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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페테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치카

Пётр Иванович Стучка
학술·연구 소련 라트비아 1865–1932 ○ 자연사

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1865년 7월 14일(26일) 리가현 콕네세 볼로스트에서 태어나 1932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붉은광장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과 신문 『디에나스 라파』를 이끌었고, 1897년 체포되어 7개월 구금 후 뱟카현으로 5년 유형되었다.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했으며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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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학술·연구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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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안드레이 예브게니예비치 스네사레프

Андрей Евгеньевич Снесар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65–1937 ○ 수용 후유증

차르 장군 출신 붉은 군대 이론가,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하다

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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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휴 쿠퍼

Hugh Lincoln Cooper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65–1937 ○ 자연사

세계 최대 댐 기술을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 옮긴 미국인 공병 대령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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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토론토 발전소(나이아가라 호스슈 급류) 완공
  • 1913미시시피강 키오콕 댐 및 발전소 완공
  • 1914아스완 댐 전력화 사업 컨설턴트(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
  • 1917–1918미 육군 공병대 감독 공병 장교, 대령
  • 1919레이크 줌브로 수력발전소(미네소타) 완공
  • 1924윌슨 댐(앨라배마, 후일 TVA 편입) 완공
  • 1927–1932드네프로스트로이(드네프로게스) 수석 컨설턴트, 소련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외국인 최초)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준콥스키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Джунковский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5–1938 ✕ 처형

오흐라나를 개혁하고 라스푸틴을 고발한 마지막 제국 헌병대 사령관

1915년, 니콜라이 2세 앞에서 라스푸틴의 주벽과 황실 모독 발언을 낱낱이 보고했다. 황제의 유일한 반응은 "경질"이었다.

제국 근위대 장교에서 모스크바 주지사로, 다시 제국 정치경찰의 수장으로 승진한 실무형 귀족 관료. 1913년 헌병대 사령관에 취임하자 지방 오흐라나 지부를 대폭 폐지하고 군대·학교 내 비밀정보원 제도를 금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915년 라스푸틴의 추문을 황제에게 직보했다가 해임되었고, 혁명 후에는 오게페우(OGPU)의 비밀 고문으로 「트레스트」 작전을 자문했다. 그의 방대한 회고록은 제정 말기 정치사와 경찰 제도의 1차 사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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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05세르게이 대공 전속 부관 (모스크바 총독 보좌)
  • 1905.8–1905.11모스크바 부주지사
  • 1905–1913모스크바 주지사, 소장 진급, 민생·문화 사업 주도
  • 1913–1915내무차관 겸 헌병대 사령관, 오흐라나 개혁 단행
  • 1915.8라스푸틴 보고 후 전격 해임
  • 1915–1917서부전선: 제15시베리아사단장, 제3시베리아군단장, 중장
  • 1918–1921체포·수감, 혁명재판 5년형, 1921년 석방
  • 1920s오게페우(OGPU) 비밀 고문, 「트레스트」 작전 자문

뤼디거 폰 데어 골츠

Rüdiger von der Goltz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5–1946 ○ 사망

핀란드와 발트에서 독일의 동방 영향력을 지키려 한 자유군단 사령관

백군 병참장군 하네스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두고 "핀란드의 사실상의 섭정"이라 불렀다.

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도운 뒤 1919년 라트비아에서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해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다. 체시스 패배 뒤 소환되었고 바이마르 시기 극우 퇴역군인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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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대장성(대참모부) 배속
  • 1914제76보병연대 지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
  • 1918발트해 사단장, 핀란드 백군 지원 후 '주핀란드 독일군 장군'
  • 1919제6예비군단장, 리가 탈환 후 체시스(벤덴)에서 패배하고 소환
  • 1920카프 쿠데타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
  • 1924–1933독일 조국단체연합(VVVD) 의장

