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그의 집단안보 외교를 상징하는 구호는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였다. 사료는 이 말이 나온 자리를 하나로 특정하지 않는다. '평화의 불가분성'을 제목으로 내세운 국제연맹 총회 연설은 1936년 7월 1일의 기록이다.
러시아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외교관. 1876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 현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태어났다. 1930~1939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집단안보를 주창했고, 1939년 5월 스탈린이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대숙청기에 그는 숙청과 트로츠키파 탄압을 공개 지지하고 부하린·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되 처형에는 반대했다. 1940년 NKVD는 그를 비밀리에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독소전쟁 후 복무에 나가 1941~1943년 주미 대사와 쿠바 공사를 겸했고, 외무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51년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해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0–1939 외교·국제활동 · 소련 · 외교
경력 연표
- 1930–1939외무인민위원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혁명 조직의 무기 밀반입 담당1905년 혁명기에 파리에 특별국을 설치해 러시아로 무기를 보내는 일을 총괄했다.
- 1921–19221921~1922년 대기근외무부인민위원, 리가 협정 소비에트 측 서명자1921년 8월 리가에서 ARA 유럽 책임자 브라운과 열흘간 협상해 미국 구호청의 러시아 진입 협정에 서명했다.
- 1934–1939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전환외무인민위원 · 집단안보 주창자국제연맹 가입과 프랑스-소련 조약으로 집단안보를 추구했다.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집단안보 노선의 소련 외무인민위원프랑스와의 접근을 추진한 집단안보 외교가 인민전선 노선의 외교적 짝이었다. 1935년 5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으로 이어졌다.
- 1934–1938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집단안보 노선의 소련 외무인민위원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으로 이어진 집단안보 외교를 이끌었다. 인민전선 노선의 외교적 짝이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소련 외무인민위원불개입위원회에서 독일·이탈리아의 협정 위반을 문제 삼으며 집단안보 노선을 폈다
- 1937–1938대숙청숙청 처벌 심의위원대숙청기에 부하린과 리코프의 처벌을 심의해 추방과 재판에는 찬성하고 처형에는 반대했다.
- 1939.08–1940.08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집단안보 노선의 설계자, 1939년 5월 3일 해임외무인민위원(1930~1939)으로서 반파시즘 집단안보를 추진했으나 1939년 5월 3일 스탈린에 의해 경질되었다. 그의 해임은 독일을 향한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였다.
- 1941–1945대조국전쟁전시 외교관전시 주미 대사로 연합국 협력의 통로를 열었다.
지하 볼셰비키에서 '리트비노프-로크하트 교환'까지 — 혁명가 시절 (1898–1918)
막심 리트비노프는 본명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당시 러시아 제국령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0년 키예프 위원회에서 지하 인쇄소를 운영했다. 1901년 체포되었으나 1902년 키예프 루키야니우카 감옥에서 '이스크라'파 11명의 탈옥을 조직하고 직접 참가했다. 이후 스위스로 망명해 《이스크라》의 러시아 밀반입을 책임졌고, 1905년 혁명기에는 파리에 특별국을 설치해 카모 등과 함께 러시아로의 무기 밀반입을 총괄했다. 1905년 여름 영국 증기선 《존 그래프턴》으로 무기를 수송하려 했으나 좌초로 실패했고, 이듬해 마케도니아 혁명가 나움 튜펙치예프의 도움으로 바르나로 대량의 무기를 보냈다. 여기까지는 실패한 작전만 기록에 남아 있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무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08년 카모의 티플리스 은행 강탈 사건과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체포·추방당했고, 이후 런던에서 10년간 망명 생활을 하며 볼셰비키 런던 그룹 서기로 활동했다. 1917년 혁명 후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영국 외교대표가 되었으나, 1918년 9월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로크하트가 러시아에서 체포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런던에서 체포되어 브릭스턴 교도소에 10일간 구금되었다. 한 달 뒤 두 사람은 상호 교환되었고, 이것이 소비에트 외교사 최초의 스파이 교환이었다.
치체린의 부관에서 제네바의 군축 무대까지 (1921~1930)
1921년 리트비노프는 외무인민위원 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 아래 제1부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외무부서의 2인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정반대였고 서로 경쟁 관계가 되었다. 치체린은 반서방 성향이 강해 소비에트 러시아가 자본주의 열강과의 거래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보았고, 외교사학자 조너선 해슬럼에 따르면 리트비노프는 그보다 학식은 떨어졌으나 서방과 성실하게 협상하려 했다. 1930년 이전 영소 관계에서 리트비노프는 1921년 2월 아일랜드 특사 패트릭 매카턴에게 소련의 우선순위는 아일랜드 공화국 승인이 아니라 영국과의 무역협정이라고 밝혔고, 영소 무역협정은 그해 3월에 체결되었다. 같은 해 9월 7일 커즌 경의 항의 각서에는 그 출처를 '직업적 위조범과 사기꾼의 패거리'라고 답했으며, 1927년 아르코스 사건과 보수당 정부의 국교 단절 이후에는 단호한 성명을 냈고 치체린은 신중론을 폈다.
그는 1927년 11월 30일부터 국제연맹 군축준비위원회에 참석해 1932년 제네바 세계군축회의로 대체될 때까지 활동했고, 처음에는 전면 군축을 주장했다. 폴봉쿠르의 반론에 대해 그는 강대국들이 군축하면 소국들의 안전이 오히려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영국 노동당과 의회노동당, 노동조합총회 공동위원회는 1927년 11월 30일 소련 대표단의 '일반적·동시적' 군축 제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리트비노프는 1928년 켈로그-브리앙 조약 참여를 지지했는데, 이는 명목상 상관인 치체린과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서명국들이 비준을 미루자 그는 서명국들이 조약의 목표를 상호 준수할 것을 선언하는 이른바 리트비노프 의정서를 제안했고, 이 의정서는 1929년 2월 모스크바에서 소련, 폴란드, 루마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서명했으며 이후 여러 나라가 참여했다.
이 시기의 리트비노프는 군축과 조약의 틀 안에서 자본주의 열강과의 제한적 협력을 밀어붙인 인물이었다. 다만 이 시기에 관해서는 해슬럼의 인물평이나 치체린과의 경쟁 관계 같은 세부 서술을 필립스의 《혁명과 서방 사이》(1992) 같은 연구로 보강할 필요가 있다.
집단안보 노선과 1939년 해임 —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
1930년대 리트비노프의 외교는 '집단안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국제연맹 무대에서 그는 파시즘에 맞선 반침략 연합을 주창했고, 1933년 미수교 후 소련-미국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1935년 소련-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상호원조조약은 이 노선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1939년 5월 3일, 스탈린은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후임 외무인민위원에 앉혔다. 유대인인 리트비노프의 퇴진은 곧 독일과의 협상 가능성을 의미했다: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 외무장관'과는 협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임 석 달 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리트비노프의 해임 자체가 소련 외교 노선의 근본적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