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기술적으로 쳐부숴야 하며, 그것은 곧 적은 피로 싸운다는 뜻이다'라는 바토프의 원칙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필리소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며 독학했다.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근위 3소총연대 정찰대를 지휘하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번 받았으며,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을 거친 뒤 1929년 당에 입당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파블로 프리츠'라는 가명으로 참전해 공화파 군사고문을 맡았고, 1942년부터 종전까지 65군을 지휘하며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 작전을 수행했다. 전후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카르파티아 군관구 재임 중이던 1956년 헝가리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1970~1981년 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1939년 1월 14일, 옛 상관이 자신을 음모에 끌어들였다는 자백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예조프 사건의 첫 진술은 그의 오랜 비서에게서 나왔다.
1898년 보리소글렙스크에서 태어났다. 1925년 여름 키슬로봇스크의 휴양지에서 예조프를 처음 만났고, 1926년부터 당 중앙위 기구의 기술서기로 일했다. 1930년 예조프가 중앙위 부서장이 되자 그의 비서가 되어 1936년까지 곁을 지켰으며,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부로 옮긴 뒤에는 잠시 NKVD 비서국에서 일하다 중앙위로 돌아갔다. 남편은 예조프 밑에서 내무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미하일 리조프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17일 체포되어 베리야가 직접 심문했고, 1939년 1월 14일 심문에서는 1931년부터 반혁명 음모 조직의 일원이었으며 옛 상관이 자신을 끌어들였다고 자백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 이 진술이 예조프에 대한 정치적 혐의를 쌓아 올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0년 1월 26일 군사법정에서 반혁명 활동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이튿날 총살되었고, 1956년 9월 복권되었다.
판결문은 그가 노보시비르스크 NKVD에서 ‘근거 없는 체포’와 수사자료 조작을 허용했다고 기록했다.
이반 말체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을 거쳐 국가보안기관의 지역 지휘관이 된 소련 관료였다. 그는 우랄과 시베리아, 북캅카스의 조직을 거치며 VChK·OGPU·NKVD가 지방 행정과 정치적 통제를 결합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이끈 그는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테러의 집행 구조에 책임을 졌으며, 이후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지 않았다.
1938년 봄 그의 사건을 정리한 결정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범죄 행위는 내무인민위원부 국 기구에 침투하여, 국장 불라흐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사안일 덕분에 튼튼한 둥지를 틀은 계급적 적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북캅카스에서 잔뼈가 굵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다긴이 고리키주로 옮겨 가자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섰다. 1937년 쿨라크 작전에서 예정된 기한보다 앞서 7월 29일에 작전을 개시해 프리놉스키의 격렬한 반응을 불렀고,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하며 상한을 훨씬 초과해 체포를 밀어붙였다. 지역 체키스트의 자의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에 닿으면서 1938년 3월 해임되고 4월 말 체포되었으며, 1940년 총살됐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베를린에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에게 독일의 대소 선전포고를 전달했고, 통역 에리히 좀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게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인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898년 6월 바쿠에서 태어나 1953년 12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으며, 공식 전기는 그를 그루지야인으로 적는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5월까지 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으로 대외정보부와 방첩부를 함께 맡아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집행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펄레츠키스를 총리로 세우고 7월 14일 인민세이마스 선거를 조직하는 등 한 달여 만에 병합을 완수했다. 전후 외무 차관과 재산총국 부국장 등 한직을 거쳐 1953년 4월 그루지야 내무장관이 되었으나 6월 30일 체포되어 12월 23일 베리야 일당으로 총살되었다.
톰스크-7 건설 현장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원자로가 아니라 빵 공장이었다. 그는 '내가 석공을 구해 오겠다'며 수용자 중 벽돌공을 직접 찾아 데려왔다.
체카 기병 출신의 소련 내무부 공병 소장이자 산업 건설자로, 원자폭탄 계획의 핵심 시설인 첼랴빈스크-40(마야크) 플루토늄 생산단지 건설을 지휘했다. 1947년 ITL 제859호 수용소와 공병 부대를 통합 지휘해 1948년까지 4만 5천 명의 인원으로 공업용 원자로와 방사화학 공장을 착공 3년 만에 가동시켜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26, 톰스크-7, 두브나, 프로트비노까지 소련 핵 지도의 주요 시설을 연이어 건설했으며 사회주의노동영웅(1949)과 스탈린상(1951)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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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4제국군 기병 위생병 → 1917년 볼셰비키 입당 → 체카 기병대 내전 참전, 특별기병대대장
1942년 초, 판필로프는 스탈린에게 「독일 파시스트군의 화학 공격 준비 지속에 관하여」라는 특별 보고를 올렸다. 이 보고는 처칠이 라디오 연설을 통해 베를린에 가스전의 대가를 공개 경고하게 만든 외교적 연쇄 반응을 촉발시켰다.
