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

Hồ Chí Minh
베트남 베트남 1890–1969 ○ 자연사

프랑스, 일본, 미국을 차례로 상대해 베트남 독립을 이끈 혁명가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 대미 항전 라디오 연설(1966)

베트남의 혁명가. 30년 망명 중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베트남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5년 비엣민을 이끌어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미국과 맞서 북베트남을 이끈 독립의 상징.

경력 연표

1890–1911년 응에안 — 응우옌 신 꿍에서 응우옌 탓 타인까지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응에안 성 낌리엔 마을에서 응우옌 신 꿍(Nguyễn Sinh Cung)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응에안은 베트남 중북부의 가난한 농촌 지역으로, 가뭄과 태풍이 번갈아 들이닥치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유교 학문의 전통이 깊었다.

아버지 응우옌 신 삭(Nguyễn Sinh Sắc)은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인물로, 응우옌 왕조 과거에서 부방(副榜), 즉 전국 2등급에 급제한 유학자였다. 그는 프랑스 식민 지배에 협력하는 한편 민족주의적 신념을 지닌 복합적 인물이었다. 어머니 호앙 티 로안(Hoàng Thị Loan)은 넷째 아이를 낳다가 32세로 사망했다.

꼬마 응우옌 신 꿍은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10세에 유교 전통에 따라 '책 이름'(공식 이름)인 응우옌 탓 타인(Nguyễn Tất Thành, '반드시 성취하리라')을 받았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후에(Huế)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꾸옥혹(Quốc Học) 학교에 다녔다. 그의 후일 측근이 될 팜반동, 보응우옌잡, 그리고 훗날 정적이 될 응오딘지엠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연날리기와 낚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식민지 현실은 일찍부터 그를 에워쌌다. 1908년 후에에서 일어난 농민 시위에 연루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1911년, 21세의 응우옌 탓 타인이 '반 바'(Văn Ba)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상선의 주방 보조로 취직해 사이공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30년간의 망명이 그날 시작되었다.

그가 태어난 낌리엔 마을의 초가집은 오늘날 베트남 전역에서 찾아오는 순례지가 되어 있다. 응에안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반세기 만에 식민제국을 무릎 꿇린 혁명가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했을까.

1911–1919년 세계의 부두 — 주방 보조에서 혁명가의 눈을 뜨기까지

1911년 6월 5일, 21세의 응우옌 탓 타인은 '반 바'라는 가명으로 프랑스 상선 아미랄 드 라투슈-트레빌 호의 주방 보조로 취직해 사이공을 떠났다. 한 달 후 마르세유에 도착했지만 프랑스 식민학교 입학에 실패했다. 그는 세계를 떠돌기로 결심한다.

1912년 배는 리우데자네이루에 닿았다. 열병에 걸린 그는 선원들에게 버려져 산타테레자 빈민가에서 요리사로 일하며 회복했다. 이곳에서 흑인 노동운동 지도자 조제 레안드루 다 실바를 만나 8시간 노동제와 평등임금 투쟁을 목격했다. 훗날 그는 국제연대라는 글에서 다 실바가 경찰의 총격을 받고 구급차에서 인터내셔널을 부른 장면을 기록했다.

1912년 가을 보스턴에 도착, 파커 하우스 호텔에서 제빵사로 일했다는 기록과 편지가 남아 있다. 뉴욕 할렘에서 마커스 가비의 범아프리카주의 집회에 참석했고,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경험들은 식민지 청년의 시야를 베트남 너머로 넓혔다.

1914년 무렵 런던으로 건너가 명성 높은 칼튼 호텔에서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주방에서 일했다. 퇴근 후 빈민가 하숙방에서 그는 제국 수도 런던의 부와 식민지의 가난 사이의 간극을 뼈저리게 느꼈다.

1917년 파리에 정착할 무렵, 이 젊은 베트남인은 6년간 대서양과 지중해를 오가며 프랑스·미국·영국·브라질·서아프리카의 부두를 거친 노동자였다. 계급과 인종, 식민지라는 삼중 억압을 몸으로 겪은 8년의 유랑은 그를 1919년 베르사유 평화회의장에 청원서를 들고 나타난 정치적 인간으로 만들었다.

1919년 베르사유 — 빌린 양복을 입은 한 식민지 청년이 세계에 호소하다

1919년 6월, 파리. 세계의 지도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 후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모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왔다.

한 베트남 청년이 줄무늬 양복과 중산모를 빌려 입고 평화회담장 밖에 나타났다. 자신을 '응우옌 아이 꾸옥'(응우옌 애국자)이라고 소개한 이 청년은 '안남 인민의 요구'라는 청원서를 배포했다. 식민지 베트남 인민을 위한 정치적 자유, 언론·집회의 자유, 법적 평등, 교육권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윌슨 대통령을 만나 베트남 독립을 호소하려 했으나, 보좌관들에게 막혔다. 청원서는 미국 국무장관 로버트 랜싱에게 제출되었지만 답변은 없었다. 프랑스 정부도 침묵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당시 파리에서 사진 수정공과 주방 보조로 일하며 빈민가에서 살고 있었다. 독학으로 프랑스어와 정치를 익혔다. 식민지 현실을 직접 경험한 그는 자유와 평등을 내건 서구 열강이 왜 베트남에는 그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지 묻고자 한 것이다.

그는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무시당한 경험은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년 후 그는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했고, 다시 1년 후 투르 대회에서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베르사유에서 문전박대당한 무명의 식민지 청년은, 35년 후 디엔비엔푸에서 바로 그 프랑스 식민제국을 무릎 꿇렸다.

윌슨의 민족자결 약속은 베트남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그날 이후 자유주의의 약속이 아니라 혁명을 선택했다.

1920년 투르 — 한 식민지 청년이 공산주의자가 되다

1919년, 스물아홉의 응우옌 아이 꾸옥은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식민지 인도차이나의 자치를 청원하는 8개 조항을 제출했다. 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그는 프랑스 사회당 기관지 《위마니테》에서 레닌의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읽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 테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 용어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 번 읽고 또 읽으며 나는 마침내 주요 내용을 이해했다. 레닌의 테제는 나를 감동시키고, 흥분시키고, 통찰을 주고, 확신을 주었다. 나는 기쁨에 겨워 울었다."

1920년 12월, 프랑스 사회당 전당대회가 투르에서 열렸다. 당은 코민테른 가입 여부를 놓고 분열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며 다수파와 함께 투표했다. 그날 프랑스공산당이 탄생했고, 응우옌 아이 꾸옥은 그 창립 당원이 되었다.

1922년 그는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목소리를 담은 신문 《르 파리아》를 창간하고, 직접 쓰고 편집하고 배포했다. 손으로 베껴 쓰거나 인쇄한 호를 파리 노동자 지구와 프랑스 항구에서 선원들을 통해 식민지로 밀반출했다. 같은 해 식민지 연합을 공동 창립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카리브해 출신의 반식민 활동가들을 한데 묶었다.

파리의 한 사진관에서 촬영된 이 시기의 초상은 시대를 관통하는 시선을 지녔다. 말쑥한 양복 차림의 이 젊은 안남인은 30년 후 식민제국을 무릎 꿇릴 사람이었다.

1922–1926년 파리 — 『르 파리아』, 식민지의 목소리를 담은 신문

1921년, 응우옌 아이 꾸옥은 파리에서 알제리·튀니지·모로코·과들루프 등 프랑스 식민지 출신 활동가들과 함께 '식민지연합'(Union Intercoloniale)을 결성했다. 이듬해 1922년 4월 1일, 연합의 기관지로 『르 파리아』(Le Paria, '버림받은 자')가 창간되었다. 편집장은 응우옌 아이 꾸옥이었다.

『르 파리아』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실상을 폭로하는 데 집중했다. 강제노동, 문화적 탄압, 경제적 착취에 대한 보도와 논평을 실었고, 식민지 민중의 단결을 호소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신문의 제호 아래에는 '식민지 민중의 광장'(Tribune des populations des colonies)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1922년 5월호에는 식민지 박람회를 풍자한 그의 손그림 만평 「식민지 박람회」(Exposition Coloniale)가 실렸다. '인종 간 형제애의 끈'이라 적힌 사슬, '언론의 자유'라 명명된 인쇄기 밑에 깔린 아시아인 등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였다.

