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활동과 국가·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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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행정 인물 328명

샤라프 라시도비치 라시도프

Шараф Рашидович Рашид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1983 ○ 심장마비

24년간 우즈베키스탄을 이끌며 산업화와 문화 부흥을 진두지휘한 작가 출신 지도자

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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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중학교 교사
  • 1937–1941사마르칸트 지역지 《레닌 욜리》 기자·편집자
  • 1941–1943소련군 소위, 모스크바 전투·볼호프 전선 참전, 중상
  • 1944–1947사마르칸트 주당위원회 서기
  • 1947–1949공화국 일간지 《키질 우즈베키스톤》 편집장
  • 1949–1950우즈베키스탄 작가동맹 이사장
  • 1950–1959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
  • 1959–1983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83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후보

티혼 야코블레비치 키셀료프

Тихон Яковлевич Киселёв

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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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표트르 미로노비치 마셰로프

Пётр Миронович Маше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918–1980 ✕ 교통사고

벨라루스 파르티잔 영웅에서 산업화를 이끈 15년의 지도자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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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로소니 중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41–1942로소니 지하 콤소몰 조직 책임자
  • 1942–1943파르티잔 분견대 '쇼르스' 지휘관 (호출부호 '두브냐크')
  • 1943–1944로코솝스키 파르티잔 여단 정치위원, 빌레이카 지하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7–1954벨라루스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55–1959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9–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65–1980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0CPSU 정치국 후보위원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셰르비츠키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Щербицкий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1990 ○ 자연사

17년간 우크라이나를 이끈 브레즈네프 시대의 공화국 건설자, 드네프르 클랜의 핵심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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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화학방호군 장교, 자캅카스 전선 복무, 대위 제대
  • 1946–1952드네프로제르진스크 코크스화학공장·금속공장 당비서 및 당 간부
  • 1952–1954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55–1957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7–196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61–1963, 1965–1972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72–1989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71–1989CPSU 중앙위 정치국 정위원 (1961–1963, 1965–1971 후보위원)

이반 이바노비치 보듈

Иван Иванович Бодюл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몰도바 1918–2013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 20년 가까이 몰도바를 통치한 공화국 제1서기

모스크바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온 드루처에 대해, 보듈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오면 첫 번째 가로등에 목을 매달아주겠다."

몰도바 공산당 제1서기로 20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최장기 집권자 중 하나다.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농업 공화국이었던 몰도바에 기계제조·전자·식품가공 등 신산업을 도입하고 유럽 최대 규모의 과수원과 축산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어 억제, 교회 폐쇄 등 강압적 러시아화를 추진했으며, 작가 이온 드루처에게 '고향에 돌아오면 첫 가로등에 매달겠다'고 위협했다. 1980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임되었고, 퇴임 후인 2003년 몰도바 공화국 훈장 수여는 작가 8명의 훈장 반납을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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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콜호즈 수석 농업기사
  • 1942–1946붉은군대 수의장교 (제127근위포병연대 → 제59근위소총사단 → 제10근위소총군단)
  • 1946–1951몰도바 SSR 각료회의 농업 담당 보좌관·감사관
  • 1951–1956키시뇨프·볼론티롭카·올라네슈티 지역당위 제1서기
  • 1956–1959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후 중앙위 조직당업무부 지도원
  • 1959–1961몰도바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1–1980몰도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0–1985소비에트연방 각료회의 부의장

이반 파블로비치 카자네츠

Иван Павлович Казанец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18–2013 ○ 자연사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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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 1952–1953예나키예베 시당위 제1서기 → 마케예프카 시당위 제1서기
  • 1953–1960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 1963–1965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
  • 1965–1985소련 철강부 장관
  • 1961–1986CPSU 중앙위원 (1956–1961 후보위원)

투르다쿤 우수발리예비치 우수발리예프

Турдакун Усубалиевич Усубали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키르기스스탄 1919–2015 ○ 자연사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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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코치코르 중학교 교사·교무주임
  • 1941–1942코치코르 지구당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42–1943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 1945–1955CPSU 중앙위원회 교관 (모스크바)
  • 1955–1956공화국 일간지 《소베티크 키르기즈스탄》 편집장
  • 1956–1958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8–1961프룬제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9–1961키르기스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61–1985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3–2005키르기스 공화국 조고르쿠 케네시(의회) 의원

후세인 쿨미예 아프라

Xuseen Kulmiye Afrax

소말리아 혁명평의회의 지도부

1991년 정권 붕괴 뒤, 그는 다른 하위예 장교들과 함께 모가디슈에서 체포되지도 추방되지도 않았다.

