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레닌〉 시나리오 작업 중 머물던 모스필름 부감독의 아파트가 NKVD에 급습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동료가 체포되어 총살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시간에 영화를 완성해 스탈린에게 개인 시사회를 올렸다.
미하일 롬은 스탈린의 직접 주문으로 〈10월의 레닌〉(1937)과 〈1918년의 레닌〉(1939)을 연출하여 수십 년간 지속될 레닌의 영화적 정전을 창조한 감독이다. 이르쿠츠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화로 전향, 모스필름에서 5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소비에트 사운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4천만 명 이상이 관람한 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1965)으로 나치즘의 작동 원리를 해부하며 해빙기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대변했고, VGIK 교수로서 타르콥스키·슉신·미할코프 등 차세대 감독들을 양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5VKHUTEIN 조각과 졸업, 조각가·번역가로 활동
1934감독 데뷔작 〈팡파르 부인〉 발표
1937–1939〈10월의 레닌〉·〈1918년의 레닌〉 연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1)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셰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세바스토폴 취재 원고의 마지막 줄: "도시가 버텨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기적을 믿는 데 익숙해졌다."
일리야 일리프와 함께 소비에트 풍자문학의 대표작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써서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탄생시킨 작가. 본명은 예브게니 카타예프로,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이며, 오데사 형사국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그의 초기 글쓰기에 독특한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1935년 일리프와 함께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단층집 미국』을 집필했고, 일리프 사후에는 잡지 『오고뇨크』 편집장으로 출판계를 이끌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취재하고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2오데사에서 교사의 차남으로 출생 (본명: 예브게니 카타예프),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와 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상세 이력 보기
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
이 황량한 시대의 사막에, 전쟁과 화재와 맹렬한 파괴 끝에, 우리 고대 영광의 이 외롭고 무엇과도 닮지 않은 성당이 서 있다.
니콜라이 자볼로츠키는 1928년 다닐 하름스, 알렉산드르 브베덴스키와 함께 아방가르드 문학 그룹 오베리우(OBERIU)를 공동 창립한 소비에트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첫 시집 『기둥들』(Столбцы, 1929)은 NEP 시기 소비에트의 그로테스크한 일상을 부조리한 이미지와 풍자로 그려내 혁명 후 러시아 시의 이정표가 되었다. 1938년 대숙청 때 반소비에트 작가조직 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 수감되었고, 유형 중 중세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의 탁월한 번역을 완성했다. 전후 모스크바로 복귀한 후에는 자연과 인간의 형이상학적 관계를 숙고하는 고전적 서정시로 전환하여 튜체프에 비견될 만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상세 이력 보기
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임종을 앞둔 베크의 병실에 금서 『새로운 임명』 독일어판이 몰래 전해졌고, 더 이상 읽을 수 없던 그는 책을 베개 곁에 놓아 달라고 한 뒤 표지를 쓰다듬었다.
사라토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사단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대조국전쟁에서 모스크바 민병대에 참가한 뒤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판필로프 사단의 방어전을 기록한 《볼로콜람스크 고속도로》(1944)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애독서가 된 소비에트 전쟁문학의 고전이다. 전후에는 금속노동자와 기술자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중공업 관료제를 소설화한 《새로운 임명》(1965)은 당대에 출판 금지되어 1986년에야 소련에서 공개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시선을 견지한 작가로 기억된다.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1938년 11월, 요양원에 있는 그에게 남편이 루미날을 보냈다. 며칠 뒤 그는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고멜의 상인 가정에서 예브게니야 파이겐베르크로 태어나, 하유틴·외교관 글라둔과의 결혼을 거쳐 1931년 예조프와 결혼했다. 1930년대에는 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의 부편집인으로 사실상 편집을 이끌었고, 바벨과 숄로호프, 예이젠시테인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모스크바 살롱을 열었다. 1933년 딸 나탈리야를 입양했다. 1938년 남편의 몰락이 다가오자 가까운 친구들이 잇따라 체포되었고 그 자신의 과거를 고발하는 진정서도 접수되었다. 심한 우울 상태로 요양원에 들어갔고, 남편이 보내 준 수면제 루미날의 과다 복용으로 1938년 11월 21일 사망했다. 돈스코이 묘지에 묻혔다.
『소피 여사의 일기』에서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까지, 옌안과 반우파 투쟁을 모두 겪은 작가
1904년 10월 12일 후난 린리에서 태어나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이름을 얻고, 반우파 투쟁이던 1958년 당에서 제명되어 1986년 3월 4일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난 출신으로 1928년 『소피 여사의 일기』로 신여성의 내면을 그려 이름을 얻었고, 남편 후예핀이 1931년 국민당에게 처형된 뒤 입당했다. 1936년 산베이의 홍군 지역에 도착해 마오의 환영을 받았으나 1942년 「3·8절 유감」으로 옌안의 성차별을 지적해 정풍운동에서 비판받았다. 토지개혁을 그린 『태양은 쌍간강을 비춘다』로 1951년 스탈린상을 받았고, 1957년 반우파 투쟁에서 우파로 몰려 북대황 농장에서 20년 넘게 노동했다. 1979년 복권되었다.
