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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바히레프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Бахирев

냉전기 소련 재래식 탄약 대량생산 체계를 19년간 지휘한 군수 행정가

그는 자신의 전직 공장인 데그탸레프 공장의 젊은 설계사에게 이렇게 설득했다. "대포도, 로켓도 언젠가는 안 만들게 될 날이 온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따뜻함은 필요하고, 원자력은 핵무기만이 아니라 평화로운 에너지이기도 하다."

소련의 군수 산업 지도자로, 1968년부터 1987년까지 기계공업장관을 지내며 재래식 탄약·폭탄·신관·로켓 추진제 생산을 총괄했다. 모스크바 대학 수리역학부 졸업 후 코브로프의 데그탸레프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항공기관포·대전차유도탄 개발을 주도했고 1960년 공장장에 올랐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의 신임으로 1965년 방위공업부 제1차관, 1968년 신설 기계공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19년간 소련군의 포탄·폭탄·기뢰·고체연료를 책임지는 거대 군수 부문을 지휘했으며, 세계 최초의 수중고속로켓 '시크발(Шквал)' 개발에도 기여했다. 군수 생산과 함께 소비재·원자력 평화 이용까지 아우르며 군수 공업의 합리화를 추구했으나, 1987년 페레스트로이카 세대교체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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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제2공장(데그탸레프 공장) 설계국 엔지니어
  • 1948OKB-2 부소장(경험 업무)
  • 1950–1952제575공장 수석 설계자
  • 1952–1954OKB-2 소장
  • 1954–1960데그탸레프 공장 수석 엔지니어·부공장장
  • 1960–1965데그탸레프 공장장
  • 1965–1968소련 방위공업부 제1차관
  • 1968–1987소련 기계공업장관

체덴발

Цэдэнбал

몽골의 계획경제와 대소 관계

몽골과 소련의 관계를 '큰 형과 작은 동생'(ах дүү) 관계로 규정했던 그는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소련 편입을 청했으나 모스크바는 거절했다.

초이발산 사후 1952년 몽골 정부 수반이 된 지도자다. 소련과의 정치·경제적 연계를 바탕으로 산업화와 협동목축을 추진했다. 장기 집권은 근대화 정책과 당내 반대파 배제, 대외 의존이라는 문제를 함께 남겼으며 1984년 권좌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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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몽골인민혁명당에 입당하고 재무차관이 되었다.
  • 1940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당내 2인자).
  • 1941–1945인민군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5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52–1974각료회의 의장(정부 수반).
  • 1958–1984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재취임(1981년 총비서 칭호).
  • 1974–1984인민대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국가원수) 겸 인민군 총사령관.
  • 1979몽골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16–1994 ↓ 퇴임 1989

라트비아 당 지도자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88년 5월 28일,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9차 전연방 당대회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보스는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았지만 어쨌든 당선되었다. 모스크바로 항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라트비아인 부모를 둔 시베리아 출신으로, 1959년 '민족주의자' 숙청 이후 라트비아 공산당을 이어받아 18년간 제1서기를 지낸 '인테르나치오날리즘'의 집행자였다. 모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면서도 공개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라트비아어로 말하지 않았던 이 모순이 그의 시대를 상징했다. 말년에는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올랐지만,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족운동 속에서 구질서와 함께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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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1950s라트비아 공산당 조직에서 성장
  • 1966–1984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 정체기 발트 공화국 관리 담당
  • 1984–1989민족소비에트 의장, 말기 소련 연방대표제의 보수적 얼굴
  • 1988–1989발트 민족운동과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 영향력 약화
  • 1989 이후중앙정치에서 퇴장

발렌틴 미하일로비치 베레시코프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Бережков

스탈린의 개인 통역사이자 소련의 미국 전문가

테헤란 회담 만찬장에서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순간 처칠이 말을 꺼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베레시코프에게, 스탈린이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자네는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야.'

