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독립 활동 서구 마르크스주의 독일 독일 1929–2026 ○ 자연사

공론장과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비판 이론을 다시 세운 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 철학자

1967년 6월 9일 하노버 학생 대회에서 하버마스는 루디 두치케의 주장을 오늘날 “‘좌파 파시즘’이라고 불러야 할” 주의주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그는 뒤에 이 단어 선택을 후회했다.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1954년 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53년 마르틴 하이데거가 나치 운동을 찬양한 말을 지우지 않고 옛 강의를 펴낸 것을 비판해 처음 주목받았다. 1956년 사회연구소에서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조교가 되었으나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부딪쳐 마르부르크로 옮겼고, 1961년 『공론장의 구조변동』으로 교수자격을 얻었다. 1964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호르크하이머의 강좌를 이었고, 1971~1981년 슈타른베르크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이끌었다.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1981)으로 비판 이론을 다시 세우려 했고, 1986년 역사가 논쟁을 일으켰다. 2026년 96세로 죽었다.

다른 이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위르겐 하버마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공론장에서 의사소통 행위로: 하버마스는 이성의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았나

하버마스의 출발점은 민주주의였다. 1961년 대학생들의 정치 의식을 조사한 공동 연구 『대학생과 정치』의 서문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정치 참여로 보았다. 성숙한 시민이 제대로 작동하는 공론 속에서 자기 사회의 질서를 스스로 정할 때 민주주의는 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헌정 국가에서는 무게중심이 의회에서 행정과 정당으로 옮겨 가 공론이 밀려났고, 시민은 마지막에 계산서만 치르는 ‘고객’의 처지가 되었다고 그는 비판했다.

교수자격 논문으로 써서 1962년 펴낸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공론이 어떻게 생겨나고 무너졌는지를 역사로 보여 준다. ‘공론장’이란 국가의 통제 밖에서 개인들이 모여 공공의 문제를 따지는 공간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17세기 중엽부터 커피하우스, 살롱, 식탁 모임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술과 문학을, 곧 경제와 정치를 토론했다. 그 안에서는 신분이 아니라 논증의 힘이 통했다. 베르사유 궁전처럼 군주의 위엄을 보여 주기만 하던 ‘과시적’ 문화와 달리, 공론장은 대화와 비판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자본주의 경쟁이 거세지면서 공론장은 특정 이해관계에 휩쓸렸다. 상업적 대중매체는 비판하는 공중을 수동적인 소비 공중으로 바꾸었고, 소통은 소수 대자본가의 영향 아래 좁아졌다. 그는 이를 ‘공론장의 재봉건화’라고 불렀다.

1981년 두 권으로 나온 주저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비판 이론의 바탕을 새로 놓으려 한 책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W.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합리화 자체를 인류사의 재앙적 과정으로 보았다. 하버마스는 그 부정적 판단을 대상과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는 ‘도구적 합리성’에만 한정하고, 그와 다른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내세웠다. 사람들의 행위를 맞추는 방식은 둘이다. 상대에게 영향을 미쳐 내 목적을 이루려는 ‘전략적 행위’가 있고, 서로 이해하고 합의하려는 ‘의사소통 행위’가 있다. 의사소통 행위에서 말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사실이라는 주장(진리), 규범에 비추어 옳다는 주장(정당성), 속마음 그대로라는 주장(진실성)을 함께 내세우고, 듣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따질 수 있다. 이유를 들어 따지는 이 과정에 이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는 ‘체계’와 ‘생활세계’라는 두 층의 사회 이론을 더했다. 생활세계는 사람들이 말로 서로를 이해하는 일상의 지평이고, 체계는 돈으로 움직이는 시장 경제와 권력으로 움직이는 관료 국가다. 근대에 체계는 생활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자립했고, 이제는 돈과 권력의 명령이 서로 이해해야만 유지되는 영역까지 파고든다. 하버마스는 이를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불렀다.

