 소농은 강령도 없고 땅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가 다가오는 지금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주장을 완전히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서유럽에도 대토지 소유가 지배적이어서 빈농을 공산주의 편으로 끌어올 수 있는 지방이 있습니다. 지역 사정 따위 때문에 그들을 얻을 수 있을 다른 지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방은 비교적 적습니다. 또 이 주장은 혁명의 맨 끝,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빈농이 한 사람도 우리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들이 오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선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의 시작과 진행을 위한 전술을 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말한 것은 관계의 일반적 성격, 일반적 경향입니다. 그리고 전술은 오직 이것 위에 세워질 수 있고, 세워져야 합니다[6].
여기서 첫째로 나오는 것은, 그리고 이것은 힘주어 분명하고 뚜렷하게 말해야 하는데, 서유럽에서 진짜 혁명, 곧 자본주의의 전복과 공산주의의 수립 및 지속적 유지는 지금으로서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다른 모든 계급에 맞서 충분히 강한 나라들, 곧 독일과 영국, 그리고 빈농의 도움이 가능하니 이탈리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혁명의 준비만 가능합니다. 선전과 조직과 투쟁을 통해서입니다. 혁명 자체는 가장 큰 나라들(러시아, 독일, 영국)의 혁명으로 경제가 흔들려 부르주아 계급들이 충분히 약해진 뒤에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올지도 모르지만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건들(러시아군의 도움, 인도의 봉기, 일찍이 없던 끔찍한 위기 따위)에 우리 전술을 맞출 수는 없다는 것을 동지도 분명히 인정할 테니까요.
그러니 빈농의 의의에 관한 이 진실을 보지 못한 것, 이것이 동지의 첫째 큰 잘못입니다, 동지. 그리고 모스크바 집행위원회와 국제 대회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전술과 관련하여 이렇게 홀로 서 있다는 것(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는 아주 다르게), 어디서도, 어느 다른 계급에게서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첫째로 여기서 대중에게 요구되는 것이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의의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지도자의 의의가 그만큼 더 작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중, 프롤레타리아들은 이미 전쟁 중에, 일부는 바로 눈앞에서 농민이 곧 자기 곁에 서리라는 것을 확신했고 또 보았습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들은, 우선 그들만 이야기하자면, 모든 계급을 거느린 독일 자본주의 전체가 자기에게 맞서 있다는 것을 압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전쟁 전에 이미 인구 7천만 명 가운데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1900만~2000만 명이었지만, 그들은 다른 모든 계급과 맞서 있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인보다 비할 데 없이 강한 자본주의와 맨손으로 맞서 있습니다. 러시아인은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혁명은 독일 프롤레타리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러시아인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희생정신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독일의 경제적·계급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떤 이론이나 혁명 낭만주의자나 지식인의 공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급 전체가, 적어도 압도적 다수가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다른 모든 계급에 맞서 혁명에 몸소 나서지 않으면 혁명은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전술을 세울 때 남의 힘, 예컨대 러시아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을 셈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동지도 일단 인정할 테니까요.
거의 무장하지 않은 채, 홀로, 도움 없이 그토록 통일된 자본주의와 맞서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이것은 독일에서 다음을 뜻합니다. 프롤레타리아 하나하나가, 큰 다수가 의식 있는 투사가 되고, 프롤레타리아 하나하나가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서유럽 전체가 그렇습니다.
의식 있고 굳게 결심한 투사, 진짜 공산주의자가 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는 여기서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러시아에서보다 더 커야, 훨씬 더 커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지식인이나 시인의 상상과 꿈 때문이 아니라 가장 순수한 현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급의 의의가 커지는 만큼 지도자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작아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도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바로 그런 지도자를 찾고 있습니다. 다만 대중의 의의에 견주어 지도자의 의의가 작아진다는 것뿐입니다.
동지처럼 700만이나 800만의 프롤레타리아로 1억 6천만의 나라를 얻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지도자의 의의는 엄청납니다! 그토록 적은 수로 그토록 많은 수를 이기려면 무엇보다 전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동지처럼 그토록 작은 무리로, 그러나 남의 도움을 받아 그토록 큰 나라를 얻는다면 무엇보다 지도자의 전술이 중요합니다. 레닌 동지, 동지가 작은 프롤레타리아 무리와 함께 투쟁을 시작했을 때, 알맞은 때에 싸움을 치르고 빈농을 얻은 것은 무엇보다 동지의 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거기서는 가장 영리한 전술, 가장 큰 명석함, 심지어 지도자의 천재성도 그리 많은 것을, 가장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거기서는 계급들이 가차 없이 서로 맞서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모든 계급에 맞서 있습니다. 거기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스스로가 결정해야 합니다. 그 힘으로, 그 수로. 그러나 적이 그토록 거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끝없이 더 잘 조직되고 무장되어 있으므로, 그 힘은 특히 그 질에 근거합니다.
동지들은 러시아의 유산 계급과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듯 맞섰습니다. 다윗은 작았지만 틀림없이 맞히는 무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의, 영국의,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와 거인 대 거인으로 맞서 있습니다. 거기서는 오직 힘이 문제입니다. 몸의 힘, 그리고 특히 정신의 힘이.
레닌 동지, 독일에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까? 모두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혁명이 무엇보다 지도자가 아니라 대중의 일이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일찍이 없던 웅대하고 더 큰 일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어떤 것일지를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독일에서 그렇듯이 서유럽 전체가 그렇습니다. 어디서나 프롤레타리아트는 홀로 서 있으니까요.
대중의 혁명, 노동자의 혁명, 세계에서 처음으로 오직 노동자 대중만의 혁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이 그토록 좋거나 아름답기 때문도, 누가 생각해 냈기 때문도 아니라, 경제적·계급적 관계가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입니다.[7]
러시아와 서유럽의 이 차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더 나옵니다.
1. 동지나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나 동지들을 따르는 서유럽의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들, 스파르타쿠스단이나 영국 공산당의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지도자냐 대중이냐를 두고 싸우는 것은 헛소리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틀린 것은 우리가 아직 지도자를 찾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물음이 동지들 나라에서와는 아주 다른 의의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
2. 동지가 우리에게 「지도자와 대중은 떼어 낼 수 없는 전체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잘못인 것은 우리가 바로 그런 통일을 찾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물음이 우리에게서는 동지들 나라에서와 다른 의의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
3. 동지들이 「공산당에는 강철같이 강한 규율과 절대적인 군대식 중앙집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이 잘못인 것은 우리가 강철 같은 규율과 강한 중앙집권을 찾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물음이 우리에게서는 동지들 나라에서와 다른 의의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
4. 동지들이 「우리는 러시아에서 이러저러하게 행동했다(예컨대 코르닐로프 공세 뒤나 그 밖의 어떤 국면에서), 또는 우리는 그때 이러저러한 시기에 의회에 들어갔다, 또는 우리는 노동조합에 남았다, 그러니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며, 그러니 맞는다고 할 수 없거나 맞을 필요가 없다는 것. 투쟁과 혁명에서 서유럽의 계급 관계는 러시아와 아주 다르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끝으로, 동지나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나 서유럽의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에서는 아주 옳았던 전술, 예컨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빈농이나 다른 근로 계층이 여기서도 곧 함께하리라는 데에,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서 있지 않다는 데에 셈을 걸고 기대는 전술을 우리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동지들이 지시하거나 여기서 따르는 그 전술은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를 파멸과 끔찍한 패배로 이끌리라는 것.
6. 그리고 끝으로, 동지나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나 서유럽의 기회주의 분자들, 곧 독일 스파르타쿠스단의 중앙과 영국의 BSP가 여기 서유럽의 우리에게 기회주의 전술(기회주의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를 저버리는 남의 분자에게 기댑니다!)을 강요하려 한다면, 동지들이 틀렸다는 것.
이것, 곧 홀로 서 있다는 것,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대중의 의의가 더 크고 지도자의 의의는 상대적으로 더 작다는 것, 이것이 서유럽 전술이 기초해야 할 일반적 근거입니다.
라데크는 독일에 있을 때, 인터내셔널의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그리고 동지는 동지의 말에서 드러나듯 이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근거, 곧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서 있다는 것과 대중과 개인의 의의가 더 크다는 것 위에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공산당[8], 그리고 모스크바가 임명한 암스테르담 위원회 다수의 전술이 서 있습니다.
이 근거에서 그들은 무엇보다 대중을 전체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훨씬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려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혁명적 투사로 길러 내려 합니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달려 있고, 그들이 다른 계급의 도움에서는 아무것도, 지도자에게서는 조금만, 자기 자신에게서는 모든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이론만이 아니라 특히 실천으로) 분명히 보여 줌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개인적 발언, 작은 문제들, 그리고 볼프하임과 라우펜베르크의 경우처럼 운동 초기에 피할 수 없는 일탈을 빼면, 이 당들과 동지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고 동지의 공격은 철저히 틀렸습니다.[9]
유럽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어느 지점에서 경제적 경계를 넘게 됩니다. 그 경계는 발트해에서 지중해로, 대략 단치히에서 베네치아로 이어집니다. 이 선이 두 세계를 가릅니다. 이 선의 서쪽에서는 가장 고도로 발달한 은행자본으로 결합된 산업자본, 상업자본, 금융자본이 거의 절대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농업자본조차 이 자본에 종속되어 있거나 이미 이 자본과 결합해야 했습니다. 이 자본은 극도로 조직되어 있고, 세계에서 가장 굳건한 국가 정부들로 응집되어 있습니다.
이 선의 동쪽에는 집중된 산업자본, 상업자본, 운송자본, 은행자본의 이런 거대한 발전도, 그 거의 절대적인 지배도, 따라서 굳게 짜인 근대 국가도 없습니다.
이 경계의 서쪽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이 동쪽의 전술과 같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기적일 것입니다.
서론 주석
- [출판사 주] KAPD는 물론 그 이상을 원한다. KAPD는 점점 더 강하게 이것, 곧 아래로부터를 요구한다. ↩
- 예컨대 동지는 『국가와 혁명』(67쪽)에서 이렇게 씁니다. “농민층이 있는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농민층의 압도적 다수는 정부에 억압받고 있으며, 그 정부의 타도를, ‘값싼’ 정부를 갈망한다.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 그러나 어려움은 농민층이 공산주의를 갈망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
- 모스크바의 농업 테제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
- 스웨덴과 에스파냐에 관해서는 통계 자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
- 나는 소책자 『세계혁명』에서 이미 러시아와 서유럽의 이 차이를 아주 힘주어 지적했습니다. 독일 혁명의 전개는 내 판단이 아직도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쩌면 빈농이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갈지도 모릅니다. ↩
- 동지는 소인배들처럼 상대의 주장을 지나치게 절대적으로 받아들여 싸움에서 이기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위의 말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
- 이 다른 수의 비율(독일에서는 7천만 명에 2천만 명!) 때문에 혁명의 진행과 끝에서도 대중과 지도자의 의의, 그리고 대중과 당과 지도자의 관계가 여기서는 러시아와 다를 것이라는 점은 여기서 전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자체로는 몹시 중요한 이 문제를 논하자면 지금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입니다. ↩
- 적어도 지금까지는. ↩
- 동지가 공격할 때 거의 언제나 상대편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개인적 견해를 끌어다 쓴다는 것이 내 눈에 띄었습니다. ↩
2. 노동조합 문제
일반적인 이론적 근거를 든 다음, 이제는 독일과 영국의 좌익이 대체로 옳다는 것을 실천적으로도 증명해 보겠습니다. 노동조합 문제와 의회제 문제에서 말입니다.
먼저 노동조합 문제입니다.
