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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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이바노비치 레베데프-폴랸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Лебедев-Полян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81–1948 ○ 자연사

소비에트 검열 기구의 설계자이자 첫 책임자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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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유리예프 대학에서 제적 후 혁명운동
  • 1908–1917제네바 망명, '브페료트' 그룹 서기
  • 191710월 혁명 참여, 성직자회의 및 학술위원회 청산
  • 1919–1922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평의회 의장
  • 1922–1930글라블리트(문학·출판 총국) 초대 책임자
  • 1934–1939『문학 백과사전』 주필
  • 1937–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푸시킨 관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포티예바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Фотиев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1–1975 ○ 자연사

레닌의 개인비서, 마지막 정치투쟁의 전달자

1923년 3월 5일, 레닌은 포티예바에게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 편지를 받아쓰게 한 뒤 카메네프에게 '그루지야 문제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글랏세르는 트로츠키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스탈린을 향한 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레닌의 개인비서(1918~1924)로, 1922년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를 구술받아 30년간 보관, 1956년 공개로 이끌었다. 1923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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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7모스크바 음악원과 베스투제프 여성고등과정 수학, 학생운동으로 페름 유형
  • 1904–1905제네바·파리 망명 중 RSDLP(b) 입당, 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
  • 1917「프라우다」지에서 몰로토프의 보좌관,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 1918–1924V.I. 레닌 개인비서, 인민위원회의(Sovnarkom) 및 노동국방회의(STO) 서기 겸임
  • 1922–1923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 구술 필기, 그루지야 문제 자료 분석 및 레닌-트로츠키 연락 중개
  • 1918–1930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 서기 지속
  • 1938–1941중앙 V.I. 레닌 박물관 연구원
  • 1941–1945MOPR(국제혁명투사원조기구) 중앙위원회 근무
  • 1956–1975연방 등급 개인연금 수급자, 회고록 집필

표도르 이바노비치 칼리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Кали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2–1920 ○ 사망

프롤레트쿨트의 노동자-지식인, 직조공 출신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이론가

프롤레트쿨트가 가장 급진적이던 시기, 그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문화 유산을 넘어 자신의 문화를 '처음부터'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조 노동자 출신의 볼셰비키 문예비평가로, 독학으로 지식을 쌓아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문화론에 영향받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자적 문화 창조를 주장했으며,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기관지 『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를 편집했다. 내전 중이던 1920년 38세로 요절하여 프롤레트쿨트 운동의 초기 급진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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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년경RSDLP 입당, 직조공으로 노동하며 독학
  • 1917–1920프롤레트쿨트 운동 참여, 보그다노프·루나차르스키 등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문화 건설 주도
  • 1918–1920『프롤레타르스카야 쿨투라』 공동 편집자 (레베데프-폴랸스키와 함께)

카모

Симон Тер-Петрося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882–1922 ✕ 교통사고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트빌리시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34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트빌리시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트빌리시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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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RSDLP 입당, 트빌리시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19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트빌리시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9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트빌리시 정신병원 탈출
  • 1912–19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19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19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유리 미하일로비치 라린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Ла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32 ○ 자연사

네프에서 계획으로 다리를 놓은 상상력의 경제이론가

"훨씬 덜 단단한 정신이라면 오래전에 굴복했을 신체적 장애를 그가 정복하는 진정한 영웅성." — 1920년 모스크바에서 라린을 만난 영국 저널리스트 아서 랜섬

심페로폴 출신 경제학자·혁명가. 고스플란 창립 멤버로, 독일 전시경제 연구를 바탕으로 계획경제를 주창했다. 유대인 농업정착(OZET) 운동을 주도하며 근위축증 속에서도 왕성히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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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3심페로폴·오데사에서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8년 유형 선고
  • 1904–1916망명 중 멘셰비키로 활동, 독일 전시경제 연구로 중앙계획 구상
  • 1917볼셰비키 합류, 최고경제회의(VSNKh) 창립 멤버·간부
  • 1921–1932고스플란 창립·간부, 연속노동주간 제안 등 계획경제 정책 구상
  • 1925–1932OZET 의장으로 유대인 농업정착 운동 주도, 반유대주의 비판 저술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와보비치 페스트콥스키

Станисла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Пестк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2–1937 ✕ 처형

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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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9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19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19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플로렌스키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лоренский
러시아 정교회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82–1937 ✕ 처형

사제복을 입고 소비에트 전기화 계획에 참여한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동시대인들은 사제복을 입은 플로렌스키가 소비에트 정부 부서의 다른 지도자들과 나란히 일하는 모습을 놀라운 광경으로 기억했다.

