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의회주의에서 해방전선으로 건너간 정치가
1943년 제2차 AVNOJ 회의를 주재해 신유고슬라비아의 수립 결정을 이끌었다.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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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크로아티아 진보민주당 창립에 참여, 변호사 활동 시작
- 1918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중앙위원
- 1919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임시 국민대표부 부의장
- 1920–1922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제헌의회 및 국민의회 의장
- 1942–1945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 의장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집단적 국가원수
- 1960정치 활동에서 은퇴
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장군이자 공군·총참모부를 이끈 군인이었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정권을 무너뜨리고 총리가 되었지만,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않은 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했다. 독일 침공 뒤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연립 내부의 갈등으로 1942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전후에는 티토의 파르티잔을 지지했으며 미하일로비치 재판에서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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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3–1942.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다민족 저항 연합을 대표한 보스니아 정치가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교사 출신의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카진 지역에서 대중적 기반을 쌓았다. 그는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제안을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으며,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유대인 피란민을 숨겨 구했다. 1942년 아브노이 초대 회의에서 집행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성을 보여 주었다. 수체스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194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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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s–1930s카진 지역 교사
- 1935유고슬라비아 왕국 의회 의원
- 1941우스타샤 협력 거부,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2카진 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2아브노이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43네레트바·수체스카 전투 참가
- 1944국민해방훈장 추서
왕정과 민족해방 세력 사이의 타협 정치가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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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21유고슬라비아 의용군 복무 후 법학 공부
- 1920년대브르보브스코에서 변호사 개업
- 1938유고슬라비아 국민의회 의원, 크로아티아 농민당
- 1939–1941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초대 수반
- 1944.06–11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 총리
- 1944.06비스 협정에서 티토와 협상
- 1944.11베오그라드 협정 초안에 서명, 연립정부와 섭정 구상
- 1945티토 정부 외무장관
비동맹을 선택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지도자
1948년 코민포름 결별은 소련권 바깥의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택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파르티잔 투쟁을 이끌고 전후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했다. 1948년 스탈린과 결별한 뒤에도 사회주의 연방을 이끌며 비동맹 노선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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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민족해방투쟁 지도
- 1945–1980유고슬라비아 연방 지도자
- 1948스탈린·코민포름과 결별
왕정 복고를 지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 지휘관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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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1913세르비아군 사관후보생, 발칸 전쟁 참전
- 1914–1918세르비아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35–1936불가리아 주재 군사 attaché
- 1936–1939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군사 attaché, 참모 장교
- 1941유고슬라비아 제2군 참모장 대리
- 1941–1945유고슬라비아 국내군 체트니크 지휘관
- 1946반역·전쟁범죄 재판, 처형
전쟁을 피하려다 추축국의 압박에 밀린 섭정
1941년 3월 25일 삼국동맹 가입 이틀 뒤 군부 쿠데타로 섭정직에서 쫓겨났다.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는 알렉산다르 1세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한 섭정공이었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을 완화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운동과 타협하려 했으며, 1939년 크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쟁이 확대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실질적 보장이 약해지자 중립을 지키려던 외교는 독일 압력에 대한 양보로 기울었고, 1941년 삼국동맹 가입은 군부 쿠데타와 그의 실각을 불렀다. 그는 전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76년 사망했고, 2011년 세르비아 법원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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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 1912–1921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수학, 제1차 세계대전 복무
- 1929베오그라드 현대미술관 설립과 후원
- 1934–1939유고슬라비아 섭정평의회 의장
- 1939크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추진
- 1941삼국동맹 가입 뒤 군부 쿠데타로 실각
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랑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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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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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파르티잔 전쟁을 조직한 참모 장교
1948년 8월, 루마니아로 향하던 국경에서 그의 전쟁 경력은 망명 시도와 함께 끝났다.
