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tructuralisme (French Theory) · 1966–현재

후기구조주의

Post-structuralism

1960년대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나온 사상 흐름을 묶어 부르는 이름. 언어와 기호의 체계가 의미를 고정하지 못하고 늘 미끄러지며, 지식과 담론이 권력과 얽혀 있다고 보고, 주체·진리·이성 같은 근대의 중심 개념을 의심했다. 데리다·푸코·들뢰즈·바르트 등이 꼽히지만 대부분 이 꼬리표를 거부했다. 니체를 주요 원천으로 삼았고, 사르트르식 휴머니즘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퇴조 속에서 자라 마르크스주의와 긴장 관계를 이루었다.

상세

‘후기’ 구조주의는 무엇의 다음인가?

1950~1960년대 프랑스 지식계를 휩쓴 것은 구조주의였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출발한 구조주의는 낱말의 의미가 사물과의 대응이 아니라 다른 낱말들과의 차이에서 나온다고 보고, 이 생각을 신화·친족(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무의식(자크 라캉), 문학, 그리고 마르크스 읽기(루이 알튀세르)에까지 넓혔다. 개인의 의식이나 의도보다 그 밑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가 의미를 정한다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는 이 구조주의를 이어받으면서 그 밑바닥을 흔들었다. 구조가 의미를 정한다면 그 구조 자체는 무엇이 고정하는가?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의미의 체계가 결코 닫히지 않고 늘 미끄러지며, 구조를 짜는 이항 대립(말/글, 남성/여성, 이성/광기)에는 위계와 배제가 숨어 있다고 보았다. 독일어판 위키백과의 정리대로, 언어는 현실을 그저 비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범주와 구분으로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 공통 전제다.

언제, 누구에게서 나왔나?

상징적인 시작은 1966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학술회의 「비평의 언어와 인간과학」이다. 구조주의를 미국에 소개하려던 이 자리에서 자크 데리다는 강연 「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놀이」로 구조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중심이 사라진 사유를 제안했다. 이듬해 1967년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서 나오지 않으며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른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와 『글쓰기와 차이』를 냈다.

이 흐름에 흔히 바르트,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 보드리야르,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꼽히지만, 그들 대부분은 ‘후기구조주의자’라는 꼬리표를 거부했다. 프랑스어판 위키백과가 소개하는 앙거뮐러의 지적대로, 후기구조주의는 프랑스 안에서 쓰인 이름이라기보다 ‘프렌치 시어리’가 미국과 독일에서 수용되며 만들어진 이름에 가깝다. 1970~1980년대 미국 대학의 문학 이론,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퀴어 이론이 이 사상들을 받아들이며 이름이 굳었다.

니체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나?

후기구조주의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원천은 니체였다. 1962년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은 니체를 헤겔 변증법에 맞서는 차이와 긍정의 철학자로 읽어 프랑스의 니체 르네상스를 열었다.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을 이어받아 진리와 지식의 역사를 권력의 역사로 다시 썼고, 데리다는 고정된 형태보다 언어의 유동성을 강조하는 해체의 동기를 크게 니체에게서 얻었다. 진리란 굳어 버린 은유의 무리라는 니체의 생각, 하나의 관점을 넘어서는 객관적 사실은 없다는 관점주의가 이들의 공통 자원이 되었다.

니체를 정치적 우익의 철학자로 읽던 독일과 달리, 프랑스의 이 세대는 니체를 해방과 전복의 사상가로 읽었다. 이 독해는 콜리·몬티나리 비판 전집의 프랑스어판 작업과도 맞물렸다. 푸코와 들뢰즈가 그 프랑스어판의 책임 편집을 맡았던 것이다. 니체 수용사에서 프랑스의 니체는 독일의 니체 문서보관소와 보수 혁명이 만든 니체상을 뒤집은 가장 큰 흐름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는 어떤 관계인가?

독일어판 위키백과는 후기구조주의가 생겨날 무렵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식 휴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크게 유행했으나, 소련 사회주의의 전체주의적 구조와 스탈린주의, 혁명적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퇴조, 사회민주주의화, 그리고 여성·흑인·동성애자 운동처럼 ‘부차적 모순’ 취급을 거부한 새로운 운동의 등장 앞에서 두 이론이 모두 부족해 보였다고 정리한다. 1968년 5월의 경험도 이 세대를 갈랐다. 후기구조주의는 노동계급과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큰 이야기 대신 일상과 몸, 담론, 미시적 권력의 정치를 내세웠다.

관계가 적대만은 아니었다. 푸코와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알튀세르의 영향 아래 있었고, 데리다는 1972년 대담집 『입장들』에서 자신의 작업을 ‘관념론 비판’으로 볼 수 있다며 “변증법적 유물론 안에서, 적어도 그것이 이 비판을 수행하는 한, 어떤 것도 내게 조금의 망설임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와의 접합이 바로 주어질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Il va donc de soi que rien, dans le matérialisme dialectique, du moins en tant qu'il opère cette critique, ne suscite de ma part la moindre réticence et à cet égard je n'en ai jamais formulée.

비판도 거셌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1985년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니체에서 하이데거, 데리다, 푸코로 이어진 이성 비판이 자기 비판의 규범적 근거를 잃는다고 비판했고, 독일에서는 만프레트 프랑크가 ‘신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이 흐름을 분석했다. 프랑스어판 위키백과는 같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알튀세르의 프랑스와 하버마스의 독일이 서로 닿지 않는 두 흐름이었다고 전한다. 냉전기 미국 중앙정보국의 1985년 보고서가 푸코 등의 작업이 사회과학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무너뜨린 것을 반겼다는 사실은, 이 사상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낳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의 재료가 되었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de.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4. Jacques Derrida, Positions, Paris: Minuit, 1972
  5. 위키백과 (영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