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
정치적 입장(선택됨)
국적
출신 배경
시대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포베도노스체프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Победоносцев

전제정치를 신앙으로 삼은 '대심문관'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846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 근무
  • 1860–1865모스크바 대학 민법 교수
  • 1861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법률 교사
  • 1865미래의 알렉산드르 3세 법률 교사
  • 1868–1880『민법 강의』 3권 출간, 민법학 박사
  • 1872국가평의회 의원
  • 1880–1905성무원 검사장, 러시아 정교회 실질적 수장
  • 1881.04'전제정치 불가침 선언' 기초, 개혁안 폐기
  • 1884교구학교 개혁 (273개 → 1902년 43,696개)
  • 1896『모스크바 선집』, 의회제·민주주의 비판
  • 1901암살 미수 생존, 재임 중 톨스토이 파문 단행
  • 1905.1010월 선언 후 사임, 국가평의회·원로원직만 유지

어포니 얼베르트

Apponyi Albert

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맹에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호소한 귀족 정치인

빈에서 태어난 백작으로, 1877년 의회에 들어가 반세기 동안 활동한 웅변가였다. 1906~1910년 교육장관으로 비헝가리계 학교에 헝가리어 교육을 강제한 1907년의 「어포니법」을 만들었다. 1920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어 1월 16일 연설했으나 조건은 바뀌지 않았고, 3월 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정통주의 야당 의원이자 국제연맹 대표로 트리아농 국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33년 군축회의 참석차 머물던 제네바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7의회 진출
  • 1906–1910교육장관, 1907년 어포니법
  • 1920파리 강화 대표단장
  • 1920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패배
  • 1923–1933국제연맹 대표

알프레트 티르피츠

Alfred von Tirpitz

영국 해군에 맞설 대양함대를 건설해 건함 경쟁을 부르고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한 독일 제독

브란덴부르크주 퀴스트린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1916년 제국해군청 장관으로 작은 제국 해군을 영국 해군을 위협할 세계적 해군으로 키웠다. 「위험 이론」에 따른 1898~1912년 함대법으로 독일 해군은 세계 2위가 되었지만, 값비싼 건함 경쟁을 부르고 영국을 프랑스 쪽으로 더 가깝게 밀었다. 그는 해군력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진정제」가 되리라 보았다. 전쟁 중 대양함대가 영국의 해상 봉쇄를 깨지 못하자 무제한 잠수함전을 거세게 주장했고, 1916년 3월 사임했다. 1917년 협상에 의한 강화에 반대하는 극우 조국당을 함께 세워 의장이 되었고, 전후 독일국가인민당 의원을 지냈다. 1930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1916제국해군청 장관
  • 1898–1912함대법으로 대양함대 건설
  • 1917독일 조국당 공동 창당·의장
  • 1924–1928독일국가인민당 제국의회 의원

미하일 블라디미로비치 로댠코

Михаил Владимирович Родзянко

차르에게 '뚱보'라 불린 의회주의자, 제국의 마지막 두마 의장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10월당(옥탸브리스트) 공동 창립, 입헌군주제 노선
  • 1907–1911제3대 국가두마 의원, 부의장(1909~)
  • 1911–1912제3대 국가두마 의장(구치코프 후임)
  • 1912–1917제4대 국가두마 의장, 진보블록 참여
  • 1917.02–03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2세 퇴위 협상 주도
  • 1917 여름구치코프와 자유공화당 창당
  • 1917.10–1920백군 지역(돈·크림)에서 반볼셰비키 활동
  • 1920–1924유고슬라비아 망명, 『라스푸틴의 통치: 제국의 붕괴』 집필

조지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인도 총독을 지내고 외무장관으로 커즌선과 로잔 조약 협상을 이끈 보수당 정치가

