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도대체 어떤 바보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을 만들어냈나? 집이 무너지지도 않는데 왜 다시 지어야 하나? 우리는 잘 살고 있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대한 셰르비츠키의 반응.
드네프로제르진스크·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공업 지구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와 18년간 CPSU 정치국원(1971–1989)을 겸했다. 브레즈네프와 드네프르 인맥을 공유하며 17년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진두지휘했고, 공화국 경제 규모를 4배 이상 키웠다. 흐루쇼프의 분권 실험에 반대하여 일시 좌천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집권 후 복귀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정보 통제와 키예프 메이데이 행진 강행으로 비판받았으며,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된 마지막 구세대 공화국 수반이었다.
모스크바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온 드루처에 대해, 보듈은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오면 첫 번째 가로등에 목을 매달아주겠다."
몰도바 공산당 제1서기로 20년 가까이 재임한, 소련 공화국 지도자 중 최장기 집권자 중 하나다. 브레즈네프의 측근으로서 농업 공화국이었던 몰도바에 기계제조·전자·식품가공 등 신산업을 도입하고 유럽 최대 규모의 과수원과 축산단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어 억제, 교회 폐쇄 등 강압적 러시아화를 추진했으며, 작가 이온 드루처에게 '고향에 돌아오면 첫 가로등에 매달겠다'고 위협했다. 1980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임되었고, 퇴임 후인 2003년 몰도바 공화국 훈장 수여는 작가 8명의 훈장 반납을 촉발했다.
우크라이나 총리에서 소련 철강부 장관으로: 20년간 소련 철강을 지배한 드네프르 출신 기술관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카자네츠 동지. 미국보다 더 많이 제련한다고 자랑하지만, 금속 품질은 어떻습니까? 생산된 톤당 40%만 제품이 되고 나머지는 슬래그와 부스러기로 나갑니다!» — 1972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의 질책.
드네프르 강 도선사 집안 출신의 우크라이나인 기술관료로, 전기기사로 시작해 쿠즈네츠크 제철소와 예나키예베 제철소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53년 흐루쇼프의 발탁으로 35세에 도네츠크 주당위 제1서기가 되었고, 1960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 1963–1965년 우크라이나 SSR 각료회의 의장을 지냈다. 1965년 코시긴 개혁으로 소련 철강부가 재설립되자 초대 장관에 임명되어 20년간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올려놓았다. 브레즈네프 시기 내내 중앙위원을 지냈고, 1985년 고르바초프 집권 직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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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44쿠즈네츠크 제철소 전기기사·기사·변전소 구역장, 시베리아 야금연구소 졸업
1944–1952예나키예베 제철소 압연공장 교대장·당위 부비서·공장장, 1950년 당조직자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는 폴란드의 사제이자 철학자였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되어 가톨릭교회를 이끌었다. 나치 점령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겪은 경험은 인간의 존엄, 종교의 자유, 민족적 기억을 강조하는 그의 목회와 정치적 언어를 형성했다. 1979년 폴란드 방문에서 약 1,100만 명이 그를 만났고, 그의 존재는 정권 아래 흩어져 있던 사회가 자신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도록 도왔다. 그는 연대가 결성될 조건을 만든 여러 요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 운동의 노동자 조직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대신한 사람은 아니었다.
슐츠는 레이건 부부와의 저녁 식사에서 소련 지도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듣고 깨달았다. '이 사람은 공산당 지도자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고, 몹시 하고 싶어 하는구나.'
조지 슐츠는 노동·예산·재무·국무의 4개 부처 장관을 모두 지낸 두 미국인 중 하나로, 레이건 행정부에서 6년 반 동안 국무장관을 맡아 대소 외교의 방향을 다시 썼다. 국방장관 와인버거와 CIA 국장 케이시가 협상을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슐츠는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의 외교적 토대를 놓았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 전체가 폐기되었고, 슐츠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동유럽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냉전의 종식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의 회고록 『격랑과 승리』는 1980년대 외교사의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체포해 루마니아를 연합국 편으로 돌리고, 1947년 총구 앞에서 퇴위한 마지막 국왕
1947년 12월 30일 아침, 병력이 둘러싼 왕궁에서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는 퇴위 문서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구금 중인 학생 1천 명이 총살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미하이는 망명 뒤 증언했다. 그날 오후 의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카롤 왕세자와 그리스의 엘레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 계승을 포기한 탓에 1927년 여섯 살에 섭정 아래 국왕이 되었고 1930년 카롤 2세가 귀국해 왕위를 되찾자 왕세자로 내려왔다. 1940년 9월 안토네스쿠가 카롤 2세를 퇴위시키자 열여덟 살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안토네스쿠의 독재와 추축국 동맹에 있었다.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은 뒤 그는 궁정 쿠데타로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해 루마니아를 대독 전선으로 돌렸고, 이 공으로 소련의 승리훈장을 받은 극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비신스키의 압박으로 그로자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그해 8월부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으로 맞섰으나 1946년 조작 선거와 1947년 마니우 재판을 막지 못했다. 1947년 12월 30일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가 강요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같은 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과 스위스에서 시험 비행사와 증권 중개인으로 살았으며, 1992년 부활절의 첫 귀국 때 부쿠레슈티에 백만 명이 모였다. 1997년 국적을 되찾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죽어 쿠르테아데아르제시의 왕가 묘지에 국장으로 안장되었다.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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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포르투갈 유학, 코임브라·리스본 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하며 반식민주의 학생운동 참여
1956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창립 당시 초대 의장(사무총장은 비리아투 다 크루스)
1960–1962PIDE에 체포되어 리스본 구금, 1962년 탈출 후 콩고-레오폴드빌로 망명
1962–1974MPLA 대표자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전쟁을 지도하고 소련·쿠바·유고슬라비아와 유대를 구축
1975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 사회주의 노선 선언
1975–1979쿠바 군사 개입과 소련 지원으로 내전 방어, 1977년 니투 알베스의 쿠데타 시도 진압
1977MPLA를 MPLA-노동당(MPLA-PT)으로 재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2007년 BBC 베트남어방송 인터뷰에서 "애국에는 백 가지 길이 있다. 베트남의 조국은 한 사람, 한 당,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1975년 이후 남부에서 당의 '중대한 실수'를 인정하며 정치범과의 대화와 민족 화해를 촉구했다.
베트남의 정치인·경제 개혁가. 1922년 메콩델타 빈롱 성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프랑스·대미 항쟁에 참전했다. 1976~1982년 호찌민시 당 책임자, 1982~1991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1991~1997)에 도이머이 개혁을 추진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별세했다.
1982년 6월 크메르루주·손산의 KPNLF와 함께 반베트남 연합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이 되어 유엔의 캄보디아 대표권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국왕·국가원수·총리를 지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지 아래 즉위해 1953년 독립을 이끌었고 1955년 양위한 뒤 정치에 들어갔다. 1970년 축출됐다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아래 가택 연금됐고, 1982~1991년 크메르루주와 연합한 저항 정부를 이끌었으며 1993년 왕으로 복위해 2004년 다시 양위했다.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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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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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톰스크(오늘날 옴스크) 교통대학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에스토니아 SSR 철도 기술자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