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

헝가리의 새 노선

스탈린 사후 모스크바는 왜 헝가리 지도부에 라코시의 노선을 뒤집으라고 요구했고, 그 수정은 어디까지 갔는가?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서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과잉 공업화와 대량 탄압을 비판하고 너지 임레를 총리로 세웠다. 6월 결의와 7월 4일 강령 연설로 사면, 수용소 폐쇄, 공출 완화, 협동조합 탈퇴 허용이 이어졌지만, 당 제1서기로 남은 라코시는 베리야 실각 뒤 수정의 속도를 늦추려 했다.

신호가 닿지 않는 체제: 1952년의 위기

헝가리 공산 체제의 위기는 1953년이 아니라 1952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1951년 제1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위로 끌어올린 데다 1952년의 가뭄과 서리로 수확이 무너지자 경제 모든 부문에서 불균형이 드러났다. 그해 8월 경제 전반을 책임진 부총리 게뢰 에르뇌는 라코시 마차시에게, 농산물 수출 감소만으로 1,200만 달러(1억 5천만 외화 포린트)가 날아가고 사료와 감자를 수입해야 하며 소련에 긴급 차관을 청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1953년 1월 총리실에서 작성된 농업 실태 보고서는 1949년 이후 빵곡물 수확이 1930년대 평균보다 6퍼센트, 사료곡물은 15퍼센트, 감자는 13퍼센트 낮다고 적었지만, 단 일곱 부만 만들어졌다. 1

가장 심각한 곳은 농촌이었다. 1952년 여름 의무 공출에 맞선 집단 저항이 처음 나타났다. 탈곡 거부, 할당량 납부 거부, 때로는 폭력이 뒤따랐다. 바치키슈쿤 주 사크마르레제텔레크에서는 농민 300명이 밀 한 톨도 마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며 행진했고, 내무장관 하지 아르파드가 국가보안기관(ÁVH) 부대를 이끌고 마을에 내려왔다. 농업 담당 부총리 너지 임레는 곡물의 자유시장 거래를 다시 허용하자고 당 서기국에 제안했고, 8월 거래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1953년 초 헝가리 농촌의 식량과 종자 부족을 바꾸지 못했다. 1

탄압도 한계를 넘고 있었다. 법무부·내무부와 당 행정부서의 합동 보고에 따르면 법원은 1949년 7만 2,300명, 1950년 9만 8,000명, 1952년 12만 명에게 형을 선고했고, 경범죄 처벌만 50만 건에 달했다. 1952년 8월 당 기구 안에서도 「노동자에게 과도한 가혹함」이 적용된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그럼에도 라코시는 스탈린 말년의 마지막 숙청을 흉내 냈다. 1953년 2월 말 그는 ÁVH 수장 페테르 가보르와 여러 간부의 체포를 중앙지도부에 알렸고, 정치위원 코바치 이슈트반과 버시 졸탄이 비판받고 지방으로 밀려났다. 모두 유대계였다.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반시온주의」 숙청이었다. 3월 5일 스탈린 사망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런 때였다. 1

스탈린 사후 모스크바의 계산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두 문제를 동시에 풀어야 했다. 스탈린 생전에는 꺼낼 수 없던 후계 문제, 그리고 제국의 안정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의 긴장은 폭발점에 가까웠다. 대량 테러는 더 이상 겁을 주지 못할 만큼 커져 경제의 합리적 운영을 막았고, 강행 성장은 심각한 불균형을 낳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1951~1952년 생활수준이 급락했다. 헝가리의 집단화는 1920~1930년대 소련에서 일어난 일을 작은 규모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식량 부족, 농촌 인구 유출, 가축 감소, 버려진 농지였다. 1

스탈린 시대에 라코시는 스탈린과 직접 선을 대는 유일한 헝가리 지도자였고, 어떤 정보가 어떤 형태로 전해질지는 그 둘의 대화에 달려 있었다. 스탈린이 죽자 서랍에 묻혀 있던 보고서들이 새 의미를 얻었다. 특히 부다페스트 주재 소련 대사 키셀료프의 보고서가 그랬다. 그는 헝가리 지도부의 생활수준 정책과 탄압, 지식인의 분위기를 비판적으로 보고했고, 몰로토프는 6월 회담을 앞두고 그의 지난 보고서들을 다시 읽었다. 5월 말 라코시는 모스크바에 불려 가 과제를 받았고, 6월 3일 당 서기국은 투자 축소와 소비 확대, 정부 각료 32명을 17~18명으로 줄이는 안, 총리와 당 지도자의 분리, 라코시의 서기장 직 사임을 결의했다. 1

