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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보리스 이바노비치 아리스토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Аристов

27년 장기 집권 장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자기 임기 안에 부처 자체가 사라진 마지막 대외무역장관

1985년 10월, 27년간 소련의 대외무역을 관장해온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대외무역장관에 취임한 아리스토프는 불과 2년 3개월 만에 부처 자체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으로 폐지되는 순간을 맞았다.

소련의 당·국가 관료이자 외교관. 레닌그라드 공장 기술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를 지냈다. 이후 외교 경력으로 전환하여 주폴란드 대사(1978–1983)와 외무차관(1983–1985)을 거쳐, 1985년 니콜라이 파톨리체프의 뒤를 이어 소련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의 일환으로 1988년 1월 대외무역부가 폐지되고 대외경제관계부로 통합되면서, 그는 소련의 마지막 대외무역장관이 되었다. 이후 주핀란드 대사(1988–1992)로 전임되어 소련 붕괴기를 헬싱키에서 지켰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연방 대사로 잠시 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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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야로슬라블주 집단농장 회계사
  • 1942–1943야로슬라블주 보병학교 사관생도
  • 1943–1946공병여단 분대장 → 모스크바 공병대대 서기
  • 1947–1952레닌그라드 '스베틀라나' 공장 기술자 → 조립구역장
  • 1952–1963비보르크 구당 산업운수부 지도원 → 부장 → 레닌그라드 주당 산업운수부 차장
  • 1963–1969레닌그라드 비보르크 구당 제1서기
  • 1969–1971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1–1978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1978–1983주폴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85소련 외무차관
  • 1985–1988소련 대외무역장관
  • 1988–1992주핀란드 소련·러시아연방 대사

조레스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Жоре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학술·연구 소련 그루지야 1925–2018 ○ 자연사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 계획을 기록 부재로 반박한 반체제 생물학자

1970년 정신병원 석방 후: "어떤 정직하고 원칙 있는 학자도 그러한 근거로 정신병원 무기한 수용이라는 탄압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체제 역사가.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노화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연구했다. 1962년 리센코의 유사과학을 폭로한 사미즈다트 원고 「생물학과 개인숭배」를 집필했고, 이는 1969년 《리센코의 흥망》으로 미국에서 출간되며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1970년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사하로프·솔제니친 등의 항의로 석방되었고, 1973년 런던 체류 중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말년의 저작 《스탈린과 유대인 문제》(2003)에서는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 유대인 추방 계획으로 이어지려 했다는 통설을 기록 부재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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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3붉은 군대 징집, 타만 반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제대
  • 1950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식물생리학 후보학위 취득
  • 1962사미즈다트 「생물학과 개인숭배」로 티미랴제프 아카데미에서 해고
  • 1963–1969오브닌스크 의학방사선연구소 분자방사선생물학 연구실장
  • 1970강제 정신병원 수용, 국내외 학자·작가들의 항의로 3주 만에 석방
  • 1973런던 국립의학연구소 초청 연구 중 소련 시민권 박탈, 영국 망명
  • 1990–1992소련 시민권 회복,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 방사선생물학 조사 참여

필리프 데니소비치 봅코프

Филипп Денисович Бобков

KGB 이념방첩의 설계자, 12명의 수장 아래 45년간 살아남은 체키스트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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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5붉은 군대 복무, 서부·발트 전선, 두 차례 부상
  • 1946레닌그라드 스메르시 학교 졸업, MGB 배치
  • 1956KGB 제4국(이념방첩) 부장
  • 1961KGB 제2총국 부국장
  • 1969–1983KGB 제5총국장(이념방첩 → 헌법질서 수호)
  • 1983–1985KGB 부의장
  • 1985–1991KGB 제1부의장
  • 1992–2001모스트 그룹 분석국장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925–2020 ○ 자연사

냉전 종식기의 신중한 전략가

몰타 회담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결국 회담의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미국 공군 장교 출신의 국가안보 관료로, 대통령과 외교·군사 관료 사이의 정책 조정을 중시한 현실주의적 전략가였다. 그는 제럴드 포드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냉전 말기의 군비·유럽 외교를 조율했다. 1989년 몰타 회담에는 성급한 정상회담이 기대만 키울 수 있다며 처음에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회담이 열리자 미소 관계의 전환을 관리하는 핵심 참모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동맹과 국제기구를 중시하며 이라크 침공과 일방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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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 미국 공군 소위 임관
  • 1953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 1967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관계학 박사
  • 1972–1973리처드 닉슨 대통령 군사보좌관
  • 1973–1975국가안보 담당 대통령 부차관보
  • 1975–1977제럴드 포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1989–1993조지 H. W. 부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 2001–2005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 의장

