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사회혁명당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혁명당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대일전 준비 시점을 물었고, 스탈린은 8월 8일을 제시했다.
해리 홉킨스는 대공황기 미국의 공공구호를 유급 일자리 정책으로 조직한 행정가이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가장 가까운 참모였다. 그는 연방구호와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운영한 뒤 상무장관을 지냈고, 전쟁기에는 무기대여법과 연합국 협력을 조율했다. 건강 악화에도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특사로 소련과 협상했으며, 1945년 5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 시점과 일본 점령 구역을 물어 전후 동아시아 질서의 쟁점을 드러냈다.
“그들은 병력이 부족한 나를 상륙시켜 심각한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미 육군 소장 존 P. 루카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에 복무한 직업군인으로, 상륙작전의 기획과 지휘를 맡았다. 1944년 안치오에서 미 제6군단을 지휘하며 기습의 성과를 즉시 확대하기보다 교두보를 공고히 하는 길을 택했고, 그 선택은 작전의 조건과 상급 지휘부의 모호한 명령이 얽힌 논쟁이 되었다. 독일군의 반격을 버텨 냈지만 곧 지휘권을 잃었으며, 이후에도 중국 국민정부 군사고문단과 미 제5군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1940년 7월 소련의 발트 3국 병합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밝힌 웰스 선언의 미국 국무차관
뉴욕의 부유한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나 1914년 하버드 칼리지를 졸업했고, 집안 친구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권유로 외교관이 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전문가로 일하다 쿨리지 대통령에게 외교 경력을 끊겼으나, 루스벨트 집권 뒤 라틴아메리카 담당 국무차관보를 거쳐 1937~1943년 국무차관을 지냈다. 1940년 7월 23일 국무장관 대행으로서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을 규탄하고 병합을 승인하지 않는 웰스 선언을 발표했고, 그 전날에는 콘스탄틴 페츠 가족에게 외교 비자를 내주도록 허가했다. 뒤에도 병합에 대한 어떤 양보에도 반대했다. 대서양 헌장 작성에 참여했으나, 1943년 열차 승무원들에게 성관계를 제안한 일이 퍼지면서 코델 헐에게 밀려났다. 1961년 뉴저지에서 숨졌다.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1951년 5월 15일 의회 증언에서 브래들리는 전쟁 확대를 주장한 맥아더를 향해 '이 전략은 잘못된 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상대로 치르게 할 것입니다'라고 일갈했다.
오마르 브래들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육군 고위 지휘관으로,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거쳐 노르망디 상륙과 서유럽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기존의 제1미군집단 본부가 연합군의 기만작전에서 허구의 지휘부로 활용되는 과정을 거쳤고, 실제 전선에서는 제1군과 제12군집단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육군참모총장과 초대 합동참모의장을 지내며 한국전쟁 초기 미국의 군사정책을 조정했다.
소콜롭스키가 회의장을 떠난 직후, 머피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3단계 계획에 착수했다고 보고했다.
로버트 대니얼 머피는 전쟁과 점령의 현장에서 협상과 정보 판단을 결합한 미국 외교관이었다. 1948년 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으로서 그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단계적 압박에 들어갔다고 분석해 워싱턴에 보고했고, 그 판단은 봉쇄와 공수작전을 둘러싼 미국의 인식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북아프리카 상륙 준비와 전후 독일 행정, 벨기에·일본 대사직, 국무부 고위직을 거쳤으며, 외교관의 현장 보고가 군사·정치 결정을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 준다.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세계적 베이스-바리톤이자 배우로 〈올 맨 리버〉와 《오셀로》로 정상의 예술가에 오르면서도, 그 예술을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식민주의 투쟁에 바친 사회주의자. 스페인 공화파와 1949년 파리 평화대회를 지지한 뒤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아 매카시 시대 여권 박탈과 블랙리스트를 겪었지만,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