크렘린의 사흘: 1953년 6월 13~16일

6월 12일, 1948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합당으로 생긴 집권당 헝가리 노동인민당(MDP)의 지도자 여덟 명이 퇴쾰 군 비행장에서 특별기로 모스크바에 갔다. 명단은 소련 당 간부회가 직접 골랐다. 라코시, 부총리 게뢰·너지·히다시 이슈트반, 각료회의 사무국장 설러이 벨러, 농업장관 헤게뒤시 언드라시, 부다페스트 당위원회 제1서기 푈드바리 루돌프, 그리고 국가원수인 대통령평의회 의장 도비 이슈트반이었다. 서기국원 퍼르커시 미하이와 레버이 요제프는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은 왜 불려 가는지 몰랐다. 다음 날 스탈린의 옛 집무실에서 말렌코프·베리야·몰로토프·흐루쇼프·불가닌·미코얀이 그들을 맞았다. 며칠 전 동독 지도자 울브리히트와 그로테볼도 같은 「협의」를 거쳤고, 동베를린은 6월 11일 「새 노선」 공보를 발표했다. 1 5 3 4 6 7

라코시는 숙제를 다 했다는 듯 보고했지만, 말렌코프는 곧바로 「헝가리 동지들이 결함을 과소평가한다」고 잘랐다. 베리야가 가장 많은 숫자를 들고 나왔다. 「인구 950만의 헝가리에서 150만 명을 기소한 것이 용납되는가?」 그는 라코시가 국가보안을 직접 지휘하며 수사에 개입하고 신체적 폭력을 지시했다고 비난했고, 각료회의 의장은 「헝가리인」이 맡는 편이 낫다며 처음으로 너지의 이름을 꺼냈다. 몰로토프는 「영도자주의」가 소련에서 비롯되었다고 자기비판하며 자급자족 목표를 비판했고, 불가닌은 군 숙청과 퍼르커시를, 미코얀은 「철광석도 코크스도 없는 헝가리」의 제철 공업과 지하철 같은 과잉 투자를 비판했다. 1

헝가리 쪽에서 가장 먼저 발언한 너지는 책임을 나눠 지면서도 원인을 일반화했다. 「문제의 주된 원천은 대중과의 괴리입니다. 우리는 인민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쿨라크 명부를 거론하며 여기에 오른 사람은 사회에서 배제된다고 말했고, 라코시·게뢰·퍼르커시 셋이 서기국도 모르게 결정한다고 지적했다. 흐루쇼프는 책임이 전적으로 라코시에게 있으며 그는 「집단적으로 일할 줄 모른다」고 못 박았다. 16일 회의에서 베리야는 헝가리 측 초안에 숫자가 없다며 탄압 통계와 ÁVH 지휘에 대한 라코시의 개인 책임을 넣게 했고, 몰로토프는 강제로 만든 협동조합의 해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너지가 주장한 쿨라크 명부 폐지는 이틀 동안 소련 측이 받아들인 유일한 헝가리 측 제안이었다. 1

회담은 인사로 끝났다. 너지가 총리가 되고, 라코시는 당 지도자로 남되 권력을 나누며, 국방장관 퍼르커시는 버터 이슈트반으로 교체된다. 말렌코프는 「소련은 헝가리에 어떤 권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라코시가 돕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베리야는 그가 「스스로를 망칠 것」이라고 답했다. 참석자들의 회고에는 「등뼈를 부러뜨리겠다」는 말로 남아 있다. 모욕당한 라코시는 「이런 가르침을 진작 받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다. 1

6월 결의: 공개되지 않은 자기비판

대표단이 돌아온 다음 날인 6월 17일, 동독에서 봉기가 일어나 소련 전차가 진압에 나섰다. 6월 20일 확대 정치위원회에서 라코시는 「즉각적인 전환」을 하지 않으면 「가장 심각한 위기」가 온다며 이것이 「권력 장악 이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6월 27~28일 중앙지도부 확대회의에서 그는 한 시간 넘게 개인숭배와 영도자주의, 권력 집중, 「헝가리 출신」 간부의 배제를 자기비판했다. 너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류의 뿌리는 처음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다」고 말했고, 경제정책을 「과장 없이 모험주의적 정책」이라 불렀으며 「절반의 조치」에 만족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1 7

