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국부」, 삼민주의와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혁명가
광둥 출신으로 하와이와 홍콩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흥중회, 1905년 도쿄에서 동맹회를 조직해 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곧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제창했으며 1923년 소련의 요페와 공동선언을 내고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받아들여 제1차 국공합작을 열었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그의 유산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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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1912중국동맹회 총리
- 1912.01–03중화민국 임시대총통
- 1919–1925중국국민당 총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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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
『아Q정전』의 작가, 신문화운동의 비판정신을 좌익작가연맹으로 이어 간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저장 사오싱 출신으로 일본에서 의학을 배우다 「국민의 정신을 고치겠다」며 문학으로 돌아섰다.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광인일기」는 최초의 백화 단편으로, 이어 「아Q정전」에서 낡은 사회의 정신적 노예상태를 그렸다. 1927년 이후 상하이에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번역하고 1930년 좌익작가연맹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으나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1936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마오는 그를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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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1926베이징대학 강사
- 1930–1936중국좌익작가연맹 지도자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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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껴안고 마오쩌둥 세대를 길러낸 베이징대학 도서관장
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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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1913톈진 북양법정전문학교 정치경제학 전공
- 1913–1916와세다대학 유학, 반위안스카이 학생운동 지도
- 1918–1927베이징대학 도서관장·역사학 교수, 『신청년』 편집위원
- 1919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이자 조직자
- 1920베이징 공산주의 소조 창립, 보이틴스키와 천두슈 연결
- 1921중국공산당 공동 창립자 (제1차 전국대표대회)
- 1922–1924제1차 국공합작 주창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 1926–1927농민무장혁명론 전환, 소련대사관에서 지하활동 지도
「외눈의 용」, 덩샤오핑과 짝을 이룬 홍군 총참모장이자 회하이 전역의 지휘관
쓰촨의 군인으로 1916년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었고 1926년 입당해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뒤 홍군 총참모장으로 대장정을 이끌었고, 항일전쟁기 129사단장으로 정치위원 덩샤오핑과 「류덩」 부대를 이루었다. 국공내전에서 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회하이 전역을 지휘해 승리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다. 건국 후 원수가 되어 난징 군사학원을 세웠으며 1958년 「교조주의」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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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7홍군 총참모장
- 1937–1945팔로군 129사단장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1930년 1월 5일 린뱌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옛 중국 속담 “별불꽃 하나가 들판을 태운다(星星之火,可以燎原)”를 인용하며 홍군의 전망을 둘러싼 비관론에 답했다.
후난성 샤오산 부근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창사에서 공부했고, 1911년 혁명과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1919년 5·4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1년 상하이 제1차 전국대회에 13명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중국공산당 창립에 가담했다. 농촌 근거지와 게릴라전, 인민전쟁 전략을 발전시켰고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지도부에 선출되었으며 그해 11월 군사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당 주석직은 1943년에 맡았다.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이끌었고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인민지원군을 파병했으며, 반대파를 탄압하고 대약진 운동(1958~1962)과 1966년 문화대혁명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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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쑨원의 부인으로 국민당 좌파에 남아 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이 된 인물
상하이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 쑹씨 세 자매의 둘째로, 1915년 쑨원과 결혼했다. 1927년 장제스의 반공 정변에 반대해 국민당 좌파의 상징이 되었고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0년대 상하이에서 민권보장동맹을 이끌었다. 항일전쟁기 홍콩에서 보위중국동맹을 조직해 공산당 근거지에 물자를 보냈다. 1949년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고 1981년 사망 직전 공산당에 입당해 명예국가주석 칭호를 받았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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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54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9–1975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후난의 사나이, 난창 봉기 총지휘와 제2방면군 사령관
후난 상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식칼 두 자루로 봉기했다는 전설을 남겼고, 1927년 난창 봉기를 지휘한 뒤 제2방면군을 이끌고 대장정에 올랐다.
후난 서부의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지방 무장을 이끌다 국민혁명군 군장이 되었고, 1927년 8월 1일 난창 봉기의 총지휘를 맡은 직후 입당했다. 후난·후베이 서부에 근거지를 세우고 대장정에서 제2방면군을 이끌었으며 항일전쟁기 120사단장이었다. 건국 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과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린뱌오·캉성의 공격을 받아 감금되었고 1969년 치료를 거부당한 채 사망했다. 197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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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08난창 봉기 총지휘
- 1936–1937홍군 제2방면군 총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창당 대회 의장에서 대장정 중 마오와 결별해 국민당으로 간 홍군 지도자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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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의장
- 1931–1935어위완 소비에트 · 제4방면군 지도자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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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25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 전권대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
- 1936중국공산당 북방국 서기 (화북 항일 저항 지도)
- 1941–1943신사군 정치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에 관하여」 보고, 마오쩌둥 사상 당규약 명문화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1959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원수)
- 1968모든 당내외 직위 박탈 및 제명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1년 키신저와의 비밀 회담으로 길을 열어 1972년 2월 21일 닉슨을 베이징에서 맞이했고, 같은 해 2월 28일 상하이 공동성명으로 냉전의 삼각구도를 뒤바꾸었다.