대부분의 기사는 응우옌 아이 꾸옥이 직접 썼다. 그는 다양한 필명으로 뉴스, 논평, 단편소설, 번역, 풍자 희극, 만화를 생산했다. 프랑스 당국의 엄격한 검열과 감시를 피해 신문은 원양 여객선을 통해 인도차이나와 아프리카 식민지로 밀반입되었다. 1922년 8월호에 실린 「식민지 민중에게 호소함」은 마르크스의 구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으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국제적 연대를 촉구했다.

『르 파리아』는 1926년 4월 1일까지 정확히 4년 동안 38호를 발행했다. 자금난과 탄압으로 문을 닫았지만, 이 작은 신문은 식민지 혁명 저널리즘의 효시가 되었다. 『르 파리아』에 실린 글들은 1925년 출간된 『프랑스 식민주의 재판』(Le Procès de la colonisation française)의 토대가 되었고, 응우옌 아이 꾸옥은 이후 광저우에서 『타인 니엔』(1925), 『부아 리엠』(1929) 등 혁명 신문을 계속 발행했다. 2022년 베트남은 『르 파리아』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며 이 신문을 베트남 혁명 언론의 출발점으로 기렸다.

1923년 모스크바 — 만델슈탐이 만난 「미래의 문화」

1923년 12월, 모스크바의 한 방에서 서른셋의 베트남 혁명가 응우옌 아이 꾸옥이 러시아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과 마주 앉았다. 잡지 《오고뇨크》의 취재였다. 만델슈탐은 이렇게 썼다: "응우옌 아이 꾸옥에게서는 문화가 풍겨 나온다 — 유럽의 문화가 아니라, 아마도 미래의 문화일 것이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당시 모스크바에 있는 유일한 안남인이었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레닌을 만나고 싶었지만, 레닌은 이미 중병이었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해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만델슈탐은 이 젊은 혁명가의 고귀한 태도와 따뜻하고 소박한 말투에 감탄했다. 인터뷰에서 응우옌 아이 꾸옥은 식민지 민중의 고통과 베트남 독립의 당위를 차분히 설명했다. 시인이 포착한 것은 단지 정치적 신념이 아니었다. 그가 "미래의 문화"라고 부른 어떤 품격이었다.

15년 후 만델슈탐은 대숙청의 희생자가 되었고, 응우옌 아이 꾸옥은 호치민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을 이끌었다.

1923–1924년 모스크바 —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코민테른 간부로, 혁명가의 이론적 토대를 닦다

1923년 6월 30일, 응우옌 아이 꾸옥은 위조 여권을 들고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베를린, 함부르크를 거쳐 배편으로 소련 땅을 밟은 것이다. 코민테른의 초청이었다.

그는 곧바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 입학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KUTV는 식민지·반식민지 출신 혁명가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1921년 창설된 코민테른의 간부 학교였다. 같은 시기 이 학교를 거친 이들로는 호세 디아스(스페인), 류사오치(중국), 탄 말라카(인도네시아) 등이 있었다. 그는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1년 만에 러시아어를 습득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에서 동양부 직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인물은 레닌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이미 중병으로 은거 중이었고, 응우옌 아이 꾸옥은 1924년 1월 노동조합의 집에 누운 레닌의 시신 앞에서 마지막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1924년 6월, 그는 제5차 코민테른 대회에 정식 대표로 참석해 식민지 문제에 관한 보고를 했다. 연단에서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서유럽 노동운동이 식민지 해방 투쟁을 경시한다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식민지 문제를 진정으로 관심 있는 동지들조차 구체적인 행동보다 구호에 그친다"는 그의 발언은 유럽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직격탄이었다.

그의 코민테른 내 후견인은 드미트리 마누일스키였다. 마누일스키는 이 베트남 혁명가의 조직 감각과 국제주의적 시야를 높이 평가했고, 이후 10년 이상 코민테른 내에서 그의 정치적 생존을 보호했다.

1924년 12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리취'(Li Qu)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광저우에 파견되었다. 모스크바에서의 1년 반, 즉 KUTV 교육, 코민테른 실무, 제5차 대회 연설은 그를 식민지 출신 활동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간부로 바꾸어놓았다. 그가 광저우에서 베트남 청년 혁명가들을 훈련시키고, 훗날 베트남공산당을 창건할 수 있었던 이론적·조직적 역량은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이 모스크바 시절은 호치민의 사상 형성에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식민지의 체험적 고통과 유럽 노동운동의 실천이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론적 틀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훗날 '호치민 사상'이라 불리게 될(마르크스-레닌주의와 베트남 현실의 창조적 결합)의 원형이 바로 이곳에서 빚어졌다.

1924–1927년 광저우 — '보로딘의 통역'이 베트남 혁명간부를 키우다

1924년 12월, 코민테른은 응우옌 아이 꾸옥을 중국 광저우(廣州)로 파견했다. 쑨원의 혁명정부가 광둥을 장악하고 공산당과 협력하던 시기였다. 그는 '리취'(李秋)라는 중국식 가명으로 코민테른 대표 미하일 보로딘의 통역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임무는 따로 있었다. 그는 '브엉 동지'(đồng chí Vương)라는 암호명으로 베트남 망명 혁명가들을 규합해 '특별정치훈련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작은 학교에서 그는 개인 테러가 아닌 조직적 집단투쟁의 방법을 가르쳤다. 1925년에는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Việt Nam Thanh niên Cách mạng Đồng chí Hội)를 창립하고 기관지 《청년》(Thanh niên)을 발행했다. 이 청년회는 5년 후 베트남공산당의 직접적 모태가 되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여성조직, 농민조직, 소년조직을 잇따라 세우고, 아시아 피억압민족연맹을 결성해 조선·인도네시아·인도 식민지 출신 활동가들과 연대했다. 1926년에는 보로딘을 통해 첫 베트남 혁명가 그룹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보냈다. 같은 해 훗날 '혁명의 길'로 알려진 정치교본을 집필해 배포했다: 베트남 최초의 공산주의 교과서였다.

1927년 4월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로 공산당 탄압이 시작되자 보로딘 기구는 해체되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체포를 피해 홍콩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입국이 거부되어 중국 북부를 거쳐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광저우 3년은 응우옌 아이 꾸옥을 파리의 선전가에서 아시아 혁명의 조직자로 탈바꿈시킨 시기였다. 그가 이곳에서 훈련시킨 간부들(쩐푸, 레홍퐁, 팜반동)은 훗날 베트남 혁명의 중추가 되었다. 광저우의 작은 훈련반이 없었다면 1930년 홍콩 당 창립도, 1945년 8월 혁명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1925년 파리 — 『프랑스 식민주의 재판』, 식민지 해방 문학의 기원

1920년 봄, 파리의 한 하숙방에서 서른 살의 응우옌 아이 꾸옥은 프랑스어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911년 사이공을 떠난 이후 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까지 프랑스 식민제국의 현장을 두루 목격한 그가 써내려간 것은 식민주의에 대한 포괄적 고발장이었다. 1925년 파리의 '노동의 서점'(Librairie du Travail)에서 『프랑스 식민주의 재판』(Le Procès de la colonisation française)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본격적 반식민주의 저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책은 12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강제 징집한 '피의 세금'(인도차이나에서만 70만 명이 동원되었고 8만 명이 유럽의 참호에서 죽었다)을 폭로하는 장으로 시작해, 행정 부패와 군사적 폭압, 경제적 약탈, 문화적 탄압, 식민지 여성의 이중적 억압, 종교를 앞세운 위선까지 식민주의의 모든 기제를 낱낱이 해부한다. 마지막 장은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정부의 반식민주의 정책에 대한 희망으로 끝맺는다. 특유의 풍자와 신랄한 위트(마치 법정에서 검사의 구형을 읽듯 식민주의자들을 '피고'로 세우는 구성)는 단순한 선전물을 넘어 문학적 성취로도 읽힌다.

