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

반당 그룹 사건

스탈린의 옛 동료들은 왜 흐루쇼프를 몰아내려다 오히려 밀려났는가?

1957년 6월,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를 비롯한 주석단 다수파는 비밀연설과 개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한 흐루쇼프를 제1서기직에서 몰아내려 했다. 흐루쇼프는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넘겼고, 주코프의 도움으로 소집된 중앙위원들이 그를 지지했다. 다수파는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어 패배했다.

한 사람이 사라진 자리, 스탈린 사후 3년의 권력 지형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했을 때, 소련은 한 인물이 당과 국가를 동시에 움켜쥐던 체제에서 제도화된 후계 절차 없는 공백으로 빠져들었다. 당일 밤 긴급 소집된 합동회의에서 권력은 서류상 분할되었다: 말렌코프가 각료회의 의장, 베리야가 내무장관 겸 제1부총리, 몰로토프가 외무장관, 불가닌이 국방장관을 맡았다. 흐루쇼프는 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을 이끌었지만, 이 자리는 스탈린 사후 잠정 폐지된 총서기직보다 한참 낮았다. 장례 행렬에서 그는 3열에 섰을 뿐이었다.

진짜 투쟁은 장례식 이후에 시작되었다. 베리야는 국가보안기관을 장악한 채 100일 동안 사면령, 민족간부 우대, 동서독 중립 통일안까지 쏟아내며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흐루쇼프는 말렌코프와 손잡고 1953년 6월 26일 각료회의 도중 주코프 원수의 장교들에게 베리야를 체포시켰고, 12월 처형했다. 소련 최고 권력투쟁의 마지막 총살이었다.

다음 표적은 말렌코프였다. 그는 총리로서 경공업·소비재 우선을 내걸었으나, 당 간부들의 '봉투' 수당을 폐지해 관료들의 분노를 샀다. 흐루쇼프는 이 틈을 타 1953년 9월 제1서기직을 부활시켜 장악한 뒤, 중공업 우선이라는 정통 노선을 앞세워 1955년 2월 말렌코프를 총리직에서 끌어내렸다. 후임 총리로는 무해한 불가닌이 앉았다. 몰로토프는 유고슬라비아 화해에 반대하다 1956년 외무장관직을 잃었다. 스탈린 사후 3년 만에 흐루쇼프는 베리야, 말렌코프, 몰로토프라는 세 경쟁자를 차례로 밀어내며 실질적 1인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불완전했다. 패배한 경쟁자들(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은 여전히 주석단 정식 위원으로 남아 있었고, 보로실로프도 이들 편에 섰다. 이 '옛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신성모독하는 일은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전 생애에 대한 부정이었다. 흐루쇼프는 1955년 12월 31일 포스펠로프 위원회를 설치해 대숙청 문서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위원회가 1934년 제17차 당대회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인민의 적'으로 몰려 848명이 처형되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자, 흐루쇼프는 이 폭탄을 제20차 당대회 폐회 직전 비공개 세션에서 터뜨리기로 결심했다. 주석단 다수파는 이 연설 자체에 반대했고, 이미 그 순간부터 1957년 6월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시작되고 있었다.

포스펠로프 위원회, 숫자가 말하게 하다

1955년 12월 31일, 흐루쇼프의 제안으로 당 중앙위원회 주석단은 포스펠로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리스토프·시베르니크·코마로프와 KGB·검찰 인력이 투입된 이 위원회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1934년 제17차 당대회, '승리자들의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과 대의원들이 1937~1938년 사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그 전모를 밝히는 것.

위원회는 한 달 남짓 작업한 끝에 1956년 2월 9일 약 70쪽 분량의 보고서를 주석단에 제출했다. 그 내용은 당 간부들조차 알지 못했던 숫자들로 가득했다. 1937~1938년 2년 동안 150만 명 이상이 '반소비에트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중 68만 5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제17차 대회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반혁명분자'로 몰렸고 848명이 총살되었다. 선출된 중앙위원·후보위원 139명 중 98명이 '인민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보고서는 NKVD의 대량 체포 할당제, 고문을 통한 허위 자백 강요, 스탈린이 직접 서명한 처형 명령을 낱낱이 적시했으며, 결론은 명백했다: '반세기 당 역사에서 1937~1938년의 대량 탄압보다 더 무겁고 쓰라린 페이지는 없었다.'