루치안 젤리고프스키

Lucjan Żeligowski

「항명」을 가장해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운 폴란드 장군

「1920년 10월 9일, 빌뉴스는 폴란드 장군 젤리고프스키가 아니라 리투아니아인 젤리고프스키가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군 출신 폴란드 장군으로 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해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이 사건은 1938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교를 막았다. 1947년 런던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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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러시아 제국군 보병 장교 임관
  • 1917–1918러시아 내 폴란드군 조직, 제4폴란드소총병사단장
  • 1919귀국 후 폴란드군 제10보병사단장
  • 1920리투아니아-벨라루스 전선 사령관, 10월 「항명」으로 빌뉴스 점령
  • 1920–1921중부 리투아니아 수장
  • 1925군사부 장관
  • 1935–1939폴란드 하원 의원
  • 1940–1947런던 망명정부 국민평의회 위원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Ульянов

레닌의 형, 벌레를 연구하던 금메달 동물학도에서 차르 암살을 기도한 혁명가

어머니의 사면 청원 권유에: "결투를 생각해보세요, 어머니. 한쪽은 이미 총을 쐈습니다. 아직 쏘지 않은 상대에게 총을 쓰지 말라고 부탁할 수는 없습니다."

레닌의 친형.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촉망받는 동물학도였으나, 1886년 돌연 혁명에 투신하여 '인민의 의지당'의 '테러 분파'를 조직하고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의 주모자가 되었다. 1887년 3월 1일('제2의 3월 1일') 암살 미수로 체포되어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죽음은 17세 동생 블라디미르(훗날 레닌)를 혁명의 길로 이끈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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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심비르스크 고전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3–1886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환형동물 연구로 금메달 수상
  • 1886인민의 의지당 가입, '테러 분파' 조직: 이념가이자 폭탄 제조자
  • 1887.02테러 분파 강령 작성, 알렉산드르 3세 암살용 폭탄 준비
  • 1887.03–053월 1일 체포, 4월 15–19일 재판, 5월 8일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6–1918 ✕ 처형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관료 경력 없이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도 혁명의 위협을 부정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에 무능했으며, 각료와 총리의 거듭된 사임 요구를 무시했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체포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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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4–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9–1917.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쑨원

孙中山
정치·당 지도 중국국민당 중국 중국 1866–1925 ○ 간암

중화민국의 「국부」, 삼민주의와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혁명가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임종에서 직접 구술한 유언에서도 소련과의 우호를 거듭 밝혔다.

광둥 출신으로 하와이와 홍콩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흥중회, 1905년 도쿄에서 동맹회를 조직해 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곧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제창했으며 1923년 소련의 요페와 공동선언을 내고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받아들여 제1차 국공합작을 열었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그의 유산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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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2중국동맹회 총리
  • 1912.01–03중화민국 임시대총통
  • 1919–1925중국국민당 총리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소비에트 폴란드인 1866–1925 ○ 병사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과 러시아 혁명을 모두 거친 국제주의자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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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폴란드 노동자동맹 공동 창립
  • 1893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 공동 창립
  • 1896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 1906–1907SDKPiL 대표로 RSDLP 런던 당대회 참석, 중앙위 후보위원
  • 1914–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독일에서 반전 운동으로 투옥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TKRP) 위원장
  • 1922–1925MOPR 중앙위 초대 의장, KUNMZ 초대 총장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

Михайло Грушевський
학술·연구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66–1934 ○ 사망

우크라이나를 독자적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이자 중앙라다 의장

1917년 3월 중앙라다는 모스크바에서 유배 중이던 그를 부재중 의장으로 선출했고, 그의 귀환이 민주 세력 통합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다.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로 우크라이나를 독자적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로 1917~1918년 중앙라다 의장을 맡았다. 1924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감시 속에서 193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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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키이우대학교 졸업, 학위논문 금메달
  • 1894리비우대학교 역사학 교수
  • 1897셰우첸코 학술회 회장(1897~1913)
  • 1917중앙라다 의장(1917~1918), 부재중 선출
  • 1919빈에서 우크라이나 사회학연구소 설립
  • 1924소비에트 우크라이나 귀환, 전우크라이나과학원 회원
  • 192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31반혁명 혐의로 체포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발크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Балк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페트로그라드 시장, 2월 혁명의 물결 앞에 선 경찰 관료

2월 24일, 발크는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의 이동과 집결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이양했다.