아르소 요바노비치는 왕립 유고슬라비아군 출신의 교육받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의 참모총장을 맡아 작전 지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결별에서 소련의 입장을 지지하며 정치적 고립에 놓였다. 루마니아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사망했으며, 공식 발표와 후대 증언이 엇갈려 죽음의 경위는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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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1928베오그라드 왕립 군사학교 하급과정 생도
- 1932–1934왕립 군사학교 고급과정 수학
- 1939『보병대대 전술』 출간, 보병학교 교관·지휘관
- 1941몬테네그로 봉기 임시 최고사령부 사령관
- 1942–1945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참모총장
- 1945유고슬라비아군 초대 총참모장
- 1946–1948모스크바 보로실로프 고등군사학교 유학
- 1948인포르비로 결의 지지, 루마니아 탈출 시도 중 사망
스탈린이 '영국 스파이'로 지목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외교관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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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박사
- 1939이스탄불에서 티토를 만나 KPJ에 입당
- 1942–1943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연합군 군사 임무단 연락장교
- 1945–1948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
- 1951–1952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52–1956주영국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60–1967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 사무총장
코민포름 숙청을 지휘한 티토의 3인자이자 유고 중앙집권의 수호자
내무장관 란코비치는 1948년 분열 직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티토와 카르델에 이은 유고슬라비아 제3의 권력자로, 내무장관과 국가보안국(UDBA) 수장으로서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반스탈린 숙청을 총괄했다. 골리오토크 강제수용소를 건설하고 수만 명의 '코민포름주의자'들을 체포·투옥시켰으며,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강경 진압 정책을 주도했다. 연방 분권화에 반대하고 세르비아 중심의 중앙집권을 고수하다가 1966년 티토의 침실 도청 스캔들로 실각했으며,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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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9–1935공산주의 활동으로 체포·투옥
- 1941–1945파르티잔 최고사령부에서 복무, 1944년 OZNA 창설
- 1946–1953유고슬라비아 내무장관 겸 UDBA 수장
- 1948–1955코민포름 반대 숙청 총괄, 골리오토크 수용소 건설
- 1963–1966유고슬라비아 부통령
- 1966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전직에서 해임, 당에서 제명
노동자 자주관리의 수석 이론가이자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료
노동자 정당들이 의회주의에 빠져 익사한다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티토주의의 핵심 이론가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주요 설계자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는 질라스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 환상'을 신랄히 비판했으며, 전후 혁명적 기회를 놓친 서유럽 공산당의 기회주의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에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구별되는 분권적 자주관리 모델을 이론화했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헌법의 초안을 주도하며 공화국 간 자율성을 대폭 확대했다.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집단지도체제의 핵심 인물로 남았으며, 그의 헌법 사상은 연방 해체 후에도 후속 국가들의 정치 체제에 흔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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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1941슬로베니아 공산당 지도부
-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및 파르티잔 지도부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수상
- 1948–1953유고슬라비아 외무장관
- 1963–1967유고슬라비아 연방의회 의장
- 1974–1979유고슬라비아 연방 간부회의 위원
- 1950년대–1970년대노동자 자주관리 이론 수립
코민포름에서 서유럽 공산당을 공격하고, 훗날 『새 계급』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해부한 유고슬라비아 반체제 인사
나는 공산주의의 전 길을 걸었다: 젊은 혁명가에서 독실한 스탈린주의자로, 그리고 완전한 환멸에 이르기까지.
몬테네그로 출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로, 파르티잔 투쟁과 전후 국가 건설에서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하나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 카르델과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주의적 기회주의'를 신랄히 비판했으며, 그의 회고록은 이 회의의 내부 동학에 관한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당내 민주화와 관료 특권층 비판을 제기하다 1954년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었고, 수감 중 밀반출한 『새 계급』에서 공산당 관료가 착취적 지배계급으로 변했다고 주장해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30년 넘게 투옥과 감시 속에서도 저술을 이어간 동유럽 최초의 저명한 공산권 반체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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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6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 체포 및 수감
- 1937–1939KPJ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 1941–1945몬테네그로 파르티잔 봉기 지도, 최고사령부 선전 담당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통령, 민족의회 의장
- 1953–1954『보르바』에 일당제 비판 연재, 당에서 축출
- 1956–1966반체제 저술로 두 차례 수감, 『새 계급』·『스탈린과의 대화』 해외 출간
- 1966–1995베오그라드에서 감시 속 자유, 저술 활동 지속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설계한 유고슬라비아의 혁명가