1918년 붉은 군대와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여 동부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내전을 치렀다. 기갑부대로 전환해 1937년 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38년 하산 호에서 제2기계화여단을 지휘했다. 1941년 7월부터 1942년까지 GRU 국장으로서 전쟁 최대 위기 속 소비에트 군사정보를 지휘했고, 1942년 초 독일 화학전 준비 보고로 처칠의 공개 경고를 이끌어냈다. 안데르스군 이탈 후 전선으로 복귀해 제3근위전차군단을 이끌고 동포메라니아와 베를린 공세에서 독일 제2군을 격멸,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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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22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5군에서 내전 참전 (동부전선, 콜차크군 상대)
1922–26기병연대 정치위원 → 시베리아 군관구 정치국 근무 → 프룬제 사관학교 고위지휘관 과정 졸업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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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1956–1957국방부 차관 겸 육군총사령관, 1956년 11월 헝가리 봉기 진압에는 참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
1941년 6월 22일 아침, GAU 청사에서 사무실 열쇠를 받는 순간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대조국전쟁 전 기간 동안 포병총국(GAU)장으로서 적군의 포병 보급·개발·편제를 총괄하고 스탈린에게 140회 호출된 포병원수. 종전 후 독일 V-2 시설을 조사하고 GAU 내 로켓국을 창설했으며, 1948년 R-1 탄도미사일 첫 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소련 로켓 개발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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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20제국군 징집 → 붉은군대 입대; 제1차 세계대전·내전 참전, 페트로그라드 포병과정 졸업
1920–193728산악사단 포대장·포병연대장 등 포병 지휘관 역임, 고등포병학교 졸업(1924)
1937–1941벨로루시아·북카프카스·키예프 특별군관구 포병사령관; 폴란드 원정·겨울전쟁 참전
1941–1948포병총국(GAU)장; 포병원수 진급(1944); 전시 내내 포병 보급·개발 총괄
1948–1952군무차관; S-60 대공포 결함으로 1952년 2월 체포·계급 박탈
1953–1960복권(1953.4); 방공군 제1부사령관 겸 제1부총사령관; S-25 위원장; ABM 서한 공동서명
1960–1972국방부 감찰장단 감찰고문; 회고록 『Об артиллерии и немного о себе』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전시 전기공업을 지휘하고 수소폭탄의 리튬-6을 낳은, 소련의 마지막 스탈린 시기 대외무역장관
1953년, 카바노프는 전자기 동위원소 분리법과 리튬-6 생산으로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그 기술로 소련은 이윽고 수소폭탄을 완성했다.
페름 현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자물쇠공에서 출발해 내전 정치위원을 거쳐 전기공업 관료로 성장했다. 1941년 전기공업인민위원이 되어 전시 소련의 발전설비 대피와 재건을 총괄했고, 1945년부터 원자폭탄 계획에 참여해 우라늄 동위원소 전자기 분리법과 열핵무기용 리튬-6 생산기술 확립을 주도하여 1953년 스탈린상 1등급을 수상했다. 같은 해 대외무역장관이 되어 흐루쇼프 시기 소련 대외경제의 방향 전환을 집행했으며, 1958년 파톨리체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이미 전개된 군대로 그냥 시작된다. 동원과 집중은 1914년처럼 전쟁 상태 발발 이후의 시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은밀히 진행된다」 — 『새로운 투쟁 형태』(1940)
소련의 군사 이론가이자 군 장교로, 트리안다필로프와 투하쳅스키와 함께 종심작전(глубокая операция) 교리의 핵심 설계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작전술의 진화』(1932, 1937)는 전략과 전술 사이의 작전술을 체계화한 기념비적 저작이며, 참모 아카데미 작전술 학과장으로서 붉은 군대 지휘관 세대를 양성했다. 1940년 저서 『새로운 투쟁 형태』는 독일군의 전격전을 예리하게 분석하며 동원 없는 전쟁 개시를 예언했으나 스탈린 지도부는 외면했고, 이 책은 오늘날 게라시모프 doctrine에서 인용되며 재평가되고 있다. 1941년 6월 체포되어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카라간다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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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8준사관학교 졸업,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8년 여름 붉은 군대 자원입대
1918–21제6군 정치부, 제159소총연대 군 정치위원, 제154소총연대 부지휘관
1921–24붉은 군대 군사아카데미 졸업; 서부전선 참모부 정보부장 겸임 (1923–24)
1925–30레닌그라드 군관구 작전부장 → 제10소총군단 참모장
1930–3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 작전학부장 (1932)
1933–36제4소총사단장 (벨로루시 군관구), 1935년 콤브리그 계급 부여
1936–39참모본부 제1부 부부장 → 참모 아카데미 군 작전학과장 → 작전술 학과장, 교수
1939.12겨울전쟁 당시 제7군 참모장 (12월 17–30일), 콤디브 계급 (12.9)
1940–41국방인민위원회 배속; 『새로운 투쟁 형태』 출간 (1940); 1941년 6월 7일 체포
1942–55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 복역; 만기 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유형
1955–761955년 6월 복권, 대령 계급 회복 후 퇴역; 『군사사상』 편집부 근무, 저술 재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