소말리아의 경찰 간부 출신 정치가로 1969년 쿠데타 이후 바레 정권에 참여했다. 1970년 내무장관이 되었고 1971년부터 최고혁명평의회 부의장 중 한 명을 맡았다. 군·경 출신 지도부가 국가 행정을 장악한 구조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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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이탈리아 식민지 경찰에 입대
  • 1950–1954모가디슈 경찰학교 교관·통역, 로마 장교학교 수료
  • 1960아덴 압둘라 오스만 대통령의 부관
  • 1970내무장관 (1974년까지)
  • 1971최고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6부통령, 혁명사회당 정치국 위원
  • 1987부총리 겸 국가계획장관
  • 1989국민의회 의장 (1991년까지)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

Karol Józef Wojtyła
정부·행정 소속 미확정 폴란드 폴란드인 1920–2005 ○ 자연사

철의 장막 뒤에서 온 세계적 교황

“폴란드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바르샤바에서 성령에게 호소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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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크라쿠프 대교구 사제 서품
  • 1958크라쿠프 보좌주교
  • 1964크라쿠프 대주교
  • 1967추기경
  • 1978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1979첫 폴란드 사목 방문
  • 1980연대 운동의 출범을 지켜봄
  • 2005선종

야드가르 사디코브나 나스리디노바

Ядгар Садыковна Насриддинова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0–2006 ↓ 퇴임 1974

우즈베크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크림 타타르인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우즈베키스탄에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크림 반도 귀환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우즈베크 공화국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브레즈네프 시대 중앙과 공화국 엘리트의 연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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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우즈베크 공화국 콤소몰·당·국가 행정에서 성장
  • 1959–1970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 1970–1974민족소비에트 의장, 중앙의 공화국 대표제에서 높은 지위에 오름
  • 1974우즈베크 지도부 교체와 정치적 압박 속에서 퇴임
  • 이후공식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짐

조지 프랫 슐츠

George Shultz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20–2021 ○ 자연사

레이건 곁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대화를 밀어붙여 냉전 종식을 이끈 국무장관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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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뉴욕시 출생, 뉴저지주 엥글우드에서 성장
  • 1942–1945해병대 장교, 앙가우르 전투 참전
  • 1969–1974노동장관 → OMB 국장 → 재무장관, 브레턴우즈 체제 종료
  • 1974–1982벡텔 사장, 중동 건설 사업 확장
  • 1982–1989국무장관,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INF 조약
  • 1989–2021스탠퍼드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 핵군축 및 탄소세 운동
  • 1993회고록 『격랑과 승리』(Turmoil and Triumph) 출간

테파리 벤티

ተፈሪ በንቲ
정부·행정 에티오피아 국가기관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921–1977 ✕ 군부 숙청으로 피살

데르그의 초기 의장

1975년 7월 그는 '구체제를 거부한 모든 세력'의 '밑으로부터' 세워지는 통일전선을 제안했고, 멩기스투 진영은 이 전략을 반대했다.

1974년 말 에티오피아 데르그 의장이 된 군인이다. 토지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진행된 시기에 국가원수를 맡았으나 군부 내부 권력투쟁을 통제하지 못했다. 1977년 2월 살해됐고 멩기스투가 지도부의 우위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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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에티오피아 육군 입대
  • 1967워싱턴 주재 무관
  • 1974제4사단 준장
  • 1974–1977데르그(PMAC) 의장 겸 국가원수

올드르지흐 체르니크

Oldřich Černík

프라하의 봄을 이끈 광부 출신 기술관료 총리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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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오스트라바 광산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 선반공으로 일함
  • 1945~49KSČ 입당, 오스트라바 고등광산학교 졸업
  • 1956~60KSČ 중앙위원회 서기
  • 1960~63연료·에너지 장관
  • 1963~68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8.4~70.1체코슬로바키아 총리: 행동강령, 프라하의 봄, 모스크바 의정서
  • 1970~71해임, KSČ 제명
  • 1970~89프라하 연구소 경제 부소장

미하이 1세

Mihai I
정부·행정 루마니아 국가기관 루마니아 루마니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 1921–2017 ↓ 퇴위 강요 후 망명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체포해 루마니아를 연합국 편으로 돌리고, 1947년 총구 앞에서 퇴위한 마지막 국왕