책은 출간 즉시 프랑스 당국의 탄압을 받았지만 식민지로 밀반입되어 읽혔고, 이후 베트남어·중국어·러시아어 등으로 번역되며 20세기 탈식민 운동의 고전이 되었다. 이 저작의 경험과 자료는 『르 파리아』(1922~1926) 기사들의 토대가 되었고, 응우옌 아이 꾸옥이 단순한 식민지 애국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갖춘 혁명 이론가로 성장했음을 국제 운동에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1920년 봄에 쓰기 시작한 이 한 권의 책은, 30년 후 프랑스 식민제국을 무릎 꿇릴 혁명의 지적 기원이었다.

1927년 광저우 — 혁명가의 첫 교과서, 『혁명의 길』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응우옌 아이 꾸옥은 광저우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의 정치훈련반을 직접 가르쳤다. 그 강의를 모아 1927년 초 출판한 소책자가 『혁명의 길』(Đường Kách Mệnh)이다. 아시아 피압박민족연맹 선전부 명의로 발행된 이 책은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 최초의 본격적인 이론 교재였다.

책은 레닌의 명제로 시작된다: "혁명적 이론 없이는 혁명적 운동도 없다." 첫 장의 제목은 '혁명가의 자격'(Tư cách người cách mệnh)이었다. 호치민은 여기서 혁명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자기희생, 비밀 엄수, 대중과의 긴밀한 접촉, 교만과 사치의 경계)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이어서 각국 혁명사를 검토했고, 미국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완전하지 않은 혁명'으로, 러시아 10월 혁명을 '철저한 혁명'으로 규정하며 베트남이 따라야 할 길로 제시했다.

이 작은 책자의 진정한 무게는 그 영향력에 있다. 『혁명의 길』은 개인 테러가 아닌 조직적 집단투쟁, 민족독립과 계급해방의 결합, 그리고 노동자·농민·병사 동맹에 기초한 혁명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첫 베트남어 텍스트였다. 광저우 훈련반 수료생들은 이 책을 베트남으로 밀반입했고, 그들 중 다수가 1930년 베트남공산당 창립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45년 8월 혁명을 이끈 세대의 상당수도 이 책으로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호치민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이 나를 레닌에게, 제3인터내셔널로 이끌었다." 『혁명의 길』은 바로 그 이행을 기록한 최초의 증거다. 애국자에서 공산주의자로의 이행 말이다. 2012년 베트남 정부는 1927년 초판본을 국가보물로 지정했다.

1928–1929년 시암 — '타우 친'이라는 이름으로 메콩 강변에서 혁명의 씨앗을 뿌리다

1928년 7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유럽을 떠나 시암(지금의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배를 타고 인도차이나 반도로 향한 긴 여정 끝이었다. 그는 곧바로 베트남인 이주민이 밀집한 우돈타니 주 농부아 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타우 친'(Thầu Chín)이라는 새로운 가명으로 활동했다. 때로는 '토'(Thọ)나 '남선'(Nam Sơn)이라는 이름도 썼다. 그는 현지인들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농민의 모습으로 살았다. 낮에는 우물을 파고, 채소밭을 가꾸고, 닭과 돼지를 키웠다. 밤이면 등잔불 아래에서 베트남어와 태국어 이중언어 문해 교실을 열고, 혁명 이론서를 번역했으며, 청년들에게 조직적 집단투쟁의 방법을 가르쳤다.

그가 특히 신경 쓴 것은 태국인들의 호의를 얻는 일이었다. 그는 베트남 이주민들에게 태국의 관습을 존중하고 현지 문화를 배우라고 당부했다. 베트남 문화를 고수하되 태국 사회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공존하는 것,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는 우돈타니에만 머물지 않았다. 농카이, 사콘나콘, 나콘파놈 등 메콩 강변의 베트남인 거주지를 두루 돌며 혁명 조직의 그물을 짰다. 이때 훈련된 간부들 중 상당수가 1년 후 홍콩에서 열린 베트남공산당 창립대회에 합류했고, 이후 비엣민과 항불 전쟁의 중간 간부로 성장했다.

1929년 11월, 프랑스 식민법원이 응우옌 아이 꾸옥에게 궐석 사형을 선고하자 그는 시암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홍콩으로 향했다. 우돈타니에 있는 그의 활동지는 오늘날 호치민 기념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2004년 베트남과 태국 공동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메콩 강변의 작은 마을에서 1년 남짓 뿌린 씨앗이 베트남 혁명의 장기적 인적 기반이 된 셈이다.

1930년 홍콩 — 사형선고를 받은 자가 당을 창건하다

1929년 11월 11일, 프랑스 식민법원은 응우옌 아이 꾸옥에게 궐석 사형을 선고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그는 홍콩에 있었다.

코민테른은 당시 베트남에 존재하던 세 개의 공산주의 조직(인도차이나 공산당, 안남 공산당, 인도차이나 공산연맹)의 통합을 그에게 맡겼다. 각 조직은 지역과 노선을 달리하며 분열되어 있었다. 1930년 1월 6일부터 2월 7일까지, 응우옌 아이 꾸옥은 홍콩 주룽에서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세력을 단일한 베트남공산당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고, 자신이 직접 기초한 「간략정강」, 「간략책략」, 「간략당헌」을 채택시켰다.

그해 10월 제1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명은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바뀌었고,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킨다는 정치 강령이 확정되었다.

이 홍콩 회의는 베트남 혁명사의 분수령이다. 식민지 법정이 사형을 선고한 그 순간에, 혁명의 제도적 기초가 놓였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 당은 8월 혁명을 이끌었고, 45년 후에는 전쟁으로 찢긴 조국을 통일했다.

1931–1933년 홍콩 — 사형수를 구한 영국 변호사, 그리고 위장된 죽음

1931년 6월 6일, 홍콩 경찰은 영국 식민지 당국과 프랑스 식민 당국의 공조 작전으로 Kowloon의 한 주택을 급습해 '똥반서'(Tống Văn Sơ, 중국명 宋文初/Sung Man Cho)라는 가명을 쓴 베트남 혁명가를 체포했다. 그는 1929년 11월 프랑스 식민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응우옌 아이 꾸옥 ─ 훗날의 호치민 ─ 이었다.

프랑스는 즉시 범죄인 인도를 요구했다. 호치민이 인도차이나로 송환된다면 처형은 확실했다. 그러나 홍콩의 변호사 프랭크 로즈비(Frank Loseby)가 그의 변호를 맡았다. 로즈비는 영국 법정에서 호치민이 '정치범'이라는 논리를 펼쳤고, 홍콩-프랑스 간 범죄인 인도 조약이 정치범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년 이상 이어진 법정 공방 끝에, 로즈비는 런던의 추밀원(Privy Council)까지 상소했다. 그 사이 영국과 프랑스 식민 당국은 곤혹스러워졌고, 결국 타협이 이루어졌다: 호치민은 홍콩에서 추방하되, 프랑스령으로는 보내지 않는다. 프랑스 측에는 그가 1932년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보되었고, 실제로 빅토리아 감옥(Victoria Gaol)에는 그의 '사망 기록'이 남아 있다.

1933년 초, 호치민은 영국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배에 올랐고 산터우( Swatow )로 향했다. '죽은' 혁명가는 다시 중국 대륙으로 사라졌고, 8년 후 베트남으로 돌아가 독립 투쟁을 이끌었다.

이 에피소드는 호치민의 삶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생존기다. 식민지 법정이 내린 사형선고, 1년 반의 수감, 영국 변호사의 법적 투쟁, 그리고 위장된 죽음, 모든 것이 한 편의 스파이 소설 같지만, 모두 사실이다. 로즈비는 훗날 '호치민의 생명의 은인'으로 베트남에서 기억되며, 하노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1934–1938년 모스크바 — 대숙청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남은 식민지 혁명가

1934년 여름, 응우옌 아이 꾸옥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31년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수감된 후, 프랑스로의 신병 인도를 막기 위해 영국 당국이 그를 '사망' 처리하고 몰래 풀어준 직후였다. 그는 상하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모스크바까지 도피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영웅의 환영이 아니었다. 코민테른과 베트남 당 내부에서 그의 입지는 약화되어 있었다. 1930년 그가 홍콩에서 창당한 직후, 코민테른은 그의 '민족주의적 편향'을 비판하며 당 강령을 수정하도록 지시했고, 쩐푸(Trần Phú)가 새로운 당 서기장으로 임명되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응우옌 아이 꾸옥은 당의 실무에서 배제된 채 국제레닌학교(International Lenin School)의 학생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Institute for National and Colonial Problems)의 연구원으로 배치되었다. 한때 코민테른 동양부의 핵심 요원이었던 그가 이제는 변방의 관찰자였다.