더비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쳐 1885년 하원에 들어갔고, 러시아의 인도 위협을 경고하는 여행기를 썼다. 1899~1905년 인도 총독으로 행정 개혁을 폈지만, 1905년 벵골 분할로 민족주의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재임 중 대기근이 겹쳤다. 1차 세계대전 중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소련-폴란드 경계안인 커즌선에 이름을 남겼다. 세브르 조약을 설계했고, 1922년 로잔 회의에서 연합국 수석 협상자로 튀르키예의 국경을 정했다. 1923년 총리 자리를 놓쳤고 1925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하원 의원
  • 1899–1905인도 총독
  • 1916전시 내각, 상원 원내대표
  • 1919–1924외무장관
  • 1922–1923로잔 회의 연합국 수석 협상자

티서 이슈트반

Tisza István

제1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총리를 지내고 과꽃 혁명 날 병사들에게 살해된 이중군주국 옹호자

1875~1890년 총리를 지낸 티서 칼만의 아들로, 칼뱅파 하급 귀족 가문에서 자라 부다페스트와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1886년 자유당 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섰고, 1903~1905년과 1913~1917년 두 차례 헝가리 총리를 지냈으며 1912~1913년에는 하원의장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이중군주국 체제를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고, 보통선거권과 대토지 분할에 반대했다. 1914년 7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처음에는 홀로 반대했으나 결국 지지로 돌아섰다. 개혁을 내건 카를 왕의 요구로 1917년 5월 사임했다. 1918년 10월 31일 과꽃 혁명 중 부다페스트의 집에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6자유당 하원의원
  • 1903–1905헝가리 총리
  • 1910국민노동당 창당
  • 1912–1913하원의장
  • 1913–1917헝가리 총리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Pehr Evind Svinhufvud

핀란드 독립을 선언하고 내전에서 독일의 개입을 요청한 원로원 수반

유형지 톰스크에서 2월혁명 소식을 들은 그는 경찰서로 걸어가, 나를 여기 보낸 자가 체포되었으니 이제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1917년 12월 핀란드 독립 선언을 이끈 원로원 수반으로 1918년 내전에서 백색정부를 이끌며 독일의 개입을 요청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4귀족원 대표로 의회 활동 시작
  • 1907–1912핀란드 의회 의장
  • 1914–1917러시아화 반대로 톰스크 유형
  • 1917–1918원로원 수반(초대 정부 수반)
  • 1918섭정(국가 원수)
  • 1930–1931핀란드 총리
  • 1931–1937핀란드 대통령

네빌 체임벌린

Neville Chamberlain

전쟁을 피하려다 전쟁의 문을 연 유화정책의 설계자

1938년 뮌헨에서 돌아온 그는 협정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15버밍엄 시의원, 도시계획위원회 의장
  • 1915버밍엄 시장
  • 1916–1917국가복무국장
  • 1923–1924보건부 장관, 재무장관
  • 1924–1929보건부 장관
  • 1931–1937재무장관
  • 1937–1940영국 총리
  • 1938–1939뮌헨 협정과 대독 유화정책 주도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Juho Kusti Paasikivi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0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카로이 줄러

Károlyi Gyula

1919년 세게드 반혁명 정부를 세우고 1931~1932년 헝가리 총리를 지낸 보수 귀족

니르바크터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카로이 미하이의 사촌이다. 상원 의원이 되었고 1906~1910년 아라드 주지사를 지냈다. 1919년 5월 평의회 공화국에 맞서 아라드에서 반혁명 정부를 세웠으나 루마니아군에 억류되었고, 풀려난 뒤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정부를 다시 꾸렸다. 이때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국방장관으로서 국민군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평생의 벗이 되었다. 1930~1931년 베틀렌 정부의 외무장관을 거쳐 1931년 8월 총리가 되었고, 비어토르바지 고가교 폭파 뒤 계엄을 선포해 공산주의자를 가두었다. 1932년 9월 사임했고,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에 항의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0아라드 주지사
  • 1919아라드·세게드 반혁명 정부 총리
  • 1930–1931베틀렌 정부 외무장관
  • 1931–1932헝가리 총리

