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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릴 일리치 먀스니코프

Гавриил Ильич Мясников

레닌에게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먀스니코프주의'를 촉발한 노동자 볼셰비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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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 1918–1920미하일 대공 처형 조직, 제16사단 정치위원, 페름 현당위원장
  • 1921–1923'노동자 그룹' 결성, 언론자유 요구로 레닌과의 공개 논쟁 — '먀스니코프주의' 논쟁, RCP(b) 제명·체포
  • 1928–1944이란·터키 경유 프랑스 망명, 『최근의 사기(Ocherednoy Obman)』 집필 —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 1944–1945소련 대사관 초청으로 귀국, 직후 체포되어 1945년 11월 16일 총살 (2001년 12월 25일 복권)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아르튜히나

Александра Васильевна Артюхин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69 ○ 자연사

제노트델을 전성기로 이끈 유일한 여성 조직국·서기국원

1927년 국제회의 연단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조차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며 당내 편견을 직시했다.

방직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서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전성기로 이끌며 여성의 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유일한 여성 조직국원·서기국 후보위원(1926~193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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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4상트페테르부르크 방직·금속 노동자, 노조 조직, 프라우다에 '금속노동자 슈라' 필명 기고
  • 1914–1917체포되어 유형
  • 1917–1924비시니볼로초크 당위원, 노동위원, 트베리현 여성부장, 프롤레타르카 공장위원장
  • 1924–1929당 중앙위 여성노동부(제노트델) 부장, 잡지 《라보트니차》 편집장
  • 1926–1930중앙위원, 조직국 위원, 서기국 후보위원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8섬유(면방직)노동자노조 중앙위원장
  • 1938–1951모스크바 방직 공장장

그리고리 이사코비치 추드놉스키

Григорий Исаакович Чуд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18 ✕ 자살

겨울궁전에 두 번 들어간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항복 협상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으로 열다섯 살에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파리와 뉴욕 망명길에서 트로츠키를 따르다 1917년 5월 메즈라이온치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들어가 협상했으며(처음엔 팔친스키에게 체포됐다가 사관생도들의 요구로 풀려났다), 무기를 내려놓으면 무사 통행을 보장한다는 약속으로 수비대가 잇달아 궁을 떠나게 했다.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독일 점령군·중앙라다와 싸우다 1917년 12월 라다에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키예프에 들어온 소비에트군에 풀려났고,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된 끝에 숨졌는데, 전사했다는 기록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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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 1917.11–12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 중앙라다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
  • 1918.01–04소련군에 구출; 키예프 민사위원;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되어 자살

파니 예피모브나 카플란

Фанни Ефимовна Каплан

사회혁명당 활동가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하고 단독 암살을 결행한 여성

체카 심문에서: '나는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나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한다. 나는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지금도 지지한다.'

볼린주 유대인 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파니 카플란은 16세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키예프 총독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의 수감 중 실명과 회복을 반복했으며,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에 합류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을 계기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모이세이 우리츠키 암살과 함께 적색 테러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으며, 그녀는 나흘 뒤 크렘린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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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키예프 총독 수호믈리노프 암살 기도 폭탄 음모로 체포됨
  • 1907–1917시베리아 네르친스크 말체프·아카투이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복역, 복역 중 실명과 부분 회복 반복
  • 1917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사면으로 석방, 사회혁명당 활동 재개
  • 1918.08.30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연설 마친 레닌에게 브라우닝 권총 세 발 발사, 중상 입힘
  • 1918.09.03체카 심문 후 크렘린에서 파벨 말코프에 의해 총살됨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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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마르테먄 니키티치 류틴

Мартемьян Никитич Рюти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류틴 강령」으로 스탈린 독재에 마지막 당내 저항을 조직한 우익 반대파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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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멘셰비키 입당,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
  • 1918–1921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 이르쿠츠크 당위원장
  • 1923–1924다게스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프레스냐 구당서기, 중앙위원 후보
  • 1928–1930『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부편집장, 소유즈키노 의장
  • 1930당 제명, 체포 후 석방
  • 1932「류틴 강령」 집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 1937군사재판 25분 만에 사형, 당일 총살

