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에른스트 마흐,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 이마누엘 칸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요제프 디츠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블라디미르 바자로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빅토르 체르노프,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블라디미르 넵스키, 프란츠 메링, 폴 라파르그, 카를 카우츠키, 표트르 스트루베 용어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학습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1장 서론을 대신하여: 1908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1710년의 관념론자, 2장 경험비판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I, 3장 물자체, 객관적 진리, 실천의 기준, 4장 물질과 경험, 인과성, 공간과 시간, 자유와 필연성, 5장 칸트를 오른쪽에서 비판한 사람들: 경험비판론의 동맹자와 계승자, 6장 자연과학의 최신 혁명과 철학적 관념론, 7장 경험비판론과 사적 유물론, 8장 결론과 두 서문: 철학의 당파 투쟁
제2장 경험비판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II
1. “물자체”, 또는 V. 체르노프가 Fr. 엥겔스를 반박하다
우리 마흐주의자들이 “물자체”에 관해 써 놓은 것은 어찌나 많은지, 그것을 한데 모으면 인쇄된 종이가 몇 무더기는 될 것이다. “물자체”는 보그다노프와 발렌티노프, 바자로프와 체르노프, 베르만과 유시케비치에게 진짜 bête noire다. 그들이 “물자체”에 퍼붓지 않은 “독한” 말이 없고, 쏟아붓지 않은 조롱이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 불운한 “물자체” 때문에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여기서부터 러시아 마흐주의 철학자들이 정치적 당파에 따라 갈리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흐주의자들은 모두 플레하노프의 “물자체”와 싸우면서, 플레하노프가 혼란에 빠져 칸트주의로 빗나갔다고, 그리고 엥겔스에게서 이탈했다고 비난한다. (첫 번째 비난에 관해서는 제4장에서 이야기하고, 두 번째 비난에 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겠다.) 인민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의 철천지원수인 마흐주의자 V. 체르노프 씨는 곧장 엥겔스를 상대로 “물자체”를 위한 원정에 나선다.
고백하기는 부끄럽지만 숨긴다면 죄가 될 터인데, 이번만큼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적대감이 빅토르 체르노프 씨를 우리의 당 동지이자 철학상의 논적들보다 더 원칙적인 문필상의 적수로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흐주의자들이 외교적으로 엥겔스를 옆으로 제쳐 두고, 포이어바흐를 완전히 무시하며, 오로지 플레하노프 주위만 맴돈 것은 오직 떳떳하지 못한 양심(아니면 거기에 유물론에 대한 무지까지 덧붙여서?) 때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맴돌기, 스승의 견해를 정면으로 검토하는 일은 비겁하게 피하면서 엥겔스의 제자에게 트집이나 잡는 지루하고 하찮은 물어뜯기다. 그리고 이 간략한 메모의 과제는 마흐주의의 반동성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의 올바름을 보여 주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흐주의자들과 플레하노프 사이의 실랑이는 옆으로 제쳐 두고, 경험비판론자 V. 체르노프 씨가 반박하는 엥겔스에게로 곧장 눈을 돌리겠다. 그의 『철학적·사회학적 연구』(모스크바, 1907 — 몇 편을 빼고는 1900년 이전에 쓴 논문들을 모은 논문집)에 실린 「마르크스주의와 초월철학」이라는 논문은 마르크스를 엥겔스와 대립시키려는 시도, 그리고 엥겔스를 “소박-독단적 유물론”, “가장 조야한 유물론적 독단”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곧장 시작한다(29쪽과 32쪽). V. 체르노프 씨는 칸트의 물자체와 흄의 철학적 노선에 반대하는 엥겔스의 논의를 “충분한” 본보기라고 선언한다. 우리도 바로 이 논의에서 시작하겠다.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을 기본적인 철학 경향이라고 선언한다. 유물론은 자연을 일차적인 것으로, 정신을 이차적인 것으로 보며, 존재를 첫째 자리에, 사유를 둘째 자리에 놓는다. 관념론은 그 반대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여러 학파” 철학자들이 갈라서는 “두 개의 커다란 진영”의 이 근본적 차이를 엥겔스는 모든 것의 초석으로 삼으며,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표현을 다른 의미로 쓰는 자들을 “혼란”에 빠졌다고 직접 비난한다.
“모든 철학의 최고 문제”, “모든 철학, 특히 근대 철학의 위대한 근본 문제”는 — 엥겔스의 말에 따르면 — “사유가 존재에 대해, 정신이 자연에 대해 가지는 관계의 문제”이다. 이 기본 문제에 따라 철학자들을 “두 개의 커다란 진영”으로 나눈 뒤, 엥겔스는 기본 철학 문제에 “또 다른 측면”도 있다고 지적한다.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이 세계 자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리의 사유는 현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현실 세계에 관한 우리의 표상과 개념 속에서 현실의 올바른 반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55]
“철학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답한다”고 엥겔스는 말한다. 그는 여기에 모든 유물론자들뿐 아니라 가장 일관된 관념론자들까지 포함시키는데, 예컨대 절대적 관념론자 헤겔이 그렇다. 헤겔은 현실 세계를 어떤 영원 이전의 “절대 이념”이 실현된 것으로 여겼으며, 인간 정신은 현실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면서 그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 세계를 통해 “절대 이념”을 인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와 나란히”(다시 말해 유물론자들 및 일관된 관념론자들과 나란히) “세계의 인식 가능성, 또는 적어도 남김없는 인식의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철학자들이 여럿 있다. 최근의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흄과 칸트가 이에 속하며, 그들은 철학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V. 체르노프 씨는 엥겔스의 이 말을 인용한 뒤 싸움에 뛰어든다. 그는 “칸트”라는 말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단다.
“1888년에 칸트와 특히 흄 같은 철학자들을 ‘최근의’ 철학자라고 부른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라면 코엔, 랑게, 릴, 라스, 리프만, 헤링 등의 이름을 듣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엥겔스는 ‘최근’ 철학에 그다지 밝지 않았던 모양이다”(33쪽, 주석 2).
V. 체르노프 씨는 언제나 그답다. 경제 문제에서도 철학 문제에서도 그는 똑같이 투르게네프의 보로실로프를 닮아서, 때로는 무식한 카우츠키를[56], 때로는 무식한 엥겔스를 그저 “학식 있는” 이름들을 들먹이는 것만으로 섬멸한다! 다만 곤란한 점은 체르노프 씨가 거론한 권위자들이 모두 바로 그 신칸트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L. 포이어바흐』 바로 그 쪽에서 이들을 오래전에 논박된 칸트와 흄의 학설이라는 시체를 되살리려 애쓰는 이론적 반동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감무쌍한 체르노프 씨는 엥겔스가 바로 이 (마흐주의에게) 권위 있는 갈팡질팡 교수들을 자신의 논의로 논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헤겔이 이미 흄과 칸트에 맞서 “결정적인” 논거를 제시했고 포이어바흐가 이 논거를 깊이 있다기보다는 재치 있는 고찰로 보충했다고 지적한 뒤, 엥겔스는 이렇게 이어 간다.
“이것들을, 그리고 다른 모든 철학적 기벽(또는 망상, Schrullen)을 가장 결정적으로 논박하는 것은 실천, 곧 실험과 산업이다. 우리가 자연의 어떤 현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 조건들로부터 그것을 불러일으키며 게다가 그것을 우리의 목적에 봉사하게 함으로써 그 현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칸트의 파악할 수 없는”(또는 불가해한: unfassbaren — 이 중요한 낱말은 플레하노프의 번역에서도 V. 체르노프 씨의 번역에서도 빠져 있다) “‘물자체’는 끝장난다. 동물과 식물의 몸속에서 만들어지는 화학 물질들은 유기 화학이 그것들을 하나씩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까지 그러한 ‘물자체’로 남아 있었다. 그로써 ‘물자체’는 ‘우리를 위한 사물’로 바뀌었다. 예컨대 꼭두서니의 염료인 알리자린이 그러한데, 우리는 이제 그것을 밭에서 기른 꼭두서니의 뿌리에서가 아니라 석탄 타르에서 훨씬 값싸고 간단하게 얻는다”(앞의 책, 16쪽).
V. 체르노프 씨는 이 논의를 인용하고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가엾은 엥겔스를 철저히 섬멸해 버린다. 들어 보라. “석탄 타르에서 알리자린을 ‘더 값싸고 간단하게’ 얻을 수 있다는 것에는 물론 어떤 신칸트주의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알리자린과 함께 같은 타르에서 그만큼 값싸게 ‘물자체’에 대한 논박까지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신칸트주의자들에게만 놀랍고 전대미문의 발견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엥겔스는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 정리를 거꾸로 뒤집어, 인식되지 않은 모든 것은 물자체라고 결론지은 모양이다…”(33쪽).
들어 보라, 마흐주의자 씨: 거짓말을 하더라도 정도껏 해야지! 당신은 바로 여기서, 대중이 보는 앞에서, 무슨 이야기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신이 “때려부수려는” 바로 그 엥겔스의 인용문을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첫째, 엥겔스가 “물자체에 대한 반박을 얻어낸다”는 것은 틀렸다. 엥겔스는 자기가 칸트의 포착할 수 없는(또는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를 반박한다고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말했다. 체르노프 씨는 사물이 우리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엥겔스의 유물론적 견해를 흐려 놓는다. 둘째, 칸트의 정리가 물자체는 인식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역(逆)” 정리는 인식 불가능한 것이 물자체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체르노프 씨는 인식 불가능한 것을 인식되지 않은 것으로 바꿔치기했으면서, 이런 바꿔치기로 자기가 또다시 엥겔스의 유물론적 견해를 흐려 놓고 왜곡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V. 체르노프 씨는 자기가 길잡이로 삼은 관제 철학의 반동가들에게 너무나 얼이 빠져서, 인용된 예에서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엥겔스를 향해 소란을 피우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흐주의의 대표자에게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지 풀어 설명해 보자.
엥겔스는 흄과 칸트 둘 다에게 함께 반박한다고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런데 흄에게는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 따위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 두 철학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현상”과 현상하는 것, 감각과 감각되는 것, 우리에 대한 사물과 “물자체”를 원칙적으로 갈라놓는다는 점이다. 다만 흄은 “물자체”에 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며, 그것에 관한 생각 자체를 철학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형이상학”으로(흄주의자들과 칸트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여긴다. 반면 칸트는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인식 불가능한 것”으로, 현상과 원칙적으로 다른 것으로, 원칙적으로 다른 영역, 즉 지식에는 접근할 수 없으나 신앙에는 열려 있는 “저편”(Jenseits)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선언한다.
엥겔스의 반박의 핵심은 무엇인가? 어제 우리는 석탄 타르 속에 알리자린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묻건대, 어제 석탄 타르 속에 알리자린은 존재했는가?
물론 그렇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현대 자연과학을 조롱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인식론적 결론이 나온다.
1) 사물은 우리 의식과 무관하게, 우리 감각과 무관하게, 우리 밖에 존재한다. 어제 석탄 타르 속에 알리자린이 존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어제 우리가 그 존재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고 이 알리자린으로부터 어떤 감각도 받지 못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2) 현상과 물자체 사이에는 원칙적 차이가 단연코 전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차이는 단지 인식된 것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것 사이에 있을 뿐이다. 그 둘 사이에 특별한 경계가 있다느니, 물자체가 현상의 “저편”에 있다느니(칸트), 또는 이런저런 부분에서 아직 인식되지 않았으나 우리 밖에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문제로부터 무슨 철학적 칸막이로 스스로를 막아 둘 수 있고 또 막아 두어야 한다느니(흄) 하는 철학적 날조들 — 이 모든 것은 공허한 헛소리요, Schrulle요, 억지 궤변이요, 꾸며 낸 이야기다.