베틀렌 이슈트반

Bethlen István

1921~1931년 총리로서 제한 선거와 국제연맹 차관으로 호르티 체제를 안정시킨 트란실바니아 귀족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자유주의자로 의회에 들어갔다. 1919년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에 합류했고, 1921년 4월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총리가 되었다. 통일당을 세우고 1922년 선거법으로 농촌에 공개투표를 되살려 집권당의 승리를 굳혔으며, 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고 국제연맹 가입과 차관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1931년 대공황 속에 물러났고, 1941년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6년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자유주의자로 의회 진출
  • 1919세게드 반혁명 세력 합류
  • 1921–1931총리
  • 1921베틀렌–페이에르 협정
  • 1922통일당 창당 · 선거법 개정
  • 1924국제연맹 차관
  • 1945–1946소련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옥사

허버트 C. 후버

Herbert Hoover

기근 구제의 거장이자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이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하든, 먹여야 한다!」 볼셰비키 구제를 두고 공격받자 후버가 남긴 응답이었다.

후버는 광산기사로 막대한 부를 이룬 뒤 두 차례 세계대전의 구호활동으로 명성을 쌓은 인물로, 1929년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 구제위원회와 미국 식량청을 이끌며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고, 전후 미국구제청(ARA)을 사적 조직으로 개편해 동유럽과 러시아 구제를 주도했다. 1921년 볼가 기근에 맞서 고리키의 호소에 즉각 응답하고 리가 협정을 직접 주도해 식량 분배의 자율성과 소련의 금 보유분 지출을 관철, 하루 천만 명 이상을 먹였다. 대공황 속 대통령직에서는 고전했으나 은퇴 후에도 트루먼·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개혁위원회를 이끌며 활동을 이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 1874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의 퀘이커 가정에서 출생
  • 1895스탠퍼드대 졸업, 광산기사로 중국·호주 등에서 부 축적
  • 1914–1919벨기에 구제위원회(CRB) 위원장, 점령지 벨기에에 식량 지원
  • 1917–1919미국 식량청장, '식량 독재자'로 전시 식량 통제
  • 1919–1923미국구제청(ARA) 국장, 동유럽·러시아 구제 주도
  • 1921.08.20리가 협정 조인, 볼가 기근 구제의 자율성·비용 조건 확정
  • 1921–1928상무장관
  • 1929–1933제31대 대통령, 대공황 속 재선 실패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바이마르 공화국 재무장관을 지내고 1945년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을 세운 농업 정치가

쾰른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농학을 공부했고, 1911년부터 로마의 국제농업연구소에서 일했다. 1920년 가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식량장관이 되었고, 1922년부터 1923년 8월 쿠노 내각이 물러날 때까지 재무장관을 지냈다. 나치 집권 뒤 체포되었고 콜롬비아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귀국한 뒤 괴르델러 일파와 이어져 7월 20일 사건 뒤 체포되었고, 1945년 1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아내가 집행을 늦춰 붉은 군대의 베를린 점령으로 살아남았다. 1945년 6월 베를린과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의 첫 의장이 되었으나, 보상 없는 토지개혁을 비판해 12월 군정청에 의해 물러났다. 서독으로 옮겨 농민연맹 의장을 지내며 통일을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14로마 국제농업연구소 부장
  • 1920독일 식량장관
  • 1922–1923독일 재무장관
  • 1945나치 법정에서 사형 선고
  • 1945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의장, 12월 해임
  • 1948독일 농민연맹 의장

텔레키 팔

Teleki Pál

「붉은 지도」를 만든 지리학자로 두 차례 총리를 지내고 1941년 독일군 통과에 항의하듯 자살한 정치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지리학자로, 대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헝가리 스카우트 연맹 수장이었다. 1918~1919년 1910년 인구조사에 바탕한 민족 분포도 「붉은 지도」를 만들었다. 1920년 외무장관으로 트리아농 조약 조인을 지켜보았고, 7월 총리가 되어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시기의 정부를 이끌다 1921년 4월 물러났다. 1939년 다시 총리가 되어 제2차 유대인법의 전문을 쓰고 제3차 유대인법을 준비했다. 1941년 4월 3일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통과가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19「붉은 지도」 작성
  • 1920외무장관, 트리아농 조약 조인
  • 1920–1921총리
  • 1938교육장관
  • 1939–1941총리
  • 1941자살