결의는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오류, 원인, 당면 조치, 조직 과제였다. 1951년 이후의 과잉 공업화를 「과대망상」과 「모험주의」로 규정했고, 너지를 「기회주의자」로 몰았던 1949년의 집단화 논쟁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1951년부터 1953년 5월 1일까지 경찰의 경범죄 처분이 85만 건, 1950년부터 1953년 1분기까지 법원이 다룬 사람이 65만 명이고 그 가운데 38만 7천 명이 선고받았으며, 공출 미납 벌금으로 약 4억 포린트를 거두었다는 숫자도 들어갔다. 지도부는 「라코시·게뢰·퍼르커시·레버이 네 동지의 손에 집중된 파벌」이었고, 라코시가 ÁVH에 누구를 체포하고 어떻게 수사할지 직접 지시하며 구금자 학대를 명령한 것은 잘못이라고 적었다. 쿨라크 명부 폐지, 공출 미납금 탕감, 협동조합 탈퇴 허용도 담겼다. 1

그러나 결의는 공개되지 않았다. 회의 도중 모스크바에서 전화가 와서, 결과가 나타난 뒤에 알리라고 했다는 것이 라코시의 설명이다. 라코시는 결의를 당의 공보가 아니라 새 정부의 강령으로 국회에서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총리의 강령 연설에서는 당 지도부와 지도자 개인을 비판할 자리가 없었다. 인사도 전환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퍼르커시·레버이·키시 카로이·하지 아르파드가 정치위원회에서 빠졌지만, 새 위원들은 대부분 라코시와 게뢰가 1951~1953년에 발탁한 젊은 간부였고, 게뢰는 내무장관을 겸한 부총리가 되었고, 새 정부의 장관 가운데 라코시 정부에 없던 사람은 버터 이슈트반과 졸도시 샨도르 둘뿐이었다. 결의 전문은 1985년 지하출판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 1 4

7월 4일: 국회의 강령 연설

7월 3일 라코시 정부가 사퇴했고, 4일 새벽 너지 정부가 선출되었다. 그날 너지의 강령 연설은 정오 뉴스로 알려진 뒤 밤 8시에 전체가 방송되었다. 그는 「5개년 계획의 상향된 목표가 여러 면에서 우리의 힘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사회주의 중공업의 발전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며 공업 자급자족 시도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개인 농가의 생산을 국가적 이익으로 규정하고 소유의 안정을 약속했으며, 소매업과 소공업에 개인 영업 허가를 다시 내주겠다고 했다. 의심받던 옛 지식인에게 부당한 숙청을 끝내겠다고 했고, 종교 문제에서는 행정적 강제 대신 「관용」을 말했다. 1 2

사람들이 가장 오래 기억한 대목은 고등교육에 무리했으니 「공중누각을 짓지 말자」며 「미래의 희망인 어린 헝가리인들」의 초등학교에 투자하겠다는 말이었다. 국경일마저 폐지되었던 나라에서 공산당 총리가 「어린 헝가리인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대목은 법질서였다. 너지는 사법·경찰 기관과 지방평의회에서 적법성이 지켜지지 않았고, 기소와 경범죄 처분, 공출, 세금 징수, 쿨라크 명부가 인민의 정의감을 해쳤다고 말했다. 몇 문장 안에 「적법성」을 네 번 썼다. 정부가 인민을 상대로 한 전쟁을 끝낸다는 뜻이었다. 1956년 이후 망명자 면담과 1980년대 구술사가 한목소리로 전하듯, 1945년 이후 처음으로 다수가 동의한 공산주의 지도자의 연설이었다. 1

외국 언론은 이 연설을 레닌의 신경제정책(NEP)과 비교했다. 『뉴욕 타임스』 빈 특파원은 이 강령을 믿을 수 있다면 헝가리의 개인 농민이 유고슬라비아보다도 강제 집단화에서 더 잘 보호받게 되었다고 썼다. 블레드에서 티토는 AFP 기자 페이퇴 페렌츠에게 「너지 임레가 누구냐」고 물었고, 페이퇴는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에 관심이 많은 철저한 부하린주의자로 알려져 있다」고 답했다. 반면 지난 몇 년의 정책으로 특권을 얻은 사람들은 강령을 의심스럽게 받아들였다. 1

베리야의 몰락과 두 개의 연설

6월 26일 모스크바에서 베리야가 체포되었다(그는 12월 23일 처형된다). 7월 초 소련 지도부는 너지·라코시·게뢰 세 사람을 불러 베리야 규탄 결의를 설명했고, 흐루쇼프는 헝가리 문제 토론 때 베리야의 태도가 그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라코시는 곧바로 6월 회담의 수정을 시도했지만 소련 지도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라코시가 가장 매섭게 공격하던 비판자를 잃은 것은 분명했다. 훗날 라코시와 카다르 야노시는 너지가 「베리야의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퍼뜨렸다. 카다르는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까지 그렇게 말했다. 라이너는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전혀 없다고 쓴다. 1 9