파벨 플로렌스키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신학자,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전기공학자로, 20세기 초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하나다. 대표작 『진리의 기둥과 터』(1914)는 정교회 신정론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합리적 분석을 넘어선 직관적 체험을 통해 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후에는 트로츠키의 추천으로 GOELRO 전기화 계획에 참여했으며, 사제복을 벗지 않은 채 소비에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이중적 삶을 살았다. 1922년 에세이 「역원근법」은 이콘의 공간 구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으로 타르투 기호학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7년 대숙청 시기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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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모스크바대학 수학과 졸업
  • 1908모스크바 신학아카데미 졸업, 『진리의 기둥과 터』 집필 완성
  • 1911사제 서품
  • 1911–1917『신학통보』 편집장
  • 1914『진리의 기둥과 터』 출판
  • 1921–1927GOELRO 전기화 계획 참여, 브후테마스 교수
  • 1922「역원근법」 발표, 『기하학에서의 허수』 출판
  • 1933체포, 10년 강제노동형 선고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얀손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Янсо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882–1938 ✕ 처형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상한 소련 법무인민위원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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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레벨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
  • 1907–1917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 서기 (미국)
  • 1921–1923금속노조 중앙위원회 서기
  • 1923–1927중앙통제위원회 서기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28–1930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1–1934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
  • 1935–1937글라브세브모르푸티 부국장

오시프 아로노비치 퍄트니츠키

Осип Аронович Пятниц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82–1938 ✕ 처형

코민테른 지하 배달부에서 기구의 등뼈로, 그리고 기구에 먹혔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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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이스크라』 비밀 배송망 구축, '프레이다크'로 활동
  • 1903–1908볼셰비키 합류, 오데사·모스크바 위원회 활동, 1905년 혁명 참여
  • 1914–1917체포되어 예니세이스크주 유형,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복귀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전투당센터 구성원, 철도노선 적위대 지휘
  • 1921–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위원
  • 1923–1935코민테른 서기 — 연락·재정·간부 배치 총괄
  • 1935–1937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행정정치부장
  • 1937.06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 비상권한 반대, 축출·체포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보그다노프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Богд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38 ✕ 처형

네프 산업화의 설계자, 트러스트 체제로 글라브키즘에 맞서다

“우리는 산업 관리의 분권화, 관리 기관을 공장 가까이 가져가는 것, 동시에 전체 산업 지도의 중앙집권화라는 원칙을 토대로 해야만 올바르게 관리할 수 있다.” — 글라브키즘에 맞서 트러스트 체제를 옹호하며.

모스크바 상인 가문 출신의 볼셰비키 엔지니어이자 경제 관료로, 1921년부터 1925년까지 러시아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을 지내며 네프 시기 산업 조직의 골격을 설계했다. 소르모보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전차 생산을 총괄했고, 군수공업회의 의장으로서 내전기 군수 공장 간 계획적 생산 협력을 도입했다. 트러스트를 광범한 자율성을 가진 국가 기업 연합으로 육성하며 중앙집권적 '글라브키즘'에 맞섰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주요 양허위원회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암토르그 사장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며 소련-미국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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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에 합류, 보로네시 당 위원회 군사조직 책임자
  • 1906–1908모스크바 당 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 학생조직 지도
  • 1909–1914모스크바 시청 엔지니어, 도시 가스망 책임자
  • 1917고멜 소비에트 군사부문 의장, 시 두마 의장, 11월 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21VSNKh 화학공업 부문 위원, 우랄·북부 화학산업 국유화 전권대표
  • 1919–1925군수공업회의(국방공업 총국) 의장
  • 1921–1925VSNKh 의장 겸 RSFSR 인민위원회 위원, 주요 양허위원회 의장
  • 1926–1929북카프카스 지역집행위원회 의장
  • 1930–1934암토르그(소련 대미 무역회사) 사장
  • 1935–1937RSFSR 지방공업 제1부인민위원

알렉세이 카피토노비치 가스테프

Алексей Капитонович Гаст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러시아(RSFSR), 소련 러시아 1882–1939 ✕ 처형

노동을 과학으로, 인간을 기계의 리듬으로: 50만 노동자를 훈련시킨 사회공학의 창시자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1921)

1882년 10월 8일(구력 9월 26일) 블라디미르 주 수즈달에서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교사대학 재학 중 1902년 학생 시위를 주도한 일로 제적된 뒤 직업혁명가가 되었고,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프랑스에서 금속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해 '사회공학'과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NOT)를 정립했고,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38년 9월 반혁명 테러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4월 15일 코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3월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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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 1905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
  • 1906RSDLP 제4차 대회 대의원
  • 1917–1918전러시아금속노동자동맹 중앙위 서기
  • 1920–1938중앙노동연구소(CIT) 창설·소장
  • 1931VKP(b) 재입당
  • 1932–1936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수하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уханов
멘셰비키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40 ✕ 처형

『혁명의 기록』 저자이자 자기 집에서 10월 봉기 결의를 맞이한 농업경제학자

"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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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 1931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 선고; 베르흐네우랄스크 정치격리소 수감
  • 19406월 29일 시베리아 군관구 재판소 사형 선고, 옴스크 교도소에서 당일 총살

아브람 야코블레비치 벨렌키

Абрам Яковлевич Белень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2–1941 ✕ 처형

레닌의 개인 경호를 맡은 체카 창립 멤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양측 서술은 이 사건을 7월 6일로도, 8월로도 기록한다.