“의회제가 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정신적 힘을 구현하듯이,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물질적 힘을 구현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결합하는 자연스러운 조직이며, 마르크스는 이미 아주 일찍부터 그런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의의를 강조했다. 발전한 자본주의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욱더 노동조합은 점점 거대한 연합체가 되었고, 예전 시대의 부르주아 국가 기구 자체와 같은 발전 경향을 보인다. 노동조합 안에는 관리 계급, 곧 관료층이 생겨났는데, 이 관료층은 조직의 모든 권력 수단, 곧 자금과 언론과 하급 간부 임명을 쥐고 있다. 흔히 그보다 더 큰 권한을 갖고 있어서, 전체의 종에서 전체의 주인이 되었고 스스로를 조직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국가 및 그 관료층과 일치하는 점이 또 하나 있다. 그 안에서 민주주의가 지배한다고 하지만, 조합원들은 관료층에 맞서 자기 뜻을 관철하지 못한다. 교묘하게 짜인 의사 규칙과 규약의 장치에 부딪혀 모든 반란은 가장 높은 영역을 뒤흔들기도 전에 꺾인다.
끈질긴 인내로 어떤 조직이 몇 해 뒤에 겨우 적당한 성과를 거두는 일이 이따금 있지만, 그 성과도 대개 사람이 바뀌는 데서 끝난다. 그래서 지난 몇 해 동안, 전쟁 전과 그 뒤에 영국, 독일, 미국에서는 조합원들이 지도자의 뜻이나 연합체 자체의 결정에 반하여 제멋대로 파업을 벌이는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일어나고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조직이 조합원 전체가 아니라 그들에게 낯선 무엇과 같다는 것, 노동자들이 자기 연합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연합체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바깥의 힘으로서 그들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힘은 그들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이 점에서도 국가와 비슷하다. 반란이 가라앉으면 옛 지배가 다시 들어선다. 대중 속의 증오와 무력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옛 지배는 버틸 줄 안다. 이 대중의 무관심과 뚜렷한 통찰 및 통일되고 끈질긴 의지의 부족에 기대고 있으며, 자본에 맞서 결합 속에서 힘을 찾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수단으로서 노동조합이 지닌 내적 필연성에 떠받쳐지기 때문이다.
자본에 맞서, 사람들을 궁핍하게 만드는 자본의 절대주의적 경향에 맞서 싸우고, 그 경향을 제한함으로써 노동계급이 살아갈 수 있게 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은 자본주의 안에서 제 역할을 다했고, 그로써 그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한 고리였다. 그러나 혁명이 시작되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사회의 한 고리에서 이 사회의 파괴자가 될 때 비로소 노동조합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대립하게 된다. [……]
마르크스와 레닌이 국가에 대해 강조한 것, 곧 형식적 민주주의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조직이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구로 만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노동조합 조직에도 들어맞아야 한다. 노동조합의 반혁명적 힘은 사람을 바꾸는 것으로, 반동적 지도자를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지도자로 갈아 치우는 것으로 없애거나 약하게 할 수 없다.
대중을 거의 무력하게 만들고 대중이 노동조합을 자기 의지의 기관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조직 형태다. 혁명은 이 조직을 없앰으로써만, 곧 조직 형태를 완전히 뒤엎어 전혀 다른 것이 되게 함으로써만 이길 수 있다. 안으로부터의 건설인 소비에트 체제는 국가 관료층뿐 아니라 노동조합 관료층도 뿌리 뽑고 없앨 수 있다. 소비에트 체제는 자본주의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정치 기관이 될 뿐 아니라 새로운 노동조합의 기초도 될 것이다. 독일의 당내 논쟁에서는 조직 형태가 혁명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비웃었다. 문제는 오직 조합원들의 혁명적 신념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대중 스스로 자기 일, 곧 사회와 생산의 관리를 손에 쥐는 데 있다면, 대중이 스스로 다스리고 이끌 수 없게 하는 조직 형태는 모두 반혁명적이고 해롭다. 그러니 그것은 노동자 자신이 능동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다른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판네쿠크) [1]
노동조합은 그 본질상 서유럽 혁명에 좋은 무기가 아닙니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의 도구가 되었고 배신자의 손에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 이 조직들이 그 본질상 온건한 지도자의 손에 있어도 언제나 조합원을 노예로, 도구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도 차치하고, 노동조합은 그 밖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극도로 조직된 서유럽 자본과 그 국가에 맞선 투쟁에서, 혁명에서 너무 약합니다. 이것들은 노동조합에 비해 너무나 강력합니다. 노동조합은 일부가 아직 직업별 조합이어서 그것만으로도 혁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산업별 연합인 한에서도 그들은 사업장, 작업장 자체에 기반을 두지 않으므로 그 때문에도 약합니다. 그들은 또한 소부르주아 시대에 생겨나 투쟁 조합이라기보다 상조회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조직은 혁명 전에도 이미 투쟁에 충분하지 않았고, 혁명 자체에는 서유럽에서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사업장이,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혁명을 하는 곳은 직업이나 산업이 아니라 작업장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조합들은 느리게 움직이는, 지나치게 복잡한 도구여서 진화의 시대에만 쓸모가 있습니다. 혁명이 곧바로 성공하지 못하여 한동안 다시 평화적 투쟁으로 넘어가야 한다 해도, 그때에도 노동조합은 없애고 사업장과 작업장 조직에 기반을 둔 산업 연합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차피 없애야 할 이 비참한 노동조합으로 혁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서유럽 혁명을 위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서유럽 혁명을 위한 유일한 무기는 사업장 조직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큰 전체로 결합된 것입니다!
서유럽 노동자들에게는 가장 좋은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홀로 서 있고 아무 도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사업장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독일과 영국에서는 혁명이 가장 가까우니 지금 당장, 다른 나라들에서도 되도록 빨리, 우리가 세울 수 있는 대로 곧. 레닌 동지, 「우리는 러시아에서 이러저러하게 했다」고 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첫째로 동지들은 러시아에서 여기 많은 노동조합만큼 나쁜 투쟁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동지들에게는 산업별 연합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노동자들의 정신이 더 혁명적이었습니다. 셋째로 자본가들의 조직이 약했습니다. 국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넷째로, 그리고 사실 이것만이 문제인데, 동지들에게는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동지들에게는 가장 좋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홀로 서 있으니 가장 좋은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가 꼬리를 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심리적·물질적 근거들도 이것을 증명합니다. 동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독일의 사정이 어떠했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너무나 약하지만 유일한 수단인 노동조합은 완전히 지도자의 손에 있어 죽은 기계처럼 자본주의를 위한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그다음 혁명이 왔습니다. 노동조합은 지도자들과 조합원 대중에 의해 혁명에 맞선 무기로 쓰였습니다. 노동조합의 도움으로, 그 지원으로, 그 지도자들에 의해, 그렇습니다, 일부는 그 조합원들에 의해서도 혁명은 살해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형제들이 노동조합의 협력 아래 총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혁명을 위한 파업은 저지되었습니다. 동지, 그런데도 혁명적 노동자들이 그런 조합에 남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까? 게다가 그 조합들이 혁명에는 너무나 약한 도구인데도! 나는 그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동지 자신이 어느 정당, 예컨대 멘셰비키 당의 당원이었는데 그 당이 혁명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동지는 그 당을 쪼갰을 것입니다(그 전에 이미 쪼개지 않았다면!). 그러나 동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당이었고 노동조합은 다르다. 나는 동지가 잘못 생각한다고 봅니다. 혁명에서, 혁명 동안에는 모든 노동조합이, 그렇습니다, 모든 노동자 단체가 정당입니다. 혁명 편이거나 반혁명 편이거나.
그러나 동지는 말할 것이고 동지의 글에서도 말합니다. 통일과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이런 감정은 극복해야 한다고. 나는 그것이 혁명 동안 독일에서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 문제들도 우리는 아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살펴보아야 하니까요… 독일에 진짜 혁명적인 조선 노동자가 10만, 혁명적인 금속 노동자가 10만, 그런 광부가 10만 있었다고 해 봅시다. 이들은 혁명을 위해 파업하고 싸우고 죽으려 했습니다. 다른 수백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30만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서로 단결하여 투쟁을 위한 연맹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동지도 인정합니다. 조직 없이 노동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옛 조합에 맞선 새 연맹은 조합원들이 옛 조합에 남아 있다 해도, 형식상으로는 아니라 해도 실제로는 이미 분열입니다. 그리고 새 연맹의 구성원들에게는 이제 신문, 집회, 사무실, 유급 인원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주 많은 돈이 듭니다. 그런데 독일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새 연맹을 살려 두려면 그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옛 조합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친애하는 동지, 구체적으로 보면 동지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더 나은 물질적 근거가 있습니다. 노동조합을 떠나고 노동조합을 없애려 하고 사업장 조직과 노동자 연합을 만든 독일 노동자들은 혁명 속에 서 있었습니다. 곧바로 싸워야 했습니다. 혁명이 와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은 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노동조합에 남아서 너희 생각을 선전하라, 그러면 너희는 더 강해지고 다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 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노동조합에서 흔히 하듯 소수를 목 졸라 죽이는 일을 빼면 그것도 아주 좋은 말이고, 시간만 있다면 좌익도 그렇게 해 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혁명이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혁명은 아직도 와 있습니다!
혁명 속에서는(동지,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독일 노동자들이 갈라져서 자신의 노동자 연합을 만든 것은 혁명 속에서였습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언제나 사회애국주의자들과 갈라질 것입니다. 싸우려면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동지와 모스크바 집행위원회와 국제 대회가 무슨 말을 하든, 동지들이 분열을 아무리 싫어하든, 심리적·물질적 이유 때문에 분열은 언제나 일어날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오래도록 노동조합에 의해 총살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고,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좌익은 전국 노동자 연합(AAU)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독일 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승리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레닌 동지! 노동운동에서 두 경향이 생기면 투쟁 말고 다른 수단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경향들이 아주 다르고 서로 맞서 있다면 분열 말고 다른 수단이 있습니까? 동지는 다른 수단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혁명과 반혁명보다 더 서로 맞서는 것이 있습니까? 이 점에서도 KAPD와 전국 노동자 연합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리고 동지, 이런 분열, 이런 정리는 결국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축복이 아닙니까? 나중에 언제나 그렇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이 분야에서 나는 경험이 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사회애국주의 당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는 영향력이 없었고, 쫓겨난 뒤 처음에는 조금 있었지만, 곧 커졌고 그다음에는 빠르게 아주 커졌습니다. 그리고 동지, 볼셰비키는 분열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 생각에는 아주 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작았고, 나중에는 커졌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입니다. 어떤 그룹이 아무리 작더라도 더 강한 쪽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경제적·정치적 발전에 달려 있습니다. 혁명이 독일에 머문다면 노동자 연합의 의의와 영향력이 더 강해지리라는 희망이 충분히 있습니다. 7만 대 700만이라는 동지의 숫자에 그들이 겁먹을 까닭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작은 그룹들이 가장 강해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볼셰비키가 그랬습니다!
왜 사업장 조직, 작업장 조직, 그리고 그것에 기반을 두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노동자 연합은 서유럽 혁명을 위해 그토록 뛰어난, 그렇습니다, 공산당과 더불어 가장 좋은, 유일하게 좋은 무기입니까?
노동자들 자신이 옛 노동조합에서보다 끝없이 더 많이 행동에 나서기 때문이며, 그들이 지도자를, 따라서 지도를 손에 쥐기 때문이며, 그들이 사업장 조직을, 따라서 연합 전체를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업장, 모든 작업장은 하나의 전체입니다. 거기서 노동자들은 자기 대표를 뽑습니다. 사업장 조직들은 경제 지구별로 나뉩니다. 지구마다 다시 대표를 뽑습니다. 그리고 지구들은 다시 전국 총지도부를 뽑습니다.
모든 사업장 조직은 어느 산업에 속하든 상관없이 함께 하나의 노동자 연합을 이룹니다.
보다시피 완전히 혁명을 향한 조직입니다.