테헤란(1943), 얄타(1945), 포츠담(1945) 회담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개인 통역을 맡아 전후 질서를 결정한 '빅3' 외교 현장을 목격한 소련 외교관. 1940~1941년 주베를린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통역을 맡았고, 리벤트로프의 대소 선전포고 현장에도 있었다. 부모의 전시 행방 문제로 외무부에서 밀려난 후 《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과 소련의 대표적 미국학 저널 《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을 지냈다. 주워싱턴 대사관 1등서기관(1979~1983)으로 복귀했고, 소련 붕괴 후 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에서 강의하며 권력 정점에서의 경험을 회고록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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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키예프 공과대학 졸업, 태평양함대 통역 장교
  • 1940–1941주베를린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
  • 1941–1944외무인민위원부 고문, 스탈린·몰로토프 개인 통역
  • 1943 · 1945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5–1960s《노보예 브레먀》 부편집장 (필명 보그다노프)
  • 1970–1989《USA: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창립 편집장
  • 1979–1983주워싱턴 소련 대사관 1등서기관
  • 1992–1998몬터레이 국제학연구소 교수

레오니트 바실리예비치 스미르노프

Леонид Васильевич Смирнов

22년간 소련 군산복합체를 조율한 VPK 의장, 군수공업의 숨은 설계자

R-12를 살피던 흐루쇼프가 설계자 얀겔에게 "뭘 만든 거요, 소시지인가?" 하고 소리치자, 스미르노프가 나서 조용히 말했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입니다."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로켓공장(유즈마시) 사장 시절 R-12·R-16 대륙간탄도미사일 양산을 지휘하며 전략로켓군의 산업 기반을 구축한 공병 출신 군수 행정가. 1963년부터 22년간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미사일·핵·우주·전자 분야 군산복합체 전체를 조율했고 SALT-I 준비에도 참여했다.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함께 브레즈네프기 소련 군사력의 정점을 관리했으며, 군수 영역을 넘어 면역학 연구소 설립을 정부에 설득한 개방적 기술 관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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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8노보체르카스크 광산장비 공장에서 부생산책임자→화력발전소장→수석 에너지 엔지니어로 승진
  • 1949–1951중앙자동화·유압연구소(TSNII-173) 소장, 무기성 산하
  • 1951–1952소련 무기성 로켓·우주기술 총괄국장
  • 1952–1957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기계제작공장(유즈마시) 사장, R-1·R-12·R-16 미사일 양산 지휘
  • 1957–1961국방기술 국가위원회(GKOT) 총괄국장
  • 1961–1963소련 각료회의 국방기술 국가위원회 의장 (장관급)
  • 1963–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군수 전 분야 총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프로호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рохоров
학술·연구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6–2002 ○ 자연사

노벨상 수상 레이저 공동 발명가이자 소련 대백과사전의 얼굴

프로호로프는 연구실 방향을 마이크로파에서 레이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직접 옛 장비를 부수었다. 연구원 절반이 분노하며 떠났지만, 남은 팀은 노벨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물리학자로, 니콜라이 바소프와 메이저-레이저 원리를 공동 창안해 1964년 바소프 및 찰스 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보병으로 복무하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고, 전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서 개방형 공진기와 기체역학 레이저를 개척했다. 일반물리학연구소장(1982–1998)으로서 광섬유·레이저 핵융합·우주 통신 연구를 총괄했으며, 30년 이상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의 대표적 지식 총서를 이끌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고 조레스 알표로프를 비롯한 한 세대의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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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 국립대 물리학과 우등 졸업;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입소
  • 1941–1944붉은 군대 보병 복무, 두 차례 부상
  • 1954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진동연구실장
  • 1959레닌상 수상; 모스크바 국립대 교수
  • 1964바소프·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믹)
  • 1969–2001《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
  • 1982–1998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일반물리학연구소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테레빌로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Теребилов
학술·연구 소련, 이후 러시아 러시아인 1916–2004 ○ 자연사

사라졌던 법무부를 되살려 소비에트 법전 편찬을 지휘한 법률가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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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주 파르골로보 지구 검사
  • 1941노동자 분견대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
  • 1945레닌그라드 프리모르스키 지구 검사
  • 1949전연방 범죄수사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7소련 검찰총장 수석보좌관·수사국 부국장
  • 1962소련 대법원 부원장
  • 1970소련 법무장관
  • 1984소련 대법원장
  • 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 도첸트

로버트 맥나마라

Robert McNamara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6–2009 ○ 자연사

베트남전을 주도하고 쿠바 위기에서 핵전쟁을 막은, 양적 분석의 국방장관

쿠바 미사일 위기의 가장 큰 교훈: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핵무기의 무기한 결합은 국가들을 파괴할 것이다.