주석단은 충격에 휩싸였다. 보고자 포스펠로프조차 목소리를 떨며 눈물을 보였다고 미코얀이 회고했다. 그러나 충격이 곧 합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월 9일 회의에서 몰로토프는 '스탈린은 위대한 지도자, 레닌의 위업을 계승한 자'라는 표현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가노비치는 '냉철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고,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이 적들과 싸우다 사나워졌다'고 항변했다. 반면 사부로프는 '이게 무슨 공산주의인가, 용서할 수 없다'고 반박했고, 말렌코프는 '당에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지지했다. 흐루쇼프는 토론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스탈린은 당을 파괴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진실을 말할 용기를 내자.'

일주일 전인 2월 1일 회의에서는 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수감 중이던 전 NKVD 수사관 로도스를 주석단 앞에 세워 심문했다. 코시오르와 추바르 같은 정치국원들을 어떻게 자백시켰느냐는 질문에 로도스는 태연히 답했다: '당이 그들이 인민의 적이라고 말했으니, 나는 수사관으로서 자백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닭의 시야를 가진 보잘것없는 인간', 흐루쇼프가 비밀연설에서 이렇게 묘사한 그가 바로 당의 저명한 활동가들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 장면은 스탈린 체제의 작동 방식을 주석단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리스토프가 '진실을 말할 용기가 우리에게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질문은 이미 수사적인 것이었다.

논쟁 끝에 2월 13일 주석단은 결정을 내렸다: 대회 폐막 후 비공개 회의에서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보고를 흐루쇼프가 직접 하기로. 미코얀은 포스펠로프가 위원회 보고자로서 발표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라고 제안했으나, 흐루쇼프는 '제1서기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라며 자신이 나섰다. 대의원들이 충격으로 지도부 선거에서 보복할 가능성을 우려해, 보고는 선거가 끝난 후로 배치하고 토론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대회에 앞서 대의원들에게는 레닌의 '유언'과 '민족문제에 관한 편지'가 배포되었다: 스탈린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미리부터 흔들기 위한 포석이었다.

2월 18일 포스펠로프와 아리스토프가 초안을, 셰필로프가 보완 작업을 거쳐 2월 19일 흐루쇼프가 최종 구술했다. 이 과정에서 포스펠로프 보고서의 핵심 결론 하나가 빠졌다: 트로츠키스트·부하린파 '반대파 블록' 자체가 NKVD의 조작이라는 지적은 삭제되었다. 흐루쇼프의 보고는 오직 '충성스러운 당원'들에 대한 탄압만을 문제 삼고, 반대파 숙청의 정당성은 건드리지 않았다. 집단화와 기근, 일반 시민에 대한 탄압도 보고의 범위 밖이었다. 2월 25일 자정을 넘긴 시각, 1,430명의 대의원 앞에서 니콜라이 불가닌의 사회로 4시간 동안의 낭독이 시작되었다.

7 대 4, 그리고 움직이지 않은 탱크

1957년 6월 18일 화요일 오후, 크렘린의 불가닌 집무실에서 각료회의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안건은 레닌그라드 건설 250주년 행사 준비였다. 그런데 갑자기 말렌코프가 끼어들었다. "레닌그라드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집단지도 원칙 위반과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동지의 중대한 실책에 대해 논의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흐루쇼프 동지의 성격을 아시지 않습니까. 자신에 관한 발언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자는 다른 분이 맡는 게 어떻겠습니까."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즉시 동의했다. 흐루쇼프는 항의했지만 6 대 2로 불가닌이 사회자로 선출되었다. 주석단 회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즉흥적인 폭발이 아니었다. 말렌코프는 사전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제거할 것이다." 음모의 핵심은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세 사람이었지만, 이들은 평소 서로를 불신하던 사이였다. 이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흐루쇼프에 대한 공동의 위기감이었다. 1956년 2월 비밀연설 이후 탈스탈린화의 물결은 이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근본부터 허물고 있었고, 1957년 5월 통과된 소브나르호스 개혁은 중앙 부처를 해체하며 이들의 제도적 기반 자체를 없애고 있었다. 여기에 흐루쇼프의 거침없는 단독 행보가 겹치며 불만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는 외교에서 농업까지 모든 분야에 개입했고, 측근들을 주석단에 올리려는 움직임을 숨기지 않았다.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자 공격은 전방위로 쏟아졌다. 말렌코프는 흐루쇼프가 "집단지도를 파괴하고 자신의 개인숭배를 키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카가노비치는 더 신랄했다. "동지가 성장할 줄 알았는데 잡초로 판명났습니다." 그는 흐루쇼프의 전국 순회를 두고 "전국을 쏟아다닌다"고 조롱했고, 1920년대 흐루쇼프의 트로츠키주의 과거까지 끄집어냈다. 몰로토프는 흐루쇼프의 모든 정책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목표치만 부풀린 축산업 캠페인은 "우익 일탈이자 모험주의"였고, 처녀지 개간은 "먼지바람만 일으켰고", 소브나르호스 개혁은 "성급하고 무모했다." 외교에서도 "위험한 지그재그"가 계속된다고 했다. 셰필로프는 흐루쇼프가 직접 발탁한 외무장관이었지만 이날 반대파에 섰다. 훗날 흐루쇼프가 결코 용서하지 않은 배신이었다.