3) 인식론에서도 다른 모든 과학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즉 우리의 인식을 완성되어 있고 불변인 것으로 전제하지 말고, 무지로부터 어떻게 지식이 생겨나는지,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지식이 어떻게 더 완전하고 더 정확한 지식이 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인간의 인식이 무지로부터 발전한다는 관점에 일단 서기만 하면, 여러분은 석탄 타르에서 알리자린을 발견한 것처럼 단순한 수백만의 사례들, 과학과 기술의 역사뿐 아니라 모든 사람 하나하나의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수백만의 관찰들이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곧 “물자체”가 “우리에 대한 사물”로 전화하는 것, 우리의 감각 기관이 이러저러한 대상으로부터 외부의 자극을 받을 때 “현상”이 생겨나는 것, —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대상이 우리의 감각 기관에 작용할 가능성을 이러저러한 장애물이 없앨 때 “현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유일하고 불가피한 결론, — 살아 있는 인간의 실천 속에서 모든 사람이 내리며 유물론이 의식적으로 자기 인식론의 기초로 삼는 결론, — 은 우리 밖에 우리와 독립하여 대상들, 사물들, 물체들이 존재하며 우리의 감각은 외부 세계의 상(像)이라는 것이다. 마흐의 반대 이론(물체는 감각 복합이다)은 한심한 관념론적 헛소리다. 그런데 체르노프 씨는 엥겔스를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보로실로프적 자질을 또 한 번 드러냈다. 엥겔스의 단순한 예가 그에게는 “이상하고 소박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는 현학자들의 날조만을 철학으로 여기며, 교수들의 절충주의와 일관된 유물론적 인식론을 구별할 줄도 모른다.
체르노프 씨의 이어지는 논의를 모두 검토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똑같이 거드름 부리는 헛소리다(유물론자들에게는 원자가 물자체라는 주장 같은 것이다!). 우리 주제와 관련된 것, 즉 엥겔스와 다르다고 하는 마르크스에 관한 논의(이것이 몇몇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 듯하다)만 짚어 두자. 문제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르크스의 두 번째 테제와, 플레하노프가 Diesseitigkeit라는 말을 번역한 방식이다.
그 두 번째 테제는 이러하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다. 인간은 실천 속에서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이편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고립된 사유의 현실성 또는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다.”
플레하노프의 번역에는 “사유의 이편성을 증명한다”(직역) 대신에 사유가 “현상의 이편에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자 V. 체르노프 씨는 이렇게 외친다. “엥겔스와 마르크스 사이의 모순은 지극히 간단하게 제거되었다”, “마치 마르크스가 엥겔스처럼 물자체의 인식 가능성과 사유의 피안성을 주장한 것처럼 되어 버린다”(앞의 책, 34쪽, 주).
문장 하나하나로 혼란의 심연을 쌓아 올리는 보로실로프를 상대해 보시라! 빅토르 체르노프 씨, 모든 유물론자가 물자체의 인식 가능성을 지지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무지다. 빅토르 체르노프 씨, 사유의 “대상적 진리성”(gegenständliche Wahrheit)이란 다름 아니라 사유가 참되게 반영하는 대상들(= “물자체”)의 존재를 뜻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테제의 바로 첫 문장을 건너뛴다면, 그것은 무지이거나 끝없는 부주의다. 빅토르 체르노프 씨, 플레하노프의 재서술(플레하노프는 번역이 아니라 재서술을 했다)에서 마르크스가 사유의 피안성을 옹호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무식이다. 인간의 사유를 “현상의 이편에” 멈춰 세우는 것은 흄주의자와 칸트주의자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유물론자에게, 버클리 주교가 섬멸하려 드는 17세기 유물론자들(「서론」을 보라)에게도, “현상”은 “우리에 대한 사물”이거나 “대상 그 자체”의 모사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플레하노프의 자유로운 재서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보로실로프식으로 말 달리듯 설쳐 대지 말고 마르크스의 논증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마르크스의 “테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려 하지 않거나 그럴 능력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되는 반면, 때로는 부르주아 저술가들, 철학 전문가들이 더 큰 성실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연구하면서 그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테제”를 검토한 그런 저술가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이 저술가는 알베르트 레비로, 포이어바흐에 관한 자신의 책 제2부 제3장을 포이어바흐가 마르크스에게 미친 영향을 고찰하는 데 할애했다[57]. 레비가 포이어바흐를 어디서나 올바로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가 통상적인 부르주아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어떻게 비판하는지는 따지지 않고, 마르크스의 유명한 “테제”의 철학적 내용에 대한 알베르트 레비의 평가만 인용하겠다. 제1테제에 관해 A. 레비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는 한편으로 그 이전의 모든 유물론 및 포이어바흐와 더불어, 사물에 관한 우리의 표상에는 우리 외부의 실재적이고 개별적인(독립적인, distincts) 대상이 대응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독자가 보다시피, 알베르트 레비에게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뿐 아니라 모든 유물론, “그 이전의 모든” 유물론의 기본 입장, 즉 우리 외부의 실재적 대상을 인정하고 그 대상에 우리의 표상이 “대응한다”는 입장이 단번에 분명해졌다. 모든 유물론 일반에 해당하는 이 기초 상식을 모르는 것은 러시아 마흐주의자들뿐이다. 레비는 계속한다.
“…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유물론이 능동적 힘들의 의의를 평가하는 일을 관념론에 맡겨 둔 것을 유감스러워한다”(즉 인간의 실천). “마르크스의 생각에 따르면 이 능동적 힘들을 관념론에게서 빼앗아 유물론적 체계에도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이 힘들에는 관념론이 인정할 수 없었던 실재적이고 감성적인 성격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표상에 우리 외부의 실재적 대상이 대응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상적 활동에도 우리 외부의 실재적 활동, 즉 사물의 활동이 대응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는 이론적 인식을 통해서뿐 아니라 실천적 활동을 통해서도 절대적인 것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론과 나란히 설 수 있게 해 주는 존엄과 위대함을 얻는다. 혁명적 활동은 이제부터 형이상학적 의의를 얻는다…”.
A. 레비는 교수다. 그런데 점잖은 교수라면 유물론자들을 형이상학자라고 욕하지 않을 수 없다. 관념론자, 흄주의자, 칸트주의자 교수들에게는 모든 유물론이 “형이상학”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은 페노멘(현상, 우리에 대한 사물) 뒤에서 우리 외부의 실재적인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 레비가 마르크스에게는 인류의 “현상적 활동”에 “사물들의 활동”이 대응한다고, 즉 인류의 실천은 (흄주의적·칸트주의적 의미에서) 현상적 의의만이 아니라 객관적·실재적 의의도 지닌다고 말할 때, 그는 본질적으로 옳다. 실천의 기준은, 우리가 해당 부분(제6절)에서 자세히 보여 주겠지만, 마흐에게서와 마르크스에게서 전혀 다른 의의를 지닌다. “인류는 절대적인 것에 참여한다”, 이것은 다음을 뜻한다. 인간의 인식은 절대적 진리를 반영하며(아래 제5절 참조), 인류의 실천은 우리의 표상들을 검증하면서 그 표상들 가운데 절대적 진리에 부합하는 것을 확증한다. A. 레비는 계속한다.
“… 이 지점에 이르러 마르크스는 자연히 비판의 반론에 부딪힌다. 그는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했고, 우리의 이론은 그 물자체를 인간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통상적인 반론을 피할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에게 번역의 정확성을 보증하는가? 인간의 사유가 당신에게 객관적 진리를 준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이 반론에 마르크스는 두 번째 테제에서 답한다”(p. 291).
독자가 보다시피 A. 레비는 마르크스가 물자체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
2. “초월”에 관하여, 또는 V. 바자로프가 엥겔스를 “가공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는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은 엥겔스의 가장 단호하고 명확한 발언 가운데 하나는 외교적으로 비켜 갔지만, 그 대신 그의 다른 발언은 완전히 체르노프식으로 “가공했다”. 인용문의 뜻을 왜곡하고 비튼 것을 바로잡는 일이 아무리 지루하고 아무리 고되더라도,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에 관해 말하려는 사람이라면 이 일을 피할 수 없다.
다음은 바자로프가 엥겔스를 가공한 것이다.
「사적 유물론에 관하여」[58]라는 글에서 엥겔스는 영국 불가지론자들(흄 계열의 철학자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의 불가지론자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우리가 우리의 감관을 매개로 받아들이는 통보들(Mitteilungen)에 기초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니 우리 마흐주의자들을 위해 적어 두자. 불가지론자(흄주의자) 역시 감각에서 출발하며 그 밖의 어떤 지식의 원천도 인정하지 않는다. 불가지론자는 순전한 “실증주의자”다. “최신 실증주의” 옹호자들은 참고하시라!
“… 그러나, — 그(불가지론자)는 덧붙인다, — 우리의 감관이 그것이 지각하는 사물들의 정확한 모상(Abbilder)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나아가 그는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가 사물이나 그 속성에 관해 말할 때, 실제로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자기가 확실하게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그 사물 자체나 그 속성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감관에 일으킨 인상들일 뿐이라고…”
엥겔스는 여기서 철학적 방향의 어떤 두 노선을 서로 대립시키는가? 한 노선은 감각이 우리에게 사물의 참된 상(像)을 준다는 것, 우리가 바로 그 사물들을 안다는 것, 외부 세계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지론자가 동의하지 않는 유물론이다. 그러면 불가지론자 노선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감각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현상의 이쪽 편에 멈추어 서서 감각의 한계 밖에서는 어떤 “확실한” 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물들(즉 물자체, 버클리가 논쟁했던 유물론자들의 말대로 하면 “그 자체로서의 객체”)에 관해서 우리는 어떤 확실한 것도 알 수 없다 — 이것이 불가지론자의 지극히 명확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말하는 그 논쟁에서 유물론자는 물자체의 존재와 그 인식 가능성을 주장한다. 불가지론자는 물자체에 관한 생각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것에 관해 어떤 확실한 것도 알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엥겔스가 서술한 불가지론자의 관점과 마흐의 관점은 무엇이 다른가? “요소”라는 “새로운” 말인가? 그러나 명명법이 철학적 노선을 바꿀 수 있다거나, “요소”라고 불린 감각은 더 이상 감각이 아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한 유치함이다! 아니면 동일한 요소들이 한 연관에서는 물리적인 것을, 다른 연관에서는 심리적인 것을 이룬다는 “새로운” 사상인가? 그러나 엥겔스가 말하는 불가지론자도 역시 “바로 그 사물들” 대신에 “인상”을 끼워 넣는다는 것을 그대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그렇다면 사태의 본질상 불가지론자 역시 물리적 “인상”과 심리적 “인상”을 구별하는 것이다! 차이는 이번에도 오로지 명명법에 있을 뿐이다. 마흐가 물체는 감각 복합이다라고 말할 때, 마흐는 버클리주의자다. 마흐가 “요소”(감각)는 한 연관에서는 물리적일 수 있고 다른 연관에서는 심리적일 수 있다고 “정정”할 때, 마흐는 불가지론자, 흄주의자다. 마흐는 자기 철학에서 이 두 노선을 벗어나지 못하며, 자기가 유물론도 관념론도 참으로 “넘어섰다”는 이 혼란한 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극도로 순진한 사람뿐이다.
엥겔스는 자기 서술에서 일부러 이름을 들지 않는다. 그는 흄주의의 개별 대표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직업 철학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군가가 용어나 논증에 가한 하찮은 변형을 독창적 체계라고 부르기를 몹시 좋아한다) — 흄주의의 전체 노선을 비판한다. 엥겔스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을 비판하며, 모든 흄주의자가 유물론에서 벗어나는 그 기본적인 것을 붙잡는다. 그러므로 밀도, 헉슬리도, 마흐도 엥겔스의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가 물질은 감각의 항구적 가능성이라고 말하든(J. St. 밀에 따라), 물질은 “요소” — 감각의 다소 안정적인 복합이라고 말하든(E. 마흐에 따라) — 우리는 불가지론이나 흄주의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두 관점,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두 정식은 모두 엥겔스가 서술한 불가지론에 포괄된다. 불가지론자는 감각 너머로 나아가지 않으며, 감각의 원천이나 원본 등에 관해서는 어떤 확실한 것도 알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마흐가 앞서 말한 문제에서 자신이 밀과 갈라지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바로 마흐가 엥겔스가 정교수들에게 내린 규정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Flohknacker, 신사 양반들, 그대들은 근본적인 반쪽짜리 관점을 버리는 대신 자잘한 수정이나 덧붙이고 명명법이나 바꾸면서 벼룩이나 짓눌러 잡은 것이다!
그러면 유물론자 엥겔스는 — 논문 서두에서 엥겔스는 자기 유물론을 불가지론과 공공연히, 단호하게 대립시킨다 — 위에서 서술된 논거들을 어떻게 반박하는가?