그러나 이 좌천은 역설적으로 그를 살렸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스탈린의 대숙청이 코민테른을 휩쓸었다.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수많은 외국 공산주의자들(독일, 폴란드, 헝가리, 조선, 중국 출신)이 '간첩'과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체포되고 처형되었다. 베트남인 동지들 중에도 희생자가 있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의 후계자 쩐푸는 1931년 프랑스 식민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이미 사망했지만, 당 창립에 함께했던 레홍퐁(Lê Hồng Phong)은 1937년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어 1942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은 정치적 주변인이었기에 오히려 의심의 그물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이 시기를 연구와 저술, 그리고 후배 혁명가들의 교육에 바쳤다. 베트남어 신문 《띤특》(Tin Tức)에 가명으로 정기 기고했고, 민족문제와 식민지 혁명 전략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인도차이나공산당 수석대표로 참석해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지지했다. 이는 그가 줄곧 주장해 온 통일전선 전략이 마침내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된 순간이었다.

1938년 가을, 그는 모스크바를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마오쩌둥의 팔로군에서 무선통신사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4년간의 모스크바 체류는 그의 정치적 몰락기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대숙청의 희생자 명단에서 지워주었다. 그가 살아남았기에 3년 후 베트남으로 돌아가 비엣민을 창설할 수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코민테른이 그를 밀어낸 바로 그 순간, 역사는 그를 보존하고 있었다.

1941년 빡보 — 30년 만에 귀국한 혁명가가 동굴에서 해방전선을 세우다

1941년 2월, 응우옌 아이 꾸옥은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 땅을 밟았다. 1911년 사이공을 떠난 지 정확히 30년 만이었다. 그는 까오방 성의 빡보(Pác Bó) 마을에 자리 잡고, 중국과의 국경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동굴 속에 본부를 차렸다.

그해 5월, 그는 인도차이나공산당 제8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이 동굴에서 주재했다. 회의의 핵심 결정은 하나였다: 계급투쟁보다 민족독립이 우선이다. 모든 애국 세력을 아우르는 통일전선인 베트남 독립동맹, 곧 비엣민(Việt Minh)이 이날 창설되었다. 당은 단기적으로 강령을 완화하여 지주 토지 몰수 대신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고, 사회혁명은 프랑스와 일본을 몰아낸 뒤로 미루었다. 게릴라전이 혁명 전략의 핵심으로 채택되었고, 비엣민이 통제하는 모든 마을에 자위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이 전략은 응우옌 아이 꾸옥, 이제 호치민이라 불리기 시작한, 이 주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구상은 도시 민족주의자들의 엘리트 정치와 농민 반란의 저력을 하나의 독립운동으로 융합하는 것이었다.

빡보 동굴은 지금도 신화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호치민은 이곳에서 바위를 책상 삼아 신문을 발행하고 당원을 훈련시켰으며, 시를 썼다. "아침에는 시냇가로 내려가고, 저녁에는 동굴로 돌아온다." 그가 남긴 소박한 구절은 격동의 시대를 앞둔 고요한 순간을 담고 있다. 30년의 망명을 끝내고 귀국한 혁명가가 동굴 속에서 세운 전선은, 4년 후 8월 혁명을 이끌었고, 35년 후에는 분단된 조국을 통일한 역사적 힘이 되었다.

1942년 광시 — 사슬에 묶인 혁명가가 시를 쓰다

1942년 8월, 호치민은 중국 광시성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었다. 남중국에서 중국 공산당 및 베트남 망명자들과 접촉하던 중 '간첩' 혐의를 받은 것이다. 13개월 동안 그는 발에 족쇄를 차고 감옥에서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는 이 감옥 생활을 한시(漢詩)로 기록했다. 당시(唐詩) 형식으로 쓴 115수의 시, 즉 《옥중일기》(베트남어: Nhật ký trong tù)는 지금도 베트남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4개월째 단잠 한 번 못 자고, 4개월째 옷 한 번 못 갈아입었네"라고 그는 썼다. 그러나 시에는 굴욕이 아닌 위트와 불굴이 넘친다. "손발은 비록 포승에 얽매였으나, 산새 소리와 봄꽃 향기야 누가 막으랴." 쇠사슬 소리가 옥고리 소리처럼 들린다고 익살을 부리기도 했다.

1943년 9월 석방된 그는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2년 후 그가 이끈 8월 혁명이 성공했다. 이 시절 그가 한시로 남긴 기록은, 극한의 고립 속에서도 정신의 자유를 지킨 한 혁명가의 초상이다.

시인 호치민 — 혁명가의 또 다른 얼굴

호치민은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로 알려져 있지만, 평생 시를 썼다. 그에게 시는 단순한 문학 취미가 아니라 정치적 소통의 도구이자 인간적 품격의 표현이었다. 베트남인들이 그를 '호 아저씨'(Bác Hồ)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느낀 데에는(국부라는 위엄보다 할아버지 같은 따스함으로 기억된 데에는) 그의 시가 큰 몫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집은 『옥중일기』(Nhật ký trong tù)다. 1942년 중국에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1년여 동안 13개 감옥을 전전하며 손발에 족쇄를 찬 채 쓴 134수의 한시 모음이다. 당대(唐代) 고전시의 형식을 빌렸지만, 내용은 혁명가의 의지와 인간적 고뇌, 자연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으로 가득했다. "몸은 옥중에 있으나 정신은 옥 밖에 있네": 이 한 구절은 감금된 혁명가의 정신을 압축한다.

그러나 호치민의 시 세계는 감옥에 국한되지 않는다. 1941년 빡보 동굴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아침에는 시냇가로 내려가고, 저녁에는 동굴로 돌아온다 / 옥수수 죽과 죽순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 흔들리는 돌책상에서 소련 당사를 번역하노라니 / 아, 혁명가에게 이보다 호사로운 삶이 또 있을까." 자연과 혁명이 하나로 녹아든 이 시는, 그가 왜 단순한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하나의 전통은 매년 음력 설(뗏)에 발표한 신년시다. 1968년 뗏 공세 직전 라디오로 낭송된 그의 마지막 설시는 이랬다. "올봄은 지난봄보다 훨씬 뜻깊어라 / 온 나라에 승리의 좋은 소식이 넘쳐난다 / 남북이 함께 싸워라 / 나아가라! 완전한 승리는 반드시 우리 것이다!" 이 시는 단순한 축시가 아니었다: 전국적 총공격을 알리는 암호였다.

호치민의 시는 유교적 교양과 당대 한시의 간결함, 베트남 전통 시형(詩形)인 룩밧(lục bát)의 운율을 두루 흡수했다. 동시에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의 낙관과 국제주의적 시야가 배어 있다. 그가 남긴 약 170편의 시는 오늘날 베트남의 국어 교과서에 실려 모든 학생이 암송하고, 그의 시구는 일상 언어 속에 녹아 있다. 한 혁명가의 시가 한 민족의 정서가 된 셈이다.

1945년 베트북 — '미스터 후', 미군 특수부대와 함께 일본군을 몰아내다

1945년 7월, 미군 전략정보국(OSS) 소령 앨리슨 K. 토머스가 이끄는 '디어 팀'(Deer Team) 7명이 베트북 정글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일본군의 중국 진입을 차단하는 것이었고, 현지 게릴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토머스와 대원들이 만난 것은 '미스터 후'(Mr. Hoo)라는 별칭의 호치민과 '미스터 반'(Mr. Van)이라는 보응우옌잡이었다. OSS 대원들은 비엣민 게릴라들에게 화기 훈련을 실시했고, 함께 탄짜오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해 점령했다. 승리를 축하하며 함께 취한 이들은, 몇 년 후 적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OSS 위생병 폴 호글랜드는 말라리아와 이질로 죽어가던 호치민을 퀴닌과 설파제로 구했다. 호치민은 연기 자욱한 오두막 구석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훗날 드푸르노 중위는 "그는 몹시 아파 꼼짝 못했다. 우리 위생병은 이질, 뎅기열, 간염 중 하나로 보았다"고 회고했다. 호치민은 부하들에게 정글 약초를 찾아오라 지시했고, 회복 후 자신의 정글 지식 덕분이라 우겼다.