스타니스와프 아다모비치 메싱

Станислав Адамович Мессинг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0–1937 ✕ 처형

제르진스키의 폴란드 전우, 체카의 초석을 놓고 야고다의 조작에 맞서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와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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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 1921.0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 1931–1937전연방 상공회의소 의장, 소·몽·투바 무역회의소 의장
  • 19376월 15일 체포, 9월 2일 총살 — '폴란드 간첩' 혐의

아르투르 카를로비치 스타솁스키

Артур Карлович Сташе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90–1937 ✕ 처형

스페인 공화국 금을 모스크바로 보낸 소련 무역대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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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4베를린 합동 레지덴투라(INO·군사정보) 책임자
  • 1925–1926소프토르그플로트 이사
  • 1926–1932푸시노토르그·소유스푸시니나 부이사장
  • 1932–1934토르그신 이사장
  • 1934–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글라프푸시니나 국장
  • 1936–1937주스페인 소련 무역대표

야코프 나우모비치 드롭니스

Яков Наумович Дробнис

우크라이나 볼셰비즘의 창립자, 46인 선언 서명자

페틀류라 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부상당한 채 탈출하여 붉은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은신했다.

야코프 드롭니스는 1906년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유대인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다섯 차례 중앙위원을 지냈다. 내전기에는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맞서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했으며, 폴타바·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가담했고 1927년 제명되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의 피고로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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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 중앙위원 (5기)
  • 1920–1922폴타바·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22–192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3'46인 선언' 서명, 좌익반대파 가담
  • 1923–1927소인민위원회 부의장, 행정재정위원회 위원
  • 1927–1930당 제명·유배, 1930년 복당
  • 1937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사형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8 ✕ 처형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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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레프 나타노비치 크리츠만

Лев Натанович Криц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병사

전시공산주의를 이론화한 농업마르크스주의자

『영웅적 시기』에서 전시공산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본질에서 그것은 개인이나 계급의 오류가 아니었다. 비록 순수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미래의 예기요, 미래가 현재로 돌입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의 선취적 돌파로 분석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고스플란 간부로 계획경제 제도화에 참여했고, 차야노프를 비판하며 삼층계급분화론을 주창해 집단화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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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 청년활동가로 혁명운동 참여, 오데사대학 제적 후 취리히대학 졸업
  • 1918귀국 후 RKP(b) 입당, 최고경제회의(Vesenkha)에서 경제정책 실무
  • 1920–1921최고경제회의 이용위원회 위원장, 자원 중앙배분 체계 구축
  • 1921–1925고스플란 간부회원, 『프라우다』 편집위원, 공산아카데미 간부회원
  • 1925–1930농업경제연구소장·공산아카데미 농업연구소장, 『농업전선에서』 책임편집자
  • 1926–1936『대소비에트백과사전』 경제 부문 편집위원, 『경제백과사전』 편집장
  • 1928–1933중앙통계국 부국장, 소련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8지병으로 공직 사임, 연구에 전념하다 신장병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아로세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Аросев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처형

크렘린 포격명령을 내린 혁명가이자 30권을 쓴 프롤레타리아 작가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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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포격 명령
  • 1918주공군총국(Gлаввоздухфлот) 커미사르
  • 1920우크라이나 최고혁명재판소 의장
  • 1921–1927레닌 연구소 부소장; 체카·OGPU 근무; 프랑스·스웨덴 외교관
  • 1927–1928리투아니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9–193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4–1937VOKS(전연방 대외문화교류협회) 의장

무스타파 쇼카이

Мустафа Шокай
민족주의 러시아 제국 카자흐 1890–1941 ○ 의문사

투르키스탄 독립을 꿈꾸고 코칸트 자치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자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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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
  • 1917투르키스탄 민족평의회 의장
  • 1917투르키스탄 임시정부 위원
  • 1917–1918코칸트 자치 정부 외무장관, 후임 수반
  • 1918–1919알라쉬 오르다 정부 위원
  • 1921–1941망명 언론인·편집자, 《야쉬 투르키스탄》 편집장

엘 마르코비치 리시츠키

Эль Маркович Лисицкий
소련 러시아 1890–1941 ○ 결핵

절대주의를 건축으로 전환한 구성주의의 공동 창시자, 혁명 아방가르드의 국제적 연결고리

1920년, 붉은 쐐기가 백색 원을 찢고 들어가는 포스터 한 장. 리시츠키는 단 두 개의 도형과 세 가지 색만으로 내전의 모든 것을 말했다.