알렉산드르 발크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이자 경찰 관료로, 16년간 바르샤바 경찰에서 근무하며 도시 치안을 책임졌다. 1916년 11월 페트로그라드 시장(градоначальник)에 임명되어 식량 공급과 교통 문제에 적극 대처했으나, 1917년 2월 혁명 발발 나흘 만에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고 보고하고 군에 전권을 넘긴 뒤 체포되었다. 내전기 백군에 가담했고, 망명길에 올라 브라질의 한 수도원 양로원에서 91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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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제16라도가 보병연대 배속
  • 1887근위 볼린스키 연대로 전속
  • 1903–1915바르샤바 부경무총감 (1906 정식 임명, 1912 소장 진급), 독일군 점령 후 모스크바 주재
  • 1916.11–1917.02페트로그라드 시장 (градоначальник)
  • 1917.02–062월 혁명 중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임시정부에 의해 석방
  • 1918–1920백군 의용군 및 남러시아군 참전, 크림에서 철수
  • 1920–1945유고슬라비아 망명, 볼린스키 연대 퇴역병회 및 러시아 장교협회 베오그라드 지부장
  • 1945–1957브라질 이주, 상파울루 근교 오자스쿠의 수도원 양로원에서 사망

표트르 페트로비치 시미트

Пётр Петрович Шмидт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러시아 러시아 1867–1906 ✕ 처형

흑해함대에 적기를 올리고 차르에게 헌법을 요구한 혁명적 해군 장교

시미트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전보: 「…각하께 제헌의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며, 더 이상 각하의 대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함대 사령관 P. 시미트.」

러시아 제국 해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05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세바스토폴 해군 봉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순양함 오차코프에 적기를 올리고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을 선언했으며, 니콜라이 2세에게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봉기는 90분 만에 진압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베레잔 섬에서 총살당했지만, 그 이름은 소비에트 전역의 거리·함선·기념비와 파스테르나크의 시를 통해 '시미트 중위'로 불멸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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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해군사관학교 졸업, 미치만 임관
  • 1888–92사임, 파리에서 기구 비행 훈련 등 민간 생활
  • 1892해군 재입대
  • 1895중위 진급
  • 1904러일전쟁으로 현역 재소집
  • 1905.10세바스토폴 혁명 연설로 체포, 군중 압력으로 석방
  • 1905.11순양함 오차코프 봉기 지휘, 스스로 흑해함대 사령관 선언
  • 1906.3.19베레잔 섬에서 총살형

레오 요기헤스

Leo Jogiches

혁명의 지하 조직가. 언제나 뒤에서, 마지막엔 맨 앞에서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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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빌뉴스 최초의 지하 사회주의 연구 서클 창립
  • 1890징집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 룩셈부르크와 만남
  • 1892사회민주주의 도서관 출판사 설립
  • 1893룩셈부르크와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 훗날 SDKPiL) 공동 창립
  • 1905–1906바르샤바에서 SDKPiL 중앙위 지도 — 체포, 8년 중노동형, 탈옥
  • 1907RSDLP 런던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 선출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지하 조직 총괄 — 신문 《스파르타쿠스》 발행 지휘
  • 1919.1–1919.3KPD 지도부 장악,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조사 주도

블라디미르 제노노비치 마이-마옙스키

Владимир Зенонович Май-Маевский
군사·지휘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7–1920 ✕ 자살

의용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으나, 무리한 전선과 알코올 의존으로 무너진 백군 장군

1919년 여름, 영국 사절단은 '하리코프 장군'에게 수여하라는 훈장을 들고 의용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하리코프는 도시의 이름일 뿐이었고, 세인트마이클·세인트조지 훈장은 하리코프 주둔 사령관인 마이-마옙스키에게 주어졌다.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제정 러시아 중장으로, 1918년 의용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뒤 빠르게 사단장으로 올랐고 1919년 5월 의용군 사령관이 되었다. 모스크바 공세에서 하리코프·쿠르스크·오룔을 연이어 점령하며 백군 중 가장 깊숙이 볼셰비키 수도 방면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늘어진 전선과 돈군과의 협조 실패, 후방의 마흐노 봉기로 공세는 붕괴했고, 악화된 알코올 의존 탓에 1919년 11월 데니킨브란겔로 교체했다. 1920년 11월 크림 철수 중 세바스토폴에서 사망했으며, 권총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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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96제1사관학교·니콜라옙스크 공병학교 졸업,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대령 진급
  • 1914–17제1차 세계대전에서 제1근위군단 지휘, 중장 진급
  • 1918의용군 사병 입대, 드로즈돕스키 사후 제3소총사단장 취임
  • 1919.5의용군 사령관 임명, 하리코프 점령 후 지역 총사령관 겸임
  • 1919.6–10모스크바 공세 주도, 쿠르스크·오룔 점령
  • 1919.11공세 붕괴로 해임, 브란겔이 승계
  • 1920크림에서 후위부대 지휘, 세바스토폴 철수 중 사망