로버트 W. 데이비스

Robert W. Davies
학술·연구 영국 영국인 1925–2021 ○ 자연사

소련 공업화의 연대기를 7권으로 쌓은 영국의 경제사가

마지막 권에서 그는 썼다: "소비에트 역사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했지만… 역사의 세부가 선입견과 충돌할 때는 후자가 양보해야 한다… 나는 좌파로 남아 있으며,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영국의 경제사가. E. H. 카와 함께 『계획경제의 기초』를 집필했고, 카의 작업을 이어받아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업화』 전7권을 완성했다. 휘트크로프트와 공저한 『기아의 해』(2004)에서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5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계획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조달 우선 정책·흉작·지도부의 뒤늦은 대응이 결합된 결과로 설명했다. 젊은 시절 영국 공산당원이었으나 1956년 헝가리 침공 후 탈당했고, 좌파로서 "더 나은 사회의 조직은 가능하다"는 신념을 평생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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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6영국 공군 통신병 복무
  • 1950런던대 SSEES 학사
  • 1954버밍엄대 박사 (소비에트 재정)
  • 1954–1956글래스고대 소비에트연구소 강사
  • 1956–1965버밍엄대 연구원·강사·선임강사
  • 1963–1979버밍엄대 CREES 초대 소장
  • 1965–1988버밍엄대 소비에트경제학 교수
  • 1988정년퇴임, 명예교수

로이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Ро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학술·연구 소련 그루지야 1925–2026 ○ 자연사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심판한 역사가

《역사의 심판대에》 서문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신념과 이상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향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변했지만, 깊은 확신 없이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공산주의자 출판인. 1960년대부터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며 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를 편집했고, 20년 가까이 집필한 대작 《역사의 심판대에》에서 스탈린주의의 기원과 결과를 방대한 사료로 분석했다. 이 책으로 1969년 제명되었으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복당 후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중앙위원을 지냈다. 평생 35권 이상의 저작을 남기며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적 역사학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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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인도 공산주의자 M. N. 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6–1951레닌그라드대 철학부 우등 졸업, 콤소몰 서기 활동
  • 1958교육학 후보학위 취득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 1960s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 편집, 반체제 운동 참여
  • 1969《역사의 심판대에》 집필로 공산당 제명
  • 1970사하로프·투르친과 브레즈네프 지도부에 개방서한 발표
  • 1989–1991소련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 복당 후 중앙위원
  • 1991–2002러시아연방 노동자사회당 공동의장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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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아르히포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рхип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26–1998 ○ 신장암

핵전쟁을 막은 소련 해군 잠수함 장교

토머스 블랜턴 미 국가안보기록보관소장은 그를 두고 "세계를 구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소련 해군 중장.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잠수함 B-59에서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장교로, 두 명의 지휘관이 발사에 동의했으나 아르히포프만이 거부하여 핵전쟁을 막았다. 1961년 K-19 원자력 잠수함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서도 승무원으로 복무하며 피폭을 입었다. 이후 69여단장, 37사단장을 거쳐 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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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태평양 함대 소해정에서 소련-일본 전쟁 참전 (사관생도)
  • 1947카스피 고등해군학교 졸업
  • 1961K-19 원자력 잠수함 부함장, 방사능 누출 사고 대응
  • 1961–1964제69잠수함여단 참모장
  • 1964–1968제69잠수함여단장
  • c. 1968–1975제37잠수함사단장
  • 1975소장 진급
  • 1975–1985카스피 고등해군학교 교장
  • 1981중장 진급
  • 1988퇴역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쿠르노소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рносов
학술·연구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6–1998 ○ 자연사

체르노빌 4호기를 봉인한 '대피호'의 저자이자 기술 책임자

그는 파괴된 원자로를 조사하기 위해 기중기 갈고리에 매달린 '바티스카프'에 직접 올라탔다.