자주관리 도입을 앞둔 어느 연설에서, 노동 대중은 '정당의 전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유고슬라비아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슬로베니아 해방전선과 파르티잔 저항운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전후 초대 슬로베니아 정부 주석을 지낸 뒤 연방 경제 담당 장관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별 이후 소련식 중앙집권 계획에서 노동자 자주관리로의 전환을 설계한 핵심 경제 이론가였다. 그의 1951년 「전환기 경제에 관한 테제」는 상품생산과 가치법칙이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작동함을 인정함으로써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정당화한 대표적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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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1945슬로베니아 해방전선 정치서기 겸 파르티잔 총사령부 정치위원
- 1945–1946슬로베니아 인민공화국 초대 정부 주석
- 1946–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경제평의회 의장 겸 산업장관
- 1947–1952제1차 5개년 계획 입안·집행 총괄
- 1948–195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 위원
공화국의 이해와 연방 사회주의를 조율한 공산주의 지도자
1948년 2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유고슬라비아 비난을 직접 들은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블라디미르 바카리치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치의 핵심 조정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조직과 해방 권력 건설에 참여했고, 전후에는 크로아티아의 국가·당 기구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스탈린의 압박을 직접 마주했으며, 이후 티토의 독자 노선을 지지했다. 그는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자기관리 사회주의를 옹호했지만, 티토의 후원과 당의 권력 구조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신중한 지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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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5자그레브 대학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193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입당
- 1941–1943크로아티아 파르티잔 해방운동의 정치위원
- 1944–1969크로아티아 공산당 및 공산주의자동맹의 최고 지도자
- 1945–1953크로아티아 인민공화국 집행위원회 의장
- 1948에드바르드 카르델리와 함께 모스크바 회담에 파견
- 1953–1963크로아티아 의회 의장
- 1974–1983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직 위원
전쟁 인구 손실을 다시 계산한 인구학자
블라디미르 제르야비치는 크로아티아계 경제학자이자 인구학자로, 경제개발 자문과 인구 통계를 연구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의 유고슬라비아 인명 손실을 분석한 연구자로 알려졌다. 그는 전후 인구조사와 예상 인구를 비교해 실제 사망자와 인구학적 손실을 구분하려 했고, 1989년 유고슬라비아의 전쟁 사망자를 약 102만 7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수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을 포함한 여러 세력의 희생과 전후 보복을 둘러싼 기존 서사를 재검토하게 했지만, 자료와 방법을 둘러싼 비판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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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크리시에서 출생
- 1930년대자그레브 경제학부 졸업, 민간 부문에서 근무
- 1945–1958유고슬라비아 산업부·석유연구소·경제연구소 등에서 근무
- 1958–1982해외 산업개발 자문
- 1964–1982유엔 아프리카 경제위원회 산업개발 자문 및 인구 분석 전문가
- 1989제2차 세계대전 유고슬라비아 인구 손실 연구 발표
- 1990년대전쟁 및 전후 희생자 추산에 관한 저술 지속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 이어진 파르티잔 지휘관
1944년 10월 20일, 다프체비치가 지휘한 유고슬라비아군과 소련군이 베오그라드에 입성했다.
페코 다프체비치는 스페인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친 몬테네그로계 공산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몬테네그로 봉기에서 출발해 사단과 군단을 지휘했고, 1944년 베오그라드 해방에서 소련군과 함께 작전한 제1군집단을 이끌었다. 1945년 제1군 사령관으로서 스렘 전선 돌파와 전후 군대의 정규화를 맡았으며, 훗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전투조직이 국가의 상설 군대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긴 정치적 긴장을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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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1939스페인 공화국군 국제여단 자원병, 중대 지휘관
- 1941로브첸 파르티잔 분견대 사령관, 몬테네그로 봉기
- 1942제4 몬테네그로 프롤레타리아 충격여단 사령관
- 1942–1943제2 프롤레타리아 사단 사령관
- 1943–1944제2 충격군단 사령관
- 1944제1군집단 사령관, 베오그라드 작전
- 1945–1949제1군 사령관, 이어 유고슬라비아군 총감찰관
- 1953–1955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총참모장
전쟁 희생자 수를 다시 계산한 독립 통계학자
1985년 그는 전쟁 손실을 실제 손실과 인구학적 손실로 나누어 제시했다.
보골류브 코초비치는 사라예보 출신의 세르비아계 법률가이자 통계학자로,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인구와 전쟁 손실을 분석했다. 그는 1985년 저서에서 1921년·1931년·1948년 인구조사를 비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실제 손실을 약 101만 4천 명, 인구학적 손실을 약 198만 5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연구는 국가가 제시한 170만 6천 명이라는 수치와 구별되는 독립적 추계로, 전쟁 희생자 수를 둘러싼 역사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7–1952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 조교
- 1949파리에서 법학 박사 취득
- 1956시카고 루스벨트대학교 경제학 석사 취득
- 1963–1984파리에서 미국 기업의 행정·재무 책임자로 활동
- 1985『유고슬라비아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출간
- 1997『과학, 민족주의와 선전』 출간
- 2005『신화의 장례』 출간
망명 속에서 왕정의 정통성을 지킨 마지막 국왕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국왕 즉위, 섭정 아래
- 1934–1941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 1941.03.27쿠데타 뒤 성년 국왕으로 선포
- 1941.04–06추축국 침공 뒤 정부와 함께 망명
- 1941–1945런던 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의 국가원수
- 1944.09유고슬라비아 군인들에게 티토 합류를 호소
- 1945왕정 폐지로 폐위
- 1945–1970미국에서 망명 생활
- 1970미국 덴버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