게다가 비교적 평화적인 투쟁의 중간기가 온다 해도 이 조직은 그에 맞게 쉽게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자 연합 안에서 사업장 조직들을 산업별로 묶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보다시피 여기서는 노동자, 모든 노동자가 힘을 얻습니다. 그는 자기 작업장에서 자기 대표를 뽑고, 그들을 통해 지구와 전국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강한 중앙집권이 있지만 너무 강하지는 않습니다. 개인과 그의 직접적 조직인 사업장 조직이 큰 힘을 갖습니다. 그는 자기 대표를 곧바로 해임하고 바꿀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상급 기관을 곧바로 바꾸게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있지만 너무 크지는 않습니다. 중앙 기관인 지구 평의회와 전국 평의회가 큰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중앙 지도부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혁명이 터지는 이 시기에 서유럽에서 필요하고 가능한 꼭 그만큼의 힘을 갖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시민은 국가에 대해 하나의 추상, 하나의 숫자라고 씁니다. 옛 노동조합에서도 그렇습니다. 관료층, 조직의 본질 전체가 노동자 위로 높이 떠 있고 노동자에게서 하늘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노동자는 거기에 닿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하나의 숫자, 하나의 추상입니다. 그들에게 그는 작업장의 사람조차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고 의지를 지니며 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옛 노동조합에서 관료층을 다른 사람들로 바꿔 보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도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대중 위로 높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고, 더는 대중과 접촉하지 않습니다. 백에 아흔아홉은 부르주아지 곁에 선 폭군이 될 것입니다. 조직의 본질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업장 조직에서는 얼마나 다릅니까! 여기서는 노동자 자신이 전술과 방향과 투쟁을 결정하고, 「지도자」가 그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곧바로 개입합니다. 사업장, 작업장이 동시에 조직이므로 그는 끊임없이 몸소 투쟁 속에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가능한 한 자기 운명의 만드는 이요 이끄는 이이며,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므로 대중은 자기 투쟁의 만드는 이요 이끄는 이입니다.
개량주의적이든 생디칼리슴적이든 옛 노동조합에서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끝없이 더 그렇습니다.[2]
이로써, 곧 개인들 자신을, 따라서 대중 자신을 투쟁의 직접적 담당자로, 투쟁을 실제로 이끄는 사람으로 만들고 그렇게 그들을 지켜 냄으로써 사업장 조직과 노동자 연합은 혁명을 위한 가장 좋은 무기, 도움 없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를 뒤엎기 위해 서유럽의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동지, 이것들은 모두 사실 처음에 내가 시사한 원칙과 가장 밀접히 연결된 마지막의 진짜 주된 근거에 비하면 아직 약한 근거일 뿐입니다. 그리고 KAPD와 영국의 반대파 당에게 결정적인 것은 이 마지막 근거입니다. 이 당들은 독일과 영국의 대중과 개인의 정신적 수준을 크게 높이려 합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러기 위한 수단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동지가 노동운동에서 다른 수단을 안다면 다시 듣고 싶습니다! 그것은 대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싸우면서 보여 주는 그룹을 만드는 것입니다. 동지, 다른 수단을 안다면 보여 주십시오. 나는 다른 수단을 모릅니다.
노동운동에서, 그리고 내가 보기에 특히 혁명에서는 시험의 방법이 하나뿐입니다. 본보기 자체, 곧 행동입니다.
「좌익」 동지들은 자본주의와 노동조합에 맞서 싸우는 이 작은 그룹이 노동조합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거나, 아니면, 그것도 가능하니까, 노동조합을 차츰 더 나은 길로 밀어 가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본보기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독일 노동자들의 수준을 높이려면 이 새로운 조직, 사업장 조직이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애국주의 정당들에 맞서 공산당이 나서듯이, 새 조직인 노동자 연합은 노동조합에 맞서야 합니다.[3]
노예적이고 개량주의적이며 사회애국주의적인 대중을 바꾸는 데 쓸모 있는 것은 본보기뿐입니다.
이제 영국, 영국 좌익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국은 독일 다음으로 혁명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곳의 상황이 이미 혁명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곳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주 많고 자본주의적 경제 관계가 가장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는 강한 충격 하나면 투쟁이 시작되고, 그 투쟁은 승리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격은 올 것입니다. 영국의 가장 앞선 노동자들은 그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고 압니다(우리 모두 그렇게 느끼듯이). 그리고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은 독일에서처럼 새 운동을 세웠습니다. 그 운동은 독일에서와 꼭 같이 여러 방향으로 나타나고 아직 모색하고 있지만, 대체로 「평조합원 운동」(Rank and File Movement), 곧 지도자 없이, 또는 거의 지도자 없이 움직이는 대중 자신의 운동입니다.[4]
이 운동은 사업장 조직을 갖춘 독일 노동자 연합과 아주 비슷합니다.
동지, 이 운동이 가장 앞선 두 나라에서만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까?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에게서? 그리고 여러 곳에서?[5] 그것만으로도 이 운동이 자연발생적이고 막을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이 운동, 노동조합에 맞선 이 투쟁이 독일에서보다 거의 더 필요합니다. 영국의 트레이드 유니언은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지도자의 손안의 수단일 뿐 아니라 독일의 노동조합보다 혁명에 훨씬 더 쓸모없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조는 완전히 소규모 싸움의 시대, 흔히 19세기 초, 아니 18세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국에는 한 산업에 트레이드 유니언이 25개나 있는 경우가 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니언이 조합원을 두고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웁니다!! 그리고 조합원들에게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레닌 동지, 이런 노동조합도 그대로 두고 싶습니까?
이런 노동조합도 공격하고 쪼개고 없애서는 안 됩니까? 노동자 연합에 반대한다면 공장위원회(Shop Committees), 직장위원(Shop Stewards), 산업별 노동조합(Industrial Unions)에도 반대해야 합니다. 뒤의 것에 찬성한다면 앞의 것에도 찬성해야 합니다. 두 운동의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공산주의 좌익은 트레이드 유니언 운동의 이 새로운 흐름을 이용하여 지금과 같은 영국 노동조합을 없애고 바꾸어 혁명에 쓸모 있는 계급투쟁의 새 도구로 대체하려 합니다. 우리가 독일 운동에 대해 든 것과 같은 근거가 여기에도 해당합니다.
나는 제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가 KAPD에 보낸 서한에서, 집행위원회는 미국의 IWW가 정치 행동과 공산당과의 연계를 원하기만 한다면 IWW를 지지한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IWW는 미국의 노동조합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행위원회는 독일의 노동자 연합에는 반대하며, 노동자 연합은 공산주의적이고 정당과 협력하는데도 노동조합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닌 동지, 동지는 영국의 평조합원 운동에 찬성하면서(이 운동이 흔히 이미 분열을 일으키고 그 안의 많은 공산주의자가 노동조합을 없애려 하는데도!) 독일의 노동자 연합에는 반대합니다.
나는 동지와 집행위원회의 태도에서 기회주의밖에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잘못된 기회주의입니다.
물론 영국에서는 아직 혁명이 터지지 않았으니 영국의 공산주의 좌익은 독일만큼 멀리 갈 수 없습니다. 아직은 평조합원 운동을 전국에 걸친 하나의 큰 전체로, 혁명을 향해 조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국 좌익은 그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혁명이 오는 대로 노동자들은 대거 혁명에 쓸모없는 옛 트레이드 유니언을 떠나 사업장 조직과 산업 조직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좌익은 어디서나 이 운동 속으로 들어가 어디서나 그곳에 공산주의 사상을 퍼뜨리려 함으로써, 그 본보기로 그곳에서도, 그리고 이미 지금 노동자들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립니다.[6] 그리고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그들의 진짜 목표입니다.
둘 다 사업장, 작업장에, 그리고 오직 그것에만 기대는 전국 노동자 연합과 평조합원 운동은 노동자 평의회, 소비에트의 선구자입니다. 서유럽의 혁명은 아주 어려운 혁명이 될 것이고 그래서 아마 느리게만 나아갈 것이므로, 노동조합은 더는 쓸모없고 소비에트는 아직 없는 꽤 긴 과도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과도기는 노동조합에 맞선 투쟁으로, 노동조합을 바꾸고 더 나은 조직으로 대체하는 일로 채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시간이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좌익이 원해서가 아니라 혁명이 이 새로운 조직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혁명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운을 빈다, 영국의 평조합원 운동과 독일의 노동자 연합이여. 서유럽 소비에트의 첫 선구자들이여. 행운을 빈다, 공산당과 더불어 서유럽에서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을 가져올 첫 조직들이여. 레닌 동지, 동지는 동맹자 없이 지금도 여전히 몹시 강력하고 비상하게 조직되고(모든 갈래와 방향에서 조직되고) 무장된 자본주의와 맞서 있으며 그래서 가장 좋은, 가장 강한 무기가 필요한 서유럽의 우리에게 나쁜 무기를 쓰라고 강요하려 합니다. 혁명을 사업장 안에서, 사업장 단위로 조직하려는 우리에게 동지는 비참한 노동조합을 떠안기려 합니다. 서유럽의 혁명은 사업장 단위로, 사업장 안에서만 조직될 수 있고 그래야 합니다.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모든 방향에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그토록 고도로 조직되어 있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산당 말고는) 다른 강한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인들은 무장하고 있었고 빈농을 갖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무기와 농민이었던 것이 당분간 우리에게는 전술과 조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동지는 노동조합을 권합니다. 심리적·물질적 이유로 혁명 한가운데서 노동조합에 맞서 싸워야 하는 우리를 동지는 이 투쟁에서 막으려 합니다. 분열을 통해서만 싸울 수 있는 우리를 동지는 이 분열에서 막습니다. 본보기를 보여 주는 그룹,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보여 주는 유일한 수단인 그룹을 만들려는 우리에게 동지는 이 본보기를 금합니다.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준을 높이려는 우리 앞길에 동지는 돌을 던집니다.
동지는 분열을, 새로운 조직을, 따라서 더 높은 단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입니까?
동지는 큰 정당과 큰 노동조합을 제3인터내셔널에 들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은 기회주의, 가장 나쁜 종류의 기회주의로 보입니다.[7]
레닌 동지, 동지는 지금 인터내셔널에서 예전 볼셰비키 당에서와는 아주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 당은 아주 「순수하게」 유지되었습니다(어쩌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터내셔널에는 지금 당장 2분의 1, 4분의 1, 8분의 1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노동운동의 저주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힘」을 얻자마자 원칙 없는 수단으로 그 힘을 키우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처음에는 「순수」했습니다. 지금의 사회애국주의자 대부분은 진짜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선전으로 대중을 얻었습니다. 「힘」을 갖게 되자마자 그것을 저버렸습니다. 그때의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동지가, 제3인터내셔널이 지금 행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민족적 규모가 아니라 국제적 규모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순수성」으로, 원칙의 굳건함으로 이겼습니다. 이제 러시아 혁명은, 이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는 그것을 통해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 이 힘을 유럽으로 넓혀야 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옛 전술을 버립니다!!
지금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검증된 같은 전술을 적용하여 제3인터내셔널을 안으로부터 아주 강하게 만드는 대신, 지금 다시 그때의 사회민주주의와 꼭 같이 기회주의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모두 들어와야 합니다. 노동조합도, 독립파도, 프랑스 중앙파도, 노동당의 일부도. 마르크스주의의 겉모양을 지키려고 서명(!!)해야 하는 조건을 내걸고, 카우츠키, 힐퍼딩, 토마 따위를 내쫓습니다. 그러나 큰 대중, 중간 재료는 들어오며, 온갖 수단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그리고 중앙파가 아주 강해지도록 「좌익」은 중앙파로 넘어가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KAPD 같은 가장 훌륭한 혁명가들은 쫓겨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큰 대중을 중간 노선으로 하나로 묶고 나면, 강철 같은 규율 아래, 그토록 비상한 방식으로 검증된 지도자들 아래 한꺼번에 함께 전진합니다. 어디로? 낭떠러지로.
실천에서 이런 기회주의를 행한다면 가장 훌륭한 원칙, 제3인터내셔널의 빛나는 테제가 우리에게 무슨 소용입니까? 제2인터내셔널에도 가장 아름다운 원칙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런 실천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좌익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유럽에서 예전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꼭 같이 먼저 아주 굳건하고 아주 명료하며 아주 강한(처음에는 어쩌면 작더라도) 당, 핵심을 만들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갖게 되면 그것을 키우려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아주 굳건하고 아주 강하며 아주 「순수하게」. 그래야만 우리는 서유럽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지의 전술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동지.