알렉산드르 리보비치 파르부스

Александр Львович Парвус
학술·연구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7–1924 ○ 심장마비

영구혁명론을 공동 창안하고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한 '혁명의 상인'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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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바젤대 박사학위, 독일 사민당 입당
  • 1894–1897『디 노이에 차이트』 필진, '파르부스' 필명 채택
  • 1897–1898『젝지셰 아르바이터차이퉁』 편집장
  • 1900레닌·마르토프와 『이스크라』 창간 지원
  • 1904–1905트로츠키와 영구혁명론 공동 정식화
  • 1905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전략가, 「재무선언」 기초
  • 1915독일 외무부에 러시아 혁명 계획 제출, 코펜하겐 작전망 구축
  • 1917레닌의 '봉인열차' 귀환 주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1867년 12월 5일 주우프 manor(오늘날 리투아니아 잘라바스, 당시 러시아 제국 빌나 현)에서 슈лях타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문의 민족 성격은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으로 갈려 서술된다.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일으키고 마그데부르크에 갇혔으며, 1918년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어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를 꺾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이후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통치하며 브레스트 재판과 베레자 카르투스카로 반대파를 가두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1935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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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2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 연루로 시베리아 유형
  • 1892–1908폴란드 사회당(PPS) 지도자, 기관지 『로보트니크』 발행인
  • 1908–1914전투단과 소총병 연맹 조직, 갈리치아에서 군사 간부 양성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장(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
  • 1917–1918독일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로 마그데부르크 요새 수감
  • 1918.11–1922.12국가원수(나첼니크 파인스트바)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26.55월 쿠데타로 재집권
  • 1926–1935사나차 체제의 실권자, 국방장관 겸 두 차례 총리
  • 1932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버논 켈로그

Vernon Lyman Kellogg
학술·연구 미국 미국인 1867–1937 ○ 자연사

과학과 국제구호를 잇고 성인 급식을 확장한 조사관

“부모가 죽도록 내버려 두면서 아이들만 먹이는 것으로 그칠 수 있는가?”

버논 켈로그는 곤충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 스탠퍼드에서 동물학과 곤충 분류를 연구하고 미국 과학 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허버트 후버의 벨기에 구호 활동을 도운 인연은 그를 전후 국제구호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1921년 볼가 유역을 직접 시찰한 그는 아동만이 아니라 부모와 성인도 구호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고, 이는 미국구호행정의 사업 확대를 뒷받침했다. 그의 경력은 전문 과학자가 기근 앞에서 행정과 윤리적 판단의 주체가 된 사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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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4캔자스에서 성장하고 캔자스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곤충학을 공부했다.
  • 1894–1920스탠퍼드대학교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며 동물학과를 세우고 곤충 분류와 진화를 연구했다.
  • 1915–1916벨기에 미국구호위원회 책임자로 전쟁 난민과 민간인 구호를 조직했다.
  • 1917–1920구호와 전쟁 경험을 저술하고 후버의 식량·국제구호 활동을 지원했다.
  • 1921년 9월미국구호행정 특수 조사관으로 첫 구호 열차를 타고 볼가 유역을 조사했다.
  • 1921년 말워싱턴에서 후버에게 성인까지 포함하는 구호 확대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 1921–1933국가연구위원회 초대 상임 서기로 일하고 과학연구 제도와 대중 과학을 조직했다.

예브게니 카를로비치 밀레르

Евгений Карлович Миллер

북부 백군을 지휘하고 파리에서 NKVD에 납치된 발트 독일계 제정 러시아 장군

나는 그들에게 분노도 복수심도 없으며, 그저 무엇에든 선동될 수 있는 불쌍한 회색 무리일 뿐이다.

