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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예멜리얀 미하일로비치 야로슬랍스키

Емельян Михайлович Ярославский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78–1943 ○ 위암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린 당의 수석 무신론자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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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트란스바이칼 철도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5–1907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군사전투조직 지도, 제4·5차 당대회 대의원
  • 1907–19175년 카토르가형 후 야쿠티아 유형, 야쿠츠크 향토박물관장 역임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초대 군사위원
  • 1918–1919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
  • 1921RKP(b) 중앙위원회 서기, 조직국 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
  • 1925–1943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중앙평의회 의장, 반종교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아도라츠키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Адоратский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78–1945 ○ 병사

IMEL 소장, 스탈린을 이론가로 공인한 첫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닌은 내 순진함 때문에 나를 '아두라츠키'라고 놀렸다.」 — 가족 회고록

카잔 출신 볼셰비키 철학자. 1929년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이론가'로 찬양한 첫 인물로, 1931년 IMEL 소장이 되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을 편찬, 공산권의 정전 독법을 수십 년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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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대학 수학과 입학 후 법학과 전환, 1900년 혁명운동 참여, 1903년 졸업 후 해외 망명
  • 1904–1908제네바에서 RSDLP 가입(1904), 귀국 후 체포·아스트라한 유형; 1905년 카잔에서 불법 볼셰비키 신문 『라보치』 발간
  • 1908–1918파리·런던·베를린 망명; 뮌헨에서 1차대전 민간인 포로로 억류, 레닌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 1920–1928중앙기록관리국 부국장, 모스크바대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1922) 등 첫 저작 출간
  • 1928–1931레닌 연구소 부소장; 1929년 『이즈베스티야』에 「이론가로서의 스탈린」 발표, 부하린 실각 후 『레닌 전집』 편집 인수
  • 1931–1939IMEL 소장;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러시아어판 15권·독일어판 8권 편집, 서한집 발간 준비
  • 1936–193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겸임; 마르크스-엥겔스 아카이브 매입 위원회 위원장
  • 1939–1945건강 악화로 소장직 사임, IMEL 책임편집자; 대조국전쟁 중 알마아타로 대피, 194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루돌프 발덴

Karl Rudolf Walden
산업·생산 운영 소속 미확정 핀란드 핀란드인 1878–1946 ○ 자연사

산업과 전쟁을 잇댄 군사 조직가

만네르헤임은 그를 산업가의 경험과 군대 조직 능력을 함께 지닌 동료로 기억했다.

루돌프 발덴은 핀란드의 제지산업을 키운 기업가이자 군사·국가 조직가였다. 1918년 내전에서 백군의 후방과 보급을 정비한 경험은 만네르헤임과의 긴 협력으로 이어졌고, 겨울전쟁에는 본부 대표로 내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장관이 되어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핀란드 측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영토를 잃고 독립을 지켜야 했던 국가의 전환을 맡았다. 노동운동에 보수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겨울전쟁의 공동방위 속에서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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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하미나 사관학교 졸업, 핀란드 근위대 소위
  • 1918백군 후방지구·본부 후방 참모 책임자
  • 1918–1919핀란드 전쟁장관
  • 1920타르투 평화조약 핀란드 대표
  • 1939–1940겨울전쟁 전시내각 본부 대표
  • 1940–1944핀란드 국방장관, 모스크바 강화조약 서명자
  • 1942보병대장 진급
  • 1944모스크바 휴전협정 핀란드 대표단장
  • 1946사망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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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

솔로몬 아브라모비치 로조프스키

Соломон Абрамович Лозовский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78–1952 ✕ 처형