케레스테시피셰르 페렌츠

Keresztes-Fischer Ferenc
헝가리 국가기관 보수주의·기독교민주주의 헝가리 헝가리 1881–1948 ○ 망명 중 폐암으로 사망

베틀렌의 측근으로 두 차례 내무장관을 지내며 좌우 급진 운동을 경찰력으로 억누른 보수파 정치인

페치의 가톨릭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1921년부터 버러녀주, 1925년부터 쇼모지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베틀렌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맹으로 1931~1935년과 1938~1944년 내무장관을 맡아 좌우 양쪽의 급진 운동에 대한 경찰 탄압을 지휘했고, 1939년 헝가리주의 운동을 금지했다. 1941년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에 홀로 반대했고, 텔레키 자살 뒤와 바르도시 사임 뒤 잠시 총리 직무를 대행했다. 1944년 독일 점령 때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1948년 빈에서 폐암으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7페치에서 변호사 개업
  • 1921–1931버러녀주·쇼모지주 주지사
  • 1931–1935내무장관
  • 1938–1944내무장관
  • 1941총리 직무 대행
  • 1942총리 직무 대행
  • 1944–1945게슈타포에 체포, 수용소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오토 누슈케

Otto Nuschke

카이저 뒤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을 이끌며 사회주의통일당 체제에 순응한 부총리

작센 프로보르크에서 태어나 언론인으로 일했고, 좌파 자유주의 정당을 거쳐 1918년 독일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바이마르 국민의회와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나치 집권 뒤 반대파에 섰고 1944년 암살 기도 뒤 숨어 지냈다. 1945년 소련 점령지구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함께 세웠고, 1947년 카이저와 레머가 소련 군정청에 의해 해임되자 대표 대행을 거쳐 1948년 대표가 되었다. 독일인민평의회 공동의장으로 동독 헌법 초안에 참여했고, 1949년 부총리 겸 교회청장이 되었다.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을 충실히 지지하며 따르지 않는 당원을 밀어냈다. 1957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독일민주당 창당 참여
  • 1921–1933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45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공동 창당
  • 1948–1957동독 기독교민주연합 대표
  • 1949–1957동독 부총리 겸 교회청장

칼러이 미클로시

Kállay Miklós
헝가리 국가기관 보수주의·기독교민주주의 헝가리 헝가리 1887–1967 → 망명지에서 사망

독일의 유대인 이송 요구를 거부하며 서방 연합국과 비밀 휴전을 꾀한 전시 총리

서볼치 지방의 오랜 젠트리 가문 출신으로 주지사를 거쳐 1932~1935년 농업장관을 지냈고 베틀렌 계열의 보수파였다. 1941년 상원에서 제3차 유대인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1942년 3월 호르티의 요청으로 총리가 되어 대소련 전쟁을 이어 가면서도 독일의 유대인 이송 요구를 거부하고 서방 연합국과 휴전을 협상했다. 1943년 9월 이스탄불 앞바다에서 비밀 예비 휴전이 맺어졌으나, 1944년 3월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물러나 튀르키예 공사관에 숨었다. 1944년 10월 붙잡혀 다하우와 마우트하우젠에 갇혔다가 1945년 풀려났고, 1946년 망명해 뉴욕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29서볼치 주 주지사
  • 1929–1931상무부 차관
  • 1932–1935농업장관
  • 1942–1944총리, 연합국과 비밀 휴전 협상
  • 1944–1945튀르키예 공사관 피신, 다하우·마우트하우젠 수감
  • 1946–1967망명, 미국 정착

야코프 카이저

Jakob Kaiser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대표였다가 군정청에 밀려나 서독 전독일문제 장관이 된 정치가

바이에른 함멜부르크의 제본공 출신으로 가톨릭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중앙당 소속으로 1933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나치에 맞선 저항운동에 가담해 1938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 뒤 숨어 지냈다. 전후 소련 점령지구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함께 세우고 레머와 함께 대표를 맡았으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공산당을 비판한 끝에 1947년 12월 레머와 함께 소련 군정청에 의해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서베를린으로 옮겼다.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에 맞서 중립 통일 독일을 바랐고, 1949~1957년 전독일문제 장관을 지냈다. 1961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3중앙당 제국의회 의원
  • 1938게슈타포에 체포
  • 1945–1947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공동대표
  • 1947소련 군정청에 의해 해임
  • 1949–1957서독 전독일문제 장관