7월 11일 부다페스트 당 활동가 회의에서 라코시는 생중계 속에 전투적인 연설을 했다. 비판은 짧게 언급만 하고, 공업화에서 협동조합 우선까지 옛 목표와 구호는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 「과업을 먼저 당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편이 더 현명했을 것」이라는 말은 너지의 국회 연설을 겨냥한 것이었다. 「반협동조합 선동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대목에서 박수가 터졌다. 같은 자리에서 너지는 공출 미납금 탕감과 할당량 축소 같은 조치를 나열하는 데 그친 약한 연설을 했다. 일주일 사이에 당이 놀라운 속도로 정책을 바꾸고 있거나, 지도부에 통일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1 3

너지는 7월 16일 스스로 소련 대사 키셀료프를 찾아가 「경제와 정치를 개조하는 공동 계획」의 이행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고, 베리야 체포 뒤 라코시가 강령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을 「거의 자본주의 복고 시도처럼」 본다고 말했다. 며칠 뒤 소련 당은 헝가리 측에 그동안의 성과 보고를 요구했다. 8월 8일 말렌코프가 최고소비에트에서 생활수준·경공업·농업을 강조하는 정부 강령 연설을 하자, 베리야의 몰락이 스탈린식 질서의 복귀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라코시는 9월 말 대사 대리 안드로포프에게 지도부가 「서투르게」 자기 오류만 비판해 적에게 이용당했다고 불평했지만, 6~7월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했다. 1 8

사면, 수용소 폐쇄, 협동조합 탈퇴: 1953년 가을

7월 24일의 사면은 2년 이하 형을 면제하고 그보다 긴 형을 3분의 1 줄였지만 정치범은 제외했다. 대신 공출 미납, 공급 위반, 「무단 이직」처럼 형식상 일반 범죄였지만 사실상 정치적 보복이었던 처벌과, 추방·수용이라는 예방적 탄압이 폭넓게 풀렸다. 레치크·키슈터르처·커진츠바르치커·티서뢰크의 ÁVH 수용소와 호르토바지 강제이주 수용소가 문을 닫았고, 헝가리의 굴라그는 1953년 가을 사실상 사라졌다. 1953년 11월 보고에 따르면 조치의 대상은 약 74만 8천 명이었다. 약 4만 명의 수감자 가운데 1만 5,761명이 풀려났고, 5천 명 넘는 수용소 수감자 가운데 3,234명이 10월 말까지 석방되었으며, 호르토바지의 7,281명이 자유를 되찾았다. 1

그러나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을 포함한 수천 명의 정치범은 감옥에 남았다. 풀려난 사람 대부분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재산을 되찾지 못했고, 보상을 금지하는 중앙 지시가 있었으며, 일부는 경찰 감시나 비밀경찰의 「작전 통제」를 받았다. 경제에서는 세 묶음의 조치가 나왔다. 중공업 투자를 줄여 농업·경공업·주택으로 돌렸고, 92만 8천 명의 임금을 평균 100포린트 남짓 올리고 7월과 9월 물가를 내려 약 10억 포린트를 되돌려 주었으며, 농민의 부담을 덜고 공출 할당량을 낮췄다. 개인 수공업자는 1949년 20만 명에서 4년 만에 4분의 1 아래로 줄었다가 1954년 10만 명을 넘었다. 10월 27일 너지는 가톨릭 주교단 대표를 만나 교회에 대한 여러 양보에 합의했다. 1

강령 연설 직후 농업협동조합에서 자발적 탈퇴가 시작되었다. 조합원들은 억지로 내놓았던 가축과 농기구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도부는 행정력으로 막는 대신 남는 조합원에게 혜택을 주고 떠나는 사람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탈퇴자는 내놓았던 땅을 돌려받지 못했고 조합의 부채를 이중으로 떠안았으며, 해산에는 공개 투표로 3분의 2가 필요했고 열 명만 남아도 조합은 존속했다. 1953년 말까지 5천 개가 넘는 조합 가운데 688곳(12퍼센트)이 해산했고, 조합원은 37만 6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3분의 1이 줄었다. 1