프로핀테른을 이끈 볼셰비키,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와 함께 총살되다

모든 것을 말했다, 어떤 관대함도 바라지 않는다. 완전한 복권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나 언젠가 내 무죄가 밝혀지거든 사후에 당적을 회복시키고 신문에 복권 소식을 실어 달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의 유대인 멜라메드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05년 혁명 참가와 유형을 거쳐 파리로 망명, 프랑스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했다. 1921년부터 1937년까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사무총장으로 국제 노동운동의 좌파 축을 조직했다. 1939년 외무부인민위원, 전시에는 소빈포름뷰로를 이끌며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감독했다. 1949년 체포되어 1952년 JAC 재판에서 법정 자백을 철회하고 기소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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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8RSDLP 입당, 카잔에서 1905년 혁명 참가, 체포·유형 후 해외 탈출
  • 1909–1917파리 망명, 프랑스 사회당과 노동조합 운동에서 활동
  • 1918–1921전러시아 섬유노조·철도노조·모스크바 주 노조평의회 책임자
  • 1921–1937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 사무총장
  • 1937–1939국립문학출판사(고슬리티즈다트) 소장
  • 1939–1946소련 외무부인민위원(부장관)
  • 1941–1948소빈포름뷰로 부책임자(1941–1945), 책임자(1945–1948)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 재판, 총살

윌리엄 N. 해스켈

William N. Haskell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78–1952 ○ 자연사

기근 한복판의 국제 구호 지휘관

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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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 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05육군참모대학 졸업
  • 1906–1907필리핀에서 미군 작전 복무
  • 1916–1917뉴욕 주방위군 제69보병연대 임시 대령
  • 1918–1919미 원정군 포병 복무, 임시 대령 및 공로훈장 수훈
  • 1919–1921ARA 아르메니아 사절단장
  • 1921–1923ARA 소련 러시아 지부장, 러시아 기근 구호 지휘
  • 1926–1940뉴욕 주방위군 사령관, 소장
  • 1944–1945미국 민방위국장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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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정부·행정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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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예카테리노슬라프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담,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0–1903두 차례 체포·투옥, 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노동자 의원, 32회 연설
  • 1914–1917반전 활동으로 체포,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
  • 1917.11–1919.03내무인민위원: 체카 창설 참여, 적색 테러 지령 서명
  • 1919–1938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
  • 1922–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우크라이나 대표)
  • 1926–1939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40모든 직위에서 해임, 1년간 실직
  • 1940–1958모스크바 혁명박물관 부관장

로베르 투숑

Robert Toucho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78–1960 ○ 자연사

산악전 경험과 구식 지휘체계의 긴장을 드러낸 프랑스 장군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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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1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알프스 엽병 대대 지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다수 표창
  • 1928–1930제159보병연대 지휘관, 브리앙송
  • 1932–1935생마상 보병·전차 응용학교 교장
  • 1938–1939리옹 군정장관 및 제14군관구 사령관
  • 1939.11–1940.02제23군단 사령관
  • 1940.02–07제6군 사령관, 엔강 방어와 몽코르네 반격 시기
  • 1941–1942비시 국가평의회 위원 및 리옹 국가재판소 판사

안젤리카 이사코브나 발라바노바

Анжелика Исааковна Балабанова
정치·당 지도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78–1965 ○ 자연사

무솔리니를 가르치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코민테른의 첫 서기

「그보다 더 비참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 로잔에서 처음 만난 무솔리니를 두고

러시아 태생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코민테른 초대 서기로 무솔리니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쳤고, 그가 파시즘으로 전향하자 배신자라 규탄했다. 1922년 볼셰비즘과 결별하고 이탈리아 최대주의 분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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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를 떠나 브뤼셀 신대학에서 철학·문학 박사 학위 취득
  • 1900이탈리아 사회당(PSI) 입당, 이주노동자 조직화
  • 1912–14PSI 중앙위원, 《아반티!》 편집자로 무솔리니와 협력
  • 1915–16치머발트·킨탈 회의 참석, 반전 국제사회주의 운동
  • 1917러시아로 돌아가 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코민테른 초대 서기, 제1·2차 대회 준비
  • 1922–1930볼셰비즘과 결별, 이탈리아로 돌아가 PSI 최대주의 분파 주도
  • 1930–1945PSIm(최대주의 사회당) 지도, 망명 중 반파시스트 활동

폴 레노

Paul Reynaud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878–1966 ○ 자연사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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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바실리 비탈리예비치 슐긴

Василий Витальевич Шульгин
정치·당 지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무국적) 러시아 1878–1976 ○ 자연사

차르의 퇴위를 직접 받아내고 백군 이데올로그가 된 두마의 군주제 보수주의자

프스코프 역의 차르 전용 열차에서, 나흘째 면도도 씻지도 않은 슐긴에게 황제의 측근이 말했다: '이 피자크 차림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오.'