‘좌파 파시즘’ 발언: 하버마스는 왜 학생운동의 지도자와 맞섰나

하버마스는 1950년대부터 교육과 대학의 민주적 개혁을 주장했고, ‘좌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1967~1968년 학생운동에 사상적 자극을 준 사람이었다. 1967년 봄부터 서독 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운동 활동가가 서로를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는 일이 잦아졌다. 6월 2일 서베를린 시위에서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고, 6월 9일 하노버에서 장례가 치러진 뒤 독일 사회주의 학생동맹(SDS)의 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루디 두치케는 서독 대학들에 ‘행동 센터’를 세우자고 했다. 하버마스는 학생들에게 연대를 표하고, 서베를린 경찰의 행동을 앞으로의 항의를 겁주려는 ‘테러’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이 먼저 사회를 철저히 분석해야 하며, 복잡한 사회 구조를 바꾸는 데 직접행동은 승산이 적다고 말했다. 한스위르겐 크랄이 무장한 국가가 학생들에게 도발 말고는 다른 길을 남기지 않는다고 반박하자, 하버마스는 학생들이 체계적으로 도발하는 것은 ‘(파시즘적 함의를 지닌) 테러와의 놀이’라고 답했다. 두치케는 마지막 연사로 나서 “하버마스 교수님, 당신의 개념 없는 객관주의가 해방되려는 주체를 때려죽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이미 굶주림과 전쟁과 지배를 없앨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모든 것은 역사를 의식적으로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었다.

두치케가 자리를 뜬 뒤 하버마스는 다시 연단에 올랐다. 두치케가 실제로 제안한 것은 연좌 농성이라는 비폭력 시위뿐인데, 그 위에 1848년이라면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을 ‘주의주의 이데올로기’를 세웠고, 그것은 오늘날의 조건에서 “‘좌파 파시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의주의란 사회의 객관적 조건보다 사람의 의지가 역사를 바꾼다고 보는 태도다. 그는 두치케가 사람이 다칠 위험까지 일부러 감수하며 폭력을 끌어내려 하는지 밝혀 달라고 했다.

하버마스가 행동 센터나 연좌 농성 자체를 파시즘과 같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혁명가의 의지만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이론적 근거였다. 마르크스가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한 것과 같은 논리였다. 그는 불법 행동으로 국가를 도발하면, 바꿀 힘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 구조에 잠재한 파시즘을 오히려 끌어낼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그 바탕에는 파시즘을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결과이자 잠재적 위협으로 본 비판 이론의 파시즘론이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은 큰 반발을 불렀고, 그는 뒤에 이 단어 선택을 후회했다. 이후 서독에서 ‘좌파 파시즘’이라는 말은 주로 좌파 집단을 깎아내리는 데 쓰였다. 1969년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테오도어 W.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버마스의 이 비난을 비판했고, 아도르노는 하버마스를 옹호했다.

역사가 논쟁: 나치의 범죄를 다른 역사와 견주어 덜어 낼 수 있나

1986년 7월 11일 하버마스는 주간지 《차이트》에 「일종의 손해 청산」이라는 글을 실어 에른스트 놀테, 미하엘 슈튀르머, 클라우스 힐데브란트, 안드레아스 힐그루버 같은 역사가들의 나치 시대 서술을 ‘변호론적’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나치 지배와 홀로코스트를 독일 역사의 큰 흐름에서 떼어 내고, 나치즘을 볼셰비즘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해 버리며, 제2차 세계대전 때 국방군의 평판을 일부 되살리려 했다. 특히 나치즘을 스탈린주의와 같은 평면에서 비교하거나, 스탈린주의를 나치즘의 선행자이자 본보기로 그리는 논리를 그는 수정주의라고 불렀다. 슈튀르머가 독일사로 일종의 ‘대체 종교’를 만들려 하고, 힐그루버가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날들을 미화한다고도 비판했다.

그의 걱정은 역사 해석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 역사가들이 1945년 이후 독일이 이룬 ‘서방으로의 열림’을 다시 닫으려 한다고 그는 보았다. 그들이 ‘유럽 한가운데 놓인 독일’이라는 옛 지정학을 되살리려 한다고 비판하며, 그는 “우리를 서방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을 유일한 애국주의는 헌법 애국주의”라고 썼다. 헌법 애국주의란 민족이나 혈통이 아니라 민주적 헌법의 가치에 대한 충성을 공동체의 바탕으로 삼자는 생각이다.

글은 격렬한 반응을 불러 이른바 ‘역사가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일방적이지 않았다. 요아힘 페스트, 하겐 슐체, 호르스트 묄러, 이마누엘 가이스, 힐데브란트 등이 하버마스를 공격했고, 마르틴 브로샤트, 에버하르트 예켈, 한스 몸젠, 한스울리히 벨러 등은 그를 지지했다.

하버마스는 그 뒤에도 공적 논쟁에 계속 나섰다. 1990년 독일 통일에 대해서는 민주적 역동성 없이 경제적 요구에 맞춘 행정 절차처럼 치러졌다고 비판했다. 1992년 말 망명권을 제한하는 기본법 개정은 ‘복지 쇼비니즘’의 표현이라고 보아, 지면에서 반대하고 그해 11월 8일 35만 명이 모인 베를린 시위에 직접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