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안보를 외친 외교관, 1939년에 치워지다
1935년 국제연맹 총회 연단에서 리트비노프는 두 단어로 자신의 외교 철학을 요약했다: "Мир неделим" —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한 지역의 평화만으로는 안전할 수 없으며, 가까운 이웃이든 먼 이웃이든 모두의 평화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 구호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 외교관으로, 1930년대 외무인민위원 시절 국제연맹에서 반파시즘 집단안보 노선을 주도하고 1933년 미소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파시즘에 맞선 광범한 동맹을 추구했으나, 독일과의 협상으로 방향을 틀려던 스탈린은 1939년 5월 그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세웠다. 유대인 외무장관의 퇴진 자체가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였다. 독소전쟁 발발 후 복권되어 주미 대사와 외무부인민위원으로 연합국 외교에 복무했다.
경력 연표
- 1930–1939외무인민위원
관련 역사 사건
- 1921–19221921~1922년 대기근외무부인민위원, 리가 협정 소비에트 측 서명자1921년 8월 리가에서 ARA 유럽 책임자 브라운과 열흘간 협상해 미국 구호청의 러시아 진입 협정에 서명했다.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집단안보 노선의 소련 외무인민위원프랑스와의 접근을 추진한 집단안보 외교가 인민전선 노선의 외교적 짝이었다. 1935년 5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으로 이어졌다.
- 1934–1938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집단안보 노선의 소련 외무인민위원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으로 이어진 집단안보 외교를 이끌었다. 인민전선 노선의 외교적 짝이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소련 외무인민위원불개입위원회에서 독일·이탈리아의 협정 위반을 문제 삼으며 집단안보 노선을 폈다
- 1939.08–1940.08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집단안보 노선의 설계자, 1939년 5월 3일 해임외무인민위원(1930~1939)으로서 반파시즘 집단안보를 추진했으나 1939년 5월 3일 스탈린에 의해 경질되었다. 그의 해임은 독일을 향한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였다.
- 1941–1945대조국전쟁전시 외교관전시 주미 대사로 연합국 협력의 통로를 열었다.
지하 볼셰비키에서 '리트비노프-로크하트 교환'까지 — 혁명가 시절 (1898–1918)
막심 리트비노프는 본명 메이르-헤노흐 발라흐로, 당시 러시아 제국령 비아위스토크(현 폴란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0년 키예프 위원회에서 지하 인쇄소를 운영했다. 1901년 체포되었으나 1902년 키예프 루키야니우카 감옥에서 '이스크라'파 11명의 탈옥을 조직하고 직접 참가했다. 이후 스위스로 망명해 《이스크라》의 러시아 밀반입을 책임졌고, 1905년 혁명기에는 파리에 특별국을 설치해 카모 등과 함께 러시아로의 무기 밀반입을 총괄했다. 1905년 여름 영국 증기선 《존 그래프턴》으로 무기를 수송하려 했으나 좌초로 실패했고, 이듬해 마케도니아 혁명가 나움 튜펙치예프의 도움으로 바르나로 대량의 무기를 보냈다. 여기까지는 실패한 작전만 기록에 남아 있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무기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08년 카모의 티플리스 은행 강탈 사건과 연루되어 프랑스에서 체포·추방당했고, 이후 런던에서 10년간 망명 생활을 하며 볼셰비키 런던 그룹 서기로 활동했다. 1917년 혁명 후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영국 외교대표가 되었으나, 1918년 9월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로크하트가 러시아에서 체포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런던에서 체포되어 브릭스턴 교도소에 10일간 구금되었다. 한 달 뒤 두 사람은 상호 교환되었고, 이것이 소비에트 외교사 최초의 스파이 교환이었다.
집단안보 노선과 1939년 해임 — 외교 노선 전환의 신호
1930년대 리트비노프의 외교는 '집단안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국제연맹 무대에서 그는 파시즘에 맞선 반침략 연합을 주창했고, 1933년 미수교 후 소련-미국 국교 정상화를 이끌었다. 1935년 소련-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상호원조조약은 이 노선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1939년 5월 3일, 스탈린은 리트비노프를 해임하고 몰로토프를 후임 외무인민위원에 앉혔다. 유대인인 리트비노프의 퇴진은 곧 독일과의 협상 가능성을 의미했다: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 외무장관'과는 협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임 석 달 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리트비노프의 해임 자체가 소련 외교 노선의 근본적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