“…말할 나위도 없다. — 그는 말한다. — 이것은 논증만으로는 반박하기 어려워 보이는 관점이다. 그러나 인간은 논증하기 전에 먼저 행동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은 인간의 사변이 이 난점을 지어내기 훨씬 전에 이미 그것을 해결했다. The proof of the pudding is in the eating”(푸딩의 증명, 곧 푸딩의 시험·검사는 그것을 먹어 보는 데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서 지각하는 속성에 따라 그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순간, —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틀림없는 시험에 부친다. 만일 이 지각이 거짓이었다면, 그 사물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는 우리의 판단도 필연적으로 거짓일 것이며, 그렇게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피하게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을 이룬다면, 곧 그 사물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표상과 일치하며 그것을 사용하면서 기대했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 그때 우리는 이 한계 안에서 사물과 그 속성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과 일치한다는 긍정적 증명을 얻는다….”
이처럼 유물론적 이론, 곧 사유에 의한 대상 반영의 이론이 여기에 더없이 명료하게 서술되어 있다. 우리 밖에 사물이 존재한다. 우리의 지각과 표상은 그 사물의 모상이다. 이 모상들을 검증하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가려내는 일은 실천이 해 준다. 그러나 엥겔스의 말을 조금 더 들어 보자(바자로프는 여기서 엥겔스의, 또는 플레하노프의 인용을 끊어 버린다. 엥겔스 본인과는 따져 볼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반대로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대개 머지않아 그 잘못의 원인을 찾아낼 줄 안다. 우리는 우리의 시험의 기초가 된 지각이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피상적이었거나, 사태의 실상으로는 정당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지각들의 결과와 결합되어 있었음을 발견한다”(『사적 유물론』에 실린 러시아어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제대로 발달시키고 사용하는 한, 우리의 활동을 올바르게 얻어지고 사용된 지각이 정해 준 경계 안에 묶어 두는 한, — 그런 한 우리는 언제나 우리 행위의 성공이 우리의 지각과 지각된 사물의 대상적(gegenständlich) 본성이 일치(Übereinstimmung)한다는 증명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는 한, 과학적으로 검증된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본성상 현실에서 벗어난 외부 세계의 표상을 우리 두뇌 속에 산출한다거나, 외부 세계와 그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 지각 사이에 타고난 부조화가 존재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신칸트주의적 불가지론자가 나타나 말한다….”
신칸트주의자들의 논거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다만 지적해 두자.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아니 그저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엥겔스가 여기서 서술하는 것이 모든 마흐주의자가 언제 어디서나 맞서 싸우는 바로 그 유물론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제 바자로프가 엥겔스를 손질하는 수법을 보라.
“여기서 엥겔스는 실제로 — 바자로프는 우리가 표시해 둔 인용 대목을 두고 이렇게 쓴다 — 칸트의 관념론에 반대하여 나선다….”
사실이 아니다. 바자로프는 혼동하고 있다. 그가 인용했고 우리가 더 온전하게 인용한 그 구절에는 칸트주의에 관해서도, 관념론에 관해서도 단 한마디도 없다. 바자로프가 엥겔스의 글 전체를 실제로 읽었다면, 엥겔스가 신칸트주의와 칸트의 노선 전반을 거론하는 것은 그다음 단락에 가서야 비로소, 즉 우리가 인용을 끊은 바로 그 자리에서라는 것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리고 바자로프가 자신이 직접 인용한 그 구절을 주의 깊게 읽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면, 여기서 엥겔스가 반박하는 불가지론자의 논거 속에 관념론적인 것도 칸트주의적인 것도 조금도 없음을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관념론은 철학자가 사물이 우리의 감각이라고 말할 때에야 비로소 시작되고, 칸트주의는 철학자가 물자체는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할 때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자로프는 칸트주의를 흄주의와 혼동했다. 그가 이렇게 혼동한 까닭은 그 자신이 마흐주의 분파의 반(半)버클리주의자, 반(半)흄주의자이기에 칸트주의에 대한 흄주의적 반대와 유물론적 반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이 점은 아래에서 상세히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아! — 바자로프는 계속한다 — 그의 논증은 칸트의 철학 못지않게 플레하노프의 철학에도 겨누어져 있다. 플레하노프-오르토독스 학파에는, 이미 보그다노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의식을 둘러싼 숙명적인 오해가 있다. 플레하노프에게는 — 모든 관념론자에게 그러하듯이 — 감각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 즉 의식되는 모든 것이 ‘주관적’이며, 오직 사실적으로 주어진 것에서만 출발하는 것은 곧 유아론자가 되는 것이고, 실재적 존재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의 한계 밖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리프크네히트가 참된 러시아 인민주의자였다고 장담하던 체르노프의 방식 그대로다! 플레하노프가 엥겔스에게서 벗어난 관념론자라면, 엥겔스의 지지자를 자처하는 그대는 어째서 유물론자가 아닌가? 이것은 그야말로 한심한 속임수다, 바자로프 동지여! 그대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마흐주의적 용어로 불가지론과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구별을 흐리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 “사실적으로 주어진 것”이란 마흐주의자, 내재론자, 그 밖의 철학상 반동가들의 혼란이며, 불가지론자(마흐에게서는 때로 관념론자도)가 유물론자의 옷을 걸치고 나서는 가장무도회라는 것을 깨달으라. 유물론자에게는 외부 세계가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의 감각은 그 외부 세계의 상(像)이다. 관념론자에게는 감각이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으며, 이때 외부 세계는 “감각 복합”으로 선언된다. 불가지론자에게도 감각이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지만, 불가지론자는 외부 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유물론으로도, 세계를 우리의 감각으로 인정하는 관념론으로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플레하노프에 따르면) “실재적 존재”는 “직접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의 한계 밖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그대의 표현은 그대의 마흐주의적 입장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무의미한 소리다. 그러나 그대가 어떤 입장이든, 마흐주의적 입장이든 취할 권리가 있다 해도, 엥겔스에 관해 말하는 이상 엥겔스를 왜곡할 권리는 없다. 그런데 엥겔스의 말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유물론자에게 실재적 존재는 인간의 “감각적 지각”, 인상, 표상의 한계 밖에 놓여 있는 반면, 불가지론자에게는 이 지각들의 한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자로프는 “직접적으로”(또는 사실적으로) 주어진 것이 지각하는 자아와 지각되는 환경을 그 악명 높은 “불가분의” 조정 속에서 하나로 묶는다는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와 슈페의 말을 믿고, 이 허튼소리를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유물론자 엥겔스에게 슬쩍 떠넘기려 애쓰고 있다!
“… 위에 인용한 엥겔스의 글은 마치 엥겔스가 이 관념론적 오해를 가장 대중적이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일소하려고 일부러 쓴 것처럼 보인다…”.
바자로프가 아베나리우스 학파에서 배운 것은 괜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아베나리우스의 신비화를 이어 가고 있다. 관념론과 싸운다는 구실로(여기서 엥겔스는 관념론에 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관념론적 “동격”을 밀수해 들여오는 것이다. 제법이다, 바자로프 동무!
“… 불가지론자는 묻는다. 우리의 주관적 감관이 사물에 대한 올바른 표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헷갈리고 있다, 바자로프 동무! 엥겔스는 “주관적” 감관 같은 터무니없는 말을 스스로 하지도 않고, 자기 적인 불가지론자에게조차 뒤집어씌우지 않는다. 인간의 감관, 즉 “주관적” 감관 말고 다른 감관은 — 우리는 도깨비가 아니라 인간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으니까 —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또다시 엥겔스에게 마흐주의를 슬쩍 끼워 넣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불가지론자는 감관을, 더 정확히 말해 감각을 오로지 주관적인 것으로 여기는데(불가지론자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아베나리우스와 함께 객체를 주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속에 “동격화했다”는 것이다. 제법이다, 바자로프 동무!
“… 그러나 당신은 무엇을 ‘올바르다’고 부르는가? — 엥겔스가 반박한다. — 올바른 것은 우리의 실천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경험으로 확인되는 한, 그것들은 ‘주관적’이지 않다. 즉 자의적이거나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올바르고 실재적이다…”.
헷갈리고 있다, 바자로프 동무! 그대는 우리의 감각, 지각, 표상 밖에 사물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바로 그” 사물에 관한 우리 표상이 올바른지를 가리는 기준의 문제로 바꿔치기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대는 첫 번째 문제를 두 번째 문제로 가리고 있다. 그러나 엥겔스는 자신을 불가지론자와 갈라놓는 것이 상(像)의 올바름에 대한 불가지론자의 의심만이 아니라, 사물 그 자체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사물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불가지론자의 의심이기도 하다고 똑바로, 분명하게 말한다. 바자로프에게는 무엇 때문에 이런 바꿔치기가 필요했는가? 감관에 작용하여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 우리 의식 밖에 존재하는가라는, 유물론에게(그리고 유물론자로서의 엥겔스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흐리고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문제에 긍정적으로 답하지 않고서는 유물론자가 될 수 없지만, 감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상(像)의 올바름의 기준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지면서도 유물론자일 수 있다.
그리고 바자로프는 불가지론자와 논쟁하는 자리에서는 어리석고 무지한 정식, 곧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경험”으로 확인된다는 정식을 엥겔스에게 덮어씌울 때 또다시 헷갈리고 있다. 엥겔스는 여기서 이 말을 쓰지 않았고 쓸 수도 없었다. 관념론자 버클리도, 불가지론자 흄도, 유물론자 디드로도 경험을 내세운다는 것을 엥겔스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실천에서 사물과 관계하는 한계 안에서는 사물과 그 속성에 관한 표상이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과 일치한다. ‘일치한다’는 것은 ‘상형문자’라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일치한다는 것은, 주어진 한계 안에서 감각적 표상이 곧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바자로프의 강조) 뜻이다…”.
대미를 장식하는구나! 엥겔스는 마흐 식으로 손질되고 구워져서 마흐주의 소스를 뒤집어쓰고 식탁에 올랐다. 다만 우리의 지극히 존경스러운 요리사들이 목이 메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감각적 표상이 바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마흐주의의 근본적인 터무니없음, 근본적인 혼동과 허위다. 이 철학의 나머지 온갖 헛소리가 바로 여기서 기어 나왔고, 노골적인 반동분자이자 성직자주의의 설교자인 내재론자들이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에게 입을 맞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V. 바자로프가 아무리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아무리 꾀를 부리고, 아무리 외교술을 부려 까다로운 대목들을 피해 갔어도, 결국에는 말실수를 하여 자신의 마흐주의적 본성을 전부 드러내고 말았다! “감각적 표상이 바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정’의 안개 속에 숨어 있던 흄주의 또는 심지어 버클리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론적 거짓말이거나 불가지론자의 얼버무림이다, 바자로프 동지여. 감각적 표상은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의 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러시아어 낱말 일치하다의 중의성에 매달리려 하는가? 그대는 사정을 모르는 독자에게 여기서 ‘일치하다’가 ‘대응하다’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믿게 하려는가? 그것은 엥겔스를 마흐식으로 위조하는 작업 전체를 인용문의 의미 왜곡 위에 세우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독일어 원문을 보라. 그러면 “stimmen mit”, 즉 대응한다, 화합한다는 말을 보게 될 것이다 — 뒤의 번역이 직역인데, Stimme가 목소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stimmen mit”라는 말은 ‘동일한 것이다’라는 의미의 일치하다를 뜻할 수 없다. 게다가 독일어를 모르더라도 엥겔스를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엥겔스가 자기 논의 전체에 걸쳐 시종일관 ‘감각적 표상’을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의 상(Abbild)으로 다룬다는 것, 따라서 러시아어로 ‘일치하다’라는 말은 오로지 대응, 화합 따위의 뜻으로만 쓸 수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며, 분명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 표상이 바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다”라는 사상을 엥겔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마흐주의적 왜곡, 유물론이라 속여 불가지론과 관념론을 슬쩍 끼워 넣는 짓의 그야말로 걸작이니, 바자로프가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묻건대, 미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감각적 표상이(어떤 한계 안에서든 그것은 상관없다) 바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지구는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지구는 우리의 감각적 표상과 ‘일치’(동일한 것이라는 의미에서)할 수도 없고, 그것과 불가분의 조정 관계에 있을 수도 없으며, 다른 연관 속에서 감각과 동일한 ‘요소들의 복합’일 수도 없다. 지구는 인간도, 감각 기관도, 감각을 지니는 물질의 속성이 조금이라도 뚜렷이 드러나는 고등 형태로 조직된 물질도 없었을 때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이 주장의 관념론적 터무니없음을 덮는 데 쓰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제1장에서 검토한 ‘조정’, ‘투입’, 새로 발견된 세계 요소들에 관한 저 억지 이론들이다. 바자로프가 무심코 부주의하게 내뱉은 정식은, 그렇지 않았다면 현학적이고 사이비 과학적인 교수식 잔재주 더미 밑에서 파내야 했을 이 터무니없음을 명료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바자로프 동지여, 그대에게 영광을! 우리는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기념비를 세워 줄 것이다. 한쪽 면에는 그대의 명언을 새기고, 다른 쪽 면에는 이렇게 새길 것이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마흐주의를 매장한 러시아 마흐주의자에게!
