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개방으로 중국의 궤도를 바꾼 실권자
1978년 이후의 전환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다.
프랑스와 모스크바에서 혁명운동을 경험한 중국 공산당 지도자다. 문화대혁명 시기 두 차례 실각 뒤 복귀해 1978년부터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을 주도했다.
경력 연표
- 1926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학습
- 1978–1992중국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개혁개방 주도
- 1979미국 방문과 대외 개방의 상징적 출발
관련 역사 사건
프랑스에서의 혁명적 형성 (1920–1926)
1919년 10월, 15세의 덩샤오핑은 충칭 학교를 갓 졸업하고 근공검학(勤工儉學) 유학 프로그램에 참여해 마르세유로 향하는 프랑스 여객선에 올랐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선발된 4,000여 명의 중국인 유학생 중 최연소였다. 프랑스에서 덩은 학업보다 노동에 치중해야 했다: 바이외와 샤티용 중학교를 잠시 다녔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르노 자동차 공장과 르크뢰조 제철소에서 기계공·소방수·웨이터로 일하며 보냈다. 라가렌-콜롱브의 노동자 기숙사에서 저우언라이, 천이, 리리싼 등 미래의 중국 공산당 핵심 인물들과 교류했고, 이들과 함께 마르크스주의 서클에 참여했다. 1923년 6월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유럽지부에 가입했고, 1924년 하반기에는 중국 공산당에 정식 입당해 유럽지부 간부로 활동했다. 1926년 1월 프랑스 경찰이 그의 기숙사를 급습했을 때는 이미 급히 떠난 뒤였다. 경찰은 그의 방에서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와 중국어·프랑스어 선전물 더미를 압수했다. 프랑스에서의 5년은 덩샤오핑에게 혁명적 정체성과 국제적 감각, 그리고 평생 그를 따라다닌 공장 노동의 구체적인 경험을 남겼다.
문화대혁명과 두 차례 실각 (1966–1977)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덩샤오핑은 류샤오치에 이은 '당내 2인자 자본주의 길을 걷는 실권파'로 지목되어 모든 직위에서 해임됐다. 1967년 여름, 조반파(造反派)는 덩과 그의 부인을 투쟁대회에 끌어내 모욕하고 구타한 뒤 자택에 연금했다. 홍위병은 그의 장남 덩푸팡을 고문한 끝에 4층 창밖으로 밀쳐 평생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1969년 10월, 덩은 아내·계모와 함께 장시성 신젠현의 트랙터 공장으로 보내져 일반 노동자로 일하게 됐다.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선반(旋盤) 앞에 서서 하루 여덟 시간 금속을 깎았다. 퇴근 후에는 소련 공장 시절 배운 롤링 담배를 피우며 마르크스주의 고전과 24사를 읽었다.
그러나 린뱌오의 몰락(1971년) 이후 마오는 병약한 저우언라이의 후계로 덩을 다시 떠올렸다. 1973년 2월 베이징으로 복귀한 덩은 부총리가 되어 경제 재건 작업을 주도했고, 1975년 1월에는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됐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성과를 훼손할 것을 우려한 마오와 장칭의 '4인방'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1975년 말부터 덩은 공개 자아비판을 강요당했고, 1976년 4월 톈안먼 사건 이후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혀 다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연금됐다. 마오 사후 4인방이 체포되고서야 덩은 1977년 7월 복권됐다. 4년간의 트랙터 공장 노동과 두 차례의 정치적 몰락은 덩샤오핑에게 마오주의적 대중운동이 경제와 당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뼈저리게 각인시켰고, 이 경험은 후일 개혁개방의 실용주의적 전환을 밑받침하는 정치적 자산이 됐다.
1978년 3중전회와 개혁개방의 출발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3중전회)는 중국 현대사에서 단일 회의로서는 가장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마오쩌둥 사후 2년간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무릇(凡是)' 노선('무릇 마오 주석이 결정한 것은 굳게 지키고, 무릇 마오 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따른다')이 당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덩샤오핑은 1977년 복권 직후부터 '두 개의 무릇은 마르크스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공개 반박하며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 논쟁을 촉발했다.
3중전회를 앞둔 11월 중앙공작회의에서 덩의 측근들은 화궈펑 진영을 압도했고, 회의의 의제 자체가 당초의 농업·경제 문제에서 정치 노선 전반의 전환으로 확장되었다. 덩은 12월 13일 폐막 연설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단결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解放思想,实事求是,团结一致向前看)에서 사상 해방 없이는 4개 현대화도 없다고 선언하며, 이 연설을 사실상 3중전회의 주제 보고로 자리매김했다.
3중전회는 마오의 '계급투쟁을 핵심으로(以階級鬥爭為綱)'라는 노선을 폐기하고 당의 모든 역량을 경제 건설에 집중할 것을 공식 결정했다. 농업 개혁, 대외 개방의 원칙적 승인, 당내 민주주의와 법제 강화도 함께 통과되었다. 이 회의로 덩샤오핑은 공식 직함(부총리)을 넘어 중국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개혁개방의 정치적 토대가 놓였다. 덩의 노선은 사유재산과 시장 경쟁을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중국특색 사회주의'로 수렴되었으며, 이 전환은 20세기 후반 세계 경제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물질적 변화를 촉발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1992년 초, 톈안먼 사건 이후 개혁에 제동이 걸린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88세의 덩샤오핑은 광저우, 선전, 주하이를 거쳐 상하이에서 춘절을 맞는 남쪽 순회에 나섰다. 이 여정에서 그는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 수단일 뿐'이라며 개혁을 주저하는 보수파를 공개 비판했고,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추상적인 논쟁에 얽매이지 말라'고 촉구했다. 베이징 중앙 언론은 처음에 이 순회를 철저히 무시했으나, 덩은 '황푸핑'이라는 필명으로 상하이 해방일보에 개혁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민간에 순회 소식이 퍼지고 지지 여론이 들끓자 장쩌민도 공개 지지로 돌아섰다. 이 남순강화는 1989년 이후 위축됐던 개혁개방 노선을 확정적으로 재출범시켰고,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방향을 시장화 쪽으로 돌이킬 수 없게 고정한 정치적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