바실리 슐긴은 러시아 제국 말기 두마(II·III·IV대)의 핵심 보수정치인이자 《키예블랴닌》 편집자로, 강력한 러시아 민족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창했다. 1917년 3월 알렉산드르 구치코프와 함께 프스코프로 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직접 받아냈으나, 혁명의 파국을 막지는 못했다. 남북전쟁기 백군의 이데올로그로 활동하고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으며, 1944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12년간 수감되었다. 1956년 사면 후 소련에 남아 회고록을 집필하고 1965년 다큐멘터리 《역사의 심판》에 출연하여, 패배했으나 굴복하지 않은 구체제의 산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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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II·III·IV대 두마 의원 (볼린현)
  • 1913–1917《키예블랴닌》 편집자
  • 1915진보블록 공동창설, '진보적 민족주의자' 그룹 지도
  • 1917.3구치코프와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2세 퇴위 접수
  • 1918–1920백군 운동 선전가·이데올로그, 《로시야》·《벨리카야 로시야》 편집
  • 1920–1944유고슬라비아 망명, 회고록 《날들》·《삼도시》 집필
  • 1947–1956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25년형 수감 (12년 복역)
  • 1956–1976사면 후 블라디미르 거주, 《레닌의 실험》 집필, 영화 《역사의 심판》 출연

알렉산드르 일리치 두토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Дутов

오렌부르크 카자크를 이끌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투르키스탄 사이를 차단한 백군 아타만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고 있다.

오렌부르크 카자크 아타만이자 백군 중장. 1917년 11월 소비에트 권력을 불인정한 최초의 군사 지도자로서 오렌부르크-타슈켄트 철도를 차단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20개월간 갈라놓았다. 콜차크 휘하에서 오렌부르크 독립군을 지휘했고, 패배 후 '기아 행군'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1921년 체카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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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니콜라이 기병학교 졸업,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배속
  • 1908총참모부 아카데미 졸업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1오렌부르크 카자크 연대 지휘
  • 1917.09오렌부르크 카자크군 아타만에 선출
  • 1917.11볼셰비키 권력 불인정, 무장봉기 주도
  • 1918–1919콜차크 휘하 오렌부르크 독립군 사령관
  • 1919–1920악토베 패배 후 '기아 행군', 중국 망명

시몬 바실리요비치 페틀류라

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유대인 학살의 책임 논쟁에 휩싸인 독립운동가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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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 1917.5–1917.12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 우크라이나 군 편성 주도
  • 1918.1–1918.3하이다마키 코쉬 지휘관, 키예프 아르세날 봉기 진압
  • 1918.11–1919.2우크라이나 집정내각(디렉토리야) 군사총책
  • 1919.2–1920.12집정내각 수반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총사령관
  • 1920.4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 체결, 대볼셰비키 동맹
  • 1924–1926파리 망명정부에서 주간지 『트리주브(Тризуб)』 발행

레옹 주오

Léon Jouhaux

31년간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한 생디칼리스트, 노벨 평화상 수상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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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 1940–1945비시 정권의 CGT 해산 뒤 가택연금, 1943년 독일 이송·억류
  • 1947–1948공산당 주도 CGT와 재분열, 「노동자의 힘」(FO) 창립 의장
  • 1947–1954프랑스 경제이사회 의장, 1951년 노벨 평화상 수상
  • 1954.04파리에서 사망

세묜 아로노비치 클리반스키

Семён Аронович Кливанский
사회운동·조직 유대인 노동자 총동맹(분트) 러시아 제국 → 소련 유대계 러시아인 1879 – 1944 이후 → 행적 미상

병사들 속에서 명령 제1호의 초안을 쓴 멘셰비키 분트 출신 지식인

1917년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그는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다.