발트 독일계 귀족 가문 출신의 제정 러시아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올랐다. 내전기에는 아르한겔스크 북부정부의 수반 겸 북부 백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미국 간섭군의 지원을 받으며 볼셰비키에 맞섰으나, 연합군 철수 후 홀로 싸우다 1920년 2월 노르웨이로 탈출했다. 망명 후 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으로 반소 활동을 이끌었으며, 1937년 파리에서 NKVD 요원 니콜라이 스코블린의 함정에 빠져 납치되어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1939년 5월 NKVD 내부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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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브뤼셀·헤이그 주재 무관
  • 1901이탈리아 주재 무관
  • 1914–1916제5군·제12군 참모장 (제1차 세계대전)
  • 1917제26군단장, 루마니아 전선
  • 1919–1920북부정부 수반 겸 북부군 총사령관
  • 1920–1930프랑스 망명, 브란겔 장군 휘하 참모장
  • 1930–1937러시아 전군연합(ROVS) 의장
  • 1937파리에서 NKVD에 납치

레옹 도데

Léon Daudet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67–1942 ○ 병사

악시옹 프랑세즈의 목소리, 추문을 날마다 지면에서 거리로 밀어 올린 논객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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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0파리 출생,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의학 수학
  • 1900–1908왕당파로 전향, 악시옹 프랑세즈 합류
  • 1908–1942《악시옹 프랑세즈》 공동 창간자이자 주필
  • 1919–1924파리 선출 하원의원
  • 1923–1927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둘러싼 소송, 명예훼손 유죄로 벨기에 망명
  • 1930사면으로 귀국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로 2월 6일 시위를 조성
  • 1942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사망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Carl Gustaf Emil Mannerheim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 1867–1951 ○ 자연사

러시아 제국군 중장에서 핀란드의 원수가 되어 두 차례 소련과 맞선 귀족 군인

"요새도, 대포도, 외국의 원조도, 모든 병사 각자가 자신이 조국의 수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30년간 복무한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으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중장까지 올랐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총사령관으로 적위대를 진압하고 섭정이 되어 독립을 공고히 했으며,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사명은 볼셰비즘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에 맞서 싸웠고, 독일과 공동전선을 폈으나 레닌그라드 공격은 거부했다. 1944년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독일군을 축출하여,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점령을 면한 국가로 핀란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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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1917러시아 제국군 기병 장교, 1917년 중장으로 퇴역
  • 1918핀란드 백군 총사령관으로 내전 승리
  • 1918–1919핀란드 섭정(국가원수)
  • 1931–1939핀란드 국방위원회 의장
  • 1939–1944핀란드 방위군 총사령관 (겨울전쟁·계속전쟁)
  • 1944–1946핀란드 공화국 제6대 대통령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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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빅토르 콘스탄티노비치 쿠르나톱스키

Викто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урнатовский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시작해 치타 공화국을 이끈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중 한 사람

옛 티플리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회고했다.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때면 동지들은 모두 쿠르나톱스키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과 판단은 언제나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쿠르나톱스키는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 해방' 그룹과 함께했으며, 미누신스크 유형지에서 레닌을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에 서명했다. 1900년 이스크라의 카프카스 대표로 티플리스에 파견되어 RSDLP 티플리스 위원회를 결성했고, 그곳에서 젊은 스탈린의 '당적 스승'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치타에서 노동자·병사·코사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무장봉기를 이끌어 이른바 '치타 공화국'을 수립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종신 카토르가로 감형된 뒤 일본으로 탈출, 파리에서 망명 중 4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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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89나로드나야 볼랴 활동가,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대학에서 제적·유형
  • 1892–1897취리히 공대 졸업(화학공학),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 그룹 참여
  • 1898–1900미누신스크 유형, 레닌과 만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서명
  • 1900–1901이스크라 카프카스 대표, RSDLP 티플리스 위원회 결성
  • 1904야쿠츠크 정치유형자 무장항의 지도, 아카투이 카토르가 수감
  • 1905–1906치타 노동자·병사·코사크 소비에트 조직, '치타 공화국' 무장봉기 지도, 《자바이칼스키 라보치》 편집
  • 1906–1912사형 선고 후 종신 카토르가 감형, 일본 탈출, 파리 망명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