동지, 동지는 우리 암스테르담 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혁명들의 교훈을 잊었거나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지, 지난 혁명들에 관해 나는 한 가지를 아주 잘 기억합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좌익」 당들이 그 혁명들에서 언제나 뛰어나고 숭고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에스파냐에 맞선 네덜란드 혁명에서, 영국 혁명에서, 프랑스 혁명에서, 코뮌에서, 그리고 두 러시아 혁명에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곳 노동운동의 발전에 따라 서유럽 혁명에는 두 경향이 있습니다. 급진적 경향과 기회주의적 경향입니다. 이 둘은 서로 맞서 싸움으로써만 좋은 전술에, 통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급진적 경향은 몇몇 세부에서는 어쩌면 너무 멀리 가더라도 단연 더 낫습니다. 그런데 레닌 동지, 동지는 기회주의적 경향을 지지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모스크바 집행위원회, 수백만 빈농 군대의 도움으로만 이긴 혁명의 러시아 지도자들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기대고 있고 그래야만 하는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 전술을 강요하려 합니다! 그리고 동지와 꼭 같이 서유럽의 가장 좋은 경향을 짓뭉갭니다!
이 무슨 믿을 수 없는 어리석음입니까, 그리고 특히 이 무슨 변증법입니까!
서유럽에서 혁명이 터지면 동지들은 이 전술로 크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자는 프롤레타리아트일 것입니다.
동지와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서유럽의 노동조합이 반혁명 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지들의 테제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동지들은 노동조합을 유지하려 합니다. 동지들은 노동자 연합, 곧 사업장 조직과 평조합원 운동이 혁명적 조직이라는 것도 압니다. 동지들 스스로 테제에서 사업장 조직이 우리의 목표여야 하며 목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동지들은 그것을 질식시키려 합니다. 동지들은 노동자, 모든 노동자가, 따라서 대중이 힘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조직은 질식시키고, 대중이 지도자의 죽은 도구인 조직은 유지하려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동지들은 노동조합을 동지들의 권력, 제3인터내셔널의 권력 안에 넣으려 합니다.
왜 동지들은 그렇게 하려 합니까? 왜 이 나쁜 전술을 따릅니까? 대중이 어떻든 대중이기만 하면 그들을 곁에 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엄격한 규율과 중앙집권으로 동지들에게 복종하는(공산주의적이든, 반쯤 공산주의적이든, 전혀 공산주의적이지 않든) 대중만 있으면 동지들, 곧 지도자들이 이기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동지들이 지도자 정치를 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정치란 지도자와 중앙집권을 원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그것 없이는(당 없이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정치란 대중의 신념이 무엇인지, 그 마음이 어떤지 묻지 않고 대중을 모으며, 지도자가 큰 대중을 곁에 두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정치입니다.
그러나 동지와 집행위원회가 지금 노동조합 문제에서 보여 주는 이 정치는 서유럽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이곳의 자본주의가 지금도 너무나 강력하고, 이곳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너무나 자기 자신에게만 기대고 있습니다. 이 정치는 제2인터내셔널의 정치와 마찬가지로 실패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노동자들 자신이 강해져야 하고, 그다음에 그들을 통해 그들의 지도자가 강해져야 합니다. 여기서는 악, 곧 지도자 정치를 뿌리째 붙잡아야 합니다.
내 생각에 동지와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노동조합 문제에서 보인 이 전술로, 적어도 이 전술을 바꾸지 않는 한 서유럽 혁명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동지는 「좌익」이 그 전술을 따르면 수다나 떨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지, 「좌익」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아직 행동할 기회가 없었거나 조금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을 보십시오. 카프 폭동 때와 러시아 혁명에 대해 KAPD가 보인 전술과 행동을 보십시오. 그러면 동지는 이 말을 거두어들여야 할 것입니다.
노동조합 문제 주석
- [엮은이 주] 안톤 판네쿠크, 「세계혁명의 발전과 공산주의의 전술」, 『코무니스무스』(Kommunismus, 빈) 제1년(1920) 제28/29호, 994~996쪽. ↩
- 물론 개인주의와 중앙집권의 이 새로운 결합이 지금 곧바로 완성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생겨나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며 투쟁 속에서 비로소 발전하고 완성된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
- 노동자 연합도 흠이 없을 수는 없다는 동지의 비꼬는 말은 별로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그 말은 노동자 연합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개선을 위해 싸워야 하는 한에서만 옳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연합이 혁명을 위해 싸우는 한에서는 옳지 않습니다. ↩
- 공장위원회, 직장위원, 그리고 특히 웨일스에서처럼 산업별 노동조합. ↩
- 독일에서 이 운동이 「위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은 중상입니다. ↩
- 동지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이, 공산주의자가 노동조합을 떠나면 대중과의 접촉을 잃는다는 논거를 씁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접촉은 날마다 사업장에서 하는 접촉이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모든 사업장이 그 어느 때보다 토론장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좌익」이 어떻게 접촉을 잃는다는 말입니까? ↩
- 이 기회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혼란한 상태로 이끄는지는 다음 예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자유노조 곁에 생디칼리슴 노조가 있는 나라들이 있는데, 생디칼리슴 노조는 나쁘기는 해도 자유노조보다 잘 싸웁니다. 모스크바 테제는 큰 자유노조에 들어가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니 테제는 예컨대 네덜란드에서처럼 공산주의자들을 흔히 파업 파괴자가 되게 합니다. 또 있습니다. 독일 노동자 연합은 분열을 일으킨다고 단죄됩니다. 그런데 제3인터내셔널 자신은 무엇을 합니까? 스스로 새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을 세웁니다! ↩
3. 의회제
이제 남은 것은 의회제 문제에서 동지에 맞서 좌익을 변호하는 일입니다.[1] 노동조합 문제에서와 같은 일반 이론적 근거가 여기서도 좌익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서 있다는 것, 적의 거대한 힘, 그래서 대중이 훨씬 높이 일어서야 하고 그때 주로 자기 자신에게 기대야 한다는 것 따위입니다. 이 근거를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동조합 문제에서와 다른 근거가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첫째. 서유럽의 노동자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근로 대중은 사상적으로 부르주아 문화, 부르주아 사상, 따라서 부르주아 대의제, 곧 의회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습니다. 동유럽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사회생활 전체, 따라서 정치생활 전체를 장악했고, 노동자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훨씬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수백 년 동안 그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았습니다. 이 사상이 노동자들을 완전히 적셔 놓았습니다.
판네쿠크 동지가 빈의 잡지 『코무니스무스』에서 이 사정을 아주 잘 그리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험은 우리를 바로 서유럽 혁명이라는 큰 문제 앞에 세운다. 이 나라들에서는 낡은 부르주아 생산양식과, 그것과 결부된 수백 년의 고도로 발달한 문화가 민중의 생각과 감정에 완전히 제 도장을 찍어 놓았다. 그 때문에 이곳 민중의 정신적·내면적 성격은 부르주아 문화의 이런 지배를 알지 못했던 동쪽 나라들과 아주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 동쪽과 서쪽의 혁명 경과의 차이가 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 독일에는 중세 이래 소부르주아적이고 원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하는 강한 시민층이 살았다. 봉건제가 부서지면서 농촌에서는 그만큼 강하고 독립적인 농민층이 자라났는데, 이들도 자기 작은 살림의 주인이었다. 이 토대 위에서 부르주아 정신생활은 굳건한 국민 문화로 꽃피었는데, 무엇보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앞서 나간 해안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랬다. 19세기의 자본주의는 경제 전체를 종속시키면서 이 국민 문화를 끌어올리고 세련되게 했으며, 자신의 정신적 선전 수단인 언론과 학교와 교회로 그것을 대중의 머리에, 곧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로 만들어 도시로 끌어들인 대중과 농촌에 남겨 둔 대중 모두의 머리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본고장 나라들뿐 아니라, 조금 다른 형태라 해도 유럽인들이 새 국가를 세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도, 그리고 그때까지 정체해 있던 중부 유럽 나라들, 곧 새로운 자본주의 발전이 낡고 멈추어 버린 소부르주아 경제와 소부르주아 문화에 이어질 수 있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도 비슷하게 해당한다. 자본주의가 유럽의 동쪽 나라들에 들어갔을 때는 전혀 다른 재료와 다른 전통을 만났다. 이곳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엘베강 동쪽에도 예부터 정신생활을 지배해 온 강한 부르주아 계급이 없었다. 대토지 소유, 가부장적 봉건제, 마을 공산제를 지닌 원시적 농업 관계가 정신생활을 규정했다.”[2]
이로써 판네쿠크 동지는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정곡을 찔렀습니다. 동지 쪽에서 일찍이 한 것보다 훨씬 더, 그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차이를 이데올로기 쪽에서 분명히 밝혔고, 그쪽에서 서유럽을 위한 혁명 전술을 찾는 열쇠를 주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적의 힘의 물질적 원인, 곧 은행자본과 결합하기만 하면 전술 전체가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해서는 더 말할 수 있습니다. 서유럽에서 부르주아적 자유, 의회의 힘은 앞선 세대, 조상들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쟁취한 것입니다. 그때는 시민, 유산자만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민중이 쟁취한 것입니다. 이 투쟁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전통으로서 이 민중의 핏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혁명이야말로 한 민족의 가장 깊은 기억이니까요. 의회로 대표되는 것이 승리였다는 생각은 무의식적인, 거대하고 조용한 힘입니다. 특히 오래 또는 거듭 자유 투쟁이 벌어진 가장 오래된 부르주아 나라들, 곧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도는 덜하더라도 독일, 벨기에,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서도 그렇습니다. 동쪽 사람은 이 영향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 아마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이곳 노동자들 자신이 흔히 여러 해 동안 보통선거권을 위해 싸웠고, 그렇게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것을 얻었습니다. 이것도 그때에는 열매를 맺은 승리였습니다. 부르주아 의회에서 대표되고 자기 대표가 자기 일을 돌보게 하는 것이 진보이고 승리라는 생각과 감정은 일반적입니다. 이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아주 큽니다.
그리고 끝으로 개량주의 때문에 서유럽 노동계급은 전쟁으로, 자본주의와의 동맹으로 이끈 의회 의원들의 힘 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었습니다. 개량주의의 이 영향도 엄청납니다.
이 모든 원인 때문에 노동자는 의회의 노예가 되었고, 의회만 행동하게 둡니다. 그 자신은 더는 행동하지 않습니다[3].
그런데 혁명이 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 계급과 함께 홀로 거대한 적과 싸워야 하고, 세상이 일찍이 본 적 없는 가장 무서운 투쟁을 견뎌 내야 합니다. 지도자의 어떤 전술도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계급들, 모든 계급이 노동자들과 날카롭게 맞서 있고, 그의 편인 계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의회 안의 자기 지도자나 다른 계급을 믿는다면, 지도자에게 행동을 맡기는 옛 약점으로 되돌아갈 큰 위험이 있습니다. 의회를 믿고, 남이 그를 위해 혁명을 해 줄 수 있다는 옛 미망에 머물고, 환상을 좇고, 낡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판네쿠크 동지는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이런 태도도 다시 아주 잘 그리고 있습니다.
“의회제는 지도자를 통한 투쟁의 전형적 형태이며, 그때 대중 자신은 종속적인 역할만 한다. 의회제의 실천은 의원들, 곧 개별 인물들이 본질적인 투쟁을 이끄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의회제는 대중에게 남이 자기를 위해 투쟁을 이끌어 줄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지도자들이 의회에서 노동자를 위해 중요한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심지어 의원들이 법률 의결로 사회주의로의 변혁을 해낼 수 있다는 환상까지 나타났다. 의회제가 더 겸손하게 나서는 오늘날에는 의원들이 의회에서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논거가 들린다. 언제나 무게 중심은 지도자에게 있으며, 그때 전문가들이 정치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회의 토론과 결의라는 민주주의의 옷을 입는다 해도 그렇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는 당원들 스스로 자기 정치를 결정하게 하려는 헛된 노력의 사슬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의회에서 싸우는 곳에서는, 대중이 아직 스스로 행동하는 기관을 만들지 못한 동안에는, 곧 혁명이 아직 와야 하는 곳에서는 이 모든 것을 피할 수 없다. 대중 스스로 나서서 행동하고 그로써 결정할 수 있게 되자마자 의회제의 해로움이 더 커진다.
