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23일 정오, 히르베파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열두 시가 되자 2천에서 5천 명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파레크는 회고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했어요.」
에스토니아 장교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건축가로 일하던 중 반체제 사미즈다트 활동으로 1983년 체포되어 4년간 수용소에 갇혔고, 석방 7개월 만에 MRP-AEG를 공동 창립해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했다. 이 집회가 발트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듬해 에스토니아 최초의 비공산 정당 ERSP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회복 후 첫 내각의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1993년 풀라패 위기로 사임했고,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스탈린주의 희생자 추모비 건립을 주도했다.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2002년 12월 28일 사나에서 이슬라흐당 대회 연설을 마친 직후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예멘사회당 부서기장이었다.
1942년 예멘 이브주 쿠할 마을에서 태어나 잠다르와 사나에서 이슬람 법학을 공부했고, 1960년대 사나의 70일 포위전에 참여했다. 1968년 예멘혁명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같은 해 8월 사나 사건 이후 3년간 수감되었고, 1971년 아덴으로 가 1972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통일 예멘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인권과 정치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야당 연합 결성에 힘썼다.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며,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 헌터칼리지 연설, 뉴욕, 1983년 8월
그레나다의 혁명가이자 인민혁명정부 수상(1979–1983).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신JEWEL운동(NJM)을 이끌며 1979년 부패한 게일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문맹률을 35%에서 5%로, 실업률을 50%에서 14%로 낮추고 무상의료·여성평등임금·출산휴가를 도입했다. 쿠바와 협력해 국제공항을 건설했으며,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라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83년 부수상 버나드 코드의 내부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이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으로 이어졌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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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독립 농민노조의 합법화 투쟁을 민주화 이후의 농민정치로 이어나간 폴란드의 농민·반체제 지도자였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농성을 이끌어 농민 연대의 등록을 관철했고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1990년 부활한 폴란드 농민당의 초대 대표가 되어 그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이듬해 지도부 경쟁에서 물러난 뒤 보수 성향의 소규모 농민 정당을 창당했다.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정치가이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공동 창립자로, 개혁 요구를 대중 정치로 조직한 인물이다. 1988년 4월 13일 생방송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고, 이 운동은 곧 민주주의와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는 독립 이행기의 첫 총리를 지냈지만, 경제적 곤란과 정치적 논란 속에서 권력의 한계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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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타르투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위 취득
1980–1988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기관에서 경제계획 업무
1988–1989마이노르 컨설팅 회사 학술 책임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 창립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동료와 함께 도피했다가 3주 만에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정확한 처형 시점은 사료마다 다르다.
앙골라 태생의 의사이자 혁명가다. 포르투갈공산당에 입당해 지타 세아브라와 함께 공산학생동맹(UEC)을 이끌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당시에는 UEC 대표로 모스크바의 콤소몰 대회에 파견되어 있었다. 1975년 앙골라로 돌아와 니투 알베스·조제 반두넴을 중심으로 한 친소 정통파에 합류했으며, 1977년 5월 27일 사건 뒤 체포돼 비공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망했다. 사망 시점은 사료마다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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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04UEC 대표로 모스크바 콤소몰 대회 참석
1975앙골라 귀환, MPLA 친소 정통파에 합류
1976–1977니투 알베스의 지시로 혁명적 지식인위원회 책임, 대중조직부(DOM) 산하 활동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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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79년 스물여섯 살에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하여 세계 최연소 외무장관이 됐다.
캄보디아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 장교다. 1970년 크메르루주에 가담해 대대장을 지냈고, 1977년 이탈해 베트남 측과 함께 싸웠다. 1979년 정권 붕괴 뒤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의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고, 1985년 챈 시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됐다. 수십 년간 집권했으며 현재 상원 의장 겸 국가수반 대행을 맡고 있다.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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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1924년 제3차 당대회에서 린치깅 엘베그도르지와 함께 솔린 단잔을 부르주아 세력으로 몰아 체포·처형했고, 그 뒤 당 우파를 이끌며 신경제정책을 본뜬 노선을 폈다.
몽골의 혁명가이자 언론인으로, 1921년 제1차 당대회에서 몽골인민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어 서기와 부의장을 지냈고 1923~1928년에는 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의장을 맡았다. 1924년 제3차 당대회에서 좌파의 린치깅 엘베그도르지와 함께 온건파 솔린 단잔을 부르주아로 몰아 체포·처형하는 데 가담했고, 이후 당 우파를 이끌며 신경제정책을 본뜬 노선을 폈다. 1928년 제7차 당대회에서 '우경'으로 제명되어 모스크바 주재 몽골 대사관 무역대표로 밀려났으며 1934년 6월 그곳에서 사망했다. 『아르딘 에르흐』, 『위넨』과 잡지 『몽골 아르딘 남』의 초대 편집인이자 엥겔스의 번역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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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나이슬레l 후레와 히악트에서 전신·철도 통신 노동자
1920가을부터 애국자 운동에 참여
1921제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선출, 임시정부 대외관계부 관료; 3월 중앙위원회 대행 의장
1921–1923중앙위원회 서기; 1922년 1~3월 부의장, 3월 15일~1923년 1월 12일 의장
1921서부 국경 담당 전권 대표로 백위군과 싸우고 서부 국경 정부·인민당 위원회 수립에 참여
1924–1928중앙위원회 상임위원·의장 (1924년 8월 31일~1928년 10월 27일)
1928–1929소련 주재 몽골 대사관 무역대표; 1929~1932년 모스크바 국민경제고등학교 수학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9세부터 일했고, 14세 때 루간스크의 하르트만 기관차 공장에서 금속 세공·선반공으로 일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루간스크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912년 프라하 당 대회 대표로 레닌을 만난 뒤 체포되어 나림으로 유형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연대를 이끌고 봉기에 나섰으며, 이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와 중앙위원(1919–1921), 중앙위 서기(1920–1921)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1927년 제명되어 세미팔라틴스크로 유배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고,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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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5세에 볼셰비키 입당, 루간스크에서 선동 활동
1908–1916반복된 체포와 유형 (볼로그다·나림), 탈출과 재체포
1912프라하 당 대회 대표
1917코스트로마에서 2월 봉기 주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
1919–1921중앙위 서기, 조직국 위원,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2–1924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장,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
1923–1927'46인 선언' 서명, 좌익 반대파 지도부 — 제명
1928–1937세미팔라틴스크 유형, 복당, 도로·자동차운수 중앙관리국장, 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로 처형
1946년 신민당·공산당 합당을 이끈 연안파 지도자이자 8월 종파사건으로 숙청된 공산주의자
1956년 8월 30일 전원회의에서 최창익은 소련파의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했고, 이후 연안파는 투옥·연금되었다.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자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항일군정대학 교관·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을 지냈다. 해방 후 조선신민당 부주석,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 재정상·부수상을 역임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뒤 숙청·수감되었으며 옥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896–1957, 영어 위키백과는 1896–1960, 소련 문서는 1898년생으로 기록한다. 정확한 생몰연도와 사망 경위에는 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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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귀국해 조선노동공제회·고려공산청년동맹에 참여
1928–1935'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수감, 1935년 출옥
1936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1938조선청년전위동맹 조직,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같은 해 말 옌안으로 이동해 항일군정대학 교관
1942화북조선독립동맹 창건, 중앙상무위원 겸 서기부장
1945화북조선독립동맹 부주석
1946.2조선신민당 부주석 (주석 김두봉)
1946.8신민당·조선공산당 합당으로 북조선노동당 결성,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겸 정치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