1890년대 분트에 입당해 1905년 리가 총파업을 지휘하고 1907년 런던 당대회에 분트 대표로 참석한 유대계 사회민주주의자다. 1917년 망명에서 귀국해 멘셰비키 '방위주의자'로 활동했고, 3월 1일 병사분과 회의에서 가명 '막심'으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정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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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분트(유대인 노동자 총동맹)에 가입
  • 1899분트 제3차 대회 대의원
  • 1905리가 총파업 지휘
  • 1907RSDRP 제5차 런던 대회 분트 대표
  • 1917.03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분과 회의에서 명령 제1호 핵심 조항 작성
  • 1917멘셰비키 '방위주의자' 신문 『덴』(День) 편집 참여
  • 1917.11제헌의회 의원 선출
  • 1918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
  • 1923OGPU 체포, 사건 종결 후 석방

아파나시 니콜라예비치 마튜셴코

Афанасий Николаевич Матюшенко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제정 러시아 신민). 사료에 따라 우크라이나인으로도 본다 1879–1907 ✕ 교수형

포툠킨 반란을 이끌고 1907년 세바스토폴에서 처형된 흑해함대 병참장

라코프스키는 1907년 회고록에서 1905년 콘스탄차에 정박한 포툠킨에 올랐을 때 마튜셴코가 자신을 맞이한 말을 전한다. 「우리는 죽을 각오가 된 300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입니다.」 직접 인용이 아니라 라코프스키가 전한 회고다.

1879년 5월 2일 하르코프현 데르가치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1년 기근 뒤 학교를 그만두고 하르코프의 철도 급유공, 오데사 항만 노동자, 증기선 화부로 일했으며 로스토프나도누의 마르크스주의 학습회에 들어갔다. 1900년 11월 흑해함대에 징집되어 크론시타트 기뢰기관학교를 마치고 1902년 3월 건조 중이던 전함 포툠킨에 배속되었다. 1904년 11월 세바스토폴 라자레프 막사 봉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사면된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왔으나 당적은 갖지 않았다. 1905년 6월 14일(구력, 신력 6월 27일) 함상위원회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고, 망명 끝에 1907년 러시아로 돌아와 체포되어 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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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1징집, 흑해함대 복무
  • 1902.03전함 포툠킨 기뢰 병참장
  • 1905.06.14포툠킨 반란 주도, 함상위원회 의장 (구력 6월 14일 = 신력 6월 27일)
  • 1905.06–1907.06루마니아·스위스·미국·프랑스 망명
  • 1907.07러시아 귀국, 니콜라예프에서 체포, 세바스토폴 군사법정에서 사형 선고
  • 1907.10.20세바스토폴에서 교수형 집행 (구력 10월 20일 = 신력 11월 2일)

보리스 사빈코프

Борис Савинков
정치·당 지도 사회혁명당 소련 러시아 1879–1925 ✕ 처형/의문사

테러리스트에서 반혁명가로: 혁명의 검은 기사

1924년 재판정에서: '나는 플레베와 세르게이 대공 암살의 사빈코프다. 평생 인민을 위해 일했으나, 이제 노동자·농민 정권에 총을 겨누었다고 기소되었다.'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을 지휘하며 제정 고위관료 암살을 주도한 혁명가·작가. 『창백한 말』로 테러의 심리를 소설화했다. 10월 혁명 후 반볼셰비키 투쟁을 이끌었고, OGPU에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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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SR 전투조직에 합류
  • 1904플레베 내무장관 암살 기획
  • 1905세르게이 대공 암살 지휘
  • 1909『창백한 말』 출간 — 테러리즘의 심리적 해부
  • 1917.4러시아 귀환, 제7군 정치위원 임명
  • 1917.7임시정부 전쟁차관 — 케렌스키·코르닐로프 중개
  • 1917.8코르닐로프 사건으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 SR당 제명
  • 1918조국과 자유수호동맹(SZRiS) 창설,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20–1921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측에 서서 반소 군사활동
  • 1924OGPU의 트러스트 작전에 속아 소련 귀환, 체포
  • 1925루뱐카 감옥에서 사망 (공식: 투신자살, 의혹: OGPU 살해)

예브게니야 보그다노브나 보시

Евгения Богдановна Бош

첫 여성 소비에트 정부 수반, 혁명과 병마 사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로 진격하자 동료들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보시는 싸우지 않고 도시를 넘길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그녀는 말 그대로 강제로 대피시켜야 했다.

