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0월 키이우의 대규모 혁명 집회를 이끌었고 10월 17일 칙령 이후 군중이 시두마 청사를 파괴했다. 10월 18일 발코니 연설은 1908–09년 재판의 기소 사유가 되었으며, 핀란드로 피신한 뒤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1868년 8월 20일(구력)/9월 1일(신력) 폴타바현 루브니에서 태어나 1940년 12월 2일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조부는 뷔르템베르크에서 1818년 러시아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목수, 어머니는 몰락한 폴란드계 지주 가문 출신이다. 1882년 가족이 러시아 신민권을 취득했고 본인도 대학 시절 이를 취득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 학생 서클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07년 제5차 RSDLP 대회(런던) 대의원이었다. 1917년 11월 RSFSR 농업인민위원, 1917년 12월–1918년 2월 식량인민위원으로 곡물 독점과 징발을 집행했다. 1920–21년 탐보프 주 집행위원장으로 반란 진압에 실패해 해임된 뒤 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1927–29)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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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하르키우 대학 학생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1898RSDLP 입당; 볼로그다 유형 (5년, 결핵으로 사마라 요양)
1902–1905키이우 RSDLP 위원회 위원,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 철도노조 전국대회 의장
190510월 키이우 혁명 집회 주도, 시두마 발코니 연설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1907–1908RSDLP 제5차 대회(런던) 대의원;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1917.11RSFSR 농업인민위원 대행 (11월 13–24일)
1917.12–1918.02RSFSR 식량인민위원 — 곡물 독점과 징발 체제 주도
1918–1919시베리아, 페름, 뱟카, 우파, 툴라 식량 비상위원; 우크라이나 식량인민위원
1920–1921탐보프 주 집행위원장 — 농민 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
1922–1923소련 오스트리아 외교대표 겸 통상대표
1923–1927우크라이나 외교인민위원부 전권대표 겸 합동위원
1927–1929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 — 농공복합단지 구상 주도
1931–193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겸 VUAMLIN 의장
그가 굶주림으로 열차에서 실신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1939년 영화 장면으로 퍼졌고 후대 선전에서 유래했다는 지적도 있다. 레닌이 1919년 6월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고 지시한 일은 문헌으로 확인된다.
1870년 알료시키(현 우크라이나 올레슈키)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대가정에서 자랐고, 1891년 마르크스주의 학생 서클을 조직했다. 1893년 체포되어 헤르손 농업학교에서 제적된 뒤 통계사로 일했고, 1898년 RSDLP에 입당해 우파와 하르코프에서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하다 1902년 올로네츠현 3년 유형을 받았다. 1917년 우파 소비에트와 시두마를 이끌며 페트로그라드로 곡물을 보냈고, 1918년 2월부터 1921년 12월까지 식량인민위원으로서 5월 8일 식량 독재를 제안하고 곡물 분견대와 빈농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고스플란 의장을 지냈다. 1928년 5월 크림에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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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1902–1904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3년 유형, 1904년 11월 우파로 복귀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1917–19211917년 11월 식량인민위원 대리, 1918년 2월 25일부터 1921년 12월 2일까지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산하 고스플란 의장, 1925~26년 통제 수치로 연례 계획 수립 개시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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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1917.03–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17.12–1918.0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1918.07–1919.01체카 전연방 위원회 위원 겸 반혁명투쟁국 국장,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비밀정치국 국장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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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모터전, 기계화, 항공, 화학 같은 건 군사전문가들이 지어낸 것이다. 지금으로선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병대일 것이다.」
1904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재단사에서 직업혁명가가 되었다. 부됸니, 보로실로프와 함께 제1기병군을 창건하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며 내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37년 국방부인민위원 대리 겸 지휘·지도인원관리국장에 오른 뒤, 키예프 군관구에서 지휘관들에 대한 '군부 파시스트 음모' 수사를 주도하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글라부쁘라포름(총군편성보충관리국) 국장으로서 붉은 군대의 병력 편성과 보충을 총괄했으나, 기병 만능론에 집착해 기계화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흐노에게 체포된 그는 아나키스트 동생 아르툠이 '아직 늦지 않았다'고 쓴 편지를 꺼내 보였으나, 마흐노의 총에 쓰러졌다.
1886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우크라이나 농가에서 태어나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에서 무장 분견대를 이끌었고, 1917년 이후 보로실로프와 함께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백군 및 독일 점령군과 싸웠으며,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협력했다. 제1기병군 특별전권위원과 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과 브란겔 토벌에 참전했고, 1921년 1월 3일 마흐노 부대의 기습으로 전사했다. 사후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고 이바노프의 소설과 1942년 동명 영화로 소비에트 내전 영웅의 판테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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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루간스크 공장 노동자, 볼셰비키 입당(1904), 1905년 혁명 무장분견대 조직, 수차례 체포
1917–1918루간스크 적위대 참모장, 돈바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칼레딘·독일군과 전투
1918보로실로프와 함께 차리친으로 후퇴, 제10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1919하리코프 군사위원·수비대장, 그리고리예프 반란 진압, 예카테리노슬라프 탈환
1919–1920제1기병군 혁명군사평의회 특별전권위원, 로스토프 함락 참여
1920–1921제14기병사단장,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북타브리야 작전 참전, 마흐노군 토벌 중 전사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개표위원장으로서 스탈린 반대표가 대량 나왔음을 카가노비치에게 보고했다. 아들 드미트로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스스로에게 내린 사형선고로 여겼다.