전술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 그 힘을 마비시키는 전통적 부르주아 사고방식을 어떻게 뿌리 뽑느냐는 것이다. 전해 내려온 견해를 새로 강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롭다. 이 사고방식에서 가장 질기고 단단한 부분은 지도자에 대한 비자립성인데, 대중은 일반적 문제의 결정, 자기 계급 문제의 지휘를 지도자에게 맡긴다. 의회제는 혁명에 필요한 대중 자신의 활동을 마비시키는 피할 수 없는 경향을 지닌다. 거기서 혁명적 행동을 일깨우는 멋진 연설을 할 수는 있겠지만, 혁명적 행동은 그런 말에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때의 가혹하고 무거운 필연에서만 솟아난다.
혁명은 정부 체제를 무너뜨리는 대중적 투쟁 행동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 행동은 지도자가 주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깊은 충동에서만 솟아날 수 있다. 혁명은 사회 재건의 큰 문제들을 손에 잡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창조적 운동으로 이끌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먼저 전위가, 그다음 점점 더 큰 대중이 스스로 그것을 손에 잡고,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찾고, 선전하고, 씨름하고, 시도하고, 숙고하고, 저울질하고, 감행하고, 해낼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어렵고 고되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남이 자기를 위해 행동하는 쉬운 길, 곧 높은 연단에서 선동하고, 결정을 내리고, 행동의 신호를 주고, 법률을 만드는 길을 갈 수 있다고 믿는 동안에는, 노동계급은 망설이고 낡은 사고 습관과 낡은 약점 때문에 수동적으로 머물 것이다.”[4]
서유럽의 노동자들은, 그리고 이것은 천 번이라도, 필요하다면 십만 번, 백만 번이라도 말해야 하며, 1918년 11월 이후의 역사를 통해 아직 이것을 배우지 못하고 보지 못한 사람은 (동지라 하더라도) 눈먼 사람인데, 서유럽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무엇보다 스스로 행동해야 하며 지도자에게 행동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들은 홀로 서 있고 지도자의 어떤 영리한 전술도 그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추진력은 그들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러시아에서보다 훨씬 높은 정도로,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독일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좌익 동지들이 옳습니다. 선거에 끼어들지 말라, 의회를 보이콧하라. 너희는 정치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에만 이길 수 있다. 너희가 2년, 5년, 10년 그에 따라 행동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그룹마다, 도시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지방으로, 마침내 전국에서 당으로서, 연합으로서, 사업장 평의회로서, 대중으로서, 계급으로서 거기에 익숙해지고, 끝없는 연습과 끝없는 투쟁과 패배를 거쳐 마침내 너희의 큰 다수가 그것을 할 수 있게 되고, 끝내 이 학교를 거쳐 하나의 단단한 대중으로 서게 될 때에만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이 동지들, 좌익, KAPD가 이것을 설교하고 선전하기만 했다면 큰 잘못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리고 정치 문제 전체가 걸려 있으므로 노동조합에서보다 거의 더, 무엇보다 투쟁과 본보기, 앞장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KAPD 동지들에게는 스파르타쿠스단, 더 정확히는 스파르타쿠스 중앙이 이 선전을 참으려 하지 않았을 때 곧바로 거기서 떨어져 나와 그것을 쪼갤 권리, 역사가 요구하므로 가장 큰 권리가 있었습니다. 독일의 노예 민족에게, 그리고 모든 서유럽 노동자에게는 무엇보다 먼저 본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노예들의 이 민족 속에, 이 예속된 서유럽 세계 속에, 지도자 없는, 곧 예전과 같은 지도자 없는 자유로운 투사의 본보기인 그룹이 있어야 했습니다. 의회 의원 없이.
그리고 이것도 그것이 그토록 아름답거나 좋거나 영웅적이거나 그 밖의 무엇이어서가 아니라, 독일과 서유럽의 근로 민중이 이 무서운 투쟁에서 홀로 서 있고 다른 계급에게서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으며, 여기서는 지도자의 영리함이 더는 소용없고 오직 하나, 한 사람 한 사람, 한 여성 한 여성, 그리고 전체로서의 대중의 의지와 결단만이 소용 있기 때문입니다.
이 더 높은 대의 때문에, 그리고 이 전술의 반대인 의회 참여는 이 더 높은 대의에 해만 끼칠 수 있고 그 해가 그것이 가져오는 작은 이익(의회 연단에서의 선전)에 비해 끝없이 크기 때문에, 이 더 높은 대의 때문에 좌익은 의회제를 거부합니다.
동지는 리프크네히트 동지가 아직 살아 있다면 제국의회에서 훌륭하게 일할 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정합니다. 대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의 모든 정당이 하나로 뭉쳐 우리와 맞서 있으니 그는 그곳에서 정치적으로 책략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얻는 일도 의회 안에서가 의회 밖에서보다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꾸로 대중의 아주 큰 부분이 그의 연설에 기대어 버릴 것이고, 그러니 의회 안에 그가 있는 것은 해로울 것입니다.[5]
물론 「좌익」의 이런 작업은 여러 해가 걸릴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곧바로 성과, 큰 숫자, 큰 당원 수와 득표수, 큰 당과 강력한(겉보기에 강력한!) 인터내셔널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과 서유럽 혁명의 승리는 아주 많은 수가, 노동자 대중이 자기 자신을 믿을 때에만 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전술에 만족할 것입니다.
독일과 서유럽에서는 이 전술만이 좋은 전술입니다. 특히 영국에서 그렇습니다.
동지, 영국의 부르주아 개인주의, 그 부르주아적 자유, 그 의회민주주의가 6~7백 년에 걸쳐 형성된 모습을 압니까? 정말로 압니까? 동지 나라의 사정과 그토록 끝없이 다른 것을? 이 사상이 영국과 그 식민지의 모든 사람, 프롤레타리아 개개인에게까지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지 압니까? 거대한 전체로 자라난 그 구조를 압니까? 그 보편적 효력을? 사회생활과 개인 생활에서의? 나는 어떤 러시아인도, 어떤 동유럽인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동지는 자본주의 전체, 세계 전체의 이 가장 큰 정치적 구조물과 완전히 결별하는 영국 노동자들을 두고 환호할 것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면, 거기에는 처음으로 차리즘과 결별한 사람들 못지않은 혁명적 정신이 필요합니다. 영국 민주주의 전체와의 이 결별은 이미 싹으로서 영국 혁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역사와 전통과 힘을 지닌 영국에서 그래야 하듯이 극도의 결단으로 일어납니다.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가장 거대한 힘을 갖고 있으므로(잠재적으로 지구에서 가장 강력합니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부르주아지에 맞서 갑자기 온 힘으로 나서며, 그 나라에 아직 혁명이 오지 않았는데도 한 번에 영국 민주주의 전체를 거부합니다.
그 전위인 좌익이 독일의 전위인 KAPD와 꼭 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들도 홀로 서 있다는 것, 영국 전체에서 어떤 계급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는 지도자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무엇보다 싸우고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6]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전위에서 자기가 어떻게 싸우려 하는지 보여 줍니다. 홀로, 그리고 영국과 그 식민지의 모든 계급에 맞서.
그리고 다시 독일과 꼭 같이, 본보기를 보여 줌으로써. 의회제를 거부하고 영국의 계급 전체에게 이렇게 외치는 공산당을 세움으로써. 자본주의 권력의 상징인 의회와 결별하라. 너희 자신의 당과 너희 자신의 사업장 조직을 만들라. 오직 너희 자신에게 기대라.
동지, 영국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결국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큰 자본주의에서 태어난 이 자부심과 용기가. 이제 마침내 오니까 그것은 한꺼번에 완전히 옵니다.
동지, 이 6월의 어느 날 런던에서 첫 공산당이 세워지고 그 당이 칠백 년 된 헌정과 국가 제도 전체를 거부했을 때, 그것은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의 모범이자 본보기이고, 수백 년 동안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자 보루이며, 인류의 3분의 1을 지배하는 영국 국가를, 이 국가와 그 의회를 아직 이론적으로일 뿐이라 해도 거부하는 이 영국 노동자들을 보았다면 그들은 크나큰, 넘치는 기쁨을 느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전술을 쓸 까닭이 더욱 많습니다. 영국 자본주의는 다른 모든 나라의 자본주의를 지원할 것이고,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든 자기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든 맞서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보조 부대를 불러오기를 결코 꺼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세계 자본에 맞선 투쟁입니다. 그러니 영국 공산주의가 가장 높고 가장 밝은 본보기를 보여 줄 까닭이 더욱 많습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모범적으로 싸우고, 그 본보기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하게 할 까닭이.[7]
그러니 어디서나 언제나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그룹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그룹이 인류의 소금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론적으로 반의회주의를 변호했으니, 여기서 의회제에 대한 동지의 변호를 하나하나 다루어야겠습니다.
동지는 영국과 독일을 위해 의회제를 변호합니다(36쪽에서 68쪽까지). 그러나 그 논증은 러시아에만(기껏해야 다른 몇몇 동유럽 나라에만) 들어맞고 서유럽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바로 거기에 동지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동지는 마르크스주의 지도자에서 기회주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 때문에 러시아와, 아마 몇몇 동유럽 나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지도자인 동지가 서유럽에 대해서는 기회주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동지의 전술이 여기서 받아들여진다면 서쪽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제 동지의 논증에 맞서 하나하나 증명하겠습니다.
동지, 36쪽에서 68쪽까지 동지의 논증을 읽을 때 나에게는 줄곧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다시 옛 네덜란드 사회애국주의 당의 대회에 앉아 트룰스트라의 연설을 듣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개량주의 정치의 큰 장점을 노동자들에게 그려 보일 때. 그가 아직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어서 우리가 타협으로 얻어야 할 노동자들에 관해 말할 때. 그가 이 노동자들의 정당과 맺을 수 있는(물론 일시적인) 동맹에 관해, 우리가 이용해야 할 부르주아 정당들 안과 사이의 「균열」에 관해 말할 때. 꼭 그렇게, 거의, 아니 아주 글자 그대로 레닌 동지, 동지는 우리 서유럽인들을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마르크스주의 동지들이 거기 뒤쪽에, 홀 맨 뒤쪽에 앉아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겨우 몇 사람, 넷이나 다섯이었습니다. 헨리에터 롤란트 홀스트, 판네쿠크, 그리고 몇 사람 더. 트룰스트라는 꼭 동지처럼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을 사로잡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나는 박수갈채가 우레같이 터지는 가운데, 빛나는 개량주의 논설과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욕설 한가운데서 홀 안의 노동자들이 트룰스트라가 우리를, 거의 꼭 동지처럼 부르던 「바보」, 「당나귀」, 「유치한 얼간이」를 찾아 뒤돌아보던 것을 기억합니다. 동지가 「좌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을 때 모스크바의 인터내셔널 대회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꼭 동지처럼, 동지, 그토록 설득력 있게, 자기 방법 안에서는 그토록 논리적으로 말해서 나 자신도 이따금 그래, 그가 옳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쫓겨난 1909년까지 몇 해 동안) 반대파를 대표해 발언하는 것은 대개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으며 나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 내가 늘 무엇을 생각했는지 압니까? 나에게는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는 수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 강령의 한 문장이었습니다. 너는 언제나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깨어나고 강해지도록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이 하는 말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강해지는가, 아닌가? 그러면 나는 언제나 곧바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 내가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지의 소책자를 읽을 때도 꼭 그랬습니다. 나는 비공산주의 정당들, 부르주아 정당들과 함께하자는, 타협하자는 동지의 기회주의적 논거를 듣습니다. 나는 사로잡힙니다. 모든 것이 그토록 빛나고 환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동지의 방법 안에서는 그토록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다시 그때처럼 한 문장만을 생각합니다. 얼마 전부터 공산주의 기회주의자들과의 싸움을 위해 생각해 낸 문장입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저 동지가 하는 말이 서유럽에서 행동으로, 혁명으로, 진짜 혁명으로 나아가려는 대중의 의지를 북돋우는가, 그런가 아닌가? 그러면 동지의 소책자에 대해 내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말합니다. 아니다. 그러면 레닌 동지, 나는 사람이 무언가를 알 수 있는 만큼 확실하게 동지가 틀렸다는 것을 곧바로 압니다.