독일계 볼셰비키로,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를 맡아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었다. 망명 시절 레닌의 민족문제 노선에 맞섰고, 좌익 반대파 46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투병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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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가입, 볼셰비키 분파 활동
  • 1907–1911키예프에서 지하혁명운동, 키예프 위원회 서기
  • 1912–1914체포, 시베리아 유형, 탈출·망명
  • 1914–1917스위스 망명, '보지 그룹'으로 레닌과 민족문제 논쟁
  • 1917.04–07남서지역 당위원회 의장, 제6차 당 대회 대표
  • 1917.12–1918.03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 겸 내무인민비서
  • 1918–1919펜자 당위원회 의장, 카스피-캅카스 전선 정치위원
  • 1923–1924좌익 반대파 합류, 46인 선언 서명

글레프 이바노비치 보키

Глеб Иванович Бокий

소련 신호정보의 아버지, 체카 스페츠오트델 창설자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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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지하조직 활동
  • 1904–1909RSDLP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17.04–1918.03RSDLP(b)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서기
  • 1918.03–08북부지역·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8.08–11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19.01–09동부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19.09–1920.08투르케스탄 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21–1937체카·GPU·OGPU·GUGB NKVD 스페츠오트델(제9부) 국장
  • 1923–1934OGPU 콜레기야 위원
  • 1935국가보안 3등급 정치위원

야코프 스타니슬라보비치 가네츠키

Яко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Ганецкий

크라쿠프에서 스톡홀름까지 레닌의 돈줄을 책임진 폴란드 혁명가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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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 1923–1935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최고경제회의 상임위원, GO-MEZ 국장
  • 1935–1937모스크바 혁명박물관 관장
  • 1937NKVD 체포, 15분 재판 후 총살형, 1954년 사후 복권

이오시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운쉴리흐트

Иосиф Станиславович Уншлихт

체카 부의장에서 민간항공까지: 혁명의 전천후 조직가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부 법정에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번복하며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으나,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 미아바(당시 러시아 제국 플로츠크 주)의 유대인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고등기술과정에서 전기기사 자격을 얻었고, 190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에 입당했다. 1902~1913년 여러 차례 체포되어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겪었다는 점은 사료가 일치하나 체포 횟수는 6차례와 7차례 기록이 갈린다. 1917년 이르쿠츠크 소비에트 위원이자 볼셰비키로 활동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부 위원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으며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부터 체카·GPU 부의장을 지내고 1925~1930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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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DKPiL 입당, 이후 RSDLP 볼셰비키 분파 합류
  • 1900–1917여섯 차례 체포,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7–1918내무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프스코프 전선
  • 1919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군사인민위원
  • 1920서부전선·제16군 혁명군사평의회,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 1921–1923체카·GPU 부의장, 능동정찰 특별국, 지식인 추방
  • 1925–1930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부인민위원
  • 1927–1930오소아비아힘 의장
  • 1930–1933고스플란 부의장 (군수공업)
  • 1933–1935민간항공총국장
  • 1935중앙집행위원회 연방회의 서기 직무대행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1922년까지 러시아, 1922~1932년 소련, 1932년부터 무국적 러시아 제국(헤르손 주 야노프카, 현 우크라이나) 1879–1940 ✕ 암살 · 멕시코

적군(赤軍)을 만든 웅변가, 얼음도끼에 스러지다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에 항의해 퇴장하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선언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879년 11월 7일(구력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주 야노프카의 유대인 농업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2월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를 조인한 뒤 1918~1925년 군사·해군 인민위원으로 적군을 건설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를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밀려 1927년 출당, 1928년 알마아타 유형, 1929년 국외 추방, 1932년 시민권 박탈을 겪었다. 망명지에서 《배반당한 혁명》(1936)으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NKVD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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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 1906《결과와 전망》 출간 — 영구혁명론의 초기 정식화
  • 1907–14망명: 빈·파리에서 언론 활동, 《프라우다》 발행
  • 1914–171차대전 반대, 파리·뉴욕 망명, 《나셰 슬로보》·《노비 미르》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볼셰비키·멘셰비키 통합파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9–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군사혁명위, 봉기 설계
  • 1918–25전쟁인민위원, 적군 창설, 내전 승리
  • 1923–27좌익반대파, 패배, 출당
  • 1929–40국외 추방, 제4인터내셔널(1938), 멕시코에서 암살
  • 1930자서전 《나의 생애》 출간
  • 1930–1932전3권 《러시아 혁명사》 출간
  • 1936《배반당한 혁명》 출간

천두슈

陈独秀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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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