1882년 또는 1883년 벨라루스 스베르줸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2년 1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볼셰비키로 활동하다 1904년 12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파리에서 구두장이와 인쇄공으로 일하며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만났다. 1917년 5월 귀국해 12월까지 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를 관리했고, 같은 해 12월 체카에 배속되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 경호 책임자로 있었고, 1928년까지 당·정부 지도부 경호를 담당하는 특별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부터 OGPU·NKVD 특별전권위원을 지냈으나 1938년 5월 9일 체포되어 1941년 10월 16일 코뮤나르카에서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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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4볼셰비키 지하운동, 반복 체포
  • 1904–1917파리 망명: 구두장이·인쇄공, 롱쥐모 당학교 수학
  • 1917.05–12중앙위원회 인쇄소 《트루드》 관리자
  • 1919–1924레닌 경호 책임자
  • 1921–1928ВЧК-ОГПУ 특별부서장 (당·정부 지도부 경호)
  • 1930–1936ОГПУ·НКВД 특별전권위원
  • 1936–1938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 1917.12–체카 배속, 출판 문제 담당 체카 위원
  • 1921–1928체카 위원회 위원, 체카 프레지디움 특별부서장, 이후 GPU·OGPU 특별부서장
  • 1936–1938NKVD 특별전권위원 보좌역
  • 1938–1941체포·수용소·총살, 1956년 복권

야코프 자하로비치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2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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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 1934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 주도
  • 1934–1937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 초기 나치 시대 독소 경제 관계 관리
  • 1937–1940프랑스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국제연맹 소련 대표단원
  • 1940프랑스 정부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40–1945외무인민위원부 고문, 대사급 외교관
  • 1946–1947브라질 주재 초대 소련 전권대사
  • 1948은퇴

소피야 시기즈문도브나 제르진스카야

Софья Сигизмундовна Дзержинская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폴란드 1882–1968 ○ 자연사

독자적 혁명 경로를 걸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자

1911년 6월 바르샤바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을 낳고, 생후 8개월 동안 감방에서 함께 살았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04년 SDKPiL에 투신해 로자 룩셈부르크 및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폴란드 혁명운동의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반복된 체포와 시베리아 유형에도 지하신문 발행과 크라쿠프 망명 조직을 계속했고, 1918년 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을 거쳐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1939~194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를 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점령 폴란드 대상 공산주의 방송 라디오 코시치우슈코를 지휘했으며, 3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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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SDKPiL 입당, 바르샤바에서 지하 혁명운동 시작
  • 1906–1911반복 체포·투옥; SDKPiL 제6차 대회 대표 (1908);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결혼 (1910); 파비아크 감옥에서 아들 얀 출산
  • 1912시베리아 유형 탈출; 크라쿠프에서 SDKPiL 해외분과 사무국 서기
  • 1918–1919베른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근무
  • 1922–1928로자 룩셈부르크 학교·서방 민족소수자 공산대학 교원; 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폴란드국 선전선동부 책임비서
  • 1929–1937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겸 책임편집자
  • 1939–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폴란드 문제 담당
  • 1941–1946라디오 코시치우슈코 책임자; 1946년 은퇴; 회고록 『대투쟁의 시절』 출간 (1964)

프로시 페르체비치 프로샨

Прош Перчевич Прошьян

소비에트 최초 연정의 좌파 사회혁명당 인민위원, 당의 '핵심 축'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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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오데사 대학에서 사회혁명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 1917.12우편전신인민위원 취임
  • 1918.02–03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
  • 1918.03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인민위원직 사임
  • 1918.07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지도부 참여; 진압 후 지하 잠복, 궐석 3년형 선고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자고르스키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агор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83–1919 ✕ 폭탄 테러 사망

모스크바 당을 이끌고 초기 소비에트 외교를 개척한 혁명 조직가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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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볼셰비키) 입당
  • 1902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 1904제네바로 탈출, 레닌과 접촉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8독일 주재 RSFSR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
  • 1918–1919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서기
  • 1919제르진스키와 도시방어위원회 공동 지휘

표도르 안드레예비치 세르게예프

Фёдор Андреевич Серге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83–1921 ✕ 사고사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설자이자 수반, 스탈린의 절친

1902년 3월, 모스크바. 19세의 표도르는 '신체의 불가침,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라 적힌 손수 만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학생 시위의 신호였다. 체포, 투옥, 퇴학 — 그렇게 '아르툠'이 탄생했다.