1947년 12월 30일 아침, 병력이 둘러싼 왕궁에서 그로자게오르기우데지는 퇴위 문서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구금 중인 학생 1천 명이 총살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미하이는 망명 뒤 증언했다. 그날 오후 의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카롤 왕세자와 그리스의 엘레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 계승을 포기한 탓에 1927년 여섯 살에 섭정 아래 국왕이 되었고 1930년 카롤 2세가 귀국해 왕위를 되찾자 왕세자로 내려왔다. 1940년 9월 안토네스쿠가 카롤 2세를 퇴위시키자 열여덟 살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안토네스쿠의 독재와 추축국 동맹에 있었다.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은 뒤 그는 궁정 쿠데타로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해 루마니아를 대독 전선으로 돌렸고, 이 공으로 소련의 승리훈장을 받은 극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비신스키의 압박으로 그로자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그해 8월부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으로 맞섰으나 1946년 조작 선거와 1947년 마니우 재판을 막지 못했다. 1947년 12월 30일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가 강요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같은 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과 스위스에서 시험 비행사와 증권 중개인으로 살았으며, 1992년 부활절의 첫 귀국 때 부쿠레슈티에 백만 명이 모였다. 1997년 국적을 되찾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죽어 쿠르테아데아르제시의 왕가 묘지에 국장으로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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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0섭정 아래 첫 재위
  • 1930–1940왕세자
  • 1940안토네스쿠의 카롤 2세 퇴위로 재즉위
  • 19448월 23일 궁정 쿠데타, 안토네스쿠 체포·연합국 편 전환
  • 1945소련 승리훈장 수훈, 그로자 정부 임명 강요
  • 1945–1946「국왕 파업」, 법령 서명 거부
  • 194712월 30일 퇴위 강요, 망명
  • 1948국적 박탈
  • 1992첫 귀국 방문
  • 1997국적 회복

아고스티뉴 네투

Agostinho Neto
정치·당 지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앙골라 앙골라 1922–1979 ○ 췌장암 · 만성 간염(간암설도 있음)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 시인,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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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포르투갈 유학, 코임브라·리스본 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하며 반식민주의 학생운동 참여
  • 1956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창립 당시 초대 의장(사무총장은 비리아투 다 크루스)
  • 1960–1962PIDE에 체포되어 리스본 구금, 1962년 탈출 후 콩고-레오폴드빌로 망명
  • 1962–1974MPLA 대표자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전쟁을 지도하고 소련·쿠바·유고슬라비아와 유대를 구축
  • 1975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 사회주의 노선 선언
  • 1975–1979쿠바 군사 개입과 소련 지원으로 내전 방어, 1977년 니투 알베스의 쿠데타 시도 진압
  • 1977MPLA를 MPLA-노동당(MPLA-PT)으로 재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

무함메트나자르 가푸로비치 가푸로프

Мухамедназар Гапурович Гапу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22–1999 ○ 자연사

16년간 브레즈네프 시대 투르크메니스탄을 이끌며 면화·가스 경제를 통합한 공화국 지도자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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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차르조우주 8년제 학교 교사
  • 1941–1943소련군 자동소총 분대장, 북서전선 참전, 중상으로 제대
  • 1943–1944학교 교무주임·교장, 차르조우주
  • 1944–1947차르조우 지역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48–1951차르조우주 콤소몰 제1서기
  • 1951–1955투르크멘 SSR 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2차르조우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63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3–1969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
  • 1969–1985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1971 후보위원)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탄자니아 탄자니아 1922–1999 ○ 자연사

우자마 사상을 창안하고 비동맹 사회주의 탄자니아를 24년간 이끈 건국 대통령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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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에든버러대학교 유학 — 사범·정치학 수학, MA 취득
  • 1954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연합(TANU) 창당
  • 1960–1961탕가니카 수석장관 → 초대 총리
  • 1961.12탕가니카 독립 — 사상 첫 흑인 다수 통치 국가로
  • 1962–1964탕가니카 초대 대통령 — 공화국 출범
  • 1964잔지바르와 통합 — 탄자니아 연합공화국 출범
  • 1967아루샤 선언 — 우자마(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 은행·대기업 국유화
  • 1978–1979우간다-탄자니아 전쟁 — 이디 아민 정권 전복 주도
  • 1985대통령직 자진 사퇴 — 평화적 정권 이양
  • 1985–1990CCM(혁명당) 의장 — 후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전환 비판
  • 1996–1999부룬디 내전 평화 중재 — 유엔 위임

헤게뒤시 언드라시

Hegedüs András
정부·행정 헝가리 국가기관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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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보반끼엣

Võ Văn Kiệt
정부·행정 베트남 국가기관 베트남 베트남 1922–2008 ○ 싱가포르에서 별세

도이머이 개혁의 설계자이자 베트남의 총리

2007년 BBC 베트남어방송 인터뷰에서 "애국에는 백 가지 길이 있다. 베트남의 조국은 한 사람, 한 당,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1975년 이후 남부에서 당의 '중대한 실수'를 인정하며 정치범과의 대화와 민족 화해를 촉구했다.