한편 하노이에서는 또 다른 OSS 장교 아르키메데스 패티 소령이 호치민과 긴밀히 협력했다. 1945년 8월 26일 점심 식사 자리에서 호치민은 패티에게 베트남 독립선언문 초안을 보여주었다. 패티는 토머스 제퍼슨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선언문 첫 문장을 다듬어주었다. 9월 2일 독립 선포 후, 패티는 본부에 이렇게 타전했다: "호치민 총리와 긴 회담을 가졌다. 그는 분별 있고 균형 잡힌, 정치적 안목을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디어 팀이 떠나기 전날 밤, 호치민은 토머스 소령과 단둘이 저녁을 함께하며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위해 해준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언제든 돌아오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20년 후, 미국은 베트남 정글에 전혀 다른 종류의 팀을 투하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 보름 만에 왕조를 끝내고 인민의 정권을 세우다

1945년 8월 13일, 호치민이 이끄는 전국봉기위원회가 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에,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금이다.

베트남은 그해 봄 이미 들끓고 있었다. 3월 일본군이 프랑스 식민정권을 전복하고 바오다이 황제의 괴뢰 정권을 세웠지만, 북부 산악지대에서는 비엣민의 해방구가 6개 성에 걸쳐 확장되고 있었다. 1944년 12월 보응우옌잡이 창설한 무장선전대는 이제 1만 명의 베트남해방군으로 성장했다. 봄의 대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이 아사하며 민중의 분노는 끓어올랐고, 쩐쫑낌 내각은 속수무책이었다.

8월 16일, 탄짜오에서 열린 비엣민 전국대표대회는 호치민을 주석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곧 임시정부)를 선출했다. 이튿날 하노이에서 총파업과 시위가 시작되었다. 8월 19일, 극장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비엣민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위대는 통킹 총독부를 점령했고, 하노이는 비엣민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날이 혁명의 승리일로 기록되었다.

8월 23일 후에, 25일 사이공: 제국의 수도와 남부 중심도시가 차례로 혁명 측에 넘어왔다. 8월 25일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했다. 응우옌 왕조 143년, 베트남 2천 년 군주제의 종말이었다. 8월 30일 후에에서 황제는 수만 명 앞에서 퇴위서를 낭독하고, 금인(金印)과 보검을 임시정부 대표에게 넘겼다.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는 편이 노예국가의 왕이 되는 것보다 낫다.” 바오다이는 그렇게 말했다.

2주 만에 하노이·후에·사이공을 포함한 전국이 비엣민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8월 27일 호치민은 하노이에 입성했고, 28일 임시정부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50만 명 앞에 서서 독립을 선언했다.

일본군은 대체로 방관했다. 프랑스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그 한순간의 역사적 간극을, 정글에서 30년을 기다려온 혁명가가 놓치지 않았다.

1945년 9월 2일 — 미국 독립선언문으로 시작한 베트남 독립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 50만 명이 모였다. 호치민은 연단에 올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연설은 충격적인 인용으로 시작되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첫 문장이었다. 이어서 1791년 프랑스 인권선언의 구절을 인용했다.

68년 전 7월 4일에 쓰인 문장을 인용하며 식민 해방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분명했다: 당신들이 선언한 원칙을 우리에게는 거부한다면, 당신들의 원칙 자체가 거짓이다.

식민 모국 프랑스와 그 동맹국 미국, 그들 자신의 혁명적 선언문으로 그들에게 심판을 구한 셈이었다.

바로 그날,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미군 정찰기 몇 대가 광장 상공을 저공비행했다. 베트남과 미국은 아직 공식 적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년도 안 되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30년간 거의 멈추지 않고 전쟁을 치러야 했다.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1945년 9월에 선포한 국가는 결국 승리했다.

1946년 — 평화를 찾아 프랑스로 간 혁명가, 전쟁만을 얻다

1946년 3월 6일,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프랑스 대표 장생트니와 예비협정(호-생트니 협정)에 서명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프랑스 연합 내의 '자유국가'로 인정하고, 북부에 주둔 중인 중국군을 프랑스군이 대체하는 조건이었다. 호치민은 이 협정을 전쟁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았다. '서명하지 않으면 프랑스군이 무력으로 진입할 것이고, 우리는 중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서 짓밟힐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고등판무관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는 이 협정을 불만스러워했다. 그가 보기에 협정은 비엣민에게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것이었다. 4월 달랏에서 열린 후속 회담은 결렬되었고, 다르장리외는 베트남 분할을 획책하며 코친차이나(남부)에 괴뢰 공화국을 세우려 했다.

호치민은 직접 프랑스로 가서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1946년 5월 31일, 그는 베트남 의회 대표단을 이끌고 프랑스로 출발했다. 그가 외국에 간 것은 30년 망명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이제는 국가 원수로서 귀환한 것이었다. 비아리츠에서 몇 주간 머문 뒤 파리로 향했다.

7월 6일, 퐁텐블로 회담이 시작되었다. 호치민은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외교·군사 주권을 거부했고, 코친차이나 분리를 고집했다. 회담은 2개월 넘게 계속되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8월 1일, 호치민은 프랑스 식민장관 마리우스 무테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죽을 수 있지만 자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죽일 수 있지만,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호치민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9월 14일, 그는 임시협정(모두스 비벤디)에 서명했다. 양측은 1947년 1월 재협상을 약속했고, 그때까지 정전을 유지하기로 했다. 호치민은 떠나기 전 프랑스 사회당 지도자 레옹 블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당신 동포들이 당신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가 10월 20일 하노이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이미 악화되어 있었다. 11월 23일, 프랑스 해군이 하이퐁을 포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12월 19일, 호치민은 전국에 저항을 호소했다. 그날 저녁 하노이 전역에서 비엣민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호치민이 평화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간 그 해는 역설적으로 전쟁을 향한 결정적 한 해가 되었다. 그가 퐁텐블로에서 얻은 것은 독립도, 통일도 아닌 3개월간의 외교 후퇴와 피할 수 없는 전쟁뿐이었다.

1946년 11월 9일 — 베트남 최초의 헌법, 호치민이 직접 기초위원회를 이끌다

1945년 9월 3일, 독립 선언 다음 날 열린 임시정부 첫 각의에서 호치민은 여섯 가지 긴급 과제 중 하나로 헌법 제정을 제시했다. 「과거 우리는 전제군주제와 식민지 독재 아래서 헌법 없이 살았다. 우리에겐 민주 헌법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가 각의에 던진 말이었다. 9월 20일, 그는 칙령 34-SL로 7인 헌법기초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직접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1월 6일,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18세 이상 모든 시민이 성별·민족·종교와 무관하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가졌다. 당시 아시아에서 여성 참정권을 보장한 최초의 선거 중 하나였다. 이 총선에서 선출된 제1기 국회는 3월 2일 첫 회기에서 호치민을 정식 주석으로 선출하고 헌법기초위원회를 재구성했다.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쳐, 1946년 11월 9일 제2차 국회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 헌법이 통과되었다. 전문(前文)과 7장 70조로 구성된 이 헌법은 국민주권, 영토 통일, 기본적 인권과 시민권을 천명했다. 제1조는 "국가의 모든 권력은 베트남 국민 전체에 속한다"고 선언했고, 제2조는 베트남이 북·중·남을 아우르는 불가분의 통일체임을 명시했다.

이 헌법의 진정한 의의는 급진적 민주주의에 있다. 언론·출판·집회·신앙의 자유, 재산권, 인신의 자유, 참정권, 피선거권이 보장되었고, 소수민족과 빈곤층·노인·장애인 등 취약 집단에 대한 국가의 보호 의무가 명시되었다. 호치민은 이 헌법의 이념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고 요약했다.

