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소련 러시아 1883–1936 ✕ 처형

10월에 반대했고, 스탈린을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죽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에 낭독된 직후.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 동지가 그 우려를 불식시켰다」 유언은 묻혔고, 스탈린은 남았다.

레닌의 가장 오랜 망명 동지 중 한 명으로, 코민테른 초대 의장을 지내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으나, 1917년 10월 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하며 레닌과 충돌했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를 막기 위해 스탈린·카메네프와 트로이카를 구성, 「스탈린 동지는 우려를 불식했다」며 유언 공개를 저지했다. 그러나 곧 스탈린에게 배제되어 1926년 평생의 적 트로츠키와 통합반대파를 결성했고, 패배와 굴복을 거듭하다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25–1927년 통합반대파 — 스탈린의 동맹자에서 트로츠키의 동지로

1924년 레닌 사후, 지노비예프는 카메네프·스탈린과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다. 지노비예프는 특히 1924년 '문학적 토론'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며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을 공격했다. 그는 트로츠키의 출당을 요구하는 쪽에 섰다.

그러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트로츠키가 무력화되자 스탈린은 부하린·리코프와 손을 잡고 방향을 돌렸다. 1925년 12월 제14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 대표단의 지지를 받아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신반대파'의 기치를 들었으나 참패했다. 이듬해 초 그는 정치생명을 구하기 위해 평생의 적 트로츠키와 손을 잡았다. 1926년 2월,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는 우호적인 서신을 교환했고, 그해 여름 '통합반대파'가 결성되었다.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직과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차례로 해임되었고, 1926년 7월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1927년 10월에는 중앙위원회에서도 제명되었고, 11월 14일 당에서 완전히 출당되었다. 11월 28일에는 올드 볼셰비키 협회에서도 추방되었다. 트로츠키와 함께 자신이 세우는 데 일조했던 기계에 짓눌린 것이다.

1928년 초 지노비예프는 칼루가로 유배되었다. 그해 말 그는 스탈린 앞에 굴복하여 자신의 '반당적 오류'를 인정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고, 당적을 회복했다. 통합반대파의 패배는 스탈린 1인 독재의 최종 관문이었다. 지노비예프의 배반과 굴욕은 앞으로 8년 뒤 그를 기다리는 운명의 서막에 불과했다.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재판 — 피고석에 선 코민테른 의장

1936년 8월,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에 16명의 피고가 섰다. 그중 가장 큰 이름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였다. 레닌의 최측근이자 코민테른 초대 의장, 한때 소비에트 체제의 얼굴이었던 그가 이제 '테러리스트-트로츠키주의자 중심'의 수괴로 기소되었다.

검사 비신스키는 키로프 암살 사건을 지노비예프의 사주로 몰아갔다. 지노비예프는 개인적 충성심 하나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메네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도, 자백을 해도, 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도 소용없었다. 그가 상징하는 것이 문제였다: 구 볼셰비키, 레닌 시대, 10월 혁명 당시 망설였던 모든 것.

재판 2일차, 모든 피고가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 구형을 받아들였다. 지노비예프는 마지막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파시즘적이고 반소비에트적인 활동을 저주한다... 사회주의 조국을 배반한 죄에 대해 나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

며칠 후, 16명 전원이 총살되었다. 코민테른의 의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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