나는 이 수단을 좌익 동지들에게 권할 수 있습니다. 동지들, 모든 나라에서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우리 앞에 놓인 힘겨운 싸움에서(여기 네덜란드에서는 그들이 이미 3년째 날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옳은지, 왜 옳은지 알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으십시오!
레닌 동지, 동지는 우리와의 싸움에서 세 가지 논거만 씁니다. 이 논거들은 따로따로 또는 뒤섞여서 소책자 전체에 되풀이해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동자와 소부르주아 분자를 얻는 데 의회 안의 선전이 주는 이점.
2. 정당들 사이의 「균열」을 이용하고 그 가운데 몇몇과 타협하는 데 의회 활동이 주는 이점.
3. 이 선전과 타협이 그토록 훌륭하게 작용한 러시아의 예.
동지에게는 다른 논거가 없습니다. 이제 차례로 답하겠습니다.
먼저 첫째 논거, 의회 안의 선전입니다. 이 논거는 아주 하찮은 의의밖에 없습니다. 비공산주의 노동자들, 곧 사회민주주의적이고 기독교적이며 그 밖에 부르주아적으로 생각하는 노동자들은 대개 자기네 신문에서 우리의 의회 연설에 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연설은 흔히 완전히 왜곡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연설로 그들에게 닿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집회, 소책자, 신문으로만 그들에게 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나는 흔히 KAPD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혁명의 시기에, 우리는 이 시기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행동으로 그들에게 닿습니다. 모든 큰 도시와 마을에서 그들은 우리가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파업, 시가전, 우리의 평의회를. 그들은 우리의 구호를 듣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앞장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선전이며, 가장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행동은 의회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직 공산주의자가 아닌 노동자, 소부르주아와 소농 분자에게는 의회 활동 없이도 아주 잘 닿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소아병』 소책자의 한 대목을 반박해야 합니다. 그 대목은 기회주의가 동지를 이미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아주 분명히 보여 줍니다.
52쪽에서 동지는 독일 노동자들이 대거 공산당이 아니라 독립사회민주당으로 가는 사실이 공산주의자들의 비의회적 활동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컨대 베를린 노동자 대중은 우리 동지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목표 의식적인 파업과 시가전으로 거의 설득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자란 것은 의회에서의 레비 동지의 연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연설만 했더라면 그들은 애매한 독립파가 아니라 우리에게 왔으리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동지,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먼저 애매한 쪽으로 간 것은 분명한 혁명을 아직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넘어가는 길은 망설임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동지. 기회주의가 동지를 이미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보십시오.
동지의 첫째 논거는 아무 의의가 없습니다.
그리고 (독일과 영국, 서유럽 전체의 혁명에서) 의회 참여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도자들이 일을 잘해 주리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약하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논거는 좋은 것을 하나도 뜻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해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논거. 정당들 사이의 균열을 이용하고 그 가운데 몇몇과 타협하는 데 (혁명기에) 의회 활동이 주는 이점.
이 논거를 (특히 영국과 독일에 대해, 그러나 서유럽 전체에 대해서도) 반박하려면 첫째 논거에서보다 좀 더 자세해야 합니다. 레닌 동지, 이 일을 동지에 맞서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 무겁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안의 혁명적 기회주의(이제는 개량주의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혁명적 기회주의이므로)라는 이 문제 전체는 서유럽의 우리에게 사활의 문제입니다. 글자 그대로 생사의 문제입니다. 일 자체, 곧 반박은 쉽습니다. 트룰스트라, 헨더슨, 베른슈타인, 레기엔, 르노델, 반데르벨데 따위, 한마디로 모든 사회애국주의자가 이 논거를 쓸 때 우리는 백 번이나 반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카우츠키도 그가 아직 카우츠키였을 때 그것을 반박했습니다. 그것은 개량주의자들의 가장 큰 논거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동지에 맞서 해야 하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래야 합니다. 자, 그럼!
의회에서 「균열」을 이용하는 이점이 그토록 하찮은 것은 몇 해, 몇십 년 전부터 「균열」이 그토록 하찮기 때문입니다. 대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서, 대부르주아 정당과 소부르주아 정당 사이에서. 서유럽에서, 독일과 영국에서. 이것은 혁명 때부터가 아닙니다. 이미 훨씬 전, 느린 발전의 시대에 그랬습니다. 모든 정당, 소부르주아와 소농의 정당까지 이미 오래전부터 노동자에게 맞서 있었고, 그들 사이의 차이는 노동자와 관련된 문제에서(따라서 거의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아주 작아졌거나 흔히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확실합니다. 서유럽에서, 독일과 영국에서.
이론적으로 확실한 것은, 자본이 은행, 트러스트, 독점체로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방식으로.
서유럽에서,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이 은행, 트러스트, 카르텔이 공업, 상업, 운송, 그리고 이미 대부분은 농업에서도 거의 모든 자본을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로써 공업 전체가, 작은 공업까지, 운송 전체가, 작은 운송까지, 그리고 농업의 대부분이, 작은 농업까지 대자본에 완전히 종속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대자본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레닌 동지는 소상업, 소운송, 소공업, 소농업이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서 동요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그리고 예전에는 여기서도 그랬습니다. 서유럽에서, 독일과 영국에서 그들은 이제 대자본에 너무나, 완전히 종속되어 있어서 더는 동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가게 주인, 작은 공업가, 작은 상인은 완전히 트러스트와 독점체와 은행의 힘 아래 있습니다. 이들이 그들에게 상품과 신용을 공급합니다. 그리고 소농조차 협동조합과 저당을 통해 트러스트와 독점체와 은행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동지, 내 논증의, 「좌익」의 논증의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유럽과 미국을 위한 전술 전체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동지, 프롤레타리아트에 가장 가까운 이 하층은 어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가게 주인, 수공업자, 하급 관리와 사무원, 그리고 빈농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서유럽에서 살펴봅시다! 동지, 나와 함께 서유럽의 큰 가게가 아니라(거기서는 대자본에 대한 종속이 당연합니다)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구역의 작은 가게로 가 봅시다. 둘러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이 모든, 거의 모든 상품, 옷, 식료품, 도구, 연료 따위는 대공업의 생산물일 뿐 아니라 아주 흔히 트러스트의 생산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시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그렇습니다. 작은 가게 주인들은 압도적 다수가 이미 대자본의 창고지기입니다. 곧 은행자본의 창고지기입니다. 은행자본이 큰 공장, 트러스트를 지배하니까요.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마찬가지인데, 작은 수공업자의 작업장을 들여다보십시오! 그의 원료, 금속, 가죽, 나무 따위는 대자본에서, 흔히 이미 독점체에서, 곧 은행에서 옵니다. 그리고 이 상품의 공급자가 아직 더 작은 자본가인 곳에서도 그들은 은행자본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급 사무원과 관리는? 서유럽에서 그들은 대부분 대자본과, 대자본에 완전히 종속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고용되어 있으니 결국 이미 은행에 고용되어 있는 셈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에 가장 가까운 사무원과 관리 가운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대자본에 종속된 사람의 비율은 서유럽에서 아주 크고, 독일과 영국에서는, 미국과 영국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엄청납니다.
그러니 이 층의 이익은 대자본, 곧 은행의 이익과 얽혀 있습니다.
빈농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고, 그들이 당분간 공산주의 편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든 원인 말고도 일부는 그들이 도구와 상품과 저당 때문에 대자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나옵니까, 동지?
근대 서유럽(그리고 미국) 사회와 국가가 하나의 크고 조직된, 가장 바깥의 마디와 가지까지 조직된 전체가 되었고, 그 전체가 완전히 은행자본에 지배되고 움직여지고 조절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회는 질서 있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으로 질서 지어졌지만 어쨌든 질서 있는 몸이라는 것. 은행자본은 이 몸의 피여서 몸 전체를 흐르며 모든 가지를 먹여 살린다는 것. 이 몸은 하나이며 자본이 몸 전체를 엄청나게 강하게 만들고, 그래서 모든 마디가 그 몸이 참으로 끝날 때까지 그것에 붙어 있으리라는 것. 다만 피, 곧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은 아닙니다.
모든 계급이 은행자본에 종속되어 있고 은행자본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모든 계급이 혁명에 적대적으로 맞서 있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도 홀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은행자본은 세계에서 가장 유연하고 가장 탄력 있는 힘이며 신용으로 자기 힘을 천 배로 늘리기 때문에, 이 끔찍한 전쟁 뒤에도, 수천억을 잃은 뒤에도, 이미 우리에게는 파산으로 보이는 상태 한가운데서도 자본주의,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국가를 붙들어 유지합니다.
그리고 그로써 은행자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뺀 모든 계급을 더 큰 힘으로 자기 둘레에 묶고, 모든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선 하나의 전체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 힘과 유연성, 모든 계급의 이 결속은 너무나 커서 혁명이 터진 뒤에도 아주 오래 남을 것입니다.
물론 자본은 끔찍하게 약해졌습니다. 위기가 오고 그와 함께 혁명이 옵니다. 그리고 나는 혁명이 이기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여전히 아주 강하게 지탱하는 두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중의 정신적 노예 상태와 은행자본입니다.
그러니 우리 전술은 이 둘의 힘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조직된 은행자본이 모든 계급을 혁명에 맞서 묶어 두는 원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많은 수입니다. 모든 계급은 노동자들(독일에서는 거의 2천만 명)을 하루 10시간, 12시간, 14시간 일하게만 할 수 있다면 아직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으리라고 느낍니다. 그 때문에도 그들은 함께 섭니다.
이것이 서유럽의 경제 상태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은행자본이 아직 이런 힘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과 하층 계급이 함께 뭉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진짜 균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홀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이 경제적 원인이 정치를 결정합니다. 이 원인 때문에 서유럽의 이 계급들은 종속된 노예인 까닭에 선거에서 자기 주인, 곧 대부르주아 정당에 투표하고, 대부르주아 정당에 속합니다. 독일과 영국과 서유럽에서 이 작은 사람들은 자기 정당이 거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혁명 전에, 전쟁 전에 이미 아주 강했습니다. 전쟁은 이 경향을 거대하게 강화했습니다. 민족주의와 배외주의를 통해서. 그러나 특히 모든 경제적 힘의 거대한 트러스트화를 통해서. 그리고 혁명은 이 경향, 곧 모든 부르주아 정당의 결합과 모든 소부르주아·소농 분자의 대부르주아 정당으로의 합류를 다시 엄청나게 강화했습니다.
괜히 러시아 혁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어디서나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압니다.
그러니 서유럽에서,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 대부르주아와 대농, 중간계급과 중농, 하층 부르주아와 농민층은 독점체, 은행, 트러스트, 제국주의 때문에, 전쟁 때문에, 혁명 때문에 노동자에게 맞서 있으며, 모두 그 점에서 함께 섭니다.[8] 그리고 노동자 문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므로 그들은 모든 문제에서 함께 섭니다.
동지, 여기서 나는 다시 농민 문제(제1장)에서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해야겠습니다. 나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 당의 소인배들, 곧 전술을 크고 일반적인 노선에 세울 힘이 없어서 작고 특수한 것에 세우는 소인배들이 이 층 가운데 아직 대자본의 손아귀에 들지 않은 부분에 주의를 돌리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나는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서유럽의 일반적 진실, 일반적 경향은 그들이 대자본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전술은 이 일반적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또 나는 아직 균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일반적 경향은 이 계급들의 결합이며 그것이 혁명 동안에도 오래 남으리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는 균열보다 결합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그들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나 의회 의원이 아니라, 무엇보다 혁명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소인배들이 내 말을 가지고 지어낼 것처럼 이 계급들의 실제 이익이 대자본의 이익과 같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들이 대자본에 억압받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오직 이것입니다.