전시 상황으로 인해 헌법은 정식 공포되지 못했고, 제1기 국회가 헌법상 인민의회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1946년 헌법은 1959년 신헌법 제정 시까지 북베트남 통치의 근간이 되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헌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땅에서, 불과 독립 1년 만에 세워진 이 헌법은 호치민이 국가건설가로서 남긴 첫 번째 제도적 유산이었다.

1950년 모스크바 — 17일간 걸어서 스탈린과 마오를 만나다

1950년 1월, 호치민은 베트북부 정글을 걸어서 중국 국경으로 향했다. 17일간의 도보 행군이었다. '딩(Ding)'이라는 가명으로 광시에 도착했고, 1월 30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류샤오치가 그를 맞아 중국의 원조와 외교 승인을 약속했다.

그는 베이징에서 기차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곳에는 마오쩌둥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스탈린과 중소 동맹 조약 협상을 마친 참이었다. 스탈린은 호치민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가 1945년 베트남공산당을 해산한 것, 전쟁 중 미국과 협력한 것,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처럼 보이는 것이 모두 불온한 징후로 읽혔다. 스탈린은 호치민과 마오 모두 '옷장 속의 티토'로 여겼다.

그러나 마오의 강력한 주선으로 스탈린은 호치민을 만났다. 회담 결과는 '분업'이었다: 소련은 동유럽에 집중하고 중국이 베트남을 책임지기로 했다. 소련은 대공포 연대, 트럭, 의약품을, 중국은 수개 사단분의 보병 무기와 포병 장비, 군사고문단 파견, 광시성을 비엣민의 후방 기지로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호치민은 소련과의 공개 동맹 조약을 요청했으나, 그의 방문이 비밀이었기에 거절당했다. 그가 "헬리콥터를 타고 모스크바 상공을 돌며 공개 착륙하면 되지 않겠냐"고 농담하자 스탈린은 "오, 동양인들이여, 상상력이 참 풍부하군"이라고 답했다.

이 회담은 베트남 혁명의 국제적 고립을 끝냈다. 불과 수개월 내에 중국과 소련의 군사 원조가 흘러들어왔고, 베트남 인민군은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탈바꿈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포병은 이 회담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호치민이라는 한 식민지 혁명가가 17일간 걸어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었다.

1953–1956년 토지개혁 — 혁명이 농촌을 뒤흔들고, 호치민이 과오를 인정하다

1953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가운데 북베트남에서 토지개혁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고문단이 직접 파견되어 마오쩌둥의 방식을 전수했고, 스탈린도 계급투쟁의 지연을 비판하며 개혁을 압박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지주 계급을 해체하고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

그러나 개혁은 곧 과열되었다. 간부들은 마을에 파견되어 농민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는 '삼동(三同)'을 실천했지만, '지주' 분류는 점점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다. 인구 1,000명당 1명 처형이라는 당 방침 아래 인민재판이 열렸다. 항일 투사, 당원, 심지어 가난한 농민까지 '반동 지주'로 몰려 처형되거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후일 연구에 따르면 약 17만 명이 지주·부농으로 분류되었고, 그중 70% 이상이 오분류였다. 처형 규모는 최소 1,300여 명에서 최대 15,000명으로 추정되며, 고문과 구금 후 자살한 사례도 상당했다.

1956년 봄, 당 지도부는 개혁의 폭력적 과잉을 인정했다. 그해 8월, 호치민은 전국에 공개 사과했다: "토지개혁에서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당과 정부를 대표하여 억울한 희생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는 직접 '과오 시정 운동'을 지휘하여 오분류된 농민을 석방하고 재산을 반환하게 했다. 트엉찐 당 서기장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공산당 지도자가 국가적 차원의 폭력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사례는 20세기 사회주의 역사에서 극히 드물다. 호치민의 이 사과는 그를 단순한 독립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혁명이 낳은 비극을 직시할 수 있었던 지도자로 남게 했다. 토지개혁은 고통스러운 유산을 남겼지만, 북베트남 농촌의 봉건적 토지구조를 해체하고 당의 농촌 장악력을 높여 이후 항미 전쟁의 사회적 기반을 제공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 쌀농사 민족이 식민제국을 무릎 꿇리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남 북서부 계곡에 포위된 프랑스군 주둔지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軍은 디엔비엔푸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설계했다: 깊은 계곡 바닥에 배치된 1만 6천 명의 정예 병력, 항공 지원, 참호와 철조망. 그들은 보 응우옌 잡 장군의 베트남 민군이 중포를 정글 너머 산등성이까지 운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전쟁 내내 전선의 군인들과 농민들을 끊임없이 방문했고, 1953년 12월에는 디엔비엔푸 작전을 승인하는 결정적 회의를 주재했다. 그가 군대에 보낸 메시지는 단순했다: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56일간의 포위 끝에 5월 7일, 프랑스군 사령관 드 카스트리 장군이 항복했다. 프랑스는 2,293명이 전사하고 1만 1천 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베트남 측도 약 2만 3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승리로 1954년 7월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했고, 북위 17도선 이북에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동남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세계의 부두를 떠돌던 선원이, 이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유럽 식민제국을 군사적으로 패배시킨 독립 지도자가 된 것이다.

1954년 제네바 — 이겼지만, 반만 얻은 평화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가 함락되었다. 바로 다음 날, 5월 8일, 제네바 회담의 인도차이나 의제가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전장에서는 이겼지만, 협상 테이블에서는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팜반동이 이끄는 베트남민주공화국(DRV) 대표단은 전승국의 자신감으로 회담에 임했다. 그들은 베트남 전역에서의 휴전, 외국군 철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 총선거를 요구했다. 1945년 9월 바딘 광장에서 호치민이 선언했던 바로 그 독립과 통일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치는 냉혹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와 소련의 몰로토프는 세계 긴장 완화를 원했다. 그들은 베트남 동지들에게 '현실적'일 것을 압박했다. 저우언라이는 DRV 대표단에게 16도선(북위 16도선) 분할을 수용하라고 설득했다. DRV가 실제로 지배하던 영토의 상당 부분(17도선 이남의 넓은 해방구)을 포기하라는 요구였다. 모택동과 흐루쇼프는 인도차이나에서의 더 큰 전쟁, 특히 미국의 군사 개입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호치민과 하노이 지도부는 씁쓸했다. 8년간의 전쟁, 수십만의 희생 끝에 군사적으로는 프랑스를 격파했지만, 이제 동맹국들이 전리품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베트남 노동당 내부에서는 계속 싸우자는 강경론도 있었지만, 국제적 고립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군사·경제 원조 없이는 승리를 유지할 수도, 남부를 해방할 수도 없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임시 분할되고, 1956년 7월 통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호치민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네바 회담은 끝났다. 우리 외교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깊은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실제로 DRV는 17도선 이남의 광대한 해방구에서 철수해야 했고, 수많은 당원과 지지자들을 남쪽에 남겨둔 채 북으로 재집결했다.

그리고 그 '임시' 분할선은 20년 넘게 존속했다. 1956년 선거는 열리지 않았다.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이 선거를 거부했고, 제네바 협정에 서명조차 하지 않은 미국은 이를 묵인했다. 제네바는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휴전이었을 뿐 진정한 평화는 아니었다. 호치민은 통일을 보지 못한 채 1969년에 사망했고, 17도선이 무너진 것은 그가 죽고 6년이 지난 1975년의 일이었다.

제네바는 호치민의 인생에서 가장 역설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평화에서는 절반만 얻었다. 그 절반의 평화마저 동맹국들이 정해준 선이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대미 전쟁에서 결코 협상으로 모든 것을 걸지 않는 교훈이 되었다.

1954–1965년 — 전쟁의 상처를 딛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다

1954년 10월, 호치민은 9년간의 전시 수도 비엣박을 떠나 하노이로 귀환했다. 디엔비엔푸의 승리와 제네바 협정으로 북반부는 독립을 얻었지만, 80년간의 식민지배와 전쟁이 남긴 상처는 깊었다. 국토는 17도선에서 갈렸고, 호치민 앞에 놓인 과제는 단순한 통일이 아니었다: 먼저 국가의 기초를 세워야 했다.