볼셰비키 우크라이나의 창립 세대 정치가이자 학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결성을 주도하고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에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었고 소련 수립 조약에 서명했다. 교육인민위원으로 두 차례(1922~1924, 1933~1938) 재임했으며, 1933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후퇴를 집행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학술 기반을 구축했고, 중앙위원회 서기와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7년 영화관에서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20분 재판 끝에 사형을 뜻하는 형을 선고받고 당일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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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멘셰비키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키이우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후 키이우 공과대학 물리학 강사
1917.03–11볼셰비키로 전향, 키이우 당위원회 위원장,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
1917.12–1918.03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민비서국 교육담당 비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우크라이나 대표단장
1918.03–04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국가원수)
1918.07–1920좌파 사회혁명당 반란 진압 공산대대 정치위원, 붉은군대 제12·13·14군 및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0.07–09갈리치아 혁명위원회 의장
1921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적기훈장 수훈
1921–1922전우크라이나 소비자협동조합연합회 의장
1922–1924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차), 소련 수립 조약 서명
1924–1925우크라이나·크림 군관구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1925–192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정위원
1927–1932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감찰인민위원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1933–193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2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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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1919.02–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1921.03–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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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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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차르친 전투에서 스탈린의 신임을 얻은 포병 장교로,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적군 포병총국을 이끌며 T-34·KV-1 전차, 카추샤 로켓포, 기관단총 도입을 모두 거부한 극단적 군사 보수주의자였다. 독소전 초기 야전 지휘의 연이은 실패로 1942년 원수 계급이 박탈되고 소장으로 강등되었으며, 1950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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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1907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1923–1925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1938.07.04'독일 첩보기관 요원'과 반소련 파괴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 특별 트로이카 의장으로 탄압을 주도한 뒤, 1937~1938년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볼린현 돌스크의 우크라이나인 농업노동자 집안에서 루카 그리추크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네 등급 모두 받았고, 1918년 입당해 두브로비차 봉기를 조직했다. 1920년부터 체카에서 일하며 튜튜닉 장군을 폴란드에서 끌어낸 작전에 참여했다. 1934~1937년 카바르다발카르 NKVD를 이끌며 공화국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년 10월부터 NKVD 감옥부 부부장,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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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두브로비차 봉기의 조직자·지도자로 활동한 뒤 붉은군대에 복무했다.
1920–1934체카·GPU·OGPU에서 근무했고, 카바르다발카르 OGPU 지역부서장까지 올랐다.
1934–1937카바르다발카르 자치주·공화국 국가보안부서를 이끌고 특별 트로이카 의장을 맡았다.
1937–1938카바르다발카르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뒤 소련 NKVD 감옥부 부부장과 부장으로 솔로베츠키 특별감옥 수감자 처형에 직접 관여했다.
1938–19391938년 10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3일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침묵이 그의 비장의 카드였다. 흐루쇼프가 무언가 제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 네, 물론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 윌리엄 토브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부 수반을 두 차례(1938~1939, 1947~1954) 역임하고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1954~1969)으로 15년간 재임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색 파르티잔을 조직했다. 1930년대 모스크바 바우만 구역에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인연을 맺어 측근으로 성장했고, 대숙청기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시 파르티잔 투쟁을 조직하고 종전 후 공화국 재건을 주도했다. 흐루쇼프의 충실한 집행자로, '침묵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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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적색 파르티잔 조직 · 붉은 군대 정치일꾼
1921–1928쇼스트카·체르니고프·페르보마이스크 당위원회 서기
1931–1937모스크바 바우만 구소비에트 의장 → 모스크바 주당 제2서기 → 서부 주당 제1서기
1938년 여름, 심사를 기다리는 대량작전 「앨범」이 중앙에 10만 명분 넘게 쌓였다. 그 서류 더미에서 유죄와 형량을 확정하던 회계등록부장이 체사르스키였다.
오데사의 사무원 가정에서 태어나 1915년부터 사회혁명당과 보로트비스트를 거쳐 1919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0년대 당 중앙위 기구에서 일하다 1935년부터 중앙위 서기 예조프의 보고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를 맡자 그를 따라 들어가 그를 위해 신설된 인민위원 특임전권위원 자리를 거쳐 회계등록을 총괄하는 GUGB 제8부장이 되었다. 대량작전의 「앨범」 심사와 처형 명부 실무가 그의 손을 거쳤고, 1937년 국가보안 상급소좌로 승진했다. 1938년 비밀정치부(제4부)장과 모스크바주 NKVD 국장을 지낸 뒤 우흐토-이젬스키 수용소장으로 밀려났고,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2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2002년 복권이 거부되었다.
바실렙스키 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0년 1월 7일 최고군사회의에서 스탈린이 누가 지휘를 맡겠는가를 묻자 긴 침묵이 흘렀고, 티모셴코가 일어나 논의된 모든 것을 받는다면 맡겠다고 답하며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895년 베사라비아 오르만에서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나 1914년 징집되었고, 내전에서 부됸니 기병군 계열로 성장했다. 1920~1930년대에 기병 군단과 군관구를 지휘했고 겨울전쟁에서 북서전선을 이끌며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했다. 1940년 5월 국방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대숙청으로 망가진 붉은 군대의 재무장·기계화를 추진했다. 1941년 6월 23일부터 스타브카 의장을 맡았고 이후 여러 전선을 지휘하며 11월 로스토프나도누를 되찾았다. 1942년 5월 하리코프 포위 실패와 스탈린그라드 전선 해임 뒤 1943년 3월까지 북서전선을 지휘했고, 이후 스타브카 대표를 지냈으며 1960년부터 명예직을 맡았다. 1970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