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39년 스탈린이 디미트로프에게 말했다: "마누일스키는 아첨꾼이야! 트로츠키주의자였지! 트로츠키주의자 도적떼를 숙청할 때 침묵한 것을 우리가 비판했는데 이제는 아첨을 시작했어!" 트로츠키와 연이 닿은 구볼셰비키 가운데 그만 살아남았다.
볼린의 스비아테츠 마을에서 성직자 가문(영어권 사료는 농민 가문)에서 태어나 소르본에서 법학을 마친 볼셰비키다. 《브페료드》파 성원이었고 1917년 메즈라욘치에 합류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코민테른 요직을 맡았다. 1920~30년대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로서 기구와 각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숙청을 지도했고, 1945~46년에는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고 유엔 헌장 전문과 제1장 초안을 작성한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1944년부터 1952년까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0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재학 중 RSDLP 입당, 볼셰비키
1905–06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선동원, 크론슈타트·스베아보르크 수병 봉기 조직
1906체포, 야쿠티야 5년 유형 — 탈출, 파리 망명
1907–12파리 망명, 간헐적 러시아 밀입국 활동
1912–13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지하활동 후 재망명
1914–171차대전 반대, 트로츠키와 《골로스》·《나셰 슬로보》 발행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1921–22우크라이나 CP 제1서기, 농업인민위원 — 기근 대응
1924–28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간부
1926–1943코민테른 집행위 서기 - 1926년 12월~1928년 7월, 1931년 4월 15일~1943년 5월 해산
1944–50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부의장·외무장관, 유엔 창설 대표단
1924–19431924년 7월 15일~1943년 5월 15일 코민테른 집행위 및 상임간부
1944–1952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 1946년부터 외무장관 - 1944년 7월 12일~1952년 6월 10일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멘셰비키에서 소련의 대영제국 외교관으로, 전향과 회유 속에서도 세계대전 외교의 중심에 선 인물
1918년 11월, 멘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가 혁명을 구하려는 마지막 영웅적-절망적 시도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썼다. 2년 후 그는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이자 역사가. 1932년부터 11년간 영국 대사로 재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외교의 핵심 창구로 활약했고, 마이스키-시코르스키 협정으로 소련-폴란드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종전 후 외무인민부위원으로 얄타·포츠담 회담에 참여하고 독일 배상 문제를 주도했다. 그의 런던 외교 일기는 전간기 및 전시 소련 외교의 내막을 담은 독보적 사료로 평가된다.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1939년 11월 26일 저녁, 그는 몰로토프의 마이닐라 포격 항의각서를 받고 즉시 헬싱키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아르노 위리외코스키넨은 독립 핀란드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정치 업무와 대외 협상을 맡았다. 모스크바 공사로서 그는 1939년 11월 마이닐라 포격을 둘러싼 몰로토프의 항의와 핀란드의 회답을 전달하며 전쟁 직전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지만, 협상으로 안보 갈등을 봉합하려던 외교는 겨울전쟁을 막지 못했다.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미주리호 갑판에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마모루 시게미쓰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군부의 팽창을 경계하면서도 제국 국가의 외교를 수행했다. 그는 1932년 상하이에서 폭탄 공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1945년에는 외무대신으로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도쿄재판에서 침략전쟁과 포로 보호 의무와 관련해 금고 7년을 선고받았지만 1950년 가석방되었고, 전후 외무대신과 부총리로 복귀해 일본의 국제사회 재편입을 추진했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런던 아르코스 급습(1927년 5월 12일) 뒤 로젠골츠는 7쪽 항의각서를 내고 군사스파이 활동을 부인했으나, 5월 24일 볼드윈 수상이 의회에서 압수문서를 공개했고 영국은 5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그를 추방했다.
1905년 16세로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카잔 공략과 콜차크전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공군 총책임자를 지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런던에서 대리대사로 일하며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고, 귀국 뒤 좌익 반대파와 결별하고 스탈린 체제에 합류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을 지냈으며, 1937년 해임과 체포 후 1938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 비테프스크·키예프 등지에서 보험대리인으로 지하활동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1922–1924공군 총책임자, 독일 정부·군부와 비밀 군사협상, 46인 선언 서명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5월 12일), 5월 25일 단교와 추방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1937–19386월 14일 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10월 7일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1943년 4월 17일, 라친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외교부는 카틴 사건 조사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요청했다.
에드바르트 라친스키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외교관이자 런던 망명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중 연합국에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알렸고, 1943년 카틴 학살 의혹의 국제적 조사를 요청하는 폴란드 측 외교 행동에 참여했다. 1945년 이후에도 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조선의 민주 opposition movement와 연대를 모색했고, 1979년부터 1986년까지 망명 중인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소콜롭스키가 회의장을 떠난 직후, 머피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3단계 계획에 착수했다고 보고했다.
로버트 대니얼 머피는 전쟁과 점령의 현장에서 협상과 정보 판단을 결합한 미국 외교관이었다. 1948년 독일 주재 미국 정치고문으로서 그는 소련이 서방을 베를린에서 몰아내려는 단계적 압박에 들어갔다고 분석해 워싱턴에 보고했고, 그 판단은 봉쇄와 공수작전을 둘러싼 미국의 인식 형성에 기여했다. 그의 경력은 북아프리카 상륙 준비와 전후 독일 행정, 벨기에·일본 대사직, 국무부 고위직을 거쳤으며, 외교관의 현장 보고가 군사·정치 결정을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 준다.
1950년 1월, 의장석에 앉은 장팅푸를 향해 말리크가 '이것은 회의가 아니라 회의의 패러디'라고 외치고 퇴장했다.
청나라 외교문서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역사가에서 중화민국 외교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컬럼비아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난카이·칭화대에서 중국 근대외교사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5년 학계를 떠나 국민정부에 합류해 주소대사와 상임 유엔대표를 지냈다. 1950년 1월 안보리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할 때 소련 대표 말리크가 중공이 아닌 국민당 대표와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며 퇴장했고, 이 공백은 6월 한국전쟁 유엔군 결의가 거부권 없이 통과되는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1943년 7월 25일 새벽, 그란디 결의안은 19 대 8로 통과되어 무솔리니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렸다.
디노 그란디는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의 지도자이자 외교관으로, 정권의 핵심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외무장관과 런던 대사를 지내며 전쟁 확대에 신중한 외교 노선을 추구했지만 파시스트 국가의 제도와 정책을 집행한 책임도 지녔다. 1943년 7월 시칠리아 침공 뒤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국왕에게 헌정상 군 통수권을 돌려주자는 결의안을 작성하고 표결을 조직해 베니토 무솔리니의 축출을 이끌었다. 이후 망명했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법정에서 궐석 사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