이 계급들은 이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위험도 눈앞에 보고 있으므로 전보다 더 굳게 대자본과 결속한다는 것.
서유럽에서 자본의 지배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생활 안정, 앞으로 나아가 처지를 나아지게 할 가능성, 적어도 그런 믿음을 뜻합니다. 이제 혼돈과, 처음에는 더 나쁜 혼돈을 뜻하는 혁명이 그들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수단으로 혼돈을 없애고 생산을 다시 살리고 노동자들을 긴 노동시간과 참을성 있는 궁핍으로 몰아가려는 시도에서 자본 곁에 섭니다.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들에게 모든 질서, 보잘것없더라도 모든 생활 질서의 붕괴와 몰락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대자본 편에 서며, 혁명 동안에도 오래 그 편에 설 것입니다.
끝으로 덧붙여야 할 것은, 여기서도 내가 혁명의 시작과 진행을 위한 전술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혁명의 맨 끝, 승리가 가깝고 자본주의가 흔들릴 때에는 이 계급들이 우리에게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술을 끝이 아니라 혁명의 시작과 진행을 위해 정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론적으로 이 모든 것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론적으로 이 계급들은 결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론적으로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도 못지않습니다.
이것을 이제 보여 주겠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부르주아지 전체, 서유럽의 모든 부르주아 정당은, 소부르주아와 소농이 속한 정당까지 노동자를 위해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노동운동의 적이었고, 제국주의와 전쟁을 지지했습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영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서유럽에서도 노동자를 지지하는 정당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노동자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9] 모든 일에서.
노동자 보호 입법은 더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나빠졌습니다. 파업을 막는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세금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제국주의, 식민지 체제, 해군주의, 군국주의는 소부르주아 정당을 포함한 모든 부르주아 정당이 지지했습니다. 자유주의와 교권주의, 보수와 진보, 대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의 차이는 사라졌습니다.
사회애국주의자, 개량주의자들이 정당들 사이의 차이에 관해, 정당들 사이의 「균열」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은, 레닌 동지, 이제 동지가 다시 데워 내놓는 그것은 모두 속임수였습니다. 서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1914년 7월과 8월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실천에서 그들은 혁명 때문에 훨씬 더 하나가 되었습니다. 혁명에 맞서,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모든 노동자에게 맞서(혁명만이 모든 노동자에게 진짜 개선을 가져다줄 수 있으므로), 혁명에 맞서 모든 정당은 「균열」 하나 없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전쟁과 위기와 혁명 때문에 모든 실천적 사회·정치 문제가 혁명 문제와 얽혀 있으므로, 이 계급들은 결국 모든 문제에서 함께 서며, 서유럽에서 모든 문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맞서 있습니다.
요컨대 트러스트, 독점체, 대은행, 제국주의, 전쟁, 혁명은 실천적으로도 서유럽의 모든 대부르주아·소부르주아 계급과 모든 농민 계급을 노동자에게 맞선 하나의 덩어리로 용접했습니다.[10]
그러니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이것은 확실합니다. 서유럽의 혁명에서,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이 계급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라도 의미 있는 「균열」이 없습니다.
여기서 다시 개인적인 것을 덧붙여야겠습니다. 40쪽과 41쪽에서 동지는 암스테르담 사무국을 비판합니다. 동지는 사무국의 테제 하나를 인용합니다. 덧붙이자면, 동지가 그에 관해 하는 말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지는 또한 암스테르담 위원회가 의회제를 단죄하기 전에 이 단죄를 정당화하는 계급 관계와 정당들의 분석을 내놓을 의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미안하지만 동지, 그것은 위원회의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위원회의 테제가 기대고 있는 것, 곧 모든 부르주아 정당이 의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한결같이 노동자의 적이며 아무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증명되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그러니 그것을 우리가 분석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거꾸로입니다. 의회에서 정당들과 타협하고 동맹하기를 원하며 그로써 우리를 기회주의로 이끌려는 동지에게 의무가, 입증 책임이 있었습니다.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 의미 있는 「균열」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책임이.
동지는 서유럽의 우리를 타협으로 이끌려 합니다. 트룰스트라, 헨더슨, 샤이데만, 투라티 따위가 진화의 시대에 하지 못한 것을 동지는 혁명의 시대에 하려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쪽은 동지입니다.
그리고 러시아의 증거로가 아니라(참으로 그것은 충분히 쉬우니까요!) 서유럽의 증거로. 동지는 이 의무를 가장 형편없는 방식으로 수행했습니다. 아주 뒤떨어진 나라의 경험인 러시아의 경험만 거의 가져왔지 근대 서유럽의 경험은 가져오지 않았으니 놀랄 일도 아닙니다.
바로 이 전술 문제를 내용으로 하는 작은 책 전체에서 나는 러시아의 예를 빼면(그것은 곧 다루겠습니다) 서유럽의 예를 두 개밖에 찾지 못합니다. 독일의 카프 폭동과, 영국에서 애스퀴스가 반대파로 있는 로이드 조지·처칠 정부입니다.
부르주아 정당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사회민주당까지 그 사이에 진짜 「균열」이 있다는 예로는 참으로 아주 적고 가장 형편없는 예입니다!
서유럽의 혁명에서 노동자에 맞서는 부르주아 정당들(그리고 이 경우에는 사회민주당까지) 사이에 의미 있는 균열이 없다는 증거가 필요했다면, 카프 폭동이 그 증거였습니다. 카프 일당은 민주당원, 중앙당원, 사회민주당원을 처벌하지도, 죽이지도, 가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을 때도 이들은 카프 일당을 처벌하지도, 죽이지도, 가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쪽 다 공산주의자는 죽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아직 너무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함께 독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번에 공산주의가 더 강해지면 그들은 함께 독재를 할 것입니다.
동지, 그때 공산주의자들이 의회에서 그 균열(!)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었을지 보여 주는 것이 동지의 의무였고 지금도 의무입니다. 물론 노동자에게 이롭게. 이 균열을 노동자들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공산주의 의원들이 무슨 말을 했어야 했는지 보여 주는 것이 동지의 의무였고 지금도 의무입니다. 물론 그로써 부르주아 정당들이 강해지지 않게. 동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혁명에서는 이 정당들 사이에 의미 있는 균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수한 경우에 그런 균열이 있다면 결합을 향한 일반적 경향보다 그 균열에 노동자들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 더 이롭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동지의 의무였고 지금도 의무입니다.
그리고 동지, 서유럽의 우리를 이끌기 전에 영국과 독일과 서유럽 어디에 이 균열이 있는지 보여 주는 것이 동지의 의무였고 지금도 의무입니다.
그것도 동지는 할 수 없습니다. 동지는 처칠, 로이드 조지, 애스퀴스 사이의 균열을 노동자들이 이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한심합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동지와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영국에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얼마간 힘을 가진 뒤로 이런 균열은 노동자를 속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끝없이 꾀어내어 그들을 영원히 약하고 비자립적으로 두려고 부르주아 정당과 지도자들 자신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왔고 지금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려고 그들은 흔히 한 정부에 세 적수(!)를 들이기까지 합니다. 로이드 조지와 처칠을. 그리고 거의 백 년 묵은 이 덫에 레닌 동지가 걸려듭니다! 그는 영국 노동자들에게 이 속임수 위에 그들의 정치를 세우라고 설득하려 합니다! 혁명의 시대에! 처칠, 애스퀴스, 로이드 조지 같은 자들은 혁명에 맞서 하나가 될 것이고, 그러면 동지는 영국 프롤레타리아트를 환상으로 속이고 약하게 만든 셈이 될 것입니다. 동지, 동지는 (동지가 마지막 장 전체에서, 예컨대 72쪽에서 하듯이) 일반적이고 아름답고 빛나는 말이 아니라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아주 정확하고 분명한 예와 사실로, 러시아의 것도 아니고 하찮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진짜이고 의미 있는 서유럽의 갈등과 차이가 어떤 것인지 보여 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동지는 소책자 어디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지가 그것을 내놓지 않는 동안 우리는 동지를 믿지 않습니다. 동지가 그것을 내놓으면 우리는 답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노동자를 속이고 잘못된 전술로 이끌 뿐인 환상이다. 동지, 진실은 동지가 잘못하여 서유럽 혁명을 러시아 혁명과 같은 것으로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입니까? 근대 국가, 곧 서유럽(그리고 북아메리카) 국가에는 여러 부류의 자본가, 곧 토지 소유자와 공업가와 상인 위에 서 있는 힘, 곧 은행자본이 있다는 것을 동지가 잊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와 같은 것인 이 힘이 모든 자본가를, 그리고 그들과 함께 소부르주아와 농민까지 하나로 묶습니다.
그러나 동지에게는 아직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동지는 말합니다. 노동자 정당과 부르주아 정당 사이에는 균열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은 옳습니다.
물론 사회민주당과 부르주아 정당 사이의 이 차이가 전쟁과 혁명에서 아주 작았고 대개 사라졌다고 말해야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있을 수 있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직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에 관해서는 이야기해야 합니다. 특히 동지가 영국의 「순수한」 노동자 정부, 곧 토머스, 헨더슨, 클라인스 따위를 영국에서 실비아 팽크허스트에 맞서, 에베르트, 샤이데만, 노스케, 힐퍼딩, 크리스피엔, 콘의 가능한 「순수한」 사회주의 정부를 KAPD에 맞서 내세우니 말입니다.[11]
동지는 노동자들에게 이 노동자 정부를 가리키며 그것을 세우는 일을 돕도록 몰아가는 동지의 전술은 명료하고 이로운 전술이고, 그것을 세우려 하지 않는 우리 전술은 해로운 전술이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동지. 이 노동자 정당들과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의 균열이 틈이 되는 이런 「순수한」 노동자 정부의 경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다시 아주 명료하며 혁명에 이롭습니다.
우리가 그런 정부를 존속시킬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할 수도 있고 운동의 진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더 나아갈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존속시키고 되도록 날카롭게 비판하며 할 수 있는 대로 곧 공산주의 정부로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의회에서, 선거를 통해 그것이 들어서도록 협력하는 일, 그것은 혁명 속의 서유럽에서 우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협력하지 않는 것은 서유럽에서, 그리고 혁명에서는 노동자들이 완전히 홀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알겠습니까, 모든 것이 그들의 행동 의지와 머리의 명료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샤이데만들과 헨더슨들, 크리스피엔들, 그리고 동지 자신의 지지자 몇몇(영국 독립노동당원이나 스파르타쿠스단이나 BSP의 기회주의적 공산주의자 누구든 하나만 대 보십시오)과 타협질을 하는 동지의 전술은 의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여기 서유럽에서, 혁명에서 머리를 혼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전술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미리 사기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을 뽑게 하는 반면, 우리 전술은 적을 적으로 보여 주므로 그들을 명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합법 시기에 그 때문에 의회 대표를 잃어야 한다 해도, 그리고 그 때문에 한 번쯤 「균열」(의회에서!!)을 이용하지 못한다 해도, 서유럽에서, 우리 사정에서는 우리 전술을 택하고 동지의 전술을 거부합니다.