러커토시 게저

Lakatos Géza
헝가리 국가기관 보수주의·기독교민주주의 헝가리 1890–1967 ○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연사

1944년 8~10월 총리로서 유대인 이송을 멈추고 휴전을 준비했으나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물러난 장군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10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헝가리 적군 사령부에서 복무하다 호르티의 국민군에 들어갔다. 1928~1934년 프라하 주재 무관을 지냈고 1943년 제2군, 1944년 4월 제1군 사령관이 되었다. 베틀렌 이슈트반의 천거로 1944년 8월 29일 스토여이의 후임 총리가 되어 은밀히 휴전 준비를 맡았고, 그의 정부는 유대인 이송을 멈추고 책임 차관들을 갈아치웠다. 10월 15일 판처파우스트 작전과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휴전이 무산되자 밤새 페젠마이어와 협상한 끝에 호르티에게 항복을 권했고, 사임을 강요받고 독일 측에 갇혔다. 전후 기소되지 않았으나 연금과 땅을 빼앗겼고, 1965년 딸이 사는 애들레이드로 건너가 1967년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
  • 1928–1934프라하 주재 무관
  • 1943–1944제2군 사령관
  • 1944제1군 사령관
  • 1944총리(8월 29일~10월 15일)
  • 1965–1967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거주, 사망

엥겔베르트 돌푸스

Engelbert Dollfuß
오스트리아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오스트리아 1892–1934 ✕ 나치 쿠데타 중 암살

의회를 정지시키고 조국전선 일당 독재를 세웠으며 1934년 나치 쿠데타 중 암살된 오스트리아 총리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서 37개월 복무했다. 니더외스터라이히 농민연맹에서 일하며 농업 정책 전문가로 이름을 얻었고, 1931년 농림장관, 1932년 5월 연방 총리가 되었다. 1933년 3월 의회를 정지시키고 긴급명령으로 통치했으며, 공산당과 나치당에 이어 사회민주당까지 금지하고 이탈리아 파시즘을 본뜬 조국전선 일당 독재를 세웠다. 1934년 2월 내전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짓밟았고, 3월 무솔리니·굄뵈시와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다. 1934년 7월 25일 나치 쿠데타 시도 중 총리 관저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18이탈리아 전선 복무
  • 1931농림장관
  • 1932–1934연방 총리
  • 1933의회 정지, 조국전선
  • 1934오스트리아 내전 · 로마 의정서
  • 1934나치 쿠데타 중 암살

민드센티 요제프

Mindszenty József
왕정·왕당파 헝가리 헝가리(독일계 집안) 1892–1975 ○ 망명지 빈에서 사망

1949년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1956년부터 미국 대사관에 피신한 에스테르곰 대주교·추기경

버시주 체히민드센트의 독일계 성을 쓰는 집안에서 나 1915년 사제가 되었고, 1919년 카로이·쿤 벨러 정부에 잇달아 체포되었다. 뒤에 성을 고향 마을 이름을 딴 민드센티로 바꾸었다. 1944년 3월 베스프렘 주교가 되었고, 11월 화살십자당 정권에 체포되었다가 1945년 4월 풀려났다. 1945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수좌대주교, 1946년 추기경이 되어 교회 학교 국유화 등에 맞섰다. 1948년 12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했고, 1949년 2월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1956년 혁명 중 풀려났고 소련군이 들어오자 미국 대사관에 피신해 15년을 지냈다. 1971년 빈으로 떠났고, 1974년 바오로 6세가 대주교좌 공석을 선언했으며 1975년 빈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사제 서품
  • 1919카로이 정부와 쿤 벨러 정부에 체포됨
  • 1944베스프렘 주교, 11월 화살십자당 정권에 체포됨
  • 1945–1974에스테르곰 대주교, 수좌대주교
  • 1946추기경 서임
  • 1948–1949체포,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
  • 1956–1971혁명 중 석방, 부다페스트 미국 대사관에 피신
  • 1971–1975빈에서 망명 생활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