표결 결과는 7 대 4였다.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불가닌, 사부로프가 찬성했고 페르부힌은 기권했다. 흐루쇼프, 미코얀, 수슬로프, 키리첸코가 반대했다. 주석단은 흐루쇼프를 제1서기에서 해임하고 서기국을 개편할 것을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표면상으로는 반대파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를 선출한 것은 주석단이 아니라 전원회의다. 오직 전원회의만이 나를 해임할 수 있다." 형식 논리 같았지만 실질적 힘이 뒷받침된 논리였다. 회의장 밖에서는 후보위원들이 움직였다. 주코프는 "군대는 이 결의에 반대하며, 내 명령 없이는 탱크 한 대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브레즈네프는 "우리는 전원회의에 호소하겠다"고 선언했고, 후르체바와 무히트디노프, 시베르니크도 흐루쇼프 편에 섰다. 미코얀은 재빨리 절차적 반격을 폈다. "왜 이렇게 서두릅니까? 내일이면 모든 위원이 도착할 텐데, 집단지도를 위한다는 분들이 일부 위원 없이 결정을 내리겠다는 겁니까?"

불가닌은 결국 논의를 다음 날로 연기했다. 이것이 결정적 실수였다. 흐루쇼프 측은 하룻밤 사이에 전열을 정비했다. KGB 의장 세로프와 주코프는 군용 수송기를 동원해 지방의 중앙위원들을 모스크바로 긴급 수송하기 시작했다. 수슬로프는 이 회의의 본질을 "탈스탈린화 노선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는 논리를 정리했다. 4일 동안 지속된 이 주석단 회의는 결국 아무것도 확정하지 못한 채 6월 22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7 대 4라는 숫자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

전원회의, 닷새 만에 무게중심을 옮기다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소련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8일간의 대결이었다. 주석단이 다수결로 흐루쇼프 해임을 의결했지만, 흐루쇼프는 "제1서기는 전원회의가 선출했으니 전원회의만이 해임할 수 있다"고 버텼다. 그리고 이 전원회의를 소집할 실질적 힘은 흐루쇼프 쪽에 있었다.

국방장관 주코프와 KGB 의장 세로프는 군 수송기를 동원해 전국 각지에서 흐루쇼프 지지 성향의 중앙위원들을 모스크바로 실어 날랐다. 레닌그라드 제1서기 코즐로프는 마침 도시 창건 250주년 행사에 모인 지방 간부들을 데리고 왔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푸르체바는 주석단 회의 중에도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뜨며 지지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렇게 200여 명의 중앙위원이 수도에 집결했고, 그중 20명이 서명한 '즉시 전원회의 소집' 요구서가 주석단을 압박했다. 6월 21일, 주석단 다수파는 결국 전원회의 개최를 수용했다.

전원회의의 정치적 틀을 짠 것은 수슬로프였다. 개회 첫날 그는 이 위기를 '인사' 문제가 아니라 '정치 노선'의 문제로 규정했다: 20차 당대회의 탈스탈린화 노선을 둘러싼 근본적 대립이라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흐루쇼프 개인의 거취에 대한 표결이 아니라 당의 미래 방향에 대한 선택으로 상황을 재정의했다.