베트남의 정치인·경제 개혁가. 1922년 메콩델타 빈롱 성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프랑스·대미 항쟁에 참전했다. 1976~1982년 호찌민시 당 책임자, 1982~1991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1991~1997)에 도이머이 개혁을 추진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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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6–195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참전
  • 1976–1982호찌민시 당 책임자
  • 1982–1991부총리
  • 1991–1997총리
  • 1995아세안 가입, 미국과 국교 정상화

노로돔 시아누크 노로돔

នរោត្តម សីហនុ
정부·행정 캄보디아 국가기관 캄보디아 캄보디아 1922–2012 ○ 베이징에서 사망

캄보디아의 국왕이자 민족통일전선 지도자

1982년 6월 크메르루주·손산의 KPNLF와 함께 반베트남 연합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이 되어 유엔의 캄보디아 대표권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국왕·국가원수·총리를 지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지 아래 즉위해 1953년 독립을 이끌었고 1955년 양위한 뒤 정치에 들어갔다. 1970년 축출됐다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아래 가택 연금됐고, 1982~1991년 크메르루주와 연합한 저항 정부를 이끌었으며 1993년 왕으로 복위해 2004년 다시 양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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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55캄보디아 국왕
  • 1955–1960인민사회동맹(상쿰)을 이끌며 총리·국가원수를 지냈다
  • 1960–1970국가원수
  • 1981저항 정당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창당
  • 1982–1987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CGDK) 대통령
  • 1991–1993최고국민평의회 의장
  • 1993–2004캄보디아 국왕

페타르 2세

Petar II Karađorđević

망명 속에서 왕정의 정통성을 지킨 마지막 국왕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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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국왕 즉위, 섭정 아래
  • 1934–1941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 1941.03.27쿠데타 뒤 성년 국왕으로 선포
  • 1941.04–06추축국 침공 뒤 정부와 함께 망명
  • 1941–1945런던 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의 국가원수
  • 1944.09유고슬라비아 군인들에게 티토 합류를 호소
  • 1945왕정 폐지로 폐위
  • 1945–1970미국에서 망명 생활
  • 1970미국 덴버에서 사망

헤이다르 아리르자 오글루 알리예프

Heydər Əlirza oğlu Əliye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23–2003 ○ 자연사

KGB에서 크렘린까지 오른 아제르바이잔의 실용주의자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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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 1967–1969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산하 KGB 의장 (소장)
  • 1969–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6–1982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정위원 (1982)
  • 1982–1987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기계·경공업·운송·문화·교육 담당)
  • 1993–200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제3대 대통령

호세 라몬 알바레스 페르난데스

José Ramón Fernández Álvarez

피그스만(플라야 히론) 상륙 침공을 격퇴한 쿠바 혁명군 지휘관

1961년 4월 17일 피그스만 침공 때 피델 카스트로의 지시로 2506여단과 맞서 싸운 민병대·정규군 부대를 지휘했다. 4월 19일 늦게 플라야 히론으로 돌파하여 침공군을 항복시킨 부대에 속했다.

쿠바의 공산주의자·군사 지도자이며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23년 산티아고데쿠바에서 태어나 1959년 혁명 이후 쿠바 혁명군(FAR)에 복무했고, 각료·부의장·대의원 등 여러 국가 직책을 맡았다. 쿠바 혁명의 가장 오래 산 역사적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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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2012각료회의 부의장

칼 겐리호비치 바이노

Карл Генрихович Вайно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에스토니아 1923–2022 ○ 자연사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1978–1988), 페레스트로이카를 거부하며 러시아화를 밀어붙인 강경파

에스토니아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짙은 러시아어 억양으로 말해 '예스토니안'이라 불렸다.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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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톰스크(오늘날 옴스크) 교통대학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에스토니아 SSR 철도 기술자로 근무
  • 1948–1953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주위원회 서기
  • 1953–1957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서장
  • 1957통신고등당학교 졸업
  • 1957–1960에스토니아 SSR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60–1978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8–1988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8–1990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당통제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