바자로프가 앞의 인용문에서 건드린 두 가지 문제, 즉 불가지론자(마흐주의자도 여기에 포함된다)와 유물론자에게서의 실천의 기준, 그리고 반영(또는 모사) 이론과 상징(또는 상형문자) 이론의 차이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기로 한다. 지금은 바자로프의 인용을 조금 더 이어 가 보자.
“… 그러면 이 경계들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에 관해 엥겔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서도 플레하노프 인식론의 기초를 이루는 그 ‘초월’, 즉 감각적으로 주어진 세계의 한계 밖으로 나아가는 일을 감행하려는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이’ 경계 너머란 말인가? 나와 환경, 주체와 객체를 불가분하게 융합한다는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의 그 ‘동격’의 경계 너머인가? 바자로프가 제기하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만일 그가 질문을 사람답게 제기했다면, 외부 세계가 인간의 감각·지각·표상의 ‘경계 너머’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월’이라는 말이 바자로프의 정체를 거듭거듭 드러낸다. 이것은 특유하게 칸트적이고 흄적인 ‘술수’, 즉 현상과 물자체 사이에 원리적 경계를 긋는 일이다. 현상으로부터, 원한다면 우리의 감각·지각 등으로부터 지각 밖에 존재하는 사물로 넘어가는 것은 초월이며, 이 초월은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는 허용된다고 칸트는 말한다. 초월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고 흄은 반박한다. 그리고 칸트주의자들은 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물론자들을 초월적 실재론자, 즉 한 영역에서 그와 원리적으로 다른 영역으로 불법적인 이행(라틴어로 transcensus)을 감행하는 ‘형이상학자’라고 부른다. 칸트와 흄의 반동적 노선을 따르는 현대 철학 교수들에게서는 (보로실로프-체르노프가 열거한 이름들만 보더라도) 유물론이 ‘형이상학적’이며 ‘초월’을 저지른다는 이 비난이 천 가지 가락으로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자로프는 그 말과 사고방식을 반동적 교수들에게서 넘겨받아 ‘최신 실증주의’의 이름으로 뽐내며 내세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초월’이라는 발상 자체, 즉 현상과 물자체 사이의 원리적 경계라는 발상이 불가지론자(흄주의자와 칸트주의자도 여기에 포함된다)와 관념론자의 터무니없는 발상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엥겔스의 알리자린 예로 이것을 설명했으며, 포이어바흐와 J. 디츠겐의 말로 다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바자로프가 엥겔스를 ‘손질’한 것을 끝까지 살펴보자.
“… 엥겔스는 『반뒤링론』의 한 대목에서 감각 세계 밖의 ‘존재’는 ‘offene Frage’, 즉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기는커녕 제기하기 위한 자료조차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질문이라고 말한다.”
바자로프는 이 논거를 독일 마흐주의자 프리드리히 아들러를 따라 되풀이한다. 그리고 이 마지막 예는 “바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인 ‘감각적 표상’보다도 더 고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반뒤링론』(독일어 제5판) 31쪽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의 통일성은 그 존재에 있지 않다. 비록 그 존재가 그 통일성의 전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계는 통일적일 수 있기 전에 먼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우리의 시야(Gesichtskreis)가 끝나는 경계에서부터는 대체로 열린 질문(offene Frage)이다. 세계의 실제적 통일성은 그 물질성에 있으며, 이 물질성은 요술쟁이 같은 문구 몇 마디가 아니라 철학과 자연과학의 길고 어려운 발전에 의해 증명된다.”
우리 요리사가 새로 내놓은 이 파테를 한번 보라. 엥겔스는 우리의 시야가 끝나는 경계 너머의 존재, 예컨대 화성에 사는 사람들의 존재 따위를 말하고 있다. 그런 존재가 실제로 미해결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바자로프는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 인용문을 온전히 제시하지 않고, 미해결인 것이 “감각적 세계 밖의 존재”에 관한 문제!!라는 듯이 엥겔스의 말을 바꿔 전한다. 이것은 터무니없음의 극치이며, 여기서 엥겔스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은 철학 교수들의 견해다. 바자로프는 이 교수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 익숙하며, J. 디츠겐은 이들을 사제주의 또는 신앙주의의 학위 받은 하인이라고 정당하게 불렀다. 실제로 신앙주의는 “감각적 세계 밖에”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자연과학과 뜻을 같이하는 유물론자들은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 중간에 서 있는 것이 교수들, 즉 칸트주의자, 흄주의자(마흐주의자도 포함된다) 등등인데, 이들은 “유물론과 관념론 밖에서 진리를 발견”했다면서 “화해시킨다.” 그것은 미해결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엥겔스가 언젠가 이와 비슷한 말이라도 했다면,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수치이자 망신일 것이다.
그러나 이쯤 해 두자! 바자로프에게서 인용한 반 쪽 남짓한 글이 이토록 뒤엉킨 혼란 덩어리여서, 우리는 마흐주의 사상의 온갖 갈팡질팡을 더는 쫓지 않고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3. 물자체에 대한 L. 포이어바흐와 J. 디츠겐의 견해
유물론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물자체(즉 우리의 감각, 표상 등의 밖에 있는 사물)의 존재와 그 인식 가능성을 부정했다느니, 그들이 현상과 물자체 사이에 어떤 원칙적인 경계를 인정했다느니 하는 우리 마흐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보여 주기 위해, 포이어바흐에게서 몇 구절을 더 인용하겠다. 우리 마흐주의자들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변증법도 유물론도 모르면서 반동적 교수들의 말을 받아 옮겨 변증법적 유물론을 논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관념론이라 부르는 현대의 철학적 유심론은,” L.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유물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기 생각으로는 치명적인 비난을 한다. 유물론은 독단론이라는 것, 즉 유물론은 감각적(sinnlichen) 세계를 논란의 여지 없는(ausgemacht) 객관적 진리로 보고 거기서 출발하며, 그것을 그 자체로서의(an sich) 세계, 즉 우리 없이 존재하는 세계로 여기지만, 실제로 세계는 정신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Sämtliche Werke, X. Band, 1866, S. 185)
이 정도면 분명하지 않은가? 그 자체로서의 세계란 우리 없이 존재하는 세계다. 버클리 주교가 반박한 17세기 유물론이 우리 의식 밖에 존재하는 “객체 그 자체”를 인정하는 데 있었듯이,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이다. 포이어바흐의 “An sich”(그 자체로 또는 “자체 내에”)는 칸트의 “An sich”와 정반대다. 칸트에게 “물자체”는 “실재성 없는 추상”이라고 비난한, 앞서 인용한 포이어바흐의 구절을 떠올려 보라. 포이어바흐에게 “물자체”는 “실재성을 지닌 추상”, 즉 우리 밖에 존재하고 충분히 인식할 수 있으며 “현상”과 원칙적으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계다.
포이어바흐는 현상의 세계에서 그 자체로서의 세계로 넘어가는 어떤 “초월”, 사제들이 만들어 내고 철학 교수들이 그들에게서 물려받은 어떤 건널 수 없는 심연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아주 재치 있고 알기 쉽게 설명한다. 다음은 그런 설명 가운데 하나다.
“물론 환상의 산물도 — 자연의 산물이다. 환상의 힘도 인간의 다른 모든 힘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zuletzt), 그 근저에서, 그 기원에서 자연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태양, 달, 별과, 돌, 동물, 식물과, 한마디로 — 그가 자연이라는 일반 용어로 부르는 모든 존재자(Wesen)와 — 구별되는 존재자이다. 따라서 태양, 달, 별 그리고 자연의 다른 모든 존재자(Naturwesen)에 대한 인간의 표상(Bilder)은, 비록 이 표상들 역시 자연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자연 속에 있는 그 대상들과 구별되는 다른 산물이다”(Werke, Band VII, Stuttg., 1903, S. 516).
우리 표상의 대상들은 우리의 표상들과 구별되며, 물자체는 우리에 대한 사물과 구별된다. 인간 자신이 — 그의 표상들에 반영되는 자연의 한 작은 부분일 뿐인 것처럼, 후자는 전자의 일부이거나 한 측면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미각 신경은 소금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금의 맛이 직접적으로, 그 자체로서 소금의 객관적 속성이라는 결론, — 소금이 단지 감각의 대상으로서 그러한(ist) 바를 소금 자체로서도(an und für sich) 그러하다는 결론, — 혀 위에서 느끼는 소금의 감각이 감각 없이 사유된 소금(des ohne Empfindung gedachten Salzes)의 속성이라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몇 쪽 앞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맛으로서의 쓴맛은 소금이 지닌 객관적 속성의 주관적 표현이다”(514).
감각은 우리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자체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작용한 결과다. 이것이 포이어바흐의 이론이다. 감각은 객관적 세계, an und für sich의 세계의 주관적 상(像)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태양, 별, 식물, 동물, 돌과 같이 자연의 존재자(Naturwesen)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연과 구별되며, 따라서 인간의 머릿속과 마음속의 자연은 인간의 머리 밖과 마음 밖의 자연과 구별된다.
……관념론자들 자신이 인정하듯이, 인간은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이라는 요구가 실현된 유일한 대상이다. 인간은 나의 존재와 동등하고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환상의 대상, 표상의 대상이 아닌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자기 나름의 뜻으로, 자기 식대로(in und nach seinem Sinne) 이해하지 않는가?……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조차, 사유와 사유 사이에서조차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면,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 아닌, 우리와 동일하지 않은 존재자 자체(Wesen an sich)와 우리가 사유하고 표상하고 이해하는 바로 그 존재자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더 크겠는가?”(518쪽, 같은 곳).
현상과 물자체 사이에 있다는 온갖 신비롭고 난해하고 교묘한 차이는 순전한 철학적 헛소리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물자체’가 현상, 곧 ‘우리에 대한 사물’로 전화하는 단순하고 명백한 과정을 수백만 번 관찰해 왔다. 이 전화가 바로 인식이다. 우리가 오직 감각만을 아는 이상 감각의 한계 밖에 있는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마흐주의의 ‘학설’은 관념론적·불가지론적 철학의 낡은 궤변을 새로운 양념을 쳐서 내놓은 것이다.
요제프 디츠겐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우리는 아래에서 그의 표현 방식이 흔히 부정확하다는 것, 그가 흔히 혼란에 빠진다는 것, 그리고 온갖 어리석은 사람들(예브게니 디츠겐도 그 가운데 하나다)과 물론 우리의 마흐주의자들이 바로 그 혼란을 붙잡고 늘어졌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철학의 지배적인 노선을 분석하고 유물론을 이질적인 요소들로부터 명확히 가려내는 일, 이 일을 그들은 애써 하려 하지 않았거나 해내지 못했다.
“‘물자체’로서 세계를 취해 보자 — 디츠겐은 그의 저서 『두뇌 노동의 본질』(독일어판, 1903년, 65쪽)에서 말한다 — ‘세계 그 자체’와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 즉 세계의 현상들이 서로 다른 것은 전체가 부분과 다른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상이 현상하는 것과 다른 것은 10마일의 길이 길 전체와 다른 것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다”(71—72). 여기에는 어떠한 원리적 차이도, 어떠한 “초월”도, 어떠한 “타고난 불일치”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물론 차이는 있다. 감각적 지각의 한계를 넘어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의 존재로 나아가는 이행이 있다.
