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와 파리 강화회의 때 프랑스 총리로 헝가리에 가혹한 조건을 밀어붙인 급진파 정치가
방데 출신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 1870년 파리 18구 구청장이 되었고 이듬해 파리 코뮌과 정부 사이의 타협을 시도했다. 독립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1906년 내무장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06~1909년과 1917~1920년 총리를 지냈다. 1917년 11월 전쟁이 가장 어려울 때 총리가 되어 독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 냈다. 헝가리를 독일처럼 약화시키려 해 트리아농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낳았다. 1929년 죽었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 첫해 연방 관료 조직에 인종 분리를 들여왔다. 1917년 4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이유로 참전을 요청했고, 1918년 1월 14개조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의 구상을 내놓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맹 규약 기초를 이끌었지만 연맹을 위해 독일에 대한 여러 요구를 양보했다. 191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타협을 거부해 상원의 조약 비준이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 파머 습격의 「적색 공포」가 벌어졌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24년 죽었다.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이름난 법학 교수가 되었고, 1897년부터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자유주의자였다. 1917년 10월 카포레토 패전으로 정부가 무너지자 총리가 되어 카도르나를 해임하고 군을 재정비했으며, 1918년 비토리오 베네토 승리로 「승리의 총리」라 불렸다. 강화회의에서 런던 조약이 약속한 달마티아와 피우메를 요구했으나 얻지 못해 1919년 4월 회의를 떠났고 6월 사임했다. 「불구의 승리」는 무솔리니가 일어선 배경이 되었다. 처음엔 무솔리니를 지지했으나 1924년 마테오티 살해 뒤 결별했다. 1952년 로마에서 죽었다.
맨체스터의 웨일스인 집안에서 태어나 급진 자유주의 웅변가로 이름을 얻었다. 재무장관으로 1909년 「인민 예산」과 국민보험법을 내 복지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군수장관과 육군장관을 거쳐 1916년 12월 총리가 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독일 경제를 무너뜨릴 막대한 배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의 패권을 견제했다. 1921년 영국-소련 무역협정을 맺고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을 협상했으나 1922년 보수당이 연립에서 빠지자 사임했다. 1936년 히틀러를 만나 찬양하기도 했다. 1945년 죽었다.
코마롬 주의 개혁교회 집안에서 태어난 법률가로, 1918년까지 법무부 국제국장을 지냈고 사회과학지 『후서디크 사저드』의 창간 회원이었다. 과꽃 혁명 뒤 1918년 11월부터 카로이 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1919년 1월 총리가 되었다. 3월 20일 프랑스의 페르낭 빅스 중령이 협상국 각서를 건네자 영토 보전을 해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내각과 함께 사임했고, 이로써 평의회 공화국 수립의 길이 열렸다. 그 뒤 정계에서 물러나 1920년부터 변호사로 일하며 국제법·형법·민법에 관한 연구를 냈다. 1944년 부다페스트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부유한 가톨릭 대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즉각 강화를 요구한 의회 반전파를 이끌었다. 1918년 10월 과꽃 혁명으로 총리가 되었고, 11월 16일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임시 국가원수를 겸했으며 1919년 1월 대통령으로 인정되었다. 토지개혁의 본보기로 자기 가문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다. 1919년 3월 빅스 각서로 정부가 무너진 뒤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7월 망명했다. 1946년 귀국해 1947~1949년 주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나 러이크 재판에 항의해 사임했고, 1955년 프랑스 방스에서 죽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1907년 국민자유당 의원이 되었고,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토 병합과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했다. 패전 뒤 독일인민당을 세웠고 점차 공화국을 받아들였다. 1923년 8월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루르의 소극적 저항을 끝내고, 공산당이 들어간 작센·튀링겐 정부를 군대로 몰아냈으며, 렌텐마르크로 초인플레이션을 잡았다. 11월 불신임으로 물러났지만 죽을 때까지 외무장관으로 남아 도스안과 로카르노 조약, 국제연맹 가입을 이끌었고 192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29년 뇌졸중으로 죽었다.