미국 제8대 국방장관(1961–1968)으로, 케네디와 존슨 두 행정부에서 7년 이상 국방을 이끈 최장수 재임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 내 공습 대신 해상 '격리' 봉쇄를 처음 제시하고 강력히 밀어붙여, 흐루쇼프에게 결의를 보여주면서도 군사 충돌로 번지지 않을 통제된 선택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계량적 분석과 병력 증강을 주도하다 점차 회의에 빠졌고, 퇴임 27년 뒤 회고록에서 그 전쟁이 '잘못됐다'고 고백했다. 이후 세계은행 총재(1968–1981)로 빈곤 퇴치로 은행의 방향을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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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USAAF 통계통제실, 중령 전역
  • 1946–1960포드 자동차, 사장(1960)
  • 1961–1968제8대 미국 국방장관
  • 1968–1981세계은행 총재

비탈리 라자레비치 긴즈부르크

Виталий Лазаревич Гинзбург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916–2009 ○ 심부전

수소폭탄의 '제2의 아이디어'에서 노벨상까지, 한 세기를 가로지른 이론물리학자

나는 수소폭탄 덕분에 살아남은 아주 드문—아마도 유일무이한—사람이다.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이고리 탐의 이론팀 일원으로 참여해 중수소화리튬-6(LiD)을 열핵연료로 사용하는 '제2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는 1953년 소련 최초의 열핵무기 실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0년 레프 란다우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을 정립했고, 이 공로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6)으로서 소련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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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2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FIAN 이론부 연구원
  • 1945–1961고리키 국립대학 방사물리학부 학과장
  • 1948–1952소련 수소폭탄 개발 참여 — 중수소화리튬-6 아이디어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68–2009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물리·천체물리 문제 학과장
  • 1971–1988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
  • 1989–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대표 인민대의원
  • 1998–2009«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 편집장

완리

万里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으라」 — 안후이에서 농가생산책임제를 허용한 개혁의 선구자

「쌀을 먹으려면 완리를 찾으라」: 안후이에서 농가책임제를 처음 시행한 개혁파 지도자로, 1983~1988년 제1부총리,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산둥 출신으로 건국 후 베이징 부시장으로 인민대회당 등 「10대 건축」을 지휘했고 문화대혁명에서 박해받았다. 1977년 안후이 제1서기로 부임해 기근에 시달리던 농촌에서 샤오강촌의 비밀 토지 분배를 묵인하고 「성위 6조」로 농가생산책임제를 허용해 개혁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1980년 부총리로 전국 농업을 맡아 인민공사를 해체했고 1988~199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해외 순방 중 귀국해 계엄을 지지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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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0안후이성 당위원회 제1서기
  • 1988–199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왕둥싱

汪东兴
보안·정보·치안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16–2015 ↓ 퇴임 1980 · 자연사

마오의 경호대장, 중난하이의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한 뒤 「양개범시」로 밀려난 인물

「끝까지 마오 주석의 충성스러운 병사」라 자처한 그는 수십 년간 마오를 경호했고, 1976년에는 8341부대로 4인방을 체포했다.

장시 출신으로 대장정 뒤 마오의 경호를 맡았고 1949년부터 중앙경위국(8341부대) 책임자로 지도부의 안전과 일상을 관리했다. 문화대혁명기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마오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6년 10월 예젠잉·화궈펑과 함께 8341부대를 동원해 장칭 등 4인방을 체포했다. 1977년 당 부주석이 되었으나 화궈펑의 「양개범시」를 지지해 덩샤오핑과 대립했고, 1980년 부주석직에서 물러나 정치적으로 퇴장했다. 2015년 9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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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7중앙경위국(8341부대) 국장
  • 1977–1980중공 중앙 부주석

김정숙

김정숙
군사·지휘 소속 미확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17–1949 ○ 출산 중 사망

백두산 항일 빨치산에서 '3대장군'의 하나로 추앙된 여장군

어느 날 부대가 행군할 때 갈대밭에서 적 5~6명이 장군님을 겨누었다. 김정숙 동지는 몸으로 장군님을 가리고 리볼버로 적을 쓰러뜨렸다.