1955년부터 북베트남은 두 개의 3개년 계획(1955–1957, 1958–1960)을 통해 전쟁으로 파괴된 철도와 공장을 복구하고, 하노이-남딘 간 철도를 복구했으며, 비엣찌에 베트남 최초의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1957년 토지개혁이 완료되자 북부 농촌의 봉건적 토지소유 관계는 해체되고 농민의 토지소유권이 확립되었다. 1959년 5월 19일(호치민의 생일) 정치국은 남부 지원을 위한 군사수송로 '쯔엉선 길'(훗날 '호치민 루트'로 불림) 개통을 결정했다.

결정적 순간은 1959년 12월이었다. 국회는 신헌법을 통과시켰고, 호치민은 1960년 1월 1일 이 헌법을 공포했다. 1959년 헌법은 북베트남을 '인민민주국가'로 규정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국가 목표로 명시했으며, 보통선거에 의한 국회 구성과 생산수단의 사회화 원칙을 확립했다. 같은 시기 교육 개혁이 단행되어 전국적 문맹퇴치 운동이 전개되었고, 1961년부터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되어 8-3 방직공장과 같은 근대 산업시설이 건설되었다.

이 10년은 호치민에게 전사(戰士)에서 국가건설자로의 전환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하노이 수상관저 뒤편의 소박한 고상가옥에서 일어나 연못의 잉어에게 밥을 주고, 간소한 옷차림으로 공장과 학교를 방문했다. '호 아저씨'라는 호칭은 이 시기에 국민적 친근감으로 정착했다. 북부 사회주의 건설은 완전하지 않았고 실수도 따랐지만(비합리적 목표로 인한 경제난과 관료주의의 폐해) 1965년 미국의 북폭이 시작될 때까지 북베트남은 식민지 유산을 딛고 근대적 국가의 윤곽을 갖추었다. 그의 유언은 이 경험 위에서 쓰였다: '나는 떠나지만, 인민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1955–1969년 — 할아버지 호, 대미 항전의 얼굴이 되다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은 17도선에서 남북으로 갈렸다. 북쪽에는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호치민은 이 분단을 임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1956년 총선거로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조항이 있었지만,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권은 선거를 거부했다.

호치민은 두 가지 전선에서 움직였다. 대외적으로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확보하며 사회주의 진영 내 외교를 주도했고, 1950년과 1952년에는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만나 군사 원조를 이끌어냈다. 대내적으로는 1960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이른바 '베트콩')의 결성을 지원하여 남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북에서 남으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통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정글 속에 건설되었다: '호치민 루트', 즉 쯔엉선 산맥을 관통하는 보급로였다. 미군의 맹렬한 폭격에도 이 길은 끊이지 않았다.

1965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 폭격(롤링 썬더 작전)을 개시하고 미 해병대를 다낭에 상륙시켰다. 호치민은 라디오를 통해 인민에게 호소했다: "전쟁은 5년, 10년, 20년 또는 그 이상 지속될 수 있습니다. 하노이, 하이퐁 및 일부 도시와 공장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인민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독립과 자유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1968년 구정공세(뗏 공세)에서 NLF와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전역의 100여 개 도시와 기지를 동시 공격했다. 군사적으로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음을 미국 여론에 각인시켰다. 그해 존슨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파리 평화회담이 열렸다.

호치민은 베트남 인민에게 '박호'(Bác Hồ, 호 아저씨/할아버지)로 불렸다. 그의 검소한 생활, 하노이 수상 관저 대신 정원의 소박한 고상가옥에서 지내고, 샌들을 신고 농민들과 대화하는 모습은 독립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도덕적 상징이 되었다.

그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1969년 9월 2일 79세로 사망했다. 유언에서 그는 화장을 요청했지만,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바딘 광장의 묘소에 안치되었다. 6년 후 그의 당과 군대는 사이공에 입성했다.

1959년 — 무장투쟁 재개, 그리고 호치민 루트의 탄생

제네바 협정(1954) 이후 북베트남은 정치투쟁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추구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지원 아래 통일 선거를 거부하고 구 비엣민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수만 명이 체포·처형되었다.

이에 베트남노동당 내에서는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보응우옌잡 등 온건파는 국제적 고립을 우려하며 신중론을 폈고, 레주언 등 강경파는 무장투쟁 재개를 주장했다. 호치민은 두 입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다. 서방 분석가들은 그가 잡을 선호했다고 보지만, 결국 레주언의 노선에 힘을 실어주었다.

1959년 1월, 제15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다: 남부에서 혁명적 폭력을 사용하여 지엠 정권을 전복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이다. 이는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전략의 출발점이었다.

같은 해 5월 19일(호치민의 생일) 정치국은 제559수송단을 창설하여 라오스를 통과하는 전략보급로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쯔엉선 산맥을 관통하는 이 길은 훗날 '호치민 루트'로 불리며 20세기 최대의 군사공학적 성취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에는 남베트남 해방 민족전선(NLF)이 결성되어 무장투쟁의 정치적 틀이 완성되었다.

이 결정들은 호치민이 단순한 상징적 원로가 아니라 전략적 분수령에서 방향을 정한 정치적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그해 말 그는 레주언을 차기 당 지도자로 지명했고, 자신은 국가원수와 정치국원으로서 전쟁 수행의 얼굴이 되었다. 1959년은 평화에서 전쟁으로, 분단 고착화에서 통일 투쟁으로 전환한 해였다.

1960년 12월 20일 — 남부 해방을 위한 제2의 통일전선, 베트콩

1954년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을 17도선으로 나누고 1956년 통일 총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지원 아래 선거를 거부하고 남부에 별도의 국가를 세웠다. 북베트남은 처음에는 정치투쟁 노선을 견지했지만, 지엠 정권의 가혹한 탄압(수만 명의 전 비엣민 간부와 민족주의자들이 체포·처형된 '반공 숙청')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1959년 1월, 베트남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전략적 전환을 결정했다: 남부에서의 무장봉기로의 이행이었다. 호치민은 당 주석으로서 이 결정을 승인했다. '르주언-호치민 노선'으로 불린 이 전략은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의 결합, 그리고 남부 농촌에 기반한 장기 인민전쟁을 상정했다.

그리고 1960년 12월 20일, 남부의 한 '해방구'(떠이닌 성 떤럽 마을)에서 애국세력대표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통칭 베트콩)이 공식 출범했다. 전선은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불교도, 지식인, 민족주의자까지 포괄하는 통일전선으로 설계되었고, 강령은 지엠 정권 타도, 평화적 통일, 민주중립국가 건설을 내걸었다. 초대 의장에는 사이공의 저명한 변호사 응우옌흐우토가 선출되어, 전선의 '비공산주의' 외관을 강화했다.

실질적으로 전선은 북베트남의 지도 아래 운영되었고, 그 군사 부문인 남베트남 해방군은 1968년까지 20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호치민에게 이 전선은 1941년 비엣민의 반복이자 완성이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과 그 동맹자를 상대로 한 민족통일전선이었다. 그가 평생 추구한 '대의'(đại nghĩa)의 전략, 곧 민족독립이라는 깃발 아래 모든 애국 세력을 결집시키는 노선의 최종 구현이었다.

1960년대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 — 분열된 사회주의 진영을 중재하려 한 혁명가

196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은 중소 분열로 갈라지고 있었다.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해석과 국제노선을 둘러싸고 공개적으로 충돌했고, 각국 공산당은 모스크바와 베이징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북베트남은 두 강대국 모두의 군사·경제 원조에 의존하는 처지였기에, 분열은 생존의 문제였다.

호치민은 이 틈에서 '중립'이라는 좁은 길을 걸었다. 1960년 8월, 그는 베이징을 먼저 방문한 뒤 모스크바로 날아가 흐루쇼프와 회담했다. 그가 제시한 '중국·소련 형제당에 대한 건의'는 양측의 입장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동 행동을 촉구하는 섬세한 문서였다.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81개국 공산당·노동자당 회의에서 호치민은 노장 혁명가의 권위로 중재에 나섰다. 회의 참가자들은 그가 연단에 서자 기립 박수를 보냈다. 레닌과 스탈린을 모두 알았던 마지막 세대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그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중재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중국의 후방 기지(광시 성)는 필수적이었다. 반면 소련은 최신 대공미사일과 중장비를 공급하는 유일한 원천이었다. 이러한 구조적 의존 속에서 하노이는 점차 베이징 쪽으로 기울었지만, 호치민 생전에는 완전히 한쪽 편을 들지 않았다. 1963년 미국 국가정보평가(SNIE 14.3-63)조차 "호치민이라는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살아있는 한 북베트남은 최대한의 독립성을 유지하려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의 사망 1년 전인 1968년, 소련이 주도한 부다페스트 회의에 북베트남 대표단은 참석했지만 중소 간 최종 선택은 거부했다. 호치민은 끝까지 '횡적(橫的) 연대'(제3세계 혁명운동의 자율적 공간)를 지키려 했고, 이 원칙은 1975년 통일 이후 베트남 외교정책의 유산이 되었다.

