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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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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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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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0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0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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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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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아직-아닌 것의 철학자: 『희망의 원리』로 인간 해방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사유하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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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 1920년대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57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교수로 강제 은퇴
- 1961베를린 장벽 건설 후 서독 망명 —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
- 1967독일 서적상 평화상 수상
- 1968–1970년대68운동과 해방신학에 영향, 루디 두치케와 교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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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 1923.0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 1926.0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 1938『카를 마르크스』 출간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깊은 영향
- 1950「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 선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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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베른대학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 제출했으나 철회
- 1928『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 출간
- 1933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을 영구히 떠나 파리로 망명
- 1935–1936「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집필 및 프랑스어판 발표
- 1940「역사철학 테제」 집필, 피레네 국경 포트보우에서 자결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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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195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의 수석 이데올로그였다가 쉬르데반 사건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난 경제학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19년 독립사회민주당, 1920년 공산당에 들어갔고 당 신문 편집자로 일했다. 1926년 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와 붉은 교수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33년 망명해 파리에서 울브리히트의 비서로 일했고, 1936년 모스크바에서 「이념적 일탈」로 교직에서 쫓겨났으며, 전쟁 중에는 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을 지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당 선전·교육을 맡았고, 1950년 정치국원, 1950~1955년 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어 당의 수석 이데올로그로 통했다. 1953년 6월 할레에서 봉기 진압 지휘부를 꾸렸다. 1956년 뒤 농업 전면 집단화에 반대하다 1958년 정치국에서 쫓겨났고,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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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독일 공산당 입당
- 1926–1932모스크바 국제 레닌 학교·붉은 교수 연구소
- 1941–1944모스크바 방송 독일어부 편집장
- 1950–1958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 1950–1955선전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58–196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
냉전 위기를 추적한 저널리스트 역사가
켐프는 『베를린 1961』에서 체크포인트 찰리 전차 대치 때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 말을 기록했다: "우리가 신경 쓰는 건 우리의 신경이 아니라 워싱턴에 계신 여러분의 신경입니다."
프레더릭 켐프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자로, 독일계 이민자 가정의 배경과 유럽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정치와 대서양 관계를 다뤘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1961』은 새로 공개된 미국·소련·독일 문서와 인터뷰를 엮어 베를린 장벽 건설과 1961년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의 전차 대치를 재구성했다. 이 책은 케네디의 위기 대응을 약함으로 해석하고 흐루쇼프의 선택을 제약 조건 속에 놓았으며, 그 비대칭적 논지는 독립 서평에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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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졸업
- 1981『월스트리트 저널』 런던 특파원으로 입사
- 1984『월스트리트 저널』 빈 지국 개설
- 1990『월스트리트 저널』 베를린 지국장
- 1992–1997『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 간부, 중부유럽 경제평론 창간
- 2002–2005세계판 『월스트리트 저널』 유럽 편집자
- 2007–애틀랜틱 카운슬 회장 겸 최고경영자
- 2011『베를린 1961』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