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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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Karl Wilhelm Ferdinand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왕정·왕당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신성 로마 제국) 독일 1735–1806 ✕ 아우어슈테트 전상으로 사망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

1792년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언을 내, 프랑스 왕실이 해를 입으면 파리와 주민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이자 프로이센군 원수였다. 1792년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고,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명의는 공작이었지만 문안은 망명 귀족 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지키려던 이 위협은 파리에서 오히려 왕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는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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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아버지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가 되었다.
  • 1792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으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 1792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 1806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아우어슈테트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11월 10일 오텐젠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왕정·왕당파 프로이센 독일 (프로이센) 1744–1797 ○ 재위 중 포츠담에서 사망

필니츠 선언에 서명하고 대프랑스 원정에 나선 프로이센 왕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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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 179711월 16일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18–1883 ○ 자연사

『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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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20–1895 ○ 자연사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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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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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0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0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Wilhelm Liebknecht

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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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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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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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파울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47–1934 자연사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야전원수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육군을 지휘했고,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34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대 초 의회 지지를 얻지 못한 내각이 대통령 비상명령에 의존하는 통치를 하도록 승인했고,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정부는 곧 테러와 정치적 조작을 통해 권력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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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다
  • 1925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 1933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다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Hermann von Eichhorn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으로 있다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된 독일 원수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된 프로이센 원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의 폭탄 공격으로 암살됐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고 제18군단장까지 오른 프로이센 장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915년 1월부터 제10군을 이끌며 코브노와 그로드노를 점령했고, 1916년부터는 아이히호른 집단군도 지휘했으며 1917년 12월 원수가 되었다. 1918년 4월 3일 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되었고, 7월 30일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가 마차에 던진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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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914프로이센군 입대, 1866·1870–71년 전쟁 참전, 제9사단장(1901–1904)·제18군단장(1904–1912)
  • 1915–1918제10군 사령관, 코브노·그로드노 점령, 1916년부터 아이히호른 집단군 사령관, 1917년 원수
  • 1918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우크라이나 군정총독, 7월 30일 키예프에서 암살

알프레트 티르피츠

Alfred von Tirpitz

영국 해군에 맞설 대양함대를 건설해 건함 경쟁을 부르고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한 독일 제독

브란덴부르크주 퀴스트린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1916년 제국해군청 장관으로 작은 제국 해군을 영국 해군을 위협할 세계적 해군으로 키웠다. 「위험 이론」에 따른 1898~1912년 함대법으로 독일 해군은 세계 2위가 되었지만, 값비싼 건함 경쟁을 부르고 영국을 프랑스 쪽으로 더 가깝게 밀었다. 그는 해군력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진정제」가 되리라 보았다. 전쟁 중 대양함대가 영국의 해상 봉쇄를 깨지 못하자 무제한 잠수함전을 거세게 주장했고, 1916년 3월 사임했다. 1917년 협상에 의한 강화에 반대하는 극우 조국당을 함께 세워 의장이 되었고, 전후 독일국가인민당 의원을 지냈다. 1930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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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16제국해군청 장관
  • 1898–1912함대법으로 대양함대 건설
  • 1917독일 조국당 공동 창당·의장
  • 1924–1928독일국가인민당 제국의회 의원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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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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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빌헬름 2세

Wilhelm II.
독일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독일 독일 1859–1941 → 망명지에서 사망

7월 위기에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1918년 퇴위해 망명한 마지막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세자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맏딸 사이에서 태어나 1888년 황제가 되었고,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했다. 1900년 의화단 진압군에게 훈족처럼 싸우라고 연설했고, 함대 증강과 모로코 개입으로 독일을 고립시켰다. 1914년 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군사 지원을 보장했다. 전쟁 중에는 결정을 최고사령부에 넘겨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군사독재가 섰다. 1918년 11월 9일 퇴위가 발표되자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네덜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그의 인도를 거부했다. 1941년 도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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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독일 황제·프로이센 국왕 즉위
  • 1890비스마르크 해임, 「신노선」
  • 1914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지원 보장
  • 191811월 9일 퇴위 발표, 네덜란드 망명