결정타는 주코프가 날렸다. 그는 주석단 회의에서 가장 먼저 발언한 후보위원으로서,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가 1930년대 대숙청 당시 서명했던 체포·처형 결재 문건들을 공개했다. "이들이 바로 당과 소비에트 간부들의 체포와 총살의 주범"이라고 직격했다. 카가노비치는 "정치국 전체 구성원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반박하며 흐루쇼프를 향해 "당신은 우크라이나에서 총살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소?"라고 물었다. 흐루쇼프는 직접 답하지 않았고, 주코프는 모든 가담자를 조사해야 한다고 받아쳤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원회의에서 비공개로 처리되었고, 일반 당원들에게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전원회의 분위기는 닷새 만에 완전히 기울었다. 6월 25일, 처음에 반흐루쇼프 표결에 가담했던 불가닌·보로실로프·페르부힌·사부로프가 차례로 '잘못을 인정한다'는 연설을 했다. 말렌코프도 자신의 오류를 시인했다. 끝까지 버틴 것은 몰로토프뿐이었다. 6월 29일 최종 표결에서 반당 그룹 규탄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나, 몰로토프 혼자 기권했다.

전원회의는 말렌코프·카가노비치·몰로토프를 주석단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하고,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도 함께 축출했다. 사부로프는 주석단직을 잃었고, 페르부힌은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처형은 없었다. 흐루쇼프는 "우리는 스탈린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지켜졌다. 이것이야말로 이 전원회의가 남긴 가장 분명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구원자였던 자의 가을, 그리고 침묵한 군대

6월 전원회의에서 주코프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육군은 이 결의에 반대하며, 탱크 한 대도 내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 한 마디로 주코프는 흐루쇼프에게 군대의 무게를 실어주었고, 그 대가로 주석단 정위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4개월 뒤 그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

10월 4일, 주코프는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공식 방문을 위해 소련 해군 순양함 쿠이비셰프 호를 타고 출발했다. 그가 없는 동안 크렘린에서는 일이 진행되었다. 10월 19일, 주석단은 「육해군 당정치사업 개선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결정을 채택했다. 제목은 관료적이었으나 내용은 전쟁이었다. 군 내 정치기관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당보다 국방장관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는 고발이었다.

주코프가 귀국한 10월 26일, 그는 곧장 주석단 회의로 불려갔다. 도착하자마자 모든 직위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흐루쇼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그를 주석단에서 제거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주코프는 저항했지만 이미 늦었다. 10월 28-29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소집되어 미하일 수슬로프가 「육해군 당정치사업 개선에 관하여」 보고를 낭독했다.

고발 내용은 크게 세 갈래였다. 첫째, '비당파적 행동': 주코프는 군 내 정치기관을 축소하고 정치장교들의 권한을 지휘관 아래로 격하시켰다. 1955년 불가닌 시절 도입된 정치부·군사평의회 약화 조치를 더 밀어붙여, 당이 아니라 국방장관 개인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만들었다는 혐의였다. 둘째, '개인숭배 조장': 영화, 소책자, 강연에서 주코프를 위대한 애국전쟁의 유일한 승리자로 미화했다는 것이다. 셋째, '모험주의적 외교정책': 아이젠하워의 '열린 하늘' 제안을 지지한 것을 두고 흐루쇼프는 공개적으로 "배신의 경계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더 단순했다. 나움프가 지적하듯, 주석단은 주코프가 보나파르트, 즉 군대의 인기를 등에 업고 정권을 찬탈하려는 장군이 될까 두려워했다. 6월 전원회의에서 주코프가 보여준 힘(군용기로 중앙위원들을 실어 나르고, 탱크를 언급하며 위협한 것)이 바로 그 공포의 원천이었다. 자신을 구해준 그 힘이 이제 자신을 위협한다고 흐루쇼프는 판단했다.

전원회의에는 60명의 군 관계자가 초청되었다. 국방차관 세르게이 비류조프바실리 소콜롭스키, 해군총사령관 세르게이 고르시코프는 주코프의 '실수'를 열거했다. 이반 코네프는 "주코프가 정치에 손을 댔다"고 비판했다. 로디온 말리놉스키는 주코프가 "필요하면 국민에게 호소하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 발언은 쿠데타 의도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군인도 주코프가 실제로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나움프가 "아무도 군사반란 혐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기록한 대로다.

표결은 만장일치였다. 주코프는 주석단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고 강제 퇴역했다. 국방장관에는 말리놉스키가 임명되었다.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는 주코프 귀국 소식과 해임 소식을 같은 호에 실었다. 군부는 침묵했다. 전쟁 영웅을 잃었지만, 반란은 없었다.

