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1918년 11월 뮌헨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다가 이듬해 암살된 언론인
1918년 11월 바이에른 혁명을 조직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국을 선포했으며, 1919년 2월 사임하러 가던 중 암살되었다.
베를린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 평론가와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고, 뒤에 뮌헨으로 옮겼다. 전쟁에 반대해 USPD에 들어갔고, 1918년 1월 군수 파업을 이끌다 투옥되었다. 11월 7일 테레지엔비제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병영을 돌아 이튿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하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전쟁 책임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를 공개해 우파의 증오를 샀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사임하러 가던 2월 21일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90–1895『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고 편집자로 활동했다.
1898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1900–1905『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다.
1907–1910뉘른베르크의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1917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1918군수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혐의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화가와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1917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8~1919년 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고, 1919년부터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당 대표단으로 참석했으나 코민테른 가입 조건과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재통합된 뒤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1933년 나치 집권 후 망명했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상세 이력 보기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1923.0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1926.0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독일 공산당을 대표해 창립에 기권하고, 뒤에 대숙청으로 총살된 공산주의자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에벌라인은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위임에 따라 즉각 창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레닌의 설득으로 개인 의견은 바뀌었지만, 위임을 따라 반대표 대신 기권했다.
튀링겐 잘펠트 출신의 설계 기술자로 SPD에 들어갔고, 전쟁 중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세웠다. 1919년 3월 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서둘러 새 인터내셔널을 세우면 볼셰비키가 지배하게 된다는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권고에 따라 창립 표결에 기권했다. 창립 뒤에는 코민테른과 독일 당에서 조직·재정 일을 맡았고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37년 체포되어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베를린의 공구공 출신으로 1910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8~1933년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나치 시기 저항 단체에 가담해 두 차례 투옥되었다. 전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강제 합당을 지지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49년 10월 동독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다. 글라도프 일당 재판에서 사형이 가능하도록 성인 형법을 위법하게 적용하게 했다. 1953년 6월 30일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인터뷰에서 6월 17일 파업 참가자를 혐의만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가 「국가와 당의 적」으로 몰려 해임·제명·체포되었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56년 석방·사면되고 1958년 복당했으며, 1973년 죽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베르됭 전투에서 부상한 뒤 1917년 제대했고, 전쟁 경험을 거쳐 평화주의자가 되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대통령을 엿새간 맡고 공화국의 무장 저항에 참여했으며, 반역죄로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대표 희곡들을 썼다. 나치 집권 뒤 망명해 반나치 활동을 이어갔고 1939년 뉴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4독일군에 자원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1917전쟁 중 부상과 건강 악화 뒤 군에서 제대하다.
1919독일독립사회민주당원으로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지도부에 참여하고, 4월 6~12일 대통령을 맡다.
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원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사회민주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에 들어갔고 마그데부르크·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를 지냈다. 1933년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망명했고, 소련에서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에 참여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1946년까지 작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당 규율을 맡았고 정치국원·인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봉기 뒤 정치국 다수가 울브리히트를 내치려 할 때 호네커와 함께 그의 편에 섰다. 1971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슈투트가르트 근교 포이어바흐에서 태어나 보슈 공장의 금속 프레스공으로 일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0년대 공산당 농업 정책을 이끌었다. 나치 집권 뒤 투옥되었다가 소련으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되어 1942년 게슈타포에 넘겨졌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3월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화폐개혁과 경제계획을 이끌었다. 동독 정치국원과 부총리,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3년 7월 정치국에서 울브리히트 교체를 권했으나 자리를 지켰다. 기계공업장관과 대외무역장관을 지내다 196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195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의 수석 이데올로그였다가 쉬르데반 사건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난 경제학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19년 독립사회민주당, 1920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당 신문 편집자로 일했다. 1926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와 붉은 교수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33년 망명해 파리에서 울브리히트의 비서로 일했고, 1936년 모스크바에서 「이념적 일탈」로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전쟁 중에는 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당 선전·교육을 맡았고, 1950년 정치국원, 1950~1955년 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어 당의 수석 이데올로그로 통했다. 1953년 6월 할레에서 봉기 진압 지휘부를 꾸렸다. 1956년 뒤 농업 전면 집단화에 반대하다 1958년 정치국에서 쫓겨났고,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