“우리는 — 디츠겐은 『인식론 분야로 떠난 한 사회주의자의 소풍』(독일어판, 1903년, 『Kleinere philosoph. Schriften』, 199쪽)에서 말한다 — 모든 경험이 칸트와 함께 말하자면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erfahren, 겪는다).” “자기 본질을 자각한 의식에게는 모든 작은 조각이, 그것이 먼지 알갱이든 돌이나 나무 조각이든, 끝까지 인식될 수 없는 것(Unauskenntliches)이다. 즉 각각의 작은 조각은 인간의 인식 능력에게 무진장한 소재이며, 따라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엇이다”(199).
보라. 칸트와 함께 말하자면, 즉 — 오로지 대중적 설명을 위해, 대비를 위해 — 칸트의 잘못된 혼란스러운 용어법을 받아들여, 디츠겐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인정한다. 이것은 마흐주의자들이 유물론에서 불가지론으로 넘어가면서 무엇을 붙잡고 늘어지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다. 그들의 말인즉, 우리는 “경험의 한계를 넘어” 가기를 원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감각적 표상이 바로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 디츠겐은 바로 그러한 철학에 맞서 말한다 — 절대적 진리를 상대적 진리로부터 비과학적으로 떼어 놓는다. 그것은 현상하는 사물과 ‘물자체’로부터, 즉 현상과 진리로부터 서로 toto coelo(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원리적으로) 다르며 어떠한 공통된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는 두 범주를 만들어 낸다”(S. 200).
이제 자신이 마흐주의자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면서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러시아 마흐주의자 보그다노프의 식견과 기지가 어떠한지 판단해 보라.
“황금 중간”을 — “범심리주의와 범유물론” 사이의(『경험일원론』, 제2권, 제2판, 1907년, 40—41쪽) — “보다 비판적인 경향의 유물론자들이 차지했다. 그들은 ‘물자체’의 무조건적인 불가지성을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현상’과 원리적으로(보그다노프의 이탤릭) 다른 것으로, 따라서 현상 속에서 언제나 ‘희미하게만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내용상(즉, 아마도 경험의 요소들과 같지 않은 ‘요소들’의 면에서) 경험 밖의 것이지만 경험의 형식이라 불리는 것, 즉 시간, 공간, 인과성의 한계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긴다.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과, 최근 철학자들 가운데서는 엥겔스와 그의 러시아 추종자 벨토프의 관점이 대략 이러하다.”
이것은 하나의 순전한 혼란 덩어리다. 1) 버클리가 논쟁을 벌인 17세기 유물론자들은 “객체 자체”를 무조건 인식 가능한 것으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표상과 관념은 “정신 밖에” 존재하는 이 객체들의 사본 또는 반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서론」 참조). 2) 물자체와 현상 사이의 “원리적” 차이에 단호히 반대하는 것은 포이어바흐이고 그 뒤를 이어 J. 디츠겐이며, 엥겔스는 “물자체”가 “우리를 위한 물”로 전화하는 간단한 예로 이 견해를 뒤집어엎는다. 3) 마지막으로, 유물론자들이 물자체를 “현상 속에서 언제나 단지 희미하게만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엥겔스가 불가지론자를 반박한 데서 우리가 보았듯이, 그저 헛소리일 뿐이다. 보그다노프가 유물론을 왜곡한 원인은 그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데 있다(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경험 외적인” 물자체와 “경험의 요소들”에 관해서라면 — 여기서부터는 이미 마흐주의적 혼란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에 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말했다.
반동 교수들을 따라 유물론자들에 관한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되풀이하는 것, — 1907년에 엥겔스와 절연하는 것, — 1908년에 엥겔스를 불가지론에 맞게 “가공하려” 시도하는 것, — 이것이 바로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의 “최신 실증주의” 철학이다!
4.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는가?
보그다노프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에게 마르크스주의는 그 어떤 진리이든 그 무조건적 객관성에 대한 부정, 모든 영원한 진리에 대한 부정을 포함한다”(『경험일원론』, 제3권, IV—V쪽). 무조건적 객관성이란 무슨 뜻인가? “영원히 타당한 진리”는 “절대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진리”라고 보그다노프는 같은 곳에서 말하면서, 단지 “일정한 시대의 범위 안에서만의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는 데 동의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두 가지 문제가 뒤섞여 있다. 1) 객관적 진리는 존재하는가, 즉 인간의 표상 속에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에게도 인류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내용이 있을 수 있는가? 2) 만일 그렇다면, 객관적 진리를 표현하는 인간의 표상은 그것을 단번에, 전부,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근사적으로, 상대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가? 이 두 번째 문제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상호 관계에 관한 문제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 보그다노프는 명료하게, 단도직입적으로, 확정적으로 대답한다. 그는 절대적 진리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것을 부정하며, 그것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엥겔스를 절충주의라고 비난한다. A. 보그다노프가 엥겔스의 절충주의를 발견한 이 일에 관해서는 뒤에서 따로 말하겠다. 지금은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보그다노프는 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역시 부정적으로 해결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런저런 인간 표상 속의 상대적인 요소를 부정할 수는 있지만,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절대적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 진리의 기준은 — 하고 보그다노프는 조금 뒤 IX쪽에서 쓴다 — 벨토프적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이데올로기적 형식 — 인간 경험을 조직하는 형식이다……”
여기서는 “벨토프적 의미”도, 진리의 기준도 문제가 아니다. 지금 논의하는 것은 기본적인 철학 문제 가운데 하나이지 결코 벨토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진리의 기준에 관해서는 따로 이야기해야 하며, 이 문제를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후자의 문제에 대한 보그다노프의 부정적 대답은 명백하다. 진리가 단지 이데올로기적 형식일 뿐이라면, 주체로부터, 인류로부터 독립한 진리는 있을 수 없다. 나도 보그다노프도 인간의 이데올로기 말고 다른 이데올로기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문장 후반부를 보면 보그다노프의 부정적 대답은 더욱 명백하다. 진리가 인간 경험의 형식이라면, 인류로부터 독립한 진리는 있을 수 없으며, 객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
보그다노프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지론이며 주관주의다. 이 부정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앞에서 든 자연과학적 진리의 예 하나만 보아도 명백하다. 자연과학은 인류 이전에 지구가 존재했다는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는 것을 의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유물론적 인식론과 완전히 양립한다. 반영하는 자들로부터 독립한, 반영되는 것의 존재(외부 세계가 의식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는 유물론의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인류 이전에 존재했다는 자연과학의 주장은 객관적 진리다. 자연과학의 이 명제는 마흐주의자들의 철학 및 그들의 진리론과 화해할 수 없다. 진리가 인간 경험의 조직적 형식이라면, 모든 인간 경험 밖에 지구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진리일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진리가 단지 인간 경험의 조직적 형식일 뿐이라면, 이를테면 가톨릭교의 교리도 진리가 된다. 가톨릭교가 “인간 경험의 조직적 형식”이라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보그다노프 자신도 자기 이론의 이 터무니없는 거짓을 느꼈다. 그가 자기가 빠진 수렁에서 어떻게 기어 나오려 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객관성의 근거는 — 『경험일원론』 제1권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 집단적 경험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똑같은 생활상의 의의를 지니는 경험 자료, 즉 우리가 모순 없이 그 위에 자기 활동을 세울 뿐 아니라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다른 사람들도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경험 자료를 객관적이라고 부른다. 물리적 세계의 객관적 성격은 그것이 나 개인에게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데 있으며”(틀렸다! 물리적 세계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독립해 존재한다)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의의를, 내가 확신하기로는 나에게와 똑같은 의의를 지닌다는 데 있다. 물리적 계열의 객관성이란 그것의 보편타당성이다”(25쪽, 보그다노프의 강조). “우리가 경험에서 마주치는 물체들의 객관성은 결국 여러 사람의 진술을 서로 검증하고 일치시키는 것을 바탕으로 확립된다. 일반적으로 물리적 세계란 사회적으로 일치된, 사회적으로 조화된,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이다”(36쪽, 보그다노프의 강조).
이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관념론적 정의라는 것, 물리적 세계는 인류와 인간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존재한다는 것, 물리적 세계는 어떠한 “사회성”도, 인간 경험의 어떠한 “조직”도 있을 수 없던 때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 등을 되풀이하지는 않겠다. 이제 우리는 다른 측면에서 마흐주의 철학을 폭로하는 데 머무르고자 한다. 객관성이 이렇게 정의되면, 의심할 바 없이 “보편타당성” 등을 지닌 종교의 학설도 이 정의에 들어맞게 된다. 보그다노프의 말을 더 들어 보자.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상기시키건대, ‘객관적’ 경험은 결코 ‘사회적’ 경험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적 경험은 전부가 사회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언제나 여러 가지 모순을 품고 있어서, 그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과 서로 맞지 않는다. 숲귀신과 집귀신은 특정 민족이나 특정 민족 집단, 예컨대 농민층의 사회적 경험 영역 안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사회적으로 조직된 경험, 즉 객관적 경험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나머지 집단적 경험과 조화되지 않고 그 조직적 형식, 예컨대 인과성의 사슬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45쪽).
물론 보그다노프 자신이 숲귀신과 집귀신 따위에 관한 사회적 경험을 객관적 경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로서도 매우 기쁜 일이다. 그러나 신앙주의를 부정하는 정신에서 나온 이 선의의 작은 수정은 보그다노프의 입장 전체가 지닌 근본적 오류를 조금도 바로잡지 못한다. 보그다노프의 객관성 및 물리적 세계에 대한 정의는 무조건 무너진다. 종교의 학설은 과학의 학설보다 더 “보편타당”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다수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앞의 학설을 고수하고 있다. 가톨릭교는 여러 세기에 걸친 발전을 통해 “사회적으로 조직되고, 조화되고, 일치되어” 있다. 가톨릭교는 더없이 반박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과성의 사슬”에 “들어맞는다”. 종교는 까닭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늘날의 조건에서 민중 대중 속에 유지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며, 철학 교수들이 종교에 영합하는 것도 전적으로 “법칙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의심할 바 없이 보편타당하고 의심할 바 없이 고도로 조직된 이 사회적·종교적 경험이 과학의 “경험”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둘 사이에 원리적이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뜻이며, 보그다노프는 객관적 진리를 부정함으로써 바로 그 차이를 지워 버린 것이다. 그리고 보그다노프가 신앙주의나 신부주의는 과학과 조화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아무리 “수정”을 가한다 한들, 보그다노프의 객관적 진리 부정이 신앙주의와 전적으로 “조화된다”는 것은 여전히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현대의 신앙주의는 결코 과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의 “지나친 요구”, 즉 객관적 진리에 대한 요구만을 부정할 뿐이다. 만일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면(유물론자들이 생각하듯이), 만일 인간의 “경험” 속에 외부 세계를 반영하는 자연과학만이 우리에게 객관적 진리를 줄 수 있다면, 모든 신앙주의는 무조건 배척된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진리(과학적 진리도 포함해)가 인간 경험의 조직적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면, 바로 그로써 신부주의의 기본 전제가 인정되고, 신부주의에 문이 열리며, 종교적 경험의 “조직적 형식”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묻건대, 이 객관적 진리의 부정은 스스로를 마흐주의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보그다노프 개인의 것인가, 아니면 마흐와 아베나리우스 학설의 기초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 물음에는 오직 후자의 의미로만 대답할 수 있다. 만일 세상에 오직 감각만이 존재한다면(아베나리우스, 1876년), 만일 물체가 감각 복합이라면(『감각의 분석』에서의 마흐), 우리 앞에 놓인 것이 필연적으로 객관적 진리의 부정에 이르는 철학적 주관주의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감각을 “요소”라고 부르고, 그것이 한 연관에서는 물리적인 것을, 다른 연관에서는 심리적인 것을 낳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보았듯이 이로써 경험비판론의 기본 출발점은 뒤엉킬 뿐이지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아베나리우스와 마흐는 감각을 우리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험주의(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또는 감각주의(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온다)의 관점에 선다. 그러나 이 관점은, 여러분이 그것에 아무리 “새로운” 말의 옷(“요소”)을 입힌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철학적 조류들, 즉 관념론과 유물론의 구별로 이끄는 것이지 그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유아론자, 즉 주관적 관념론자도, 유물론자도 감각을 우리 지식의 원천으로 인정할 수 있다. 버클리도 디드로도 로크에게서 나왔다. 인식론의 첫 번째 전제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 감각이라는 데 있다.