1901년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돈바스 광부·철도 노동자에서 출발해 오스트레일리아 이민 노동자 조직을 거쳐 1918년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직접 수립하고 이끌었다. 스탈린·키로프와 절친했으며,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중앙군사혁명위원회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모스크바 당 책임서기를 역임했다. 독일 점령군과 데니킨 백군에 맞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호했으며, 1921년 아에로바곤 탈선 사고로 38세에 사망했다. 갓난아들은 스탈린이 입양해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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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2RSDLP 입당, 모스크바 기술학교 학생 시위 주도 후 퇴학·투옥
  • 1903–1905돈바스·하리코프 지하 혁명 활동, 12월 하리코프 무장봉기 지도
  • 1906–1910IV 대회 대표, 페름·모스크바 당 활동, 종신 시베리아 유형 선고, 탈출
  • 1911–1917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러시아 노동자 조직, 총파업 주도, '에코 오스트레일리아' 발행
  • 1917–1918VI 대회 중앙위원 선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인민위원회 의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바시키르 전권위원, '검은 독수리' 봉기 진압, 모스크바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0–1921전러시아 광산노동자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국제광산노동자조합 조직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83–1927 ✕ 자살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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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 1917.11–1918.0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 1918.0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 1922–1923주중 소비에트 대표, 쑨원-이오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의 길을 열다
  • 1924–1925주오스트리아 소비에트 전권대표
  • 1925.06–1927트로츠키가 의장인 중앙양보위원회 부의장
  • 1919–192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국고통제 인민위원·노동국방위원회 위원
  • 1920–19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 폴란드와 리가 조약 체결
  • 1922제노바 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일원
  • 1923–1927좌익반대파 활동
  • 1927모스크바 대학 소비에트 법학부 교수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36 ✕ 총살 처형

10월에 반대했고, 스탈린을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죽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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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망명기 레닌의 최측근
  • 1917.10카메네프와 봉기 반대, 계획 누설 파동
  • 1919–1926코민테른 초대 의장
  • 1923–1925트로이카, 트로츠키 견제
  • 1926–1927통합반대파, 출당과 굴복 반복
  • 1936제1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니콜라이 카쿠린

Николай Каку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83–1936 ○ 옥사

탐보프 진압군 참모장을 지내고 내전사를 쓴 붉은 군대 지휘관·군사사가

1883년 오룔의 세습 귀족 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니콜라이 군사아카데미를 마치고 참모본부 장교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단 참모장 직무를 맡았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에, 1919년 갈리치아군에 복무했다. 1920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제10사단과 제3군을 지휘했고, 1921년 투하쳅스키 아래 탐보프 진압군 참모장으로서 독가스 사용을 명한 명령 제0116호에 서명했다. 같은 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3년 붉은 군대 참모부 내전사 부장이 되어 세 권짜리 내전사를 썼다. 1930년 체포되어 1936년 야로슬라블 감옥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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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니콜라이 군사아카데미 졸업, 참모본부 장교
  • 1915제71보병사단 참모장 직무대리
  • 1918우크라이나 인민군 참모총장 보좌
  • 1919갈리치아군 제4군단 참모장
  • 1920붉은 군대 제10사단장, 제3군 사령관
  • 1921탐보프 진압군 참모장
  • 1922부하라·페르가나 지역 소비에트군 사령관
  • 1923붉은 군대 참모부 내전사 부장
  • 1925–193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유대계 아버지·러시아계 어머니)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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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재판, 시베리아 유형
  • 1917프라우다 편집, 4월 테제와 10월 봉기에 반대
  • 1918–192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2–1924레닌 병중 정치국 주재, 트로이카
  • 1936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재판, 처형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쿠즈민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узьм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3–1938 ✕ 처형

크론슈타트의 '폭발'을 예고한 발트함대 정치위원

쿠론슈타트 수병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오히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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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볼셰비키
  • 1917가치나 소비에트 의장, 볼셰비키 군사조직 활동
  • 1918–1919남서전선 정치위원, 북부전선·제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발트함대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12군 사령관
  • 1921발트함대 정치국장,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가
  • 1924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부 차석 검사
  • 1925–1932중앙아시아·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장 등 요직
  • 1932북방해로 옴스크 지부장으로 전직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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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재무인민위원
  • 19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