탐보프 출신의 소련 원자력 건설 기술자로, 1953년 레닌그라드 공학건설연구소를 졸업한 뒤 ВНИПИЭТ에 입사해 평생 한 연구소에서 일했다. 1957년 키시팀 사고 수습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1986년 체르노빌에서는 불과 206일 만에 4호기를 봉인하는 '대피호'(석관) 프로젝트의 저자 겸 기술 책임자로서, 방사능 현장을 직접 '바티스카프'에 매달려 조사하며 세계 유례없는 공학적 해법을 설계했다. 훗날 ВНИПИЭТ의 총책임자(1989~1998)로 재직하며 아르자마스 사고와 키로바칸 지진 복구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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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ВНИПИЭТ 입사, 엔지니어로 시작
  • 1957키시팀 사고(첼랴빈스크-65) 수습 프로젝트 책임자
  • 1985–1989ВНИПИЭТ 주임기사
  • 1986체르노빌 4호기 '대피호'(석관) 프로젝트 저자 겸 기술 책임자
  • 1989–1998ВНИПИЭТ 총책임자(원장)
  • 1996러시아 연방 공훈건설자 칭호 수여

카렐 코시크

Karel Kosík
학술·연구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0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비독단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후사크 체제에 이어 1989년 이후에도 다시 매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카렐 코시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의 실천과 구체적 역사성의 철학으로 재구성한 체코 철학자였다. 대표작 《구체성의 변증법》(1963)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현상학을 대화시키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지식인이었고, 정상화 시기에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어 침묵과 저항을 견뎠다. 1989년 이후에는 개혁의 기억이 후사크 체제와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차례로 매장되었다고 비판하며 사건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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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좌파 지하 저항조직 프르제드보이 참여, 불법 잡지 편집
  • 1944–1945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수감
  • 1953–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3《구체성의 변증법》 출간
  • 1968–1969프라하 카렐대학교 철학 교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70–1989공산당 제명 뒤 대학에서 배제된 반체제 지식인
  • 1990–1992카렐대학교 철학 강의
  • 1992–2003체코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연구와 집필

피에르 브루에

Pierre Broué
학술·연구 프랑스 프랑스계 1926–2005 ○ 자연사

혁명운동의 기록자

그는 스페인의 혁명을 전쟁의 부수적 사건이 아니라 패배한 사회혁명으로 읽었다.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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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국제공산당에 입당해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시작
  • 1953프랑스 혁명사 연구로 역사학 초기 저술을 발표
  • 1960–1965중등학교 역사·지리 교사
  • 1961에밀 테밈과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 출간
  • 1965–1975그르노블 정치학교에서 현대사 강의, 국제주의 공산주의 조직 활동
  • 1972『독일 혁명, 1917–1923』 출간
  • 1977레옹 트로츠키 연구소 설립
  • 1997『코민테른사, 1919–1943』 출간

미에치스와프 프란치셰크 라코프스키

Mieczysław Franciszek Rakowski

1989년 선거에서 국민이 거부한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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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폴리티카』 편집장
  • 1972–1989세임 의원
  • 1981–1985야루젤스키 내각 부총리
  • 1988–1989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
  • 1989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 낙선
  • 1989–1990PZPR 마지막 제1서기, 당 해산 주재
  • 1990–2008『지시』 월간지 편집장, 회고록 집필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샴신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амшин

소련 통신 인프라의 현대화를 이끈 엔지니어 출신 통신장관

1981년 직접위성방송 시스템 '에크란'이 가동되자, 시베리아와 극동의 오지에서도 안테나만 있으면 모스크바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로로 샴신은 레닌상을 받았다.