수정은 어디까지 갈 수 있었나

너지는 새 노선을 자기 이론으로 설명했다. 헝가리는 「인민민주주의 이행기」를 부당하게 줄이고 더 「발전된」 단계의 정책으로 건너뛰었으니, 너무 멀리 나간 과정을 더 느리지만 확실한 길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4년 10월 펴낸 2권짜리 저작집 『10년』에 1945~1947년의 토지개혁과 소농 경영에 관한 글과 1948년 금지된 「완만한 이행」 연구를 다시 실은 것도 이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1947~1948년 이후 5년 만에 정치·경제·사회가 깊이 바뀌었고, 되돌아갈 「인민민주주의 단계」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너지가 바꿔야 할 출발점은 번개처럼 세워진 고전적 스탈린주의 제도와, 그것에 길든 새 지배층의 정신이었다. 1 2

라이너는 경제학자 코르너이 야노시의 말을 빌려 고전적 체제의 정합성이 곧 약점이라고 쓴다. 한 가닥이 끊어지면 결국 전체가 풀린다. 체제를 지키려고 고친 것이 체제의 일관성을 공격해 새 문제를 낳고, 남는 선택지는 완전한 경직이나 끝없는 수정과 연기뿐이다. 1954년 경제 긴장과 정치 갈등 속에서 너지는 수정을 개혁으로 밀고 나가려 했으나, 모스크바에서 말렌코프가 밀려난 뒤 1955년 봄 모든 직위를 잃었다. 1 11 8 2

그럼에도 1953~1955년이 남긴 결과는 컸다. 헝가리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자신감은 영영 사라졌다. 부분적인 자기비판과 수정은 지도자들, 이어 당 기구와 당 지식인 사이에 불안과 성찰과 수정주의 성향을 퍼뜨렸다. 1955년 봄 이후 「당내 반대파」로 불린 새 노선 지지자들은 체제의 틀을 넘지 않았기에 쉽게 쓸어 버릴 수 없었고, 체제 변화까지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더 인간적인 얼굴의 공산주의」는 첫걸음이 되었다. 너지의 수정은 1956년 가을의 더 급진적인 변화가 출발하고 되돌아보는 기준점이 되었다. 1956년 10월 다시 총리가 된 너지는 라디오 연설에서 1953년에 결정되고 미뤄진 개혁을 시작하겠다고 약속했다. 1 2 10

결과

1953년 가을 헝가리의 수용소 체계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약 74만 8천 명이 사면과 처벌 취소의 대상이 되었지만, 정치범 수천 명은 감옥에 남았다. 너지는 1955년 봄 모든 직위를 잃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지도부의 자신감은 되돌아오지 않았고, 새 노선은 1956년 혁명이 출발하고 되돌아보는 기준점이 되었다.

연표와 지도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모스크바 크렘린 동베를린 레치크 수용소 호르토바지
  1. 1952.08헝가리
    곡물 자유거래 허용

    너지의 제안으로 곡물의 자유시장 거래가 다시 허용되었다.

  2. 1953.02헝가리
    페테르 가보르 체포

    라코시가 ÁVH 수장과 간부들의 체포를 중앙지도부에 알렸다.

  3. 1953.03.05헝가리소련
    스탈린 사망

    라코시·게뢰·너지 3인 위원회가 사후 과제를 맡았다.

  4. 1953.06.03헝가리
    당 서기국 결의

    투자 축소와 총리·당 지도자 분리를 결의했다.

  5. 1953.06.13헝가리소련
    크렘린 회담 시작

    소련 지도부가 라코시의 노선과 탄압을 비판했다.

  6. 1953.06.16헝가리소련
    크렘린 회담 둘째 날

    쿨라크 명부 폐지와 너지 총리 기용이 정해졌다.

  7. 1953.06.17동독
    동독 봉기

    소련 전차가 동독의 파업과 봉기를 진압했다.

  8. 1953.06.27헝가리
    중앙지도부 6월 결의

    라코시가 자기비판하고 새 노선 결의가 채택되었다.

  9. 1953.07.04헝가리
    너지 정부 강령 연설

    너지가 국회에서 적법성과 생활수준을 약속했다.

  10. 1953.07.11헝가리
    라코시의 활동가 회의 연설

    베리야 실각 뒤 라코시가 옛 목표의 불변을 강조했다.

  11. 1953.07.24헝가리
    제한 사면

    2년 이하 형을 면제했으나 정치범은 제외했다.

  12. 1953.08.08소련
    말렌코프의 최고소비에트 연설

    생활수준과 경공업을 강조해 너지의 입지를 굳혔다.

  13. 1953.10.27헝가리
    가톨릭 주교단 면담

    교회에 대한 여러 양보가 합의되었다.

  14. 1953.12헝가리
    협동조합 688곳 해산

    조합원이 37만 6천 명에서 25만 명으로 줄었다.

관련 인물 1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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