패배한 자들이 살아남은 이유, 그리고 닫히지 않은 질문들

반당 그룹 사건이 남긴 가장 선명한 유산은 정치적 패배가 더 이상 처형을 뜻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몰로토프는 몽골 대사로,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 수력발전소 소장으로, 카가노비치는 우랄의 비료 공장장으로 좌천되었다. 1930년대의 스탈린이었다면 이들은 모두 총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인상적인 전환에는 금이 갔다. 흐루쇼프는 자신에게 반대한 세력의 규모를 감추기 위해 일부 처벌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다. 불가닌은 1958년까지 총리로 남았고, 보로실로프는 1960년까지 국가원수직을 유지했다.

「반당 그룹」이라는 낙인 자체가 정치적 구성물이었다. 윌리엄 토브먼이 지적했듯, 이들은 당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진정한 의미의 그룹도 아니었다. 몰로토프, 말렌코프, 카가노비치는 흐루쇼프를 제거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 외에는 서로를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거의 없는 임시 동맹에 불과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문제는 이 사건이 실제로 무엇을 해결했는가이다. 1959년 이사크 도이처는 날카로운 역설을 제시했다. 흐루쇼프의 승리는 경제 영역에서 탈스탈린화를 전진시켰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후퇴시켰다는 것이다. 주석단 다수파에 맞서 중앙위원회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을 「레닌주의적 규범」의 수호자로 내세웠으나, 승리 직후 스스로 당 제1서기와 수상을 겸임하며 스탈린 사후 유지되어 온 집단지도체제를 종결시켰다. 1957년 6월 그가 확립한 선례, 즉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최고 지도자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원칙은 아이러니하게도 1964년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 자신을 축출할 때 사용한 무기였다.

1998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편집으로 출간된 6월 전원회의 속기록은 이 사건의 역사서술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거기에는 카가노비치가 흐루쇼프에게 "당신도 우크라이나에서 총살 서류에 서명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반격한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흐루쇼프는 직접 답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는 이 문제를 기밀로 분류했다. 속기록 공개 이전에는 이 장면의 실재 여부 자체가 논쟁 대상이었으나, 문서의 존재로 흐루쇼프 역시 스탈린의 테러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반당 그룹」 공격은 자기 방어의 측면이 컸다는 해석이 힘을 얻었다.

저항이 최고위층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캄차카의 한 통조림 공장에서는 노동자 회의에서 반당 그룹을 지지한 표가 81표, 중앙위 결정을 지지한 표가 31표에 그친 사례가 있다. 공장장 해임 후 재투표로 「만장일치」가 연출되었다. 이는 흐루쇼프의 6월 승리가 전국적으로 균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주의를 청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숙청의 잔혹함은 완화되었으나 당 엘리트 내부 갈등을 제도적으로 해결할 절차는 끝내 수립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1957년 6월 적들을 살려두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지만, 7년 뒤 자신이 그 규칙에 따라 밀려날 때 그 규칙을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리가 씨앗을 심다: 1957년이 열어준 것과 닫아둔 것

1957년 6월 전원회의는 두 가지를 확정했다. 첫째, 공산당 제1서기가 주석단 다수파의 반대를 뚫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경로는 주석단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한다는 것. 둘째, 당 기구의 중간층, 즉 주코프의 군용기가 모스크바로 실어나른 공화국·주(州)당 서기들과 중앙위 간부들이 제1서기의 가장 확실한 권력 기반이라는 점. 1953년 스탈린 사후 막 결성되었던 집단지도체제는 이로써 사실상 종언을 맞았다.

그러나 확정되지 않은 것도 컸다. 첫째, 정책: 흐루쇼프의 경제 분권화(소브나르호스)와 탈스탈린화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 합의는 없었다. 6월 전원회의는 그 합의를 강요하지 않았고, 싸움을 억누른 채 미뤘다. 둘째, 후계 문제: 스탈린식 테러 없이 지도자를 교체하는 절차는 1957년에 처음 시험되었지만 정착되지 않았다. 흐루쇼프는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7년 뒤 자신을 무너뜨릴 바로 그 무기들, 즉 중앙위원회 소집을 통한 정당성 확보, 군부·KGB와의 사전 협의, 주석단 내 은밀한 포섭을 제도화했다. 1964년 10월 브레즈네프와 측근들이 흐루쇼프를 축출한 절차는 1957년의 판박이였고, 당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은 사건 당일 전문에서 "흐루쇼프 자신이 1957년 반당 그룹 축출과 탈스탈린화를 통해 심어놓은 씨앗이 결국 그를 쓰러뜨렸다"고 분석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결론이 갈리는 지점은 적어도 네 가지다. 첫째, '반당 그룹'은 진짜 그룹이었는가. 윌리엄 토브먼을 비롯한 다수의 연구자는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 사이에 흐루쇼프 제거 외의 공통 강령은 없었으며, 이들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서로를 제거하려 했던 적대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 '반당 그룹'이라는 명칭 자체가 흐루쇼프가 부여한 정치적 낙인이지 실체적 조직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