1968년 뗏 — 호의 마지막 설시(新年詩)가 전쟁의 판을 뒤집다

1968년 1월 30일, 구정(Tết) 전야에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해방민족전선(NLF) 병력 8만여 명이 남베트남 전역 100개 이상의 도시와 군사기지를 동시에 공격했다. 사이공의 미 대사관까지 특공대가 침투했다. 2차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단일 공세 작전이었다.

공세의 신호는 호치민이 직접 낭독한 설시(歲詩)였다. 호치민은 매년 구정마다 국민에게 바치는 시를 라디오로 낭독했는데, 1968년의 시는 달랐다. "금년 봄은 지난 여러 봄보다 훨씬 즐겁도다 / 승리의 기쁜 소식이 온 나라에 가득하도다 / 남과 북이 함께 미제와 싸우려 경쟁하네 / 진격하라! 완전한 승리는 반드시 우리 손에!" 이 마지막 연은 단순한 축시가 아니라 전군에 내려진 암호명령이었다.

사실 이 공세의 주된 설계자는 정치국 내 강경파인 레주언 당 제1비서와 보응우옌잡 장군이었다. 78세의 호치민은 이 무렵 일상적 의사결정에서 한발 물러나 '민족의 상징'이자 '할아버지 호(Bác Hồ)'로서 도덕적 권위를 발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정치국 내에서는 총봉기 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고, 호치민은 신중파에 가까웠다는 분석도 있으나, 결정된 뒤에는 공세를 전폭 지지했다.

군사적으로 뗏공세는 막대한 희생을 치른 실패였다. NLF는 전투원 대부분을 잃었고, 대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심리적 충격은 압도적이었다. 백악관이 '전쟁은 끝나가고 있다'고 말하던 순간, 적이 남베트남 전역을 동시 공격하는 장면이 미국 거실의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CBS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라고 물었고,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전쟁의 흐름이 돌아선 순간이었다.

호치민은 그해 말까지 살아서 전쟁의 판도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가 1969년 9월에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 사이공은 함락되고 베트남은 통일되었다. 설날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인의 시 한 수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었다.

1969년 유언 — 독립과 통일을 보지 못한 혁명가의 마지막 글

1965년 5월, 호치민은 75세 생일을 앞두고 타자기 앞에 앉았다. 「절대 비밀」이라고 적힌 서너 장의 문서, 훗날 '유언'(Di chúc)으로 불리게 될 글의 첫 원고였다. 그는 매년 자신의 생일 무렵에 이 글을 꺼내 다듬고 추가했고, 마지막 수정은 사망 4개월 전인 1969년 5월 10일에 이루어졌다.

유언은 공개를 전제로 쓰이지 않았다. "내가 칼 마르크스, 레닌 및 다른 혁명 선배들과 합류할 날"을 대비해 남기는 글이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이 문서의 존재를 공식 확인한 것은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89년의 일이다.

유언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당의 단결. "단결은 우리 당과 인민의 지극히 소중한 전통이다. 중앙위원회에서부터 각 기층 조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지는 눈동자처럼 당의 단결과 통일을 보존해야 한다."

둘째, 전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 "우리의 산은 항상 있을 것이고, 우리의 강은 항상 있을 것이며, 우리의 인민은 항상 있을 것이다. 미국 침략자들이 패배한 후, 우리는 우리의 땅을 열 배 더 아름답게 재건할 것이다."

셋째, 개인적 소망: 당과 인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화장을 요청하고, 유골을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묻어줄 것을 부탁했다.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자신이 24년 전 독립을 선언했던 바로 그날 79세로 사망했다. 당은 그의 화장 요청을 따르지 않았다. 소련 전문가들이 시신을 방부 처리했고, 하노이 바딘 광장에 묘소가 세워졌다. 유골을 국토 삼분에 나누어 묻어달라던 그의 소박한 부탁을 당과 국가가 거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전쟁 중인 국민에게 지도자의 육신이 필요했고, 통일 후에는 그가 직접 남부를 '순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상징적 약속이었다. 유언의 마지막 행은 이러했다: "나의 마지막 소원은 우리 당 전체와 인민 전체가 단결하여 평화롭고 통일되며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번영하는 베트남을 건설하고 세계 혁명에 값진 기여를 하는 것이다."

호치민 사상 —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베트남 땅에 심다

호치민은 단지 혁명을 지도한 실천가가 아니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베트남의 구체적 조건에 적용한 독자적 사상 체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오늘날 '호치민 사상'(Tư tưởng Hồ Chí Minh)으로 불리는 이 이론은 1991년 베트남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당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호치민 사상의 핵심은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 그리고 인간 해방의 변증법적 통일이다. 그는 식민지·반봉건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농민이 혁명의 주력임을 강조했고, 공산당이 민족 해방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말("공자, 예수, 마르크스, 쑨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인민의 행복과 사회의 복리를 추구했다. 나는 그들의 작은 제자가 되고자 한다")은 그가 전통 사상과 종교 윤리를 혁명 이론과 종합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사회주의론은 점진적 이행을 중시했다. 1954년 이래 베트남이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들어섰다고 보면서도, 낙후된 농업국에서 생산력 발전이 긴요함을 누차 강조했다. 국영 부문 육성, 노동자 소유권 실현, 그리고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국가" 건설은 그의 사상에서 사회주의의 핵심 과제였다.

호치민 사상의 또 다른 축은 혁명적 도덕이다. 근면, 검소, 청렴, 정직, 공익 헌신, 호치민 자신이 평생 실천한 이 가치들은 오늘날 베트남의 교육 과정에 포함되어 있으며, 모든 공산당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가 생전에 즐겨 쓴 경구는 "혁명 도덕을 높이고 개인주의를 타파하라"였다.

그의 이론적 유산은 베트남전쟁 승리 이후 도이머이(Đổi Mới) 개혁 시기에도 방향타가 되었다. 호치민 사상은 단지 과거의 혁명 이론이 아니라, 21세기 베트남 사회주의의 이념적 토대로서 현재진행형이다.

1975–1976년 — 유언을 거스른 영묘, 그리고 사이공의 새로운 이름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79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은 분명했다: 화장하여 유골을 북부·중부·남부 세 곳에 나누어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구리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땅도 절약된다'는 게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베트남노동당 지도부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소련의 방부 처리 전문가들이 하노이로 초청되어 레닌 영묘와 동일한 기술로 호치민의 시신을 보존했다. 1973년 9월 2일, 바딘 광장, 즉 1945년 그가 독립을 선언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영묘 건설이 시작되었다. 소련 건축가 가롤 이사코비치가 설계한 이 건물은 레닌 영묘를 본떴지만 베트남 전통의 경사 지붕을 결합했다. 1975년 8월 29일 정식 개방되었다.

그로부터 1년도 채 되지 않아 또 하나의 거대한 사후 헌사가 이어졌다. 1976년 7월 2일, 통일 베트남 국회는 사이공-자딘을 호치민 시로 개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프랑스 식민 수도에서 미국의 괴뢰 수도였던 도시가, 반세기 동안 그 도시의 체제와 싸워 이긴 혁명가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사실 이 구상은 1946년 남부 저항 전쟁 중에 이미 처음 제안된 바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박한 삶으로 유명했던 혁명가는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도시와 대리석 영묘를 보지 못했다. 그의 유언을 거스른 영묘와 그의 이름을 딴 도시는 오늘날 베트남에서 가장 신성한 순례지이자 최대 경제도시로 공존한다. 2014년 베트남 헌법은 호치민 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기초이자 지도 이념'으로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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