김정숙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 휘하 여군 부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여성 빨치산으로, 생전의 전공보다는 사후 '백두여장군'으로 추앙받아 '3대장군' 백두혈통 정치신화의 모성적 핵심이 된 인물이다. 김일성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어머니로서 해방 뒤 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하다 1949년 출산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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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동북항일연군 입대
  • 1936김일성 부대 친위전사 및 신갈파부대 여군 부대장
  • 1937보천보 전투 참가; 중국공산당 입당
  • 1937–1938국내 신파·풍산·단천 등지에서 혁명조직 확대 활동
  • 1940김일성과 결혼, 소련으로 이동
  • 1945해방 후 평양 귀환
  • 1946–1949조선민주여성동맹 창립 및 여성운동 참여

로숀치 게저

Losonczy Géza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숀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나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나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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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바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956-11나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나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기메시 미클로시

Gimes Miklós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처형

너지 임레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 개혁파 언론인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라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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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공산주의 운동 가담, 노동봉사대 소집
  • 1944노동봉사대 탈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합류
  • 1945–1954《사바드 네프》 기자
  • 1954취리히·빈·파리 특파원
  • 1955라이크 복권 요구로 MDP 제명, 코르비나 출판사 번역가
  • 1956 summerMDP 재입당, 너지 임레 측근
  • Oct–Nov 1956《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편집
  • Nov–Dec 1956민주독립운동 결성, 지하신문 발행, 12월 5일 체포

말레테르 팔

Maléter Pál

협상과 무장 저항 사이에 선 군인

“가야 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가 제 도움을 요구합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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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군 입대
  • 1940루도비카 사관학교 생도
  • 1944–1945소련군 포로, 반독일 유격대원
  • 1945임시정부 경비대대 지휘관, 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56.10대령, 킬리안 병영 방어 지휘
  • 1956.11너지 임레 정부 국방장관, 소장
  • 1956.11.3퇴역 협상 대표, 퇴켈에서 체포
  • 1958처형
  • 1989복권, 추서 및 재매장
  • 1956.10.23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파견된 기갑부대 지휘
  • 1956.10.25킬리안 병영 구원을 위해 전차부대 지휘
  • 1956.10.29–31무장세력과 휴전·협상, 국민위병 조직 논의 참여

실라지 요제프

Szilágyi József

법정 침묵으로 사건이 분리되어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진 혁명가

1958년 4월 법정 최후 진술: "10월이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헝가리 민중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폭정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브레첸 출신의 공산주의 법률가로, 1949년 라이크 라슬로 재판의 근거를 의심했다가 모든 당직에서 해임된 후 너지 임레의 개혁파에 합류했다. 1956년 혁명기에는 너지의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11월 4일 소련군 진압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1년 넘게 취조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 너지 재판에서 분리 심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서 너지·말레테르 등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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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39불법 공산당 입당, 데브레첸대학 법학박사
  • 1940–44체포되어 3년형 선고, 1944년 석방 후 지하 활동
  • 1945–46데브레첸 경찰서장, 국가경찰본부 조직
  • 1947–49당 중앙 군사·치안부서장, 중앙통제위원
  • 1949라이크 재판 의문 제기로 해임
  • 1953–56너지 개혁파 합류, 1956년 초 출당
  • 1956.10–11너지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
  • 1958분리 재판 후 사형, 4월 24일 교수형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17–1963 ✕ 암살

냉전의 최전선에서 핵전쟁 직전까지 간 최연소 미국 대통령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미국 제35대 대통령(1961–1963)으로, 43세의 최연소 당선자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이었다. 1961년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같은 해 흐루쇼프와의 빈 정상회담에서 위협을 느낀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해상 '격리' 봉쇄를 선택하고, 로버트 케네디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 철수라는 비밀 양보로 핵전쟁을 막았다.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 민권법과 세제 개혁 등 의제가 의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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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1953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
  • 1953–1960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
  • 1961–1963제35대 미국 대통령

이고리 세묘노비치 파나슈크

Игорь Семёнович Панасю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17–1972 ○ 병사