이 첫 번째 전제를 인정한 마흐는 두 번째 중요한 전제, 즉 인간에게 그의 감각 속에 주어져 있는, 또는 인간 감각의 원천이 되는 객관적 실재에 관한 전제를 뒤엉키게 한다. 감각에서 출발하여 유아론(“물체는 감각의 복합 또는 결합이다”)에 이르는 주관주의의 노선을 따라갈 수도 있고, 유물론(감각은 물체, 즉 외부 세계의 상이다)에 이르는 객관주의의 노선을 따라갈 수도 있다. 첫 번째 관점, 즉 불가지론 또는 조금 더 나아가 주관적 관념론의 관점에서는 객관적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두 번째 관점, 즉 유물론에서는 객관적 진리의 인정이 본질적이다. 두 경향, 더 정확히 말하면 경험주의와 감각주의의 전제들에서 나올 수 있는 두 가지 가능한 결론에 관한 이 오래된 철학적 문제를 마흐는 해결하지도, 제거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요소”라는 말 따위를 가지고 벌이는 말장난을 통해 뒤엉키게 했을 뿐이다. 보그다노프의 객관적 진리 부정은 마흐주의 전체의 불가피한 결과이지,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다. 엥겔스는 그의 『L. 포이어바흐』에서 흄과 칸트를 “세계의 인식 가능성, 또는 적어도 세계에 대한 남김 없는 인식의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따라서 엥겔스는 흄과 칸트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공통된 것을 전면에 내세운다. 엥겔스는 이와 함께 “이”(흄과 칸트의) “견해를 반박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이미 헤겔이 말했다”고 지적한다(독일어 제4판, 15—16쪽).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유물론을 “경험주의의 일관된 체계”라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는 점을 짚어 두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험주의 일반에게는 외적인 것(das Äußerliche)이 참된 것이며, 그 다음에 경험주의가 무언가 초감각적인 것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초감각적인 것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고(soll doch eine Erkenntnis desselben (d. h. des Übersinnlichen) nicht statt finden können), 오로지 지각에 속하는 것(das der Wahrnehmung Angehörige)만을 붙들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기본 전제는 그 일관된 전개(Durchführung) 속에서 훗날 유물론이라 불리게 된 것을 낳았다. 이 유물론에게는 물질 그 자체가 참으로 객관적인 것(das wahrhaft Obj ektive)이다”[59].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감각에서, 지각에서 나온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묻건대, 객관적 실재가 “지각에 속하는가”, 즉 객관적 실재가 지각의 원천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유물론자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일관성이 없으며 피할 수 없이 주관주의에, 불가지론에 이를 것이다 — 당신이 (칸트를 따라) 물자체의 인식 가능성, 시간·공간·인과성의 객관성을 부정하든, (흄을 따라) 물자체라는 생각조차 용납하지 않든 마찬가지다. 그 경우 당신의 경험론, 당신의 경험 철학의 비일관성은 당신이 경험 속의 객관적 내용을, 경험적 인식 속의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칸트와 흄 노선의 지지자들(후자 가운데에는, 순수한 버클리주의자가 아닌 한에서, 마흐와 아베나리우스도 들어간다)은 우리 유물론자들을 “형이상학자”라고 부른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고, 우리 감각의 객관적이며 인간에게서 독립한 원천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 유물론자들은 엥겔스를 따라 칸트주의자와 흄주의자를 불가지론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우리 감각의 원천으로서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자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a는 그리스어로 ‘아니다’를 뜻하고, gnosis — 지식이다. 불가지론자는 말한다. 우리 감각에 반영되고 모사되는 객관적 실재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며, 그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고(불가지론자의 입장을 서술한 앞의 엥겔스의 말을 보라). 여기서 — 불가지론자의 객관적 진리 부정과, 도깨비·집귀신·가톨릭 성인 따위에 관한 교설에 대한 관용, 소시민적이고 속물적이며 비겁한 관용이 나온다. 마흐와 아베나리우스는 “새로운” 용어, 이른바 “새로운” 관점을 거드름 피우며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헷갈리고 갈팡질팡하면서 불가지론자의 대답을 되풀이한다. 한편으로는 물체는 감각의 복합이다(순수한 주관주의, 순수한 버클리주의).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을 요소라고 개칭하면 그것의 존재를 우리 감각 기관에서 독립된 것으로 사유할 수 있다!
마흐주의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우리 감각기관의 증언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철학자이며, 세계를 실제로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곧 소리와 색채 따위로 가득 찬 것으로 여긴다고 떠벌리기를 좋아한다. 반면에 유물론자들에게는 세계가 죽어 있고, 그 속에는 소리도 색채도 없으며, 세계는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는 등등이라는 것이다. 이런 장광설은 예컨대 J. 페촐트가 『순수경험철학 입문』에서도,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본 세계 문제』(1906)에서도 늘어놓고 있다. 페촐트를 따라 빅토르 체르노프 씨도 이 “새로운” 사상에 감탄하며 같은 소리를 되풀이해 지껄인다. 그러나 실상 마흐주의자들은 주관주의자이자 불가지론자다. 그들은 우리 감각기관의 증언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으며 감각론을 일관되게 관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감각의 원천으로서, 인간에게서 독립한 객관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감각에서 이 객관적 실재를 정확히 찍은 사진을 보지 못하며, 그리하여 자연과학과 정면으로 모순에 빠지고 신앙주의에 문을 열어 준다. 반대로 유물론자에게 세계는 보이는 것보다 더 풍부하고 더 생생하며 더 다양하다. 과학이 한 걸음 발전할 때마다 세계의 새로운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물론자에게 우리 감각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객관적 실재의 모상이다. 궁극적이라 함은 그것이 이미 끝까지 인식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다른 실재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 관점은 모든 신앙주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감각의 원천으로서의 객관적 실재를 보지 못한 채 억지로 짜낸 말의 구성을 통해 객관적인 것의 개념을 보편타당한 것, 사회적으로 조직된 것 등등으로 “도출해 내는” 저 교수들의 스콜라철학에 대해서도 돌이킬 수 없이 문을 닫아 버린다. 이 스콜라철학은 객관적 진리를 숲귀신과 집귀신에 관한 교설과 구별해 내지 못하며, 흔히는 구별하려 하지도 않는다.
마흐주의자들은 “최신 과학”과 “최신 실증주의”가 반박했다고들 하는 물질 개념을 붙들고 있는 “독단론자들” — 유물론자들의 “낡아빠진” 견해를 두고 경멸하듯 어깨를 으쓱한다. 물질의 구조에 관한 물리학의 새로운 이론들은 따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마흐주의자들이 하듯이 물질의 이런저런 구조에 관한 학설을 인식론적 범주와 혼동하는 것 — 새로운 종류의 물질(예컨대 전자)이 지닌 새로운 속성에 관한 문제를 인식론의 오래된 문제, 즉 우리 지식의 원천에 관한 문제, 객관적 진리의 존재에 관한 문제 등과 혼동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마흐가 빨간 것, 초록인 것, 단단한 것, 무른 것, 시끄러운 것, 긴 것 등등의 “세계의 요소들을 발견했다”고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묻는다. 사람이 빨간 것을 보고 단단한 것을 감각하는 등등을 할 때, 그에게 객관적 실재가 주어지는가, 아닌가? 이 오래되고도 오래된 철학 문제를 마흐는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흐와 함께 주관주의와 불가지론으로, 당신에게 걸맞은 내재론자들, 즉 철학적 멘시코프들의 품으로 불가피하게 굴러떨어지고 만다. 주어진다면, 이 객관적 실재를 가리킬 철학적 개념이 필요한데, 그 개념은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으며, 그 개념이 바로 물질이다. 물질은 사람에게 그의 감각 속에 주어져 있고, 우리의 감각에 의해 모사되고 사진 찍히고 반영되면서도 감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다. 그러므로 그러한 개념이 “낡아빠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옹알이이며, 유행하는 반동적 철학의 논거를 무의미하게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천 년에 걸친 철학의 발전 속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투쟁이 낡아빠질 수 있었던가? 철학에서 플라톤과 데모크리토스의 경향 내지 노선이? 종교와 과학의 투쟁이? 객관적 진리의 부정과 그 인정이? 초감각적 지식을 옹호하는 자들과 그 반대자들의 투쟁이?
물질 개념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의 문제는 사람이 자기 감각 기관의 증언을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며, 우리 인식의 원천에 관한 문제이며, 철학의 처음부터 제기되고 논의되어 온 문제이며, 광대 교수들이 천 가지 방식으로 분장시킬 수는 있어도 낡아빠질 수는 없는 문제다. 인간 인식의 원천이 시각과 촉각, 청각과 후각이냐 하는 문제가 낡아빠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감각을 외부 세계의 상(像)으로 여기는 것 — 객관적 진리를 인정하는 것 — 유물론적 인식론의 관점에 서는 것, 이것은 모두 같은 것이다. 이를 예시하기 위해 포이어바흐와 철학 교과서 두 권에서 인용문만을 들겠다 — 이 문제가 얼마나 초보적인 것인지 독자가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얼마나 상스러운가 — L. 포이어바흐는 이렇게 썼다 — 감각이 복음이며 객관적 구원자로부터 온 통지(Verkündung)라는 것을 감각에게서 부정하다니.”[60] 보다시피 기이하고 괴상한 용어법이지만, 철학적 노선은 아주 명백하다. 감각은 사람에게 객관적 진리를 열어 보인다는 것이다. “나의 감각은 주관적이지만, 그 기초 내지 원인(Grund)은 객관적이다”(S. 195) —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은 감성적 세계를 최종적(ausgemachte)이고 객관적인 진리로 삼아 거기서 출발한다고 말한 앞의 인용문과 비교해 보라.
프랑크의 『철학 사전』[61]에서 우리는 이렇게 읽는다. 감각주의란 “인식을 감각으로 환원하면서” 우리의 모든 관념을 “감관의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내는 학설이다. 감각주의에는 주관적 감각주의(회의주의와 버클리주의), 도덕적 감각주의(에피쿠로스주의), 객관적 감각주의가 있다. “객관적 감각주의는 유물론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물질 또는 물체야말로 우리의 감관에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객체이기 때문이다”(atteindre nos sens).
슈베글러는 자신의 『철학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각주의가 진리 또는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감관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남은 일은 그저(18세기 말 프랑스 철학에 관한 이야기다) 이 명제를 객관적으로 정식화하는 것뿐이었고, 그러면 — 우리 앞에 유물론의 테제가 나타난다. 감성적인 것만이 존재하며, 물질적 존재 외에 다른 존재는 없다.”[62]
이미 교과서에까지 실린 이런 초보적인 진리들을 우리의 마흐주의자들은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5.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또는 A. 보그다노프가 발견한 엥겔스의 절충주의에 관하여
보그다노프는 1906년 『경험일원론』 제3권 서문에서 이 발견을 했다.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내가 방금 진리의 상대성을 규정한 것과 거의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다”라고 보그다노프는 쓴다(V쪽). 즉 모든 영원한 진리를 부정한다는 뜻에서, “어떤 진리든 그 무조건적 객관성을 부정한다”는 뜻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우유부단하다는 점에서, 즉 온갖 아이러니를 늘어놓으면서도 비록 보잘것없는 것이나마 어떤 ‘영원한 진리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VIII쪽). “여기서 엥겔스의 경우처럼 절충적인 유보를 허용하는 것은 오직 비일관성뿐이다…”(IX쪽). 보그다노프가 엥겔스의 절충주의를 반박하는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라고 엥겔스는 『반뒤링론』(‘영원한 진리들’에 관한 장)에서 말하며, 역사과학에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했다고 자처하는 자가 무엇에 그쳐야 하는지, 어떤 Plattheiten, 즉 ‘진부한 말들’로 만족해야 하는지를 뒤링에게 해명한다. 그러자 보그다노프는 엥겔스에게 이렇게 반박한다. “이것이 무슨 ‘진리’란 말인가?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영원’하단 말인가? 아마도 우리 세대에게조차 이미 아무런 현실적 의의도 없을 개별적 관계의 확인은 어떤 활동의 출발점도 될 수 없으며, 어디로도 이끌지 못한다”(IX쪽). 그리고 VIII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Plattheiten’을 ‘Wahrheiten’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진부한 말들’이 진리란 말인가? 진리란 경험의 살아 있는 조직하는 형식이며, 우리의 활동에서 우리를 어딘가로 이끌고, 삶의 투쟁에서 발판을 준다.”