둘째, 1957년 6월의 승부는 '당내 민주주의'의 승리였는가, 군부와 KGB를 동원한 준쿠데타였는가.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라는 더 넓은 당 기관에 호소함으로써 '레닌주의적 규범'을 지켰다고 주장했으나, 1996년 사후 출간된 카가노비치의 『회상기』는 주석단의 논의가 진행 중이던 나흘 동안 흐루쇼프가 주석단 몰래 세로프(KGB)와 주코프·코네프(군)의 협조로 중앙위원들을 비행기로 소집한 것을 두고 "당 주석단에 대한 사실상의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이 대목은 1998년 전원회의 속기록이 공개된 뒤에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속기록은 중앙위원들의 발언 내용을 보여주지만, 소집 과정의 합법성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셋째,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의 역할. 1957년 7월 5일 중국공산당은 소련공산당에 보낸 메시지에서 반당 그룹을 단죄한 중앙위 결정이 "소련공산당의 단결을 강화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흐루쇼프는 이 지지를 대가로 1957년 10월 「국방신기술협정」을 체결하여 중국에 핵무기 기술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 거래가 없었다면 흐루쇼프의 국제공산주의운동 내 입지가 더 흔들렸을 것인지는 열려 있는 질문이다.

넷째, 1957년의 결말은 '스탈린주의 없는 스탈린주의 체제'를 낳았는가. 흐루쇼프는 숙적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정치적으로 매장한 뒤 주코프마저 해임하고, 1958년에는 불가닌의 총리직까지 접수하여 당·정 일인지배를 완성한 과정은, '옛 동지들을 죽이지 않는 1인 독재'라는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낳는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패배자들을 당에서 완전히 제명한 것은, 1957년의 '관용'이 일시적 타협이었을 뿐임을 보여준다.

결국 1957년 6월 전원회의가 결정적으로 해결한 것은 권력의 소재지였고, 결정적으로 열어둔 것은 그 권력을 행사할 방향이었다. 그 방향을 둘러싼 싸움은 1964년까지, 그리고 그 너머까지 계속되었다.

판결문 너머에 놓인 것: 역사가들이 아직도 논쟁하는 세 가지

1998년 첫 공개된 6월 전원회의 속기록은 이 사건에 대한 40년 묵은 질문들에 답을 주었지만, 그것이 종결시킨 논쟁보다 새로 열어젖힌 논쟁이 더 많았다. 편집자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 사건은 스탈린주의로의 회귀를 막은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곧바로 그 공식이 「투쟁 당사자들의 위선을 가리는」 불완전한 서사임을 인정했다.

과연 이 사건은 반反스탈린주의의 승리였는가, 아니면 또 다른 권력 투쟁이었는가.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는 확실히 비밀연설 이후의 개혁 노선에 반대했고, 전원회의장에서 주코프가 낭독한 문서들은 이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에 깊이 연루되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흐루쇼프 자신도 우크라이나에서 똑같은 서류에 서명한 사람이었다. 카가노비치가 전원회의에서 던진 「당신도 우크라이나에서 처형 명부에 서명하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에 흐루쇼프는 직접 답하지 않았다. 이 순간은 속기록에 남아 있고, 역사가들은 바로 그 점에서 이 사건을 반스탈린주의의 승리로 읽는 틀이 불충분하다고 본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반당 그룹에 관한 결의문은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분량의 거의 네 배에 달했는데, 이는 흐루쇼프가 스탈린보다도 자신에게 도전했던 동료들을 더 길게 매질했음을 뜻한다.