소비에트 화가·건축가·디자이너. 프로운(PROUN) 시리즈로 절대주의를 입체 공간으로 확장했고, 〈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는 혁명 그래픽의 상징이 되었다. 아방가르드와 서유럽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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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다름슈타트 공과대학 건축학부 수학, 우등 졸업
  • 1915–1918리가 공과대학(모스크바 피난) 편입, 공학건축사 학위 취득
  • 1919–1920비텝스크 인민예술학교 교수, 말레비치의 UNOVIS 그룹 핵심 멤버
  • 1920〈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 발표, PROUN 시리즈 시작
  • 1921–1925베를린·스위스 체류, 에렌부르크와 《베쉬》 발행, 데 스테일 가입
  • 1921Vkhutemas 및 Vkhutein 교수
  • 1926–Vkhutemas 및 Vkhutein 교수
  • 1927–1928전연방 인쇄 전시회 및 쾰른 프레사 소비에트관 설계
  • 1930–1941〈건설중인 소련〉 레이아웃, 포토몽타주, 오고뇰크 인쇄소 설계

올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슘스키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Шум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46 ✕ 살해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선구자, '슘스키즘'의 원형

1926년 4월, 슘스키는 스탈린과 두 시간 독대하며 카가노비치 교체와 우크라이나화 가속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정치국 서한으로 '슘스키즘'을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 탄압의 분수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공산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모스크바 중앙집권에 맞서 공화국의 자율성을 주장한 '슘스키즘'의 원형. 보로트비스트에서 CP(b)U 정치국원으로 합류한 그는 교육인민위원(1924~1927) 시절 도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탈러시아화, 우크라이나인 간부 등용을 강력히 밀어붙였다. 1926년 스탈린과 정면 충돌하여 '민족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름은 우크라이나 자율성 탄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솔로프키 수용소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을 거쳐 1946년 석방 직후 NKVD에 암살, 195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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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 스필카(Spilka) 입당
  • 1917–1919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UP SR) 좌파 지도부, 이후 보로트비스트 중앙위원
  • 1919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첫 임기)
  • 1920보로트비스트와 CP(b)U 통합 주도; CP(b)U 정치국·조직국 위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1–1923폴란드 주재 우크라이나 SSR 전권대표
  • 1924–1927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두 번째 임기); 우크라이나화 정책 주도
  • 1927'슘스키즘'으로 규탄받고 전보; 레닌그라드 국민경제연구소·공업대 학장
  • 1933–1946체포·수감·유형; 석방 직후 NKVD에 암살됨 (1958년 복권)

빅토르 리보비치 세르주

Виктор Львович Серж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문학으로 증언한 코민테른의 작가-혁명가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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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V.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러시아 1891–1918 ✕ 암살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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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9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9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9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6–0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0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0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파벨 예브게니예비치 라지미르

Павел Евгеньевич Лазимир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1–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봉기에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을 빌려준, 이름뿐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917년 10월 21일 밤 라지미르는 두 동료와 함께 군구 사령부에 찾아가 수비대에 대한 최고 권한을 선언했고, 폴코브니코프 대령은 그들의 위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을 어기면 체포하겠다고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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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년경–1917페트로그라드 군 병원 위생병; 사회혁명당원으로 병사 선전 활동
  • 1917.0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병사부 의장·군사부 부의장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MRC 규정 초안 기초
  • 1917.11–1918내무인민위원부·군사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보급·위생 조직 총괄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푸르마노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Фурман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26 ○ 뇌막염