레닌그라드의 한 교수가 젊은 우글로프의 수술 보고를 듣고 '이건 뮌하우젠 남작의 허풍이다'라고 말했다가, 직접 수술을 검토한 뒤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시베리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사라토프 의대를 졸업하고, 겨울전쟁과 900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했다. 식도·종격동·폐·심장 수술을 개척했으며, 102세까지 수술실에 서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에서 '어떤 음주도 용납될 수 없으며 술 취함은 러시아 민족의 본성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전국에 유포한 핵심 선전가였고, 종신토록 금주 운동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의 배후로 유대인 음모론을 제기하고 록 음악을 마약으로 분류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우파와 결합한 과격한 주장으로 논란을 낳았다.
“우리 각자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쓴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당과 인민의 것이다.” 소비에트 작가 제2차 전연합 대회 연설(1954)에서.
러시아 제국 돈 지방의 비코사크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소설가로, 1925년부터 1940년까지 네 권으로 완성한 『고요한 돈강』은 혁명과 내전이 코사크 마을을 찢어 놓은 10여 년을 그려 냈다. 1932년 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고발해 곡물 지원과 조사를 이끌어 냈고, 1937~1938년 대숙청기에도 탄원으로 지역 간부들을 구해 냈다. 충성스러운 당원으로서 1932년 입당해 1937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으나, 1966년 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갈라섰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84년 뵤셴스카야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국제여단의 아동시설에서 만난 아이들의 경험을 소설로 옮겼다. 전쟁을 겪는 어린이를 선전의 대상만이 아니라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다루려 했다.
독일계 유대인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 나치 집권 뒤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 중 국제여단이 세운 에른스트 텔만 아동시설에서 활동했다. 아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네 명의 스페인 소년』을 집필했다. 1942년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 뒤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일은 확인되지 않는다.
상세 이력 보기
1925–1929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위 없이 중단했다.
1931아동 도서 연작 「어린이 나라의 해와 비」에 첫 이야기들을 발표했다.
1932베를린 노동자 아이들의 삶을 다룬 『뮐러 거리, 오늘의 소년들』을 출간했다.
1934파리 망명 중 쓴 청소년 소설 『멕시코 소년 얀코』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출간되었다.
1937리자 테츠너의 주선으로 『차오와 징링, 중국의 아이들』이 스위스 노동조합 신문에 실렸다.
1937–1938국제여단 편에서 내전을 다룬 아동·청소년 도서를 준비하기 위해 스페인을 취재했다.
1938연말에 『네 명의 스페인 소년』 원고를 완성했으나 이 작품은 1987년에야 출간되었다.
1942년 「야생 백합」으로 옌안의 특권을 비판한 당원으로, 제명과 투옥을 거쳐 1947년 비밀리에 처형된다. 다이칭은 이 사건을 정풍운동의 억압을 가늠하는 핵심 사례로 꼽는다.
허난 출신 번역가·작가로 1937년 옌안에 가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했다. 1942년 3월 『해방일보』에 실은 잡문 「야생 백합」에서 간부의 식사·의복 등급과 청년의 좌절을 지적했고, 곧 정풍운동에서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판 대회의 표적이 되었다. 1943년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1947년 국민당군의 옌안 공격으로 철수하던 중 산시성 싱현에서 처형되었다. 1991년 공안부가 트로츠키파 혐의를 공식 철회했다.
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유대인으로 태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스스로를 「나는 『혼례』 속의 유대인이다」라고 불렀다.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1942년 8월 9일, 엘리아스베르크가 굶주림 속에서 재편한 오케스트라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을 레닌그라드에 울려 퍼뜨렸다.
카를 엘리아스베르크는 바이올린 연주에서 출발해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소련 음악가였다. 레닌그라드 봉쇄로 단원 대부분이 굶주림과 전선 때문에 사라지자, 그는 남은 연주자들을 찾아 모으고 군악대원까지 보충해 오케스트라를 재편했다. 1942년 8월 9일 그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레닌그라드 초연을 지휘했으며, 이 연주는 굶주린 도시의 문화적 지속과 방어 의지를 알리는 방송이 되었다. 전후에는 레닌그라드 중심부에서 활동할 기회가 줄어 지방 순회 지휘자로 일했지만, 봉쇄기의 작업은 그의 삶을 규정한 역사적 장면으로 남았다.
보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 형성이 곧 브란덴부르크 문에 국경이 세워진다는 뜻입니까?
함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언론에 들어간 독일 기자다. 전후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베를린 방송에서 일하다 194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되었고,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경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세워지는가'를 물어 울브리히트로부터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