카를 레기엔

Carl Legien
독립 활동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1–1920 ○ 자연사

1918년 슈티네스와 노사 협정을 맺고 1920년 카프 폭동에 총파업으로 맞선 독일 자유노조 지도자

마리엔부르크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선반공이 되었다. 188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890년부터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1893~1898년과 1903~1920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13년 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의 우파를 이끌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는 성내 평화와 파업 포기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15일 후고 슈티네스와 협정을 맺어 고용주가 처음으로 노조를 노동자 대표로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와 사업장 노동자위원회를 받아들이게 했으나, 노조는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1919년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되었고,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맞서 총파업을 조직했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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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사회민주당 입당
  • 1890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 1893제국의회 의원
  • 1913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
  • 1918.11.15슈티네스-레기엔 협정
  • 1919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 1920.03카프 폭동에 맞선 총파업

후고 하제

Hugo Haase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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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1918년 베를린 경찰청장을 지냈다

“내 직책은 혁명에서 받았으니, 혁명에 의해서만 내놓겠다.”

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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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사회민주당 전임 간부가 되어 드레스덴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 1903–1911독일 제국의회 바덴 제9선거구 의원
  • 1908–1917베를린 사회민주당 언론국 책임자
  • 1917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하다
  • 1918–1919베를린 경찰청장으로 재직하다
  • 1919–1920바이마르 국민의회 베를린 의원
  • 1920–1925독일 공산당에 가입하고 국가의회 의원으로 일하다

에리히 루덴도르프

Erich Ludendorff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5–1937 ○ 자연사

힌덴부르크와 함께 독일의 전쟁을 지휘하고 전후 맥주홀 폭동에 가담한 장군

포젠주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나 참모본부에서 일했고, 1914년 리에주와 탄넨베르크로 이름을 얻었다. 1916년 8월 힌덴부르크와 함께 최고사령부를 넘겨받아 제1병참총감으로서 사실상의 군사독재 아래 전쟁을 지휘하고 힌덴부르크 계획을 밀어붙였다. 1918년 3월 미하엘 작전으로 춘계 공세를 열었으나 실패했고, 9월 즉각 휴전을 요구한 뒤 10월 해임되었다. 전후 비수설을 퍼뜨렸고 1920년 카프 폭동과 1923년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에 가담했다. 1924~1928년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의원을 지냈다. 1937년 뮌헨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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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리에주 공략, 탄넨베르크 승리
  • 1916–1918제1병참총감
  • 1918춘계 공세(미하엘 작전), 10월 해임
  • 1920카프 폭동 가담
  • 1923맥주홀 폭동 가담
  • 1924–1928제국의회 의원(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필리프 샤이데만

Philipp Scheidemann
독일 국가기관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5–1939 → 망명지에서 사망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총리가 된 SPD 정치가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카셀의 인쇄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들어갔다. 11월 9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해 에베르트의 노여움을 샀다. 인민대표평의회 위원을 거쳐 1919년 2월 총리가 되었으나, 베르사유 조약 수락을 거부하며 6월 사임했다. 1920년대 카셀 시장을 지냈고 1922년 극우의 청산가리 테러를 피했다. 1933년 망명해 코펜하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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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제국의회에 진출해 사회민주당(SPD) 의원단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 1917SPD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6월 제국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사회민주당 장관이 되었다.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혁명기 과도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에 참여했다.
  • 19192월 13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수반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내각과 함께 사임했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

Rüdiger von der Goltz

핀란드와 발트에서 독일의 동방 영향력을 지키려 한 자유군단 사령관

백군 병참장군 하네스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두고 "핀란드의 사실상의 섭정"이라 불렀다.

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도운 뒤 1919년 라트비아에서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해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다. 체시스 패배 뒤 소환되었고 바이마르 시기 극우 퇴역군인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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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대장성(대참모부) 배속
  • 1914제76보병연대 지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
  • 1918발트해 사단장, 핀란드 백군 지원 후 '주핀란드 독일군 장군'
  • 1919제6예비군단장, 리가 탈환 후 체시스(벤덴)에서 패배하고 소환
  • 1920카프 쿠데타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
  • 1924–1933독일 조국단체연합(VVVD) 의장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도이믹

Ernst Friedrich Däumig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66–1922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지도자다.