1898년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다.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 공산주의 조직 가입,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근무, 시안 사건과 충칭 협상의 수석 협상자 활동을 거쳤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함께 국무원 총리(초기에는 정무원 총리)에 임명되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1949~1958년에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초기 대외정책의 설계자로 활동했다. 쭌이 회의 이후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에 있었고, 문화대혁명기의 격동 속에서도 국가 행정을 유지하며 권력 균형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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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49–1958외교부장
- 1971–1972키신저 비밀 회담과 미중 정상회담으로 가는 외교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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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1922《천바오》 모스크바 특파원
- 1922모스크바에서 중국 공산당 입당
- 1923CCP 중앙위원, 선전·기관지 편집 책임
- 1927–1928CCP 임시 정치국 수장 (사실상 당 지도자)
- 1928–1930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CCP 대표단 단장
- 1930–1931CCP 중앙위원, 좌경폭동주의 비판 후 해임
- 1931–1934상하이 좌익작가연맹 지도, 루쉰과 공동 활동, 번역·문예비평
- 1934–1935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교육인민위원, 《붉은 중국》 편집
1930년 도시 봉기 노선 「리리싼 노선」으로 당을 이끌다 실각한 노동운동 지도자
후난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 입당했고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 1925년 5·30 운동의 조직자였다. 1928년 이후 당 중앙의 실권을 쥐고 1930년 혁명의 고조가 왔다며 창사·우한 등 대도시 공격을 명령했으나 실패했고, 코민테른의 비판으로 실각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5년 동안 소련에 머물며 소련인 아내를 맞았고 1946년 귀국해 노동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박해 속에 1967년 자살했으며 1980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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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1930중공 중앙 선전부장 · 실질적 지도자
- 1949–1954노동부장
쭌이 회의 뒤 총서기를 맡은 「28인의 볼셰비키」,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 편에 섰다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 대신 마오를 지지해 당 총서기(총부책)를 맡았다. 옌안에서 선전·이론 부문을 이끌었고 정풍운동 이후 마오에게 실권을 넘겼다. 건국 후 주소련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을 비판해 펑더화이와 함께 「반당집단」으로 몰려 실각했다. 문화대혁명기 유배지에서 197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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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1943중공 중앙 총서기
- 1951–1955주소련 대사
- 1954–1959외교부 부부장
옌안 시기 「5대 서기」의 한 사람이었던 조직가, 건국 이듬해 요절했다
후난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배우고 공산주의청년단을 이끌었다. 대장정 때 허룽과 함께 제2방면군을 지휘했고 1938년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로 마오의 지도권을 인정받는 데 기여했다. 1943년부터 중앙서기처 서기로 당 조직과 재정을 맡아 마오·류사오치·저우언라이·주더와 함께 「5대 서기」로 불렸다. 1949년 건국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50년 뇌출혈로 46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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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1940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43–1950중앙서기처 서기
'28인의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마오쩌둥의 최대 정적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코민테른에 충실한 교조주의 노선을 들여와 중공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의 노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상징으로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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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1929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 1931.1중공 중앙정치국원 선출
- 1931–1937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37–1938중공 장강국 서기
- 1949–1956중앙법제위원회 주임
- 1956–1974소련 망명, 반마오 선전 활동
『소피 여사의 일기』에서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까지, 옌안과 반우파 투쟁을 모두 겪은 작가
후난 출신으로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신여성의 내면을 그려 이름을 얻었고, 남편 후예핀이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입당했다. 1936년 산베이의 홍군 지역에 도착해 마오의 환영을 받았으나 1942년 「3·8절 유감」으로 옌안의 성차별을 지적해 정풍운동에서 비판받았다. 토지개혁을 그린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로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로 몰려 북대황 농장에서 20년 넘게 노동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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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백합」으로 옌안의 특권을 비판했다가 정풍운동의 첫 희생자가 된 작가
허난 출신 번역가·작가로 1937년 옌안에 가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했다. 1942년 3월 『해방일보』에 실은 잡문 「야생 백합」에서 간부의 식사·의복 등급과 청년의 좌절을 지적했고, 곧 정풍운동에서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판 대회의 표적이 되었다. 1943년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1947년 국민당군의 옌안 공격으로 철수하던 중 산시성 싱현에서 처형되었다. 1991년 공안부가 트로츠키파 혐의를 공식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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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노선을 대표한 중공의 젊은 총서기이자 당 언론의 설계자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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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1926상하이대학 수학, 5·30 운동 참여
- 1926–1930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28인의 볼셰비키' 결성
- 1931–1935중공 중앙 총서기 (중앙총책임자)
- 1935.1쭌이 회의에서 실각, 정치국원 유임
- 1937–193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41–1946『해방일보』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
- 1946충칭 정치협상회의 중공 대표, 귀환 중 순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