이 두 인용문에서 보그다노프가 엥겔스를 반박하는 대신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있음이 충분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그대가 “나폴레옹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는 명제가 오류이거나 부정확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면, 그대는 그것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이 미래에 반박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 진리를 영원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란 “경험의 살아 있는 조직 형식”이라는 따위의 문구를 반박이라고 부르는 것은 — 단순한 말의 나열을 철학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지구는 지질학이 서술하는 그러한 역사를 거쳐 왔는가, 아니면 칠 일 만에 창조되었는가? 설마 이 문제를, 어디론가 “이끈다”는 “살아 있는”(그것이 무슨 뜻인가?) 진리 따위에 관한 문구로 얼버무려도 된다는 말인가? 설마 지구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아무런 현실적 의의도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보그다노프가 자신의 후퇴를 감추려고 늘어놓는 한낱 거창한 헛소리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가 엥겔스의 영원한 진리 인정이 절충주의임을 증명하겠다고 나서 놓고, 정작 나폴레옹이 실제로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는 것과 이 진리를 미래에 반박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은 반박하지 못한 채 남겨 두고 오직 요란한 말소리로만 문제를 얼버무린다면, 그것은 후퇴이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든 예는 아주 초보적인 것이어서, 누구든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미친 사람만이 의심할 수 있는 진리의 예를 이와 비슷하게 수십 개는 손쉽게 생각해 낼 수 있다(엥겔스는 이와 같은 또 다른 예로 “파리는 프랑스에 있다”를 들며 그렇게 말한다). 엥겔스는 왜 여기서 “진부한 말”을 이야기하는가? 그가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관계 문제에 변증법을 적용할 줄 몰랐던 독단적·형이상학적 유물론자 뒤링을 반박하고 조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감각 기관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는 객관적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 즉 인간과 인류에게서 독립한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절대적 진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어떤 식으로든”이 형이상학적 유물론자 뒤링과 변증법적 유물론자 엥겔스를 갈라놓는다. 뒤링은 과학 일반, 특히 역사 과학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에 관해서도 닥치는 대로 최종적 진리, 궁극적 진리, 영원한 진리라는 말을 마구 던졌다. 엥겔스는 그를 조롱했다. 물론 — 엥겔스는 대답했다 — 영원한 진리는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일에 대해 거창한 말(gewaltige Worte)을 쓰는 것은 어리석다. 유물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려면 영원한 진리라는 말을 가지고 노는 저속한 장난을 그만두어야 하며,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상호 관계 문제를 변증법적으로 제기하고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삼십 년 전 뒤링과 엥겔스 사이에 벌어진 투쟁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엥겔스가 같은 장에서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의 문제를 해명한 것을 용케도 “알아채지 못한” 보그다노프, 모든 유물론에게 기본 상식인 명제를 인정했다는 이유로 엥겔스를 용케도 “절충주의”라고 비난한 보그다노프는, 이로써 자신이 유물론에 대해서도 변증법에 대해서도 절대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드러냈을 뿐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이른다.” — 엥겔스는 『반뒤링론』의 앞서 말한 장(제1편 제9장) 첫머리에서 이렇게 쓴다 — “인간 인식의 산물이 대체로 주권적 의의와 진리에 대한 무조건적 권리(Anspruch)를 가질 수 있는가,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산물이 그러한가”(독일어 제5판, S. 79). 그리고 엥겔스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해결한다.
“사유의 주권성은 지극히 비주권적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의 계열 속에서 실현되며, 진리에 대한 무조건적 권리를 지닌 인식은 상대적(관계적) 오류들의 계열 속에서 실현된다. 그 어느 것도”(절대적으로 참된 인식도, 주권적 사유도) “인류의 생명이 무한히 지속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앞에서 이미 마주친 모순, 즉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인간 사유의 성격과, 제한적으로만 사유하는 개별 인간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실현 사이의 모순에 다시 부딪힌다. 이 모순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실제로 무한한, 연속하는 인간 세대들의 계열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사유는 주권적인 만큼 비주권적이며, 그 인식 능력은 무제한적인 만큼 제한되어 있다. 사유는 그 본성”(또는 구성, Anlage), “소명, 가능성, 역사적 최종 목표에서는 주권적이고 무제한적이며, 개별적 실현에서, 이러저러한 시기에 주어진 현실에서는 비주권적이고 제한적이다”(81)[63].
“영원한 진리의 경우도, — 엥겔스는 계속한다, — 사정은 꼭 마찬가지다.”
이 논의는 모든 마흐주의자가 강조하는 상대주의, 즉 우리 인식의 상대성 원리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극히 중요하다. 마흐주의자들은 모두 자기가 상대주의자라고 우긴다 — 그러나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은 독일인들을 따라 말마디를 되풀이하면서도, 상대주의와 변증법의 관계라는 문제를 명확하고 똑바로 제기하기를 두려워하거나 그렇게 할 줄 모른다. 보그다노프에게는(모든 마흐주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 인식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를 털끝만큼이라도 인정하는 것을 배제한다. 엥겔스에게는 상대적 진리들로부터 절대적 진리가 이루어진다. 보그다노프는 상대주의자다. 엥겔스는 변증론자다. 여기 『반뒤링론』의 바로 같은 장에서 가져온,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엥겔스의 논의가 또 하나 있다.
“진리와 오류는, 극적 대립 속에서 운동하는 모든 논리적 범주와 마찬가지로, 극히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절대적 의의를 지닌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보았으며, 뒤링 씨도 변증법의 초보, 즉 바로 모든 극적 대립의 불충분성을 다루는 변증법의 첫 전제들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이것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가 진리와 오류의 대립을 위에서 말한 협소한 영역의 경계 밖에서 적용하기 시작하자마자, 이 대립은 상대적(관계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정확한 과학적 표현 방식에는 쓸모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립을 앞서 말한 영역의 한계 밖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적용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대립의 두 극은 저마다 자기 대립물로 전화할 것이다. 즉 진리는 오류가 되고 오류는 진리가 될 것이다”(86). 이어서 예가 나온다 — 보일의 법칙(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이다. 이 법칙에 담긴 “진리의 알맹이”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절대적 진리일 따름이다. 이 법칙은 “근사적으로만” 진리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인간의 사유는 그 본성상 상대적 진리들의 총화로 이루어지는 절대적 진리를 우리에게 줄 수 있고 또 실제로 준다. 과학 발전의 각 단계는 절대적 진리의 이 총화에 새로운 낟알들을 보태지만, 각 과학적 명제가 지니는 진리의 한계는 상대적이어서, 지식이 더 성장함에 따라 넓혀지기도 하고 좁혀지기도 한다. J. 디츠겐은 『산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절대적 진리를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 속에 남김없이 들어가지는 않는다(geht nicht auf)”(S. 195). “그림이 대상을 다 드러내지 못하며 화가가 자기 모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림이 어떻게 모델과 ‘일치’할 수 있겠는가? 근사적으로는 그렇다”(197). “우리는 자연과 그 부분들을 상대적으로(렐라티프하게)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은 비록 자연의 상대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절대적인 것의 본성, 인식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자연 전체 그 자체(des Naturganzen an sich)의 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 현상의 배후에, 상대적 진리들의 배후에 인간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않는 보편적이고 무한정한 절대적 자연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이 앎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의식과 함께 주어져 있다”(198). 이 마지막 말은 디츠겐의 부정확한 점들 가운데 하나이며,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마르크스는 쿠겔만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디츠겐의 견해에 혼란이 있다고 지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대목들에 매달려야만 변증법적 유물론과 다른 디츠겐 특유의 철학이니 뭐니 운운할 수 있다. 그러나 디츠겐 자신이 같은 쪽에서 스스로를 바로잡고 있다. “무한한 절대적 진리에 관한 앎이 우리에게 타고난 것이라고, 그것이 유일무이한 a priori 앎이라고 내가 말하더라도, 경험 역시 이 타고난 앎을 확증해 준다”(198).
엥겔스와 디츠겐의 이 모든 언명을 보면, 변증법적 유물론에는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보그다노프는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구유물론의 세계관)은 무조건적으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 인식(강조는 보그다노프)이기를 바라며, 모든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조건성과 양립할 수 없다”(『경험일원론』 제3권, IV쪽). 현대 유물론, 즉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지식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접근하는 한계는 역사적으로 조건적이지만, 이 진리의 존재는 무조건적이며, 우리가 그 진리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무조건적이다. 그림의 윤곽은 역사적으로 조건적이지만, 이 그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모델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우리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에서 언제, 어떤 조건에서 콜타르 속 알리자린의 발견에까지, 또는 원자 속 전자의 발견에까지 나아갔는가는 역사적으로 조건적이지만, 그러한 발견 하나하나가 “무조건적으로 객관적인 인식”의 한 걸음 전진이라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한마디로, 모든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으로 조건적이지만, 모든 과학적 이데올로기에는 (예컨대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달리) 객관적 진리, 절대적 자연이 대응한다는 것은 무조건적이다. 그대들은 말할 것이다.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의 이러한 구별은 불확정적이라고. 나는 그대들에게 대답하겠다. 그것은 과학이 그 말의 나쁜 의미에서 도그마로, 죽은 것, 굳어버린 것, 골화한 것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에 꼭 알맞을 만큼 “불확정적”이며, 동시에 신앙주의와 불가지론으로부터, 철학적 관념론과 흄과 칸트 추종자들의 궤변으로부터 가장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경계를 긋기에 꼭 알맞을 만큼 “확정적”이다. 여기에는 그대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경계가 있으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그대들은 반동 철학의 늪으로 굴러떨어졌다. 이것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상대주의 사이의 경계다.
우리는 상대주의자다, 하고 마흐, 아베나리우스, 페촐트는 외친다. 우리는 상대주의자다, 하고 체르노프 씨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는 몇몇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이 맞장구친다. 그렇다, 체르노프 씨와 마흐주의자 동지들이여, 바로 여기에 그대들의 잘못이 있다. 왜냐하면 상대주의를 인식론의 기초로 삼는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자신을 절대적 회의주의, 불가지론과 궤변에, 아니면 주관주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론의 기초로서의 상대주의는 우리 지식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대적 인식이 접근해 가는, 인류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객관적 척도나 모델도 부정하는 것이다. 순전한 상대주의의 관점에서는 온갖 궤변을 정당화할 수 있고, 나폴레옹이 1821년 5월 5일에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를 “조건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으며, 과학적 이데올로기(한 측면에서 “편리한”) 옆에 종교적 이데올로기(다른 측면에서 매우 “편리한”)를 허용하는 것을 인간이나 인류를 위한 단순한 “편리함”이라고 선언할 수 있다, 등등.
변증법은 — 헤겔이 이미 해명했듯이 — 상대주의, 부정, 회의주의의 계기를 포함하지만, 상대주의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은 분명히 상대주의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식의 상대성을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 지식이 이 진리에 접근하는 한계가 역사적으로 조건적이라는 의미에서 인정한다.
보그다노프는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을 두고 이탤릭체로 이렇게 쓴다: “일관된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독단론도 그러한 정태론도 용납하지 않는다”(『경험일원론』 제3권, IX쪽). 이것은 혼동이다. 세계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하듯이) 영원히 운동하고 발전하는 물질이고, 발전하는 인간 의식이 그것을 반영한다면, 여기서 “정태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문제는 사물의 불변하는 본질이나 불변하는 의식이 결코 아니며, 자연을 반영하는 의식과 의식이 반영하는 자연 사이의 일치다. 바로 이 문제에 관해서 — 그리고 오직 이 문제에 관해서만 — “독단론”이라는 용어는 특유의 철학적 뒷맛을 풍긴다. 우리가 이미 꽤 “오래된” 유물론자 포이어바흐의 예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관념론자와 불가지론자가 유물론자에 반대하여 즐겨 쓰는 말이다. 낡고도 낡은 잡동사니 — 그 악명 높은 “최신 실증주의”의 관점에서 유물론에 대해 제기되는 반론은 모두 이런 것으로 드러난다.
6. 인식론에서 실천의 기준
우리는 마르크스가 1845년에, 엥겔스가 1888년과 1892년에 실천의 기준을 유물론 인식론의 기초에 도입했음을 보았다. “인간의 사유에 대상적” (즉 객관적) “진리가 부합하는가”라는 문제를 실천 밖에서 제기하는 것은 스콜라주의다 —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2테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칸트주의와 흄주의의 불가지론, 그리고 그 밖의 철학적 기벽(Schrullen)에 대한 최선의 반박은 실천이다 — 엥겔스는 이렇게 되풀이한다. “우리 행위의 성공은 우리의 지각이 지각되는 사물의 대상적” (객관적) “본성과 일치함(부합함, Übereinstimmung)을 증명한다” — 엥겔스는 불가지론자들에게 이렇게 반박한다.
