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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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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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1922년 그는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오르조니키제가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시점은 다투어진다. 한 보도는 10월 20일로 적고, 영문 서술은 11월로 본다.
아카키 코바히제는 1904년 당에 가입하고 구볼셰비키협회 회원이었던 그루지야의 옛 볼셰비키다. 억압 명부는 1889년 그루지야 암브롤라우리 출생, 민족 грузин, 거주지 티플리스로 적는다. 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으로서 자캅카스 통합에 반대하는 편에 섰고, 그해 오르조니키제를 ‘스탈린의 당나귀’라 부른 뒤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사건 시점은 10월설과 11월설로 갈린다. 1936년 12월 22일 체포되어 1937년 6월 24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1957년 4월 2일 복권되었다. 1922년 인물과 처형자를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출처에 근거한 추정이며 동명이인 가능성은 배제되지 않는다.
1921년 10월 1일 레닌은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겸 도누골·히무골 트러스트 책임자였던 루히모비치에게 돈바스의 중소 탄광을 임대하는 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제정 말 로스토프 지역에서 노동자 가정에 태어나 1904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빈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다 1913년 당에 입당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다. 1920년대에는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을 지휘했고, 쿠즈바스 석탄 개발에 이어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었고, 이듬해 총살된 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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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런던 아르코스 급습(1927년 5월 12일) 뒤 로젠골츠는 7쪽 항의각서를 내고 군사스파이 활동을 부인했으나, 5월 24일 볼드윈 수상이 의회에서 압수문서를 공개했고 영국은 5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그를 추방했다.
1905년 16세로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카잔 공략과 콜차크전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공군 총책임자를 지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런던에서 대리대사로 일하며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고, 귀국 뒤 좌익 반대파와 결별하고 스탈린 체제에 합류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을 지냈으며, 1937년 해임과 체포 후 1938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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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 비테프스크·키예프 등지에서 보험대리인으로 지하활동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1922–1924공군 총책임자, 독일 정부·군부와 비밀 군사협상, 46인 선언 서명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5월 12일), 5월 25일 단교와 추방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1937–19386월 14일 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10월 7일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1935년 2월 덴마크에서 열린 비밀 주재원 회의가 발각되어 중앙기구 간부 네 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었고,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라트비아 출신으로 본명은 페테리스 큐지스이며, 1889년 리가 근처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1938년 처형되었다. 190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을 벌였고, 경찰 살해로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이르쿠츠크 유형에서 1914년 탈출했다. 1919년 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1920년부터 적군 정보부에서 일했으며 1924~35년 제4(정보)국장으로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웠다. 1936년 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을 지내고 1937년 정보국장에 복귀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1938년 7월 29일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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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7RSDLP 입당, 16세에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
1907–14경찰 살해로 8년 카토르가형(미성년으로 2년 감형), 복역 후 이르쿠츠크 유형, 1914년 탈출
1917겨울궁전 습격에 참가, 12월부터 체카에서 근무
1919.1–5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1920–24적군 정보부(GRU 전신)에서 근무
1924–35제4(정보)국장,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움
1935.4–1936.6코펜하겐 실패로 사표를 내고 극동특별군(OKDVA) 부사령관
1936.10–1937.5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 «그리신 장군», 레닌훈장 수훈
1937.6–8GRU 국장 재임명, 두 달 만에 해임·체포
1937.11–1938«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으로 11월 27일 체포, 1938년 7월 29일 처형, 1956년 복권
1918년 1월 브레스트 평화 협상 중, 레닌이 주재한 당 간부회의에서 메호노신은 "우리에겐 실질적 전투력이 없다. 전선은 벌거숭이다.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콘스탄틴 메호노신은 적군 창설기의 핵심 군사 조직가로,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이어 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포드보이스키·스클랸스키와 함께 신생 적군의 골격을 세웠다. 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으며, 1918년 차리친에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남부전선 사령관을 지지하며 스탈린·보로실로프의 독자노선에 맞서 이들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전 후에는 브세보부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체육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고스플란·오소아비아힘·해양연구소 등으로 옮겨갔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된 후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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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3페름에서 학생혁명조직 참여; RSDLP 입당·볼셰비키; 폭발물 운반·선전물 등사 등 지하 활동
1913–191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두 차례 체포·추방; 카스피해 과학원 해양탐사 참여
1915–1917.2파블롭스크 근위연대 예비대대 사병; 병사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조직 건설
1917.4–10볼셰비키 중앙위 군사조직(보옌카) 지도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7월 봉기 후 크레스티 감옥 수감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참모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진압 지휘
1917.11–1918.9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잠나르콤보옌);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적군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위원
1918.9–1919.7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РВСР) 위원; 동부·남부·카스피-카프카스 전선 РВС 위원 —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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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10월 혁명의 밤, 밀류틴의 부대는 참모본부 아치에서 알렉산드르 원주 바리케이드를 향해 정면 돌격을 감행했고, 그 방어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니콜라이 밀류틴은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습격에 참여한 볼셰비키 활동가로, 이후 RSFSR 재무인민위원(1924–1929)을 역임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모이세이 긴즈부르크의 나르콤핀 건물(소비에트 구성주의 건축의 기념비적 작품)을 발주했으며, 1930년에는 사회주의 도시계획을 위한 선형도시 개념을 제시한 저서 『소츠고로드』를 출간했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잡지 『소베츠카야 아르히텍투라』의 편집장을 맡았고, 1930년대 내내 교육·문화 행정직을 거치며 마르크스주의 정주 이론을 발전시켰다. 대숙청을 살아남았으나(베개 밑에 권총을 두고 잠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1942년 위암으로 사망하여, 혁명적 국가건설과 아방가르드 건축 사상을 잇는 유산을 남겼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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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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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10대에 혁명운동에 뛰어든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 청년으로, 트로츠키와 함께 망명 생활을 거쳐 1917년 메즈라이온치를 통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직접 들어가 협상했고, 그가 약속한 무사 통행으로 방어선이 무너지며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곧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및 중앙라다에 맞서 싸우다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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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