사회민주당 언론인으로 출발한 도이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해 베를린 급진파와 혁명적 오프로이테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918년 11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지도부로서 평의회 체제를 헌정의 토대로 삼으려 했으나 제헌의회 지지 세력에 패했다. 그는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이끌고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으며, 1921년 2월 파울 레비와 함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3월 행동과 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고, 1922년 USPD에 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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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게라·할레·에르푸르트의 사회민주당 신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1911베를린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에 군사 기술·노동자 교육 담당자로 합류했다.
  • 1916《포어베르츠》를 떠난 뒤 독립사회민주당을 위해 선전 활동을 했다.
  • 1918혁명적 오프로이테 지도자이자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주요 인사가 되었다.
  • 1920독립사회민주당 의원으로 제국의회에 들어갔고, 볼셰비키의 21개 조건 수용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지지했다. 12월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다.
  • 19212월 파울 레비와 함께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직에서 사퇴했다. 3월 행동 이후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다.
  • 1922공산주의 노동공동체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에 복당했다.

1918년 11월 뮌헨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다가 이듬해 암살된 언론인

1918년 11월 바이에른 혁명을 조직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국을 선포했으며, 1919년 2월 사임하러 가던 중 암살되었다.

베를린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 평론가와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고, 뒤에 뮌헨으로 옮겼다. 전쟁에 반대해 USPD에 들어갔고, 1918년 1월 군수 파업을 이끌다 투옥되었다. 11월 7일 테레지엔비제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병영을 돌아 이튿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하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전쟁 책임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를 공개해 우파의 증오를 샀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사임하러 가던 2월 21일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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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5『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고 편집자로 활동했다.
  • 1898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 1900–1905『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다.
  • 1907–1910뉘른베르크의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 1917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 1918군수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혐의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 1918–1919바이에른 인민국 초대 공화파 총리를 지냈다.

막스 폰 바덴

Max von Baden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29 ○ 자연사

1918년 휴전을 요청하고 황제의 퇴위를 발표한 뒤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긴 독일 제국 마지막 재상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의 혁명적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막스 폰 바덴은 황제의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바덴 대공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프로이센 군 장교를 지냈고, 전쟁 중에는 적십자와 전쟁 포로 구호 활동으로 온건파의 신망을 얻었다. 1918년 10월 3일 재상이 되어 SPD를 처음 입각시키고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했으며, 제국을 의회 책임 군주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이끌었다. 11월 9일 베를린이 시위대로 가득 차자 황제의 동의 없이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긴 뒤 물러났다. 1920년 쿠르트 한과 함께 잘렘 기숙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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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0.03독일 제국 재상에 취임해 SPD와 다수파 정당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 1918.10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하고 제국 헌법 개정을 추진해 의회 책임 정부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 1918.11.09황제의 퇴위를 발표한 뒤 재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39 ○ 자연사

1918년 에베르트와 비밀 협약을 맺어 장교단을 지키고, 뒤에 바이마르 국방·내무장관을 지낸 장군

1918년 11월 10일 에베르트와 비밀 전화 협약을 맺어 군의 새 정부 지지를 약속하고 장교단의 지휘권을 보전했다.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참모 장교로 철도 수송 전문가였고, 전쟁 중 전시청을 맡아 군수 생산과 노동 동원을 지휘했다. 1918년 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부 제1병참감이 되었고, 11월 황제에게 군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알렸다. 11월 10일 밤 에베르트와 전화로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와 장교단 지휘 체계의 유지를 맞바꾸었다. 뒤에 교통장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지냈고 1932년 나치 돌격대 금지령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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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육군에 입대했다.
  • 1912참모본부 철도부장이 되어 전시 병력 수송과 보급을 맡았다.
  • 1918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제1병참감이 되었고, 휴전 뒤 에베르트와 협력해 병력 귀환 및 혁명 진압용 의용군 편성을 추진했다.
  • 1920–1923교통장관을 지냈다.
  • 1928–1932국방장관을 지냈다.
  • 1931–1932내무장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