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Akkumulation des Kapitals. Ein Beitrag zur ökonomischen Erklärung des Imperialismus (Rosa Luxemburg, 1913) · 1913–현재 (1913년 출간 직후 논쟁이 시작되어, 룩셈부르크의 반비판(1915년 집필, 1921년 출간), 부하린의 비판(1924), 그로스만의 비판(1929)으로 이어졌고 21세기에도 다시 읽힌다.)

자본축적론 (룩셈부르크)

The Accumulation of Capital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3년에 낸 『자본축적론』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논쟁. 룩셈부르크는 노동자와 자본가만 있는 사회에서는 축적에 돌릴 잉여가치를 실현해 줄 구매자가 없으므로, 자본주의는 농민·수공업자·식민지 같은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시장이자 원료·노동력의 공급원으로 끌어들이고 파괴하며 자라며, 그 바깥이 사라지면 축적을 계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토 바우어, 레닌, 부하린 등은 축적이 자본주의 안에서도 가능하다며 이를 과소소비론으로 비판했다.

상세

룩셈부르크는 어떤 물음에서 출발했나?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 당학교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쳤다. 대중용 교과서 『정치경제학 입문』을 쓰던 그는 마르크스의 분석에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원고를 미뤄 두었다. 1911년 11월 그는 친구에게 「나는 제국주의의 원인을 찾고 싶다」고 썼고, 넉 달 동안 몰아 쓴 결과가 『자본축적론: 제국주의의 경제적 설명을 위한 기여』(1913)다.

배경에는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논쟁이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공황 경향을 극복했다고 했고, 러시아의 「합법 마르크스주의자」 투간-바라놉스키는 마르크스 자신의 재생산 표식으로 소비와 상관없이 자본주의가 끝없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신조화론」에 맞서 자본주의에는 넘을 수 없는 경제적 한계가 있음을 다시 세우려 했다(붕괴론 논쟁 항목 참고).

「실현 문제」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자본』 2권에서 사회의 총생산을 생산수단을 만드는 제1부문과 소비재를 만드는 제2부문으로 나누고, 해마다 생산이 커지는 확대재생산이 두 부문 사이의 어떤 비율에서 가능한지 숫자 표로 보였다(재생산 표식). 룩셈부르크는 이 표식이 물질적 비율은 맞게 보여 주지만, 상품에 담긴 잉여가치가 어떻게 돈으로 바뀌는지, 곧 누가 그것을 사 주는지는 풀지 못했다고 보았다.

설명을 위해 가정한 숫자로 보자. 한 해의 사회 총생산이 1000이고, 그 가치가 불변자본 600(c), 가변자본 200(v), 잉여가치 200(s)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산수단의 마모분 600은 자본가끼리 사고팔아 메운다. 노동자는 임금 200으로 소비재 200어치를 산다. 자본가가 잉여가치 가운데 100을 자기 소비에 쓰면, 나머지 100은 생산을 늘리는 데 돌릴 몫이다. 그런데 이 100어치의 상품을 누가 사 주는가? 노동자는 이미 임금을 다 썼고, 자본가가 이것을 소비해 버리면 축적이 아니라 단순재생산이 된다. 자본가가 서로 생산수단을 사 주며 공장을 늘린다고 해도, 늘어난 공장이 내놓을 더 많은 상품을 살 사람이 다시 필요하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잉여가치의 실현은 노동자와 자본가로만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풀 수 없는 과제다.” (룩셈부르크, 『자본축적론』 26장)
„Die Realisierung des Mehrwerts zu Zwecken der Akkumulation ist also in einer Gesellschaft, die nur aus Arbeitern und Kapitalisten besteht, eine unlösbare Aufgabe.“

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필요로 하나?

룩셈부르크의 답은 「제3자」, 곧 자본주의적으로 생산하지 않는 사회층과 사회다. 그는 자본에게 「외부 시장」이란 「자본의 생산물을 흡수하고 자본에게 생산 요소와 노동력을 공급하는 비자본주의적 사회 환경」이라고 정의했다. 예컨대 19세기의 첫 3분의 2 동안 영국 면공업은 유럽 대륙의 농민과 도시 소시민, 인도·아메리카·아프리카의 농민에게 면포를 팔았고, 이 소비가 영국 면공업과 그에 딸린 기계·금속·석탄 공업의 거대한 팽창의 바탕이 되었다. 이 기준에서 독일과 영국의 상호 무역은 서로에게 대개 「내부 시장」이고, 독일 공업과 독일 농민 사이의 교환이 오히려 「외부 시장」이다.