차파예프를 신화로 만든 정치위원 출신 작가

1920년 6월 베르니 수비대 봉기 때, 푸르마노프는 반란군과 직접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었다. 반란군 지휘관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동안 충성 부대가 도착해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 출신 작가. 소설 《차파예프》(1923)는 혁명적 영웅 서사의 전범이 되었고, 1934년 바실리예프 형제의 영화로 각색되어 소비에트 대중문화의 기념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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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모스크바 대학교 문헌학부 수학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 준위 복무
  • 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19제25소총사단 정치위원 (차파예프 휘하)
  • 1919–1920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장 · 세미레치예 RVS 대표
  • 1920쿠반 상륙부대 정치위원, 울라가이 상륙 격퇴 — 적기훈장 수훈
  • 1923소설 《차파예프》 출간
  • 1924–1925MAPP(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 서기
  • 1925소설 《먀테시》(반란) 출간

아르투르 흐리스티아노비치 아르투조프

Артур Христианович Артуз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소련 첩보·방첩의 창립자, '트레스트' 작전의 두뇌

1925년 모스크바의 한 안전가옥에서 시드니 라일리가 GPU 요원들에게 둘러싸이자, 아르투조프는 옆방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체카 방첩부(KRO)를 창설하고 백군 망명 조직을 무력화한 '트레스트' 작전을 설계했다. 1931년부터 해외첩보부(INO)를 이끌며 대외 불법 첩보망을 확장했고, 대숙청 속에서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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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육해군 동원해제 관리국 근무
  • 1918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정보국장, 군사통제부 활동부장
  • 1919–1922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 특별부 작전과장 → 부부장
  • 1922–1927GPU·OGPU 방첩부(KRO) 부장 — '트레스트', '신디카트-2', '타란텔라' 작전 지휘
  • 1927–1930OGPU 비밀작전국(SOU) 부국장 보좌관
  • 1930–1931OGPU 해외부(INO) 부부장
  • 1931–1935OGPU·GUGB-NKVD 해외부(INO) 부장 — 소련 대외첩보 총괄
  • 1934–1937적군참모부 제4(정보)국 부국장 겸임
  • 1937NKVD 기록보관부로 좌천, 5월 체포, 8월 총살

블라디슬라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Влад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형은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총독, 자신은 반대파로 보르쿠타에서 처형된 코시오르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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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9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 1920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제14군 정치부 부부장
  • 1920–1922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 1922–1924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8당에서 제명, 포크로프스크 유배
  • 1936수용소 5년형, 우흐타-페치라크 수감
  • 1938보르쿠타에서 처형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벨로보로도프

Александр Георги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1–1938 ✕ 처형

로마노프 처형에 서명한 좌익반대파 내무인민위원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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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우랄 지역 당위원회 위원
  • 1918우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9–1920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정위원 · 중앙위원
  • 1919–1920제9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RSFSR 내무부인민위원
  • 1923–1927RSFSR 내무인민위원
  • 1930–1936조달위원회 · 국내무역인민위원부 근무

오십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

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소련 폴란드 1891–1938 ✕ 옥사

기억으로 살아남은 시인

「러시아에서만 시가 존중받는다—시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시가 살인의 동기인 나라가 또 어디 있나?」 아내 나데즈다의 회고록 『희망, 희망을 거슬러』에 기록된, 스탈린 시대 시인의 운명을 응축한 말.

아크메이즘의 핵심 시인이자 산문가로, 스탈린 체제의 언어와 공포를 시에 새겼다. 체포와 유배 뒤 다시 체포되어 극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내와 친구들이 암기해 지킨 시편들보다 먼저 수용소 이송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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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시집 『돌』 발표
  • 1920년대시·산문·번역 활동
  • 1934–1937체포와 보로네시 유배
  • 1938재체포, 극동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
소련 러시아 1891–1940 ○ 병사

출판되지 않은 악마의 작가

1930년, 출판이 모두 막히자 『거장과 마르가리타』 초고를 벽난로에 던졌다. 훗날 소설 속 악마는 불탄 원고를 꺼내며 말한다. '원고는 타지 않는다.' 불가코프는 죽을 때까지 다시 썼고,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의사 출신의 소설가·극작가로, 소비에트 일상의 관료제와 공포를 환상과 풍자로 비틀었다. 희곡이 금지되고 출판 길이 막힌 채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죽을 때까지 고쳤으며, 이 소설은 사후 검열본으로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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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9의사로 복무
  • 1921모스크바로 이주, 작가 활동
  • 1925–1929소설·희곡 발표과 검열
  • 1928–1940『거장과 마르가리타』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