이것을 실천의 기준에 관한 마흐의 논의와 비교해 보라. “일상적 사유와 일상 언어에서는 보통 겉보기의 것, 환영적인 것을 현실에 대립시킨다. 연필을 우리 앞 공중에 들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곧은 상태로 본다. 그것을 비스듬히 물속에 담그면 우리는 그것을 굽은 것으로 본다. 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연필은 굽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곧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근거로 한 사실은 현실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실은 환영의 지위로 격하하는가? … 우리가 이례적인 경우에도 여전히 통상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자연스러운 오류를 범할 때, 우리의 기대는 물론 어긋난다. 그러나 사실들에는 그 탓이 없다. 이런 경우에 환영을 말하는 것은 실천적 관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과학적 관점에서는 조금도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세계는 단지 우리의 환영, 꿈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자주 논의되는 문제도 과학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가장 터무니없는 꿈도 다른 어떤 사실 못지않은 하나의 사실이다”(『감각의 분석』, 18—19쪽).
부조리한 꿈만이 아니라 부조리한 철학도 사실이라는 것은 옳다. 에른스트 마흐의 철학을 접하고 나면 그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가장 저열한 소피스트답게, 인간의 오류, 즉 도깨비·집귀신 따위에 대한 믿음 같은 인류의 온갖 “부조리한 꿈”에 대한 과학사적·심리학적 연구를 참된 것과 “부조리한 것”의 인식론적 구별과 혼동한다. 이는 마치 경제학자가, 노동자의 “마지막 한 시간”이 자본가에게 모든 이윤을 준다는 시니어의 이론도, 마르크스의 이론도 똑같이 사실이며, 어느 이론이 객관적 진리를 표현하고 어느 이론이 부르주아지의 편견과 그 교수들의 돈에 팔린 근성을 표현하는가라는 질문은 과학적 관점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두장이 J. 디츠겐은 과학적, 즉 유물론적 인식론에서 “종교적 믿음에 맞서는 보편적 무기”를 보았다(«Kleinere philosophische Schriften», S. 55). 그런데 정교수 에른스트 마흐에게는 유물론적 인식론과 주관적 관념론적 인식론의 구별이 “과학적 관점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유물론과 관념론 및 종교의 투쟁에서 과학은 당파성이 없다 — 이것은 마흐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현대 부르주아 교수들, 같은 J. 디츠겐의 적절한 표현을 빌리면 “억지 관념론으로 민중을 우둔하게 만드는 학위 딴 하인들”이 즐겨 내세우는 사상이다(S. 53, 같은 곳).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환상과 현실을 구별해 주는 실천의 기준을 E. 마흐가 과학 밖으로, 인식론 밖으로 내던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그런 억지 교수 관념론이다. 인간의 실천은 유물론적 인식론의 올바름을 증명한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식론의 근본 문제를 실천과 무관하게 해결하려는 시도를 “스콜라주의”이자 “철학적 궤변”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마흐에게는 실천은 실천이고 인식론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전자로 후자를 규정하지 않고도 그 둘을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인식은 — 마흐는 자신의 최근 저작 『인식과 오류』(독일어 제2판 115쪽)에서 말한다 — 생물학적으로 유용한(förderndes) 심리적 체험이다.” “오로지 성공만이 인식과 오류를 구별할 수 있다”(116쪽). “개념은 물리적 작업가설이다”(143쪽).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 러시아 마흐주의자들은 마흐의 이런 문구를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로 놀라울 만큼 순진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흐가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하는 꼴은 비스마르크가 노동운동에 접근하고 예블로기 주교가 민주주의에 접근했던 것과 똑같다. 마흐에게서 이런 명제들은 그의 관념론적 인식론과 나란히 놓여 있을 뿐, 인식론에서 이런저런 일정한 노선의 선택을 규정하지 않는다. 인식은 인간에게서 독립한 객관적 진리를 반영할 때에만 생물학적으로 유용할 수 있고, 인간의 실천에서, 생명의 보존에서, 종의 보존에서 유용할 수 있다. 유물론자에게 인간 실천의 “성공”은 우리의 표상이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의 객관적 본성과 일치함을 증명한다. 유아론자에게 “성공”이란 내가 실천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며, 이 실천은 인식론과 따로 떼어 고찰할 수 있다. 실천의 기준을 인식론의 기초에 넣으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유물론에 이른다 —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실천은 유물론적이어도 좋다, 이론은 별개의 문제다 — 마흐는 이렇게 말한다.
“실천적으로 — 그는 『감각의 분석』에서 이렇게 쓴다 —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나라는 표상 없이 지낼 수 없는 것은, 어떤 사물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신체라는 표상 없이 지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과 똑같이 한결같이 이기주의자이자 유물론자로 남는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우리는 결코 이런 견해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284—285).
이기주의는 여기서 전혀 엉뚱한 소리다. 그것은 전혀 인식론적 범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인식론에서 우리에게 기준이 되는 실천에는 천문학적 관측과 발견 등의 실천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사람들이 실천에서 전적으로, 그리고 오로지 유물론적 인식론에 따라 움직인다는 마흐의 귀중한 고백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피해 가려는 시도는 마흐의 현학적·스콜라적이며 억지스러운 관념론적 지향을 드러낼 뿐이다.
불가지론과 관념론에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실천을 인식론에서 고찰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떼어 내려는 이런 노력이 얼마나 새로울 것이 없는지는 독일 고전 철학의 역사에서 가져온 다음 예가 보여 준다. 여기서 칸트에서 피히테로 가는 길목에 G. E. 슐체(철학사에서 이른바 슐체-아이네시데무스)가 서 있다. 그는 철학에서 회의주의 노선을 공공연히 옹호하며 자신을 흄의 추종자(고대인 가운데서는 피론과 섹스투스의 추종자)라고 부른다. 그는 모든 물자체와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단호히 부정하고, 우리가 “경험” 너머로, 감각 너머로 나아가지 말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그러면서 다른 진영에서 나올 반론까지 미리 내다본다. “회의주의자는 생활의 일에 참여할 때 객관적 대상의 현실성을 의심할 바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진리의 기준을 용인하므로, 회의주의자 자신의 처신이야말로 그의 회의주의에 대한 가장 좋고 가장 명백한 반박이다”[64]. “그런 논거들은 — 슐체는 분개하며 대답한다 — 오로지 천민(Pöbel, S. 254)에게나 통한다. 나의 회의주의는 철학의 범위 안에 머물 뿐 생활 실천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255).
마찬가지로 주관적 관념론자 피히테도 관념론 철학의 범위 안에서 “행위가 문제가 될 때에는 우리 모두에게, 심지어 가장 단호한 관념론자 자신에게도 불가피하게(sich aufdringt) 다가오는 실재론, 대상들이 우리와 완전히 독립적으로, 우리 밖에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실재론”에 자리를 찾아 주기를 바란다(Werke, I, 455).
마흐의 최신 실증주의도 슐체와 피히테에서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진기한 일로서 지적해 두자면, 이 문제에 관해서도 바자로프에게는 세상에 또다시 플레하노프 말고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양이보다 센 짐승은 없는 법이다. 바자로프는 “플레하노프의 살토 비탈레 철학”을 비웃는다(『개요』, 69쪽). 플레하노프는 실제로 터무니없는 문구를 썼는데,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철학’의 불가피한 salto vitale”(생명의 도약)라는 것이다(『L. 포이어바흐에 대한 주석』, 111쪽). “믿음”이라는 표현은 비록 따옴표로 묶여 있고 흄을 따라 되풀이된 것이기는 하지만, 플레하노프에게 용어의 혼란이 있음을 드러낸다 —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플레하노프가 무슨 상관인가?? 바자로프는 왜 다른 유물론자, 이를테면 포이어바흐라도 들지 않았는가? 그저 그를 모르기 때문인가? 그러나 무지는 논거가 아니다. 포이어바흐도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의 근본 문제들에서 실천으로의 “도약”, 슐체와 피히테와 마흐의 관점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도약”을 한다.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포이어바흐는 피히테에게서 뽑은 매우 선명한 인용으로 관념론의 본질을 서술하는데, 이 인용은 마흐주의 전체를 훌륭하게 논파한다. “그대는 — 하고 피히테는 썼다 — 사물들이 실재하며 그대 밖에 존재한다고 여긴다. 오직 그대가 그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 촉각, 청각은 감각일 뿐이다... 그대는 대상들을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대 자신의 감각들만을 감각한다”(포이어바흐, Werke, X. Band, S. 185). 그리고 포이어바흐는 반박한다. 인간은 추상적인 자아가 아니라 남자이거나 여자이며, 세계가 감각인가 하는 문제는 다른 인간이 나의 감각인가, 아니면 우리의 실천적 관계가 그 반대를 증명하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관념론의 근본 오류는 바로 그것이 세계의 객관성과 주관성, 현실성과 비현실성에 관한 문제를 오직 이론적 관점에서만 제기하고 해결한다는 데 있다”(189, 같은 곳). 포이어바흐는 인간 실천의 총체를 고려하는 것을 인식론의 기초로 삼는다. 물론 — 그는 말한다 — 관념론자들도 실천에서는 우리의 자아와 타인의 너의 실재성을 인정한다. 관념론자들에게 “이것은 생활에만 쓸모 있을 뿐 사변에는 쓸모없는 관점이다. 그러나 생활과 모순에 빠지고, 죽음의 관점,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의 관점을 진리의 관점으로 삼는 사변, 그러한 사변은 죽은, 거짓된 사변이다”(192). 우리는 감각하기 전에 숨을 쉰다. 우리는 공기 없이, 먹을 것과 마실 것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계의 관념성이냐 실재성이냐 하는 문제를 따지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 이야기를 한다는 말인가? — 분개한 관념론자가 외친다. — 이 무슨 천박함인가! 철학 강단과 신학 강단에서는 학문적 의미의 유물론을 온 힘을 다해 욕하고, 공동 식탁에서는 가장 조야한 의미의 유물론을 실천하는 미풍양속을 이렇게 어기다니!”(195). 그리고 포이어바흐는 주관적 감각을 객관적 세계와 동일시하는 것은 “몽정을 출산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외친다(198).
그다지 점잖은 지적은 아니지만, 감각적 표상이 곧 우리 밖에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가르치는 철학자들에게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삶과 실천의 관점이 인식론의 첫째가는 기본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관점은 교수 스콜라철학이 끝없이 지어내는 궁리들을 문턱에서부터 내던지면서 필연적으로 유물론으로 이끈다. 물론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실천의 기준이 사태의 본질상 어떠한 인간 표상도 결코 완전히 확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기준 역시 인간의 지식이 “절대”로 바뀌지 못하게 할 만큼 “불확정적”이며, 동시에 관념론과 불가지론의 온갖 변종과 무자비한 투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확정적이다. 우리의 실천이 확증하는 것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객관적 진리라면, 여기서 유물론적 관점에 선 과학의 길만이 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정이 따라 나온다. 예컨대 보그다노프는 마르크스의 화폐 유통 이론에 오직 “우리 시대에 대해서만” 객관적 진리성을 인정하겠다고 하면서, 이 이론에 “초역사적으로 객관적인” 진리성을 부여하는 것을 “독단주의”라고 부른다(『경험일원론』 제3권, VII쪽). 이것은 또다시 혼란이다. 이 이론과 실천의 일치는 미래의 어떤 사정도 바꿀 수 없다. 나폴레옹이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는 진리가 영원한 것과 똑같이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실천의 기준은 — 즉 지난 수십 년간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발전 과정은 —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의 사회경제 이론 전체의 객관적 진리를 증명할 뿐, 그 이런저런 부분이나 정식화 따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독단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부르주아 경제학에 용서할 수 없는 양보를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객관적 진리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유하는 견해에서 나오는 유일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 이론의 길을 따라 나아가면 우리는 객관적 진리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며(결코 그것을 다 길어 내지는 못하겠지만), 그 밖의 어떤 길을 따라 나아가더라도 우리는 혼란과 거짓 말고는 아무 데도 이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