여기서도 동지의 조언은 다시 불명료함을 가져오고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조언입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 독립파, 노동당, 독립노동당의 당원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도 얻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당들의 노동자와 소부르주아 분자는 우리 좌익이 서유럽에서 우리의 선전, 우리의 집회와 신문, 그리고 특히 우리의 본보기, 우리의 구호, 사업장에서의 우리의 행동으로 얻습니다. 혁명 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신문으로, 행동으로, 혁명으로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잃은 사람들이니 악마에게나 가라지요. 영국과 독일의 이 사회민주당, 독립파, 노동당 따위는 노동자와 소부르주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의 사람들, 곧 노동자는 길게 보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소부르주아는 몇 사람만 얻을 수 있는데, 그들은 소농과 달리 경제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몇 사람은 우리의 선전 따위로 우리에게 옵니다. 대부분은(노스케와 그 일당은 특히 이들에게 기댑니다) 자본주의에 속하며, 혁명이 나아갈수록 끝까지 더욱 자본주의 둘레로 모여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거에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노동자 정당들, 독립파, 사회민주당, 노동당 따위와 단절되고 그들에게 적대적인 것입니까? 오히려 우리는 되도록 그들과의 연결을 찾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동 행동을 호소합니다. 파업에, 보이콧에, 봉기에, 시가전에, 그리고 특히 노동자 평의회와 사업장 평의회에. 우리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습니다. 다만 더는 예전처럼 의회에서가 아니라 작업장에서, 단체에서, 거리에서. 지금 그들은 거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들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실천을 잇는 새로운 실천, 공산주의 실천입니다.
동지, 동지는 사회민주당원, 독립파 따위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그들을 의회와 정부로 들여보내려 합니다. 의회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의회를 쓰려 합니다.
동지는 노동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속이려 합니다. 동지는 그들을 올가미에 걸어 매달아 둡니다. 우리는 그들이 올가미를 피하도록 돕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렇게 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합니다. 동지는 농민 민족의 전술을 따르고, 우리는 공업 민족의 전술을 따릅니다. 이것은 비웃음도 조롱도 아닙니다. 나는 동지 나라에서는 그 길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동지는, 이 작은 문제에서도, 노동조합과 의회제라는 큰 문제에서도, 러시아에서는 좋았지만 여기서는 파멸을 부르는 것을 우리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말해야겠습니다. 동지는, 그리고 동지는 이것을 여러 번 옹호했는데, 서유럽에서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에 가까운 이 하층 계급들이 충분히 흔들리거나 중립화되거나 얻어진 뒤에야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혁명의 시작에서 흔들리거나 중립화되거나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동지의 주장이 옳다면 혁명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지적은 동지 쪽에서, 무엇보다 지노비예프 동지에게서 이미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혁명을 결정하는 이 몹시 중요한 문제에서도 동지의 이 주장은 틀렸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다시 동지가 모든 것을 동유럽의 관점에서만 본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장에서 보여 주겠습니다.
이로써 나는 의회제를 위한 동지의 둘째 논거가 압도적으로 기회주의적 속임수이며, 이 점에서도 의회제는 이제 그 해로움이 아니라 더 큰 이로움을 지닌 다른 투쟁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인정합니다. 이 점에서는 동지의 전술이 몇 가지 이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노동자 정부는 무언가 좋은 것, 더 큰 명료함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비합법 시기에도 동지의 전술이 이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전에 우리가 수정주의자와 개량주의자들에게 「우리는 노동자의 자의식의 발전을 모든 것 위에, 작은 이익 위에도 둔다」고 말했듯이, 이제 우리는 레닌 동지에게, 그리고 동지의 「우익」 동지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행동 의지 속에서 대중이 자라나는 것을 모든 것 위에 둔다. 그때 모든 것이 앞의 것을 위해 쓰여야 했듯이, 이제 서유럽에서는 모든 것이 이것을 위해 쓰여야 한다. 누가 옳은지, 좌익인지 레닌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트룰스트라, 헨더슨, 르노델, 레기엔을 이겼듯이 동지를 이길 것입니다.
이제 동지의 셋째 논거, 러시아의 예로 넘어가겠습니다. 동지는 그것을 거듭 듭니다(1쪽부터 97쪽까지 줄곧 나옵니다). 나는 그것을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여 읽었고, 예전에 이미 감탄했듯이 지금도 감탄합니다. 1903년부터 나는 늘 동지 편에 섰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때처럼 동지의 동기를 아직 전혀 몰랐을 때에도(연락이 끊겨 있었으니까요) 나는 동지의 동기를 들어 동지를 변호했습니다. 동지의 전술은 러시아에서 분명히 빛났고, 러시아인들은 이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유럽에 대해 무엇을 증명합니까? 내 판단으로는 아무것도, 또는 아주 조금밖에 증명하지 않습니다.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과 건설의 수단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동지들의 대외 전술도, 적어도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본보기였습니다. 그러나 서유럽 나라들을 위한 동지의 전술은 사정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전술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는 농업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산업 자본주의는 일부만 고도로 발달했고 나라에 비해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주 큰 부분이 아직 외국 자본에 의해 길러지고 있습니다! 서유럽, 특히 독일과 영국에서는 바로 그 반대입니다. 동지 나라에는 고리대 자본부터 시작해 아직 온갖 낡은 형태의 자본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거의 고도로 발달한 은행자본만 있습니다. 동지 나라에는 봉건 시대와 봉건 이전 시대, 심지어 부족과 야만 시대의 거대한 잔재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는 모든 것, 곧 농업, 상업, 운송, 공업이 가장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동지 나라에는 농노제의 엄청난 잔재, 빈농, 그리고 농촌에는 몰락한 중간계급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빈농조차 아직 근대적 생산, 운송, 기술, 교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에서 중간계급은 가장 낮은 층까지 대자본가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지들에게는 떠오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손잡을 수 있는 계급이 아직 있습니다. 이 계급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도움이 됩니다. 물론 정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물론 동지가 그토록 생생하게 그리듯이 온갖 방향으로 타협질하고 협정을 맺는 것, 자유주의자와 지주 사이의 균열까지 이용하는 것이 동지 나라에서는 좋았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동쪽과 서쪽의 전술 차이가 생깁니다. 우리 전술은 우리 사정에 맞춥니다. 그것은 여기서 동지의 전술이 동지의 사정에서 좋은 만큼 좋습니다.
나는 동지의 러시아 예를 특히 12, 13, 26, 27, 37, 40, 51, 52쪽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 예들이 러시아의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 무엇을 뜻하든(27쪽), 서유럽의 노동조합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훨씬 강한 무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회제에 관해서는 동지의 예가 혁명이 와 있지 않던 시기에서 가져온 것이어서(예컨대 16, 26, 41, 51쪽)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는 해당하지 않거나, 동지가 빈농과 소부르주아의 정당을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 사정과 너무나 달라서(12, 37, 40, 41, 51쪽) 우리 사정에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습니다.[12]
동지, 동지의 완전히 틀린 판단, 동지의 책의 완전한 그릇됨,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동지와 의견을 같이하는 모스크바 집행위원회의 전술은 오직 동지가 우리 사정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데서, 더 정확히 말하면 동지가 아는 것에서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고 너무 러시아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고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세계혁명의 행복과 불행이 여기에 달려 있으므로 이것을 여기서 아주 날카롭게 되풀이해야 하는데, 동지들이 이 전술을 고수한다면 동지도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도 서유럽 혁명을, 따라서 세계혁명을 이끌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지는 묻습니다. 세계를 바꾸려는 너희가 의회 분파 하나 만들지 못하느냐?
우리는 답합니다. 동지 자신의 이 책이 이미, 이 뒤의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곧바로 노동운동을 잘못된 길로, 파멸로 이끈다는 증거입니다.
이 책은 서유럽의 노동자들에게 환상을, 불가능한 것을 보여 줍니다. 혁명에서 부르주아와의 타협을.
이 책은 있지도 않은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 줍니다. 서유럽의 부르주아가 혁명에서 갈라져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의회에서 사회애국주의자와 동요하는(!) 분자와 타협하는 것이 여기서 좋은 것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여 주지만, 그것은 거의 재앙만 가져옵니다.
동지의 책은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를 늪으로 되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늪에서 아주 큰 노력으로도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제 막 빠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를 샤이데만, 클라인스, 르노델, 카우츠키, 맥도널드, 롱게, 반데르벨데, 브란팅, 트룰스트라가 우리를 빠뜨린 늪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이 책은 그들에게,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이것을 알아본다면 그들에게도 큰 기쁨밖에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공산주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베른슈타인의 책이 혁명 이전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동지의 첫 번째 좋지 않은 책입니다. 서유럽에게는 있을 수 있는 가장 나쁜 책입니다.
「좌익」 동지들, 우리는 굳게 단결하고, 아래로부터 모든 것을 함께 시작하며, 제3인터내셔널 안에서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 모든 사람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해야 합니다.[13]
이제 의회제에 관한 이 모든 논의에서 결론을 끌어낸다면, 그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회제를 위한 동지의 세 논거는 아주 적은 것만 뜻하거나 틀렸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 문제에서와 꼭 같이 이 점에서도 동지의 전술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재앙입니다.
의회제 주석
- 처음에 나는 이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카프 폭동 때 스파르타쿠스단의 태도와, 이 문제에서도 기회주의적인 동지의 기회주의적 소책자가 이것이 몹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
- [엮은이 주] 안톤 판네쿠크, 「세계혁명의 발전과 공산주의의 전술」(앞의 글). ↩
- 서유럽, 미국, 영국 식민지의 이 큰 영향력, 이 이데올로기 전체를 동유럽, 터키, 발칸 등에서는(아시아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
- [엮은이 주] 안톤 판네쿠크, 「세계혁명의 발전과 공산주의의 전술」(앞의 글), 991~992쪽. ↩
- 리프크네히트 동지의 예는 바로 우리 전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혁명 전, 제국주의가 권력의 정점에 있고 전시법으로 모든 움직임을 억누르던 때에는 그는 의회에서의 항의로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에서는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자기 운명을 손에 쥐자마자 우리는 의회제를 버려야 합니다. ↩
- 영국에는 자본을 지원할 수 있는 빈농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대신 자본주의와 결부된 훨씬 더 큰 중간계급이 있습니다. ↩
- 영국에는 다른 어디보다도 늘 기회주의의 가장 큰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질과 본능과 경험으로, 그러나 어쩌면 깊은 연구로는 그만큼 아니어서, 그러니 우연히, 좌익 공산주의의 그토록 훌륭한 선구자였던 우리 동지 실비아 팽크허스트도 생각을 바꾼 듯합니다. 그녀는 통일(!)이라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반의회주의를, 그리고 그와 함께 기회주의에 맞선 자기 투쟁의 축을 버립니다. 그로써 그녀는 수천 명의 영국 노동 지도자들이 그녀보다 앞서 간 길을 갑니다. 모든 결과를 거느린 기회주의에 대한 굴복으로, 그리고 끝내 부르주아지에 대한 굴복으로.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레닌 동지, 동지가 그녀를, 영국에서 유일하게 두려움 없고 일관된 지도자인 그녀를 그리로 이끌고 설득했다는 것, 그것은 러시아 혁명과 세계혁명에 대한 타격입니다. ↩
- 전쟁으로 프롤레타리아화가 엄청나게 진전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적이지 않은 모든 것(거의 모든 것)은 자본주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필요하다면 무기를 들고 자본주의를 지키며, 공산주의에 적대적입니다. ↩
- 여기서 이것을 자세히 증명할 지면이 없습니다. 소책자 『공산주의의 기초』에서 나는 이것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
- 우리 네덜란드인은 이것을 잘 압니다. 우리는 작지만 식민지 때문에 고도로 제국주의적인 우리나라에서 「균열」이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적이든 다른 것이든 민주주의 정당이 더는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인조차, 불행히도 서유럽을 러시아에 비추어 판단하는 듯한 러시아인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
- 이 「순수한」 노동자 정부가 여기에 들어설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동지들은 어쩌면 여기서도 다시 러시아의 예(케렌스키)에 오도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래에서 나는 왜 이 경우에, 독일의 3월에 이 「순수한」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하지 않아야 했는지 보여 주겠습니다. ↩
- 이 러시아 예들을 모두 다루면 너무 단조로워질 것입니다. 독자들께 모두 찾아 읽어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위에서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 개인적으로 나는 혁명이 아직 가깝지 않고 노동자들이 아직 혁명을 할 만큼 강하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의회제를 아직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에는 의회 대표에 대한 가장 엄격한 통제와 비판이 필요합니다. 다른 동지들은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