두 번째 논쟁은 흐루쇼프가 이긴 방식 자체에 관한 것이다. 주석단 다수파가 자신을 해임하려 하자 흐루쇼프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문제를 넘겼고, 거기서 승리했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레닌적 규범」의 회복, 즉 최고 기관은 주석단이 아니라 중앙위원회라는 원칙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그 중앙위원회는 흐루쇼프 자신이 임명권을 통해 수년간 구축해온 후견 네트워크의 산물이었고, 소집 자체도 주코프의 군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은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이 역설을 정확히 지적했다: 중앙위원회를 정통성의 수호자로 만든 선례가 바로 7년 뒤 흐루쇼프 자신을 무너뜨리는 제도적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브레즈네프 일파는 1957년의 교훈을 잊지 않고 중앙위원회의 주요 인물들을 사전에 포섭한 뒤에야 움직였다.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건은 소련 정치에서 무엇을 영구히 바꾸었는가. 처형 없는 숙청은 분명 새로운 선례였다. 몰로토프는 몽골 대사로,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의 수력발전소장으로, 카가노비치는 우랄의 칼륨 공장장으로 내려갔다. 1961년 당적까지 박탈당했지만, 그들은 모두 노환으로 죽었다. 이것이 스탈린 시대와의 결정적 단절이라는 데 대부분의 역사가가 동의한다. 그러나 이 선례가 과연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뜻했는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1957년 이후에도 정치 경찰은 사라지지 않았고, 당의 독점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흐루쇼프 자신도 승리 직후 자신을 구한 군대의 수장을 해임함으로써 권력의 속성이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이 사건이 열어준 것은 개혁의 가능성이 아니라, 후계 투쟁이 더 이상 피로 끝나지 않는,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었다.

한 사건, 세 개의 거울: 역사가들이 1957년을 보는 세 가지 시선

1957년 6월 전원회의는 스탈린 사후 4년간 이어져 온 집단지도체제의 실험에 종지부를 찍었다. 패배한 쪽은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였지만, 진정한 패자는 주석단이라는 제도 그 자체였다. 흐루쇼프는 주석단에서 밀렸을 때 중앙위원회로 호소했고, 중앙위원회가 응답했다. 이로써 최고 권력의 소재는 주석단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라는 선례가 세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선례 위에서 1964년 10월 흐루쇼프 자신이 무너졌다. 1957년에 '레닌적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관철된 절차가 7년 뒤 같은 이름으로 그를 삼킨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실제로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역사가들의 판단은 세 갈래로 갈린다. 첫째 해석은 정책 투쟁이었다고 본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평화공존 노선, 십일조 폐지, 소브나르호스 개혁은 스탈린주의 구간부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되돌리려 했다. 이 독법에서 6월 전원회의는 탈스탈린화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한 순간이다.

둘째 해석은 정책보다 권력의 문제였다고 반박한다. 말렌코프는 1953년 이미 소비재 우선 노선을 내세웠던 인물이었고,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는 개혁의 방향보다 흐루쇼프 개인의 독단적 통치 스타일에 반발했다. 이들은 정강은 없었고, 흐루쇼프를 농업장관으로 좌천시키는 데만 합의했다고 훗날 몰로토프가 회고했다. 이 독법에서 1957년은 이념 충돌이 아니라, 스탈린 사후의 권력 공백을 메우기 위한 투쟁이었다.

셋째 해석은 세대의 문제를 본다. 6월 전원회의에 참석한 중앙위원 411명 중 66%가 40대에서 50대 초반이었다. 1895~1900년생인 몰로토프·카가노비치 세대는 전쟁과 내전을 겪으며 당에 들어왔고, 1905~1910년생인 주류파는 급속한 산업화 시기에 입문했다. 흐루쇼프가 이끈 것은 파벌이 아니라 소비에트 관료제 내부의 세대 교체였으며, '반당 그룹' 사건은 그 교체가 유혈 없이 완료된 보기 드문 순간이었다.

셋 중 어느 것도 단독으로는 설명하지 못한다. 정책, 권력, 세대, 이 세 축이 겹쳐진 지점에 1957년의 실체가 있다. 이 사건이 최종적으로 남긴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스탈린주의로의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당 엘리트 내부의 다수 합의로 확인된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확인의 주체가 주석단이 아니라 수백 명의 지방 당 간부들로 구성된 중앙위원회였다는 점이다. 흐루쇼프는 이겼지만, 그 승리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었다.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조직할 수 있는 자에게 권력이 귀속된다는, 관료제적 정당성의 승리였다.

결과

패배한 지도자들은 처형되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되거나 당직에서 밀려났다 — 스탈린 시대와 달리 정치적 패배가 곧 죽음을 뜻하지 않게 된 전환이었다. 흐루쇼프는 권력을 굳혔으나, 결정적 도움을 준 주코프마저 몇 달 뒤 해임했다.

연표

  1. 1956.02
    비밀연설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옛 간부들과의 긴장이 커졌다.

