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1949

동독: 소련 군정에서 독일민주공화국까지

1945년 소련 점령지구의 군정에서 1949년 10월 독일민주공화국 수립까지, 권력은 어떤 절차를 거쳐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에 모였으며, 이 나라는 왜 다른 인민민주주의 국가보다 늦게 세워졌는가?

1945년 6월 카를스호르스트에 소련군정청이 세워졌고, 4월 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울브리히트 그룹이 베를린 행정을 짰다. 6월 10일 정당 활동이 허가되어 공산당·사회민주당·기독교민주연합·자유민주당이 만장일치로 움직이는 반파시즘 블록을 이루었다. 소련은 공장 해체와 소련 주식회사로 배상을 거두었고, 특별수용소에는 15만여 명이 갇혔다. 1945년 9월 토지개혁으로 100헥타르 넘는 토지가 분배되었고, 1946년 6월 작센 주민투표가 공업 몰수를 승인했다. 1946년 4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압력 속에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 합쳐졌으나, 10월 선거에서 사회주의통일당은 어느 주에서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베를린에서는 19.8%에 그쳤다. 1947년부터 독일경제위원회와 인민회의 운동이 국가의 골격을 만들었고, 사회주의통일당은 1948~49년 「새로운 형태의 당」이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5년: 카를스호르스트의 군정과 울브리히트 그룹

포츠담 협정은 오데르-나이세 선에서 서방 점령지구 경계까지의 독일 중부를 소련 점령지구로 정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옛 프로이센의 중심부였고, 1947년 프로이센이 해체된 뒤 브란덴부르크·메클렌부르크·작센·작센안할트·튀링겐의 다섯 주로 나뉘었다. 베를린은 네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도시로 남았다. 점령지구를 다스린 기구는 1945년 6월 9일 소련 점령군 최고사령관의 명령 1호로 세워진 소련군정청(SMAD)이었다. 본부는 베를린 동남쪽 카를스호르스트에 있었고, 소련 정부(인민위원평의회, 1946년부터 각료회의), 곧 스탈린에게 직접 속했다. 각 주에는 군정청 지부가, 그 아래에는 지역 사령부가 있었다. 1 2 3

군정청의 수장은 1945년 6월부터 1946년 봄까지 게오르기 주코프, 그 뒤 1949년 3월까지 바실리 소콜롭스키, 이어 바실리 추이코프였다. 이들은 동시에 독일 주둔 소련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러나 군정청이 소련 정책을 혼자 결정하지는 않았다. 정치고문 블라디미르 세묘노프와 선전국장 세르게이 튤파노프는 모스크바의 외무부·당 기관과 따로 연결되어 있었고, 국가보안 기관들은 군정청과 별개로 움직였다. 7월 27일 명령 17호로 독일 중앙행정청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그해 가을까지 교통·산업·농업·재정·교육·사법 등을 맡은 열한 곳이 생겼다. 이 기관들은 군정청의 「보조 기관」이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1949년 동독의 부처로 그대로 넘어갔다. 3 2 4)

독일 공산당 지도부는 붉은군대와 함께 돌아왔다. 1945년 4월 25일 모스크바에서 빌헬름 피크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귀국 간부들의 임무를 정했고, 4월 30일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열 명의 「울브리히트 그룹」이 비행기로 독일에 들어왔다. 작센에는 안톤 아커만의 그룹, 메클렌부르크에는 구스타프 조보트카의 그룹이 따로 보내졌다. 울브리히트 그룹은 5월 2일 베를린 동쪽 30킬로미터의 브루흐뮐레에서 일을 시작해 베를린 20개 구의 행정을 짰다. 구청장으로는 사회민주당원이나 시민 출신을 앉히되 인사와 교육 부서는 공산당원이 맡게 했고, 5월 12일 베를린 구청장과 시 참사회가 울브리히트의 명단 그대로 임명되었다. 그룹의 막내였던 볼프강 레온하르트는 1955년의 회고록에서 울브리히트가 「민주적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우리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5

6월 4일 울브리히트·아커만·조보트카는 모스크바에서 피크,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을 만났다. 스탈린은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과 지식인에게도 열린 전국 정당을 만들고 통일 독일을 위해 일하라고 주문했다. 6월 10일 군정청 명령 2호가 반파시즘 정당과 단체의 결성을 허가했고, 이튿날 공산당이 베를린에서 가장 먼저 창당 호소문을 냈다. 아커만이 쓴 이 문서는 독일에 소비에트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히고, 1848년 혁명이 시작한 시민적 민주주의 변혁의 완수와 「모든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갖춘 반파시즘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내걸었다. 사회민주당이 6월 15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이 6월 26일 뒤따랐고, 자유민주당(LDP)은 7월 10일 「블록」 가입을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7월 14일 네 당은 공산당의 주도로 「반파시즘 민주정당 통일전선」을 결성했다. 블록의 결정은 만장일치여야 했으므로, 공산당을 빼거나 공산당에 맞서는 연립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5 6 1

점령의 비용: 해체와 배상, 특별수용소

포츠담 회담은 배상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고, 각 점령국이 자기 지구에서 배상을 가져가는 방식이 남았다. 소련은 100억 달러를 요구했고, 1947년 12월까지 서방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그 금액을 자기 점령지구에서 거두려 했다. 1945년 8월 2일 이전의 반출은 배상으로 계산되지 않았는데, 소련 외무부 자료에 따르면 전리품 대대가 128만 톤의 자재와 360만 톤의 설비를 실어 갔다. 해체 규모의 추계는 엇갈린다. 독일 측 연구는 1952년까지 약 3,400개 공장, 1944년 공업 능력의 약 30%가 해체되었다고 보며, 자동차 공업의 5분의 4와 제철 능력의 4분의 3, 1947년까지 철도망의 48%가 뜯겨 나갔다고 집계한다. 네이마크는 1950년 무렵까지 해체와 현재 생산에서의 반출을 합쳐 소련이 100억 달러 목표를 채웠고, 동부 독일 공업 기반의 3분의 1 가량이 사라졌다고 추산했다. 1 7) 8

1946년 6월 5일 군정청 명령 167호는 해체