통신 공학자 출신으로 세계 최초의 위성TV 배급망 '오르비타'와 직접위성방송 '에크란'의 개발을 이끌었고, 1980년부터 1989년까지 소련 통신장관으로서 통합자동통신망(EASS)을 구축해 국민 대다수가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게 했다. 퇴임 후에도 로스텔레콤 이사회 의장을 지내며 러시아 통신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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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통신부 산하 NII-100 연구소 기술자, 선임설계자, 선임연구원
  • 1958원거리무선통신연구소(NIIDAR) 연구실장, 탄도미사일 초장거리탐지 레이더 시스템 개발 참여
  • 1965국립무선연구소(NIIR) 과학담당 부소장 — 오르비타 및 에크란 위성 시스템 개발 주도
  • 1968소련 통신부 차관
  • 1976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80–1989소련 통신장관
  • 1992–1997모스크바 시외·국제전화(OJSC) 이사회 의장
  • 1997–2009로스텔레콤(Rostelecom) 이사회 의장

로버트 빈센트 대니얼스

Robert Vincent Daniels
학술·연구 미국인 미국계 1926–2010 ○ 자연사

혁명의 다원성과 스탈린주의의 형성을 추적한 소련사 연구자

대니얼스는 공산주의를 고정된 체제로 본 모델에 맞서, 그 운동을 상황이 빚은 진화적 산물로 해석했다.

로버트 빈센트 대니얼스는 미국의 소련사 연구자이자 교육자로,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정치의 여러 가능성을 추적했다. 대표작 『혁명의 양심』은 초기 공산당의 다원성을 분석해 스탈린의 집단화와 권력 집중을 혁명의 필연적 결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반대파의 산업화 구상과 스탈린의 폭력적 실행을 구별하면서도, 두 진영의 대외정책 차이를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연구와 교과서로 소련사의 쟁점을 여러 세대에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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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46출생, 미 해군 복무와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학사
  • 1950하버드대학교 역사학 박사
  • 1950년대베닝턴 칼리지와 인디애나대학교에서 강의
  • 1956–1988버몬트대학교 역사학 교수
  • 1960『혁명의 양심』 출간
  • 1967『붉은 10월』 출간
  • 1973–1982민주당 소속 버몬트주 상원의원
  • 1992미국 슬라브·동유럽 연구 학회 회장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

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문학·예술 미국 러시아 1926–2011 ○ 결장암

스탈린의 외동딸이자 크렘린을 버린 최초의 목격자

201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는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 — 문학 공부를 거부하고 카플레르를 체포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의 외동딸로, 1967년 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크렘린 내부를 서방에 최초로 증언한 회고록으로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아버지의 사적 면모와 소비에트 지배층의 삶을 폭로한 기록으로 평가되며, 이후 귀환과 재망명을 거듭하면서도 평생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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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 졸업
  • 1954문헌학 후보학위 취득
  • 1956–1967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번역가
  • 1967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출간
  • 1978미국 시민권 취득, 라나 피터스로 개명
  • 1984–1986소련 귀환 후 재차 미국으로 이주

비탈리 이바노비치 보로트니코프

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тник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6–2012 ○ 자연사

러시아를 떼어내지 않으려 했던 RSFSR의 마지막 수반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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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60쿠이비셰프 항공공장 기술자 → 당위원회 서기
  • 1961–67쿠이비셰프 주 당 서기 → 제2서기 → 주 집행위 의장
  • 1971–75보로네시 주 당 제1서기
  • 1975–79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9–82주쿠바 소련 대사
  • 1982–83크라스노다르 변경주 당 제1서기: 부패 척결
  • 1983–88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정위원
  • 1988–90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루드비크 바출리크

Ludvík Vaculík
문학·예술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15 ○ 자연사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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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6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 1959–1965체코슬로바키아 방송 청년 프로그램 편집자
  • 1965–1969『리테라르니 노비니』(후에 『리테라르니 리스티』) 편집자
  • 1967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 연설로 당에서 축출
  • 1968「이천 마디 말」 선언문 작성 및 발표
  • 1969–1989출판 금지, 지하 출판 활동
  • 1973–1990사미즈다트 출판사 페틀리체 설립·운영
  • 1977헌장 77 서명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
정부·행정 쿠바 국가기관 쿠바 쿠바 1926–2016 ○ 자연사

서반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고 47년간 제국주의에 맞선 지도자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 몬카다 재판 변론(1953)

서반구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쿠바 혁명가. 몬카다 병영 습격으로 바티스타 독재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고, 1959년 게릴라전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47년간 미국의 봉쇄와 압력 속에서도 사회주의 쿠바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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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몬카다 병영 공격 —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 1954법정 최후진술을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로 비밀 출간
  • 1956–1959그란마 호 상륙, 시에라마에스트라 게릴라전
  • 1959바티스타 정권 전복 — 혁명정부 수립
  • 1961–1962피그스만 격퇴, 미사일 위기
  • 1976–2008국가평의회 의장
  • 2008–2016라울에게 이양, 2016년 사망