  2. 1957.06
    주석단의 반란

    주석단 다수파가 흐루쇼프의 사임을 요구했다.

  3. 1957.06
    중앙위 전원회의

    소집된 중앙위원회가 흐루쇼프를 지지하고 다수파를 「반당 그룹」으로 규정했다.

  4. 1957.10
    주코프의 해임

    흐루쇼프가 자신을 도운 주코프마저 국방장관직에서 해임했다.

관련 인물 43명

주도 · 집행10

승리한 제1서기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

문제를 중앙위원회로 넘겨 다수파를 역전시켰다.

결정적 지원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

군용기로 중앙위원들을 소집해 흐루쇼프를 지지하게 한 뒤, 몇 달 뒤 자신도 해임됐다.

흐루쇼프 지지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주석단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한 소수 중 하나였다.

흐루쇼프 지지미하일 수슬로프1902–1982

중앙위원회에서 흐루쇼프 편에 선 이념 담당 서기였다.

흐루쇼프 측근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

흐루쇼프의 지지 세력으로 사건 이후 승진했다.

흐루쇼프 지지예카테리나 푸르체바1910–1974

상임위 후보위원으로서 흐루쇼프가 수세에 몰린 순간 직접 주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개입을 요청했다.

흐루쇼프 측근, 타협 자료 수집아베르키 아리스토프1903–1973

당시 중앙위 서기로서 반당 그룹에 대한 타협 자료를 수집해 흐루쇼프와 주코프에게 제공했으며, 사건 직후 프레지디움에 재진입했다.

흐루쇼프를 구한 콤소몰 지도자알렉산드르 셸레핀1918–1994

콤소몰 제1서기로서 195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를 적극 지지했다. 흐루쇼프를 축출하려던 반당 그룹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였다.

흐루쇼프를 구한 중앙위 조직자니콜라이 이그나토프1901–1966

당시 고리키 주당위 제1서기로, 중앙위원 전원회의에서 반당 그룹의 흐루쇼프 축출 시도를 저지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사건 직후 중앙위 서기와 간부국 정위원으로 보상받았다.

KGB 의장이반 세로프1905–1990

주코프가 유고슬라비아 방문 중이던 1957년 10월, 주석단의 「육해군 당정치사업 개선에 관하여」 결정을 준비하며 주코프 해임의 제도적 토대를 놓았다.

참여28

주저한 다수파니콜라이 불가닌1895–1975

다수파에 섰으나 즉각적 처벌은 면했고 뒤에 좌천됐다.

주저한 다수파클리멘트 보로실로프1881–1969

다수파에 가담했으나 원로 예우로 즉각적 숙청은 피했다.

주저한 다수파미하일 페르부힌1904–1978

다수파에 섰다가 강등된 기술관료였다.

주저한 다수파막심 사부로프1900–1977

다수파에 가담했다가 계획 부문에서 밀려난 관료였다.

흐루쇼프 지지자드미트리 폴랸스키1917–2001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반당 그룹'을 신랄히 비판하며 흐루쇼프를 적극 옹호했다.

정치국원 · 중앙위 서기니콜라이 벨랴예프1903–1966

중앙위 서기알렉세이 키리첸코1908–1975

중앙위 서기표트르 포스펠로프1898–1979

정치국원 · 중앙위 서기오토 빌레 쿠시넨1881–1964

중앙위원회 위원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1903–1974

중앙위원회 위원키릴 마주로프1914–1989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빌리스 라치스1904–1966

중앙위원회 위원야니스 칼른베르진슈1893–1986

중앙위원회 위원요한네스 캐빈1905–1999

중앙위원회 위원딘무하메드 쿠나예프1912–1993

중앙위원회 위원니콜라이 포드고르니1903–1983

중앙위원회 위원이반 코네프1897–1973

중앙위원회 위원키릴 모스칼렌코1902–1985

중앙위원회 위원세르게이 비류조프1904–1964

중앙위원회 위원안드레이 그레치코1903–1976

중앙위원회 위원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

중앙위원회 위원바실리 소콜롭스키1897–1968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콘스탄틴 로코솝스키1896–1968

중앙위원회 위원세묜 티모셴코1895–1970

중앙위원회 위원세묜 부됸니1883–1973

중앙위원회 위원이반 바그라먄1897–1982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니콜라이 시베르니크1888–1970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드미트리 우스티노프1908–1984

관련 용어

출처: William Taubman, Khrushchev: The Man and His EraEncyclopaedia Britannica: Anti-Party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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