겨울전쟁 당시 민간복 차림의 예비병을 가리켜 '모델 카얀데르'라는 말이 돌았다. 총리 재임 중 국방준비 부족의 상징처럼 그의 이름이 붙었으나, 책임이 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의 산림학자이자 정치가. 1879년 우시카우풍키에서 태어나 시베리아 답사를 거친 식물학 논문으로 1903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1년 헬싱키대학교 산림학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산림청장 대행을 거쳐 1934년 총국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산림행정을 이끌었다. 1922년과 1924년, 1937년에 세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1933년부터 국민진보당 의장을 맡았다.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했고 1943년 1월 21일 의사당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3시베리아 답사에 기초한 식물학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1904헬싱키대학교 식물학 도슨트
1911–1934헬싱키대학교 산림학(임업) 교수
1918–1943산림청(메찰리투스) 지휘, 1918년 청장 대행·1927년 상임 청장·1934년 총국장
1922핀란드 총리, 독립 후 첫 관료 내각 수반
1924핀란드 총리, 제2차 내각 수반
1928–1929국방장관
1929–국민진보당 소속 의원(바사·비푸리 서부 선거구)
1933–1943국민진보당 의장, 당내 좌파로 평가됨
1937–1939핀란드 총리, 최초의 사회민주당·농민당 연립(제3차 내각),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
카세르타 협정에서 그는 해방 뒤에도 영국군 사령관 스코비에게 군사 지휘권을 맡기는 구상에 동의했다.
그리스의 자유주의 정치가로, 군주제에 반대하면서도 공산주의 운동과는 대립한 사회개혁 지향의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정부를 이끌며 레바논 회의와 카세르타 협정을 통해 저항 세력의 정부 참여와 군 통합의 틀을 마련했다. 1944년 귀국 뒤 국민통합정부의 수상으로 국가 통치권을 세우려 했지만, 영국의 군사적 개입과 EAM·비EAM 세력의 충돌 속에서 그 구상은 데켐브리아나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중앙연합을 창당해 민주주의를 옹호했으며 1967년 군사 쿠데타 뒤 가택연금 중 사망했다.
미국민은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데탕트', 곧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이민자의 아들로 워싱턴주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의회에서 활동한 냉전 자유주의자였다. 민권과 환경 정책에는 앞장섰지만 데탕트에는 회의적이어서, 소련의 유대인 이민을 통상 지위와 연결한 잭슨-배닉 수정안을 주도했다. 1974년 키신저·도브리닌과의 비공식 협상이 소련의 거부로 무산되며 잭슨은 1972년 통상협정을 사실상 좌초시킨 인물로 남았다. 그의 매파 보좌관들은 훗날 신보수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1999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시간 낮 12시 신년사 방송에서: "여러분, 나는 사임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1931년 우랄 부트카에서 집단화로 몰락한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007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건설 기술자로 일하다 1961년 입당해 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1976–85)와 모스크바 당 제1서기(1985–87)를 지냈고,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뒤 해임되었다. 1990년 러시아 연방 인민대의원, 이어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91)이 되었고 1991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9년까지 재임했다.
MFM이 마침내 혁명전선에 들어오자 라치라카는 '더 이상 MFM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몽자 자오나의 모니마에서 정치에 입문한 농학대 교수 라코토니리나는 1972년 5월 시위를 조직해 치라나나 정권의 퇴진을 이끈 학생세대의 지도자였다. 1972년 12월 마오쩌둥주의 좌파 정당 소민 권력 투사(MFM)를 창당했으나 1976년 라치라카 정권에 해산·연금되었다가, 이듬해 6월 혁명전선(FNDR)에 합류해 혁명최고평의회 경제위원장으로 국유기업을 맡았다. 이후 자유주의로 돌아서 1991년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2009년 망명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로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