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장교로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군사사절단에서 일했다. 1919년 경찰로 옮겨 칠레 경찰대 책임자, 경찰학교 감찰총감을 지냈고, 친위대에 들어가 힘러의 참모부에서 일했다. 1939년 말 친위대 경찰사단을, 1943년 라트비아인 제6친위군단을 맡았다. 1944년 12월 부다페스트의 제9친위산악군단장이 되어 1944년 12월 24일부터 1945년 2월 11일까지 포위전에서 독일군을 지휘했고, 모든 항복 권유를 거부해 길고 참혹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 소련군 포로가 되어 1949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고, 1955년 풀려나 1971년 빌레펠트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
나치 인종 이론가로서 1941~1945년 동부 점령지 장관을 지낸 레발 태생의 발트 독일인
1893년 러시아 제국 에스토니아현의 레발(탈린)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18년 물러가는 독일군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1919년 1월 히틀러보다 먼저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23년 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편집장이 되었다. 1930년 인종 이론서 『20세기의 신화』를 냈고, 히틀러에게 「시온 장로 의정서」를 소개해 유대인 음모론을 심었다. 1941년 7월 17일 동부 점령지 장관이 되어 힌리히 로제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으로 두었으나 실권은 크게 제한되었다. 발트 지역을 독일의 「생존 공간」으로 보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네 죄목 모두 유죄를 받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협상을 주도했으며, 이 조약은 독일의 9월 폴란드 침공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추축국에 유대인을 독일의 살해 시설로 이송하고 독일 내 유대인 시민을 추방에 넘기도록 압박하는 외교 활동을 지휘했다.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헤스는 1920년 나치당에 가입해 히틀러의 측근으로 부상했다. 1933년 당 부지도자가 되었고 1939년 히틀러는 그를 헤르만 괴링 다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941년 5월 그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려는 평화 교섭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단독 비행했으나 영국 정부는 제안을 거부하고 그를 전쟁포로로 억류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상세 이력 보기
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슈바르츠발트의 호른베르크에서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다. 1929년 나치당, 1930년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3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찰청장과 정치경찰 책임자를 지냈다. 1941년 6월 힘러에게 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로 뽑혀 관할 지역의 아인자츠그루펜 학살을 모두 지휘했고, 카미야네츠포딜스키(2만 3600명)와 바비 야르(3만 3771명)의 대량 총살에 자신의 방식을 썼다. 11월 오스트란트로 옮겨 리가 유대인의 절멸을 명령받았고, 룸불라에서 이틀 동안 2만 5000명이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리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1941~1944년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으로서 발트 유대인의 게토 수용과 재산 몰수를 명령한 나치 대관구장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가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1923년 나치당에 들어가 1925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장이 되었고, 1933년 이 주의 주지사를 겸했다. 1941년 7월 25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에 임명되어 리가와 킬을 오갔고, 7월 27일 포고로 유대인 명부 작성, 노란 별 착용, 재산 몰수와 게토 수용을 명령했다. 리에파야의 유대인 처형을 막은 일로 해명을 요구받자 11월 15일 경제적 이해와 상관없이 모든 유대인을 없애라는 것인지 물었으나, 이후 3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1944년 8월 13일 허가 없이 오스트란트를 떠나 해임되었다. 1948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건강 문제로 풀려났고 1964년 고향에서 숨졌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 선전 책임자로서 1926년부터 베를린 당 조직을 이끌고, 1930년 당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선전장관으로 임명한 뒤 언론·영화·라디오·문화계를 나치 이념에 맞춰 통제하고, 반유대주의 선전과 유대인 박해를 부추겼다. 1938년 11월 포그롬의 주요 선동자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총력전을 선전했다.
1941년 특수작전집단 A를 이끌며 카우나스 포그롬을 부추기고 발트 유대인 살해를 지휘한 친위대 장교
슈테르넨펠스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튀빙겐 대학에서 법학 박사가 되었다.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가 뷔르템베르크와 브레슬라우의 게슈타포를 이끌었고, 1938년 빈의 유대인 이주 중앙청 공식 수장이 되었다. 1941년 2월 특수작전집단 A 사령관이 되어 6월 북부집단군을 따라 발트 3국에 들어갔다. 카우나스에서는 클리마이티스에게 포그롬을 시키고 리가에서는 아라이스에게 부대를 꾸리게 하는 등, 학살을 현지인의 「자기 정화」처럼 꾸몄다. 1941년 겨울까지 유대인 24만 9,420명을 죽였다고 보고했고, 11월 말 오스트란트 보안경찰·정보부(SD)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러시아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크 근처에서 소련 파르티잔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해 독일 국가기관들의 협력을 조율했다.
하이드리히는 1931년 친위대에 들어가 국가보안부(SD)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36년에는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을 포괄한 보안경찰을 지휘했다. 1939년 제국보안본부(RSHA)가 설치되자 수장이 되어 보안경찰과 SD를 통합 지휘했고,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나치의 박해와 살해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기관을 이끌었다. 1941년 총독 대리로 임명된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저항 세력을 처형하고 유대인 게토화와 강제이송을 추진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재해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한 부처 간 협력을 조율했으며, 5월 체코 저항요원의 공격으로 부상한 뒤 6월 4일 사망했다.
1944년 헝가리 주재 제국 전권대표로서 헝가리 정부에 유대인 이송을 압박한 친위대 외교관
바트키싱겐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에서 정치학을 공부해 1928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나치당에 들어갔고, 오스트리아 슈슈니크 총리의 사임 공작,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선포에 관여했다.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점령과 함께 친위대 여단지도자로서 헝가리 주재 제국 전권대표가 되어 게슈타포 등 국방군 밖의 점령 기관을 지휘했고, 헝가리 정부에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압박했다. 6월에는 리벤트로프에게 약 34만 명의 유대인이 제국으로 넘겨졌다고 보고했고, 10월에는 화살십자당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 1949년 빌헬름가 재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풀려났고, 1977년 다름슈타트에서 숨졌다.
유럽 각지 유대인의 절멸 수용소 이송을 맡고 1944년 헝가리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지휘한 친위대 장교
독일 졸링겐의 칼뱅파 가정에서 태어나 1914년 가족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옮겨 자랐고,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갔다. 1938년 빈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이주를 조직했다. 1939년 12월 국가보안본부 IV B4과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으며, 이후 그와 부하들이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로 보내는 이송을 맡았다.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점령 뒤 헝가리 유대인 이송을 지휘해, 7월 이송이 멈출 때까지 72만 5000명 가운데 43만 7000명이 이송되었다. 전후 미군에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달아나 1950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갔으나,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납치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1962년 교수형을 당했다.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