이 관계는 평화로운 교환이 아니다. 선진 자본주의 나라는 비자본주의 국가에 차관을 주어 그 돈으로 철도 설비 같은 공업품을 사게 하고, 그 나라를 빚과 정치적 종속에 묶는다. 군사 정복과 식민 통치로 시장을 열고 토지와 자원을 빼앗으며, 농민 경작과 수공업 같은 자연경제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려 상품생산으로 바꾼다. 군국주의도 그에게는 정치적 수단일 뿐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으로도 자본에게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일급의 수단, 곧 축적의 한 영역」이다. 룩셈부르크는 이 과정을 마르크스가 말한 본원적 축적이 자본주의 역사 내내 계속되는 것으로 보았고, 영국 농민의 수탈, 아프리카인의 노예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멸, 중국·알제리·인도·남아프리카 침탈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기가 기대는 바로 그 바깥을 먹어 치운다. 책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맺는다.

“자본주의는 선전력을 가진 최초의 경제 형태, 지구 위로 퍼져 나가 다른 모든 경제 형태를 몰아내고 곁에 다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형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다른 경제 형태를 자기 환경과 토양으로 삼지 않고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최초의 형태이기도 하다.” (같은 책, 32장)
„Der Kapitalismus ist die erste Wirtschaftsform mit propagandistischer Kraft, eine Form, die die Tendenz hat, sich auf dem Erdrund auszubreiten und alle anderen Wirtschaftsformen zu verdrängen, die keine andere neben sich duldet. Er ist aber zugleich die erste, die allein, ohne andere Wirtschaftsformen als ihr Milieu und ihren Nährboden, nicht zu existieren vermag.“

룩셈부르크는 이 모순이 저절로 끝까지 가기를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다. 군국주의와 함께 정치적·사회적 파국의 연쇄가 이어져, 축적이 「자연적 한계에 부딪치기 전에」 국제 노동계급의 반란이 필연이 되리라고 보았다.

누가 어떻게 비판했나?

책은 나오자마자 거의 모든 진영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프란츠 메링과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가 예외였을 뿐, 사회민주당 이론가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 볼셰비키가 모두 반대했다. 레닌은 1913년 이 책을 읽고 판네쿠크와 에크슈타인, 오토 바우어가 한목소리로 비판해 기쁘다며, 자기가 1899년 나로드니키를 반박하며 한 말을 그들이 했다고 썼다. 나로드니키는 러시아에 국내 시장이 없어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레닌은 자본주의가 생산수단 수요로 스스로 시장을 만든다고 반박한 바 있다. 오토 바우어는 1913년 기술 진보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는 재생산 표식을 만들어, 외부 시장 없이도 축적이 가능함을 보이려 했다.

부하린은 1924년 『제국주의와 자본축적』에서 문제 설정 자체가 틀렸다고 보았다. 자본에게 노동자의 소비는 노동력 생산의 일부이고, 확대된 생산물에 대한 수요는 투자 과정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추가 불변자본은 생산수단에 대한 수요이고, 새로 고용된 노동자의 임금인 추가 가변자본은 소비재에 대한 수요다. 룩셈부르크는 1915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1921년 출간)에서 이런 해법을 「빈 공간에서 제자리를 도는 회전목마」라고 비웃으며, 축적이란 단순히 상품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돈 형태의 자본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맞섰다.

헨리크 그로스만은 자본주의에 객관적 한계가 있다는 룩셈부르크의 목표에는 공감했지만, 그가 마르크스의 추상적 표식을 현실 그대로의 묘사로 착각했으며 한계를 생산이 아닌 유통 영역에서 찾았다고 비판했다. 그로스만에게 진짜 한계는 수요 부족이 아니라 이윤율 저하였다. 미하우 칼레츠키는 이윤 실현에 중요한 것은 비자본주의 시장에 수출한 총량이 아니라 수출이 수입을 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과소소비론이란 무엇이고 이 논쟁은 어디까지 이어졌나?

과소소비론은 소비 수요가 생산에 비해 모자라 불황과 정체가 생긴다는 이론이다. 시스몽디가 1819년 『정치경제학 신원리』에서 과소소비와 과잉생산을 경기순환의 원인으로 들었고, 맬서스도 이를 주장해 리카도와 논쟁했다. 20세기 초에는 존 A. 홉슨이 소득 분배의 불균등이 과잉저축과 과소소비를 낳는다고 보았다. 룩셈부르크의 비판자들은 그의 이론을 이 계열로 분류했다.

뒤의 평가는 더 다양하다. 리카르도 벨로피오레는 룩셈부르크가 가치를 돈으로 실현해야 할 필요와 금융의 역할을 본 「거시화폐적」 분석이었다고 재평가했고, 얀 토포로프스키는 국제 차관 분석을 비판적 금융 연구의 선구로 보았다. 데이비드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론도 비자본주의 영역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자본의 논리를 잇는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이 이루어지는 가정을 자본주의가 팽창에 필요로 하는 현대의 비자본주의 영역으로 보며 사회재생산 이론과 이었다. 반면 레셰크 코와코프스키는 임금이 늘 생존 수준에 머문다거나 국가가 축적 과정을 조절할 수 없다는 가정이 뒤의 역사로 반박되었다고 평가했다.

관련 인물

출처

  1.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3. 위키백과 (영문)
  4. de.wikipedia.org
  5. 위키백과 (영문)
  6. de.wikipedia.org
  7. 위키백과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