브세볼로드 세라피모비치 무라홉스키

Всеволод Серафимович Мураховский
농업·토지정책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6–2017 ↓ 퇴임 1989

고스아그로프롬의 초대 의장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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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89국가농공위원회 의장

발렌틴 미하일로비치 팔린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Фалин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양보에 맞섰던 소련 최고의 독일 전문가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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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2독일 내 소련통제위원회 근무
  • 1952–1958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 1959–1971외무부 제3유럽(독일)부장, 그로미코 보좌관, 흐루쇼프 연설문 작성
  • 1971–1978주서독 소련 대사
  • 1978–1982CPSU 중앙위 국제정보부 제1부부장
  • 1983–1986『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실각기)
  • 1986–1988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8–1991CPSU 중앙위 국제부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1992–2000함부르크대학 평화연구·안보정책연구소 교수
  • 2000–2018모스크바 거주,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 강의

누온 체아

នួន ជា
정치·당 지도 캄푸치아 공산당 캄보디아 캄보디아 1926–2019 ○ 복역 중 병사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2인자'

2018년 11월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 계류 중이던 2019년 8월 4일 복역 중 사망했다. 최고재판부는 판결을 무효로 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원심 판단 기록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혁명가로 캄푸치아 공산당(크메르루주)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였다. 폴 포트의 '2인자'로 불렸고 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과 정부수반 대리를 지냈다. 2014년 반인륜범죄로, 2018년 11월 16일 베트남인·참 집단학살과 제네바협약 중대 위반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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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98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 겸 최고 이념가
  • 1970북베트남의 캄보디아 개입 교섭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 1976–1979민주캄푸치아 인민대표의회 의장, 정부수반 대리
  • 199812월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 20079월 19일 체포되었다
  • 20148월 7일 사건 002/01에서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2016년 11월 23일 항소가 기각되었다
  • 201811월 16일 사건 002/02에서 참·베트남인 집단학살 등 유죄를 선고받고 두 종신형이 하나로 병합되었다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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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장쩌민

江泽民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26–2022 ○ 자연사

1989년 상하이에서 발탁된 「핵심」, 톈안먼 이후의 중국을 시장경제와 「3개 대표」로 이끈 총서기

1989년 톈안먼 진압 뒤 상하이에서 발탁된 타협의 인물로, 3세대의 「핵심」이 되어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장쑤 출신 전기공학자로 소련 자동차공장에서 연수했고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1989년 시위 때 상하이의 자유주의 신문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하고 시위를 큰 유혈 없이 수습해 6월 자오쯔양 대신 총서기로 발탁되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뒤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당의 목표로 삼았고 국유기업 개혁과 WTO 가입, 홍콩 반환을 이끌었다. 2002년 총서기, 2004년 군사위 주석에서 물러나며 「3개 대표」론으로 자본가의 입당을 열었다. 2022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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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2002중공 중앙 총서기
  • 1993–2003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라피크 니쇼노비치 니쇼노프

Rafiq Nishonovich Nishonov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6–2023 ↓ 퇴임 1991

소련 말기의 마지막 민족소비에트 의장

그의 이름 '라피크'는 아랍어로 '동지'를 뜻한다. 고르바초프가 그를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발탁하자, 우크라이나 콤소몰 서기 발레리 치부흐는 '고르바초프의 개인 라피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즈베크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타슈켄트 시당과 공화국 외무장관을 거쳐 1988년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라시도프 목화 스캔들 이후 공화국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듬해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에 발탁되었다. 연방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도 다민족 국가의 마지막 의회를 이끈 우즈베크 출신의 최고위 연방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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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1970s우즈베크 공화국 외교·당 행정에서 성장
  • 1986–1988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라시도프 이후 공화국 정리 국면 담당
  • 1989–1991민족소비에트 의장, 연방 해체기의 마지막 대표 라인
  • 19918월 쿠데타와 연방 붕괴 속에서 직위가 소멸
  • 1991 이후러시아에서 생활하며 소련 말기 공화국 엘리트로 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