쿠르차토프의 가장 가까운 조수로 F-1을 관리했으나, 스승을 고발하고 밀려난 물리학자

"이 그래파이트 샘플은 마치 굶주린 늑대가 새끼 양을 대하듯 중성자를 잡아먹습니다": 첫 흑연 품질 측정 결과를 쿠르차토프에게 보고하며

이고리 파나슈크는 쿠르차토프의 가장 신임받는 제자로, 유럽 최초의 원자로 F-1 건설을 총괄 관리하고 1946년 12월 25일 임계 실험에서 제어반을 보조한 실험물리학자다. 1943년 제2연구소에 합류해 반응로 부문 부책임자로서 흑연과 우라늄 품질 검증부터 노심 조립까지 실무를 지휘했고, 1948년 첫 산업용 원자로 'A'의 기동에도 쿠르차토프 곁에서 같은 역할을 맡았다. 1954년 돌연 스승과 결별하고 주변부 연구직으로 밀려났는데, 쿠르차토프를 당에 고발한 것이 원인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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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1레닌그라드 공업대학 물리공학부 졸업, 쿠르차토프 지도 아래 디플로마
  • 1939–1943붉은군대 복무, 소련-핀란드 전쟁 및 대조국전쟁에서 야전병원 엑스선 기술자
  • 1943–1947제2연구소 제1섹터(반응로) 부책임자, F-1 건설 및 기동
  • 1947–1950제2연구소 제1섹터장, 산업용 원자로 'A' 과학책임자
  • 1950–1954F-1 원자로 시설 책임자, 삼중수소 생산로 AI-1 건설 참여
  • 1954–1972원자력연구소(IAE) 선임연구원, 주변부 연구직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نور محمد تره‌کی
정치·당 지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17–1979 ✕ 베개에 질식사

소련의 군사 개입을 거듭 요청했으나 제자의 손에 죽으면서 결국 소련군을 불러들인 아프간 혁명정권 초대 수반

타라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지원을, 병력과 무장을, 요청합니다.' 코시긴: '이건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타라키: '당신들이 협의하는 사이 헤라트는 함락될 것입니다.' (1979년 3월 18일, 헤라트 봉기 와중의 전화 통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서기장이자 1978년 4월 혁명으로 수립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 소작농 출신으로 봄베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귀국 후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을 쓴 작가 출신 정치인이었다. 집권 후 급진적 토지개혁과 세속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농촌의 전통적 반발로 무장 봉기가 확산되었고, 소련에 반복적으로 군사 개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79년 9월 후계자 하피줄라 아민에게 축출된 뒤 베개에 질식사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두 달 뒤 소련의 침공을 초래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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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봄베이에서 무역회사 점원으로 일하며 야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접함
  • 1940s–1958작가·언론인으로 활동, 파슈툰어 첫 사회소설 『방의 방랑』 발표
  • 1952–1953주미 아프가니스탄 대사관 공보관
  • 1965PDPA 창립, 초대 서기장 선출
  • 1967PDPA 분열 후 칼크(민중)파 지도
  • 1978.04–124월 혁명으로 혁명평의회 의장·총리 취임, 소련과 20년 우호조약 체결
  • 1979.03헤라트 봉기 와중 소련에 군사 개입 요청, 거절당함
  • 1979.09–10아민에게 축출되어 베개에 질식사당함

세묜 쿠지미치 츠비군

Семён Кузьмич Цвигун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옆에 심은 감시자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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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39역사 교사 · 중학교 교장
  • 1939NKVD 입대
  • 1941–45남서부·남부 전선 및 SMERSH 복무 (전선 기록 논란)
  • 1951–53몰다비아 MGB 부장관: 브레즈네프와 인연
  • 1957–63타지크 KGB 의장
  • 1963–67아제르바이잔 KGB 의장
  • 1967–82KGB 제1부의장 · 제5국장: 반체제 탄압 총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시도렌코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Сидоренко
산업·생산 운영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7–1982 ✕ 교통사고

사막과 선캄브리아기를 횡단한 소련 지질학의 제도적 설계자

알제리 출장길에 탄 승용차가 낙타와 충돌했다. 사막을 연구하고 지하 수 킬로미터를 시추했던 지질학자의 삶을 마감한 것은, 뜻밖에도 길 위의 동물 한 마리였다.

알렉산드르 시도렌코는 13년간 소련 지질장관(1962–1975)을 지내며 서시베리아·야쿠티아·중앙아시아의 광물자원 탐사를 지휘했고, 이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로서 지구과학 전반을 총괄한 지질학자이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풍화 과정을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 변성퇴적암의 원래 퇴적환경을 복원하는 '선캄브리아기 퇴적-변성암석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했으며, 코브도르 운모광상 발견으로 1966년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의 주도로 시작된 콜라 반도 초심층 시추는 지구 지각 연구의 획기적 프로젝트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용사이기도 한 그는, 알제리 출장 중 차량이 낙타와 충돌하는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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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1보로네시 대학 광물학과 조교·대학원생
  • 1941–1943붉은군대 소대장·포대장,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중상
  • 1943–1950소련 과학아카데미 투르크멘 분소 지질연구소: 선임연구원 → 부장
  • 1950–1961콜라 분소 부의장 → 상임간부회 의장, 지질연구소장 겸임
  • 1961–1962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과학연구조정 국가위원회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지질·지하자원보호장관 → 국가지질위원회 의장 → 지질장관
  • 1975–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겸 지구과학부문 의장
  • 1979–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암석권연구소 창설 소장

샤라프 라시도비치 라시도프

Шараф Рашидович Рашид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1983 ○ 심장마비

24년간 우즈베키스탄을 이끌며 산업화와 문화 부흥을 진두지휘한 작가 출신 지도자

1962년 5월, 라시도프는 흐루쇼프의 비밀 지시로 소련 대표단을 이끌고 아바나로 날아갔다. 공식 임무는 농업·관개 협력이었지만, 실제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핵미사일 배치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 접촉은 카리브 위기의 서막이 되었고, 라시도프와 카스트로의 평생 우정을 열었다.

가난한 농가 출신 교사·신문 편집자·작가로 활동하다 1959년 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2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타슈켄트 지진 복구, 지하철 건설, 무룬타우 금광 개발, 항공·트랙터 공업 육성으로 경제 구조를 전환했다. 사마르칸트 2500주년 기념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으로 우즈벡 민족 정체성을 고양시켰다. 사후 안드로포프의 면화 스캔들 수사로 부패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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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7중학교 교사
  • 1937–1941사마르칸트 지역지 《레닌 욜리》 기자·편집자
  • 1941–1943소련군 소위, 모스크바 전투·볼호프 전선 참전, 중상
  • 1944–1947사마르칸트 주당위원회 서기
  • 1947–1949공화국 일간지 《키질 우즈베키스톤》 편집장
  • 1949–1950우즈베키스탄 작가동맹 이사장
  • 1950–1959우즈베크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
  • 1959–1983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83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후보

티혼 야코블레비치 키셀료프

Тихон Яковлевич Киселёв

벨라루스 20년 총리에서 당 제1서기로 올랐다가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실무자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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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41옐스크 지역 중학교 벨라루스어·문학 교사
  • 1941–1944스탈린그라드주 크라스냔스크 학교 교장 (대피)
  • 1944–1952고멜 주당위 지도원 →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2–1955브레스트 주당위 제1서기
  • 1955–1959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 제2서기
  • 1959–1978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78–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0–1983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후보위원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바바힌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бабах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17–1984 ○ 자연사

소련 제2핵무기설계국의 과학지도자

"문제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상관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열이면 아홉은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진짜 해결하고 싶으면 스스로 결정하고 보고하라.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 핵무기 물리학의 핵심 설계자로서, 196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제2핵무기설계국(VNIITF, 첼랴빈스크-70)의 과학지도자를 지냈다. 1947년 충격파 수렴에 관한 논문으로 젤도비치의 눈에 띄어 원자폭탄 계획에 합류했고, 첫 소련 핵실험(RDS-1)에 기여했으며, 최초의 완전 독자 설계 핵전하(RDS-2)의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 1955년 신설된 우랄 제2센터의 이론부문 책임자로 옮겨 1957년 소련군 최초의 실전배치 열핵전하 개발을 이끌었다. 과학지도자로서 25년간 이끈 VNIITF는 소련 핵탄두 대부분을 설계했고, 평화적 핵폭발 기술을 개척해 가스 유정 화재 진압과 지각 탐사에 응용했으며, 말년에는 무제한 누적 현상에 관한 논문으로 켈디시 금메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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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5KB-11(아르자마스-16) 이론물리학자
  • 1955–1960NII-1011 부과학지도자·이론부문장
  • 1960–1984VNIITF(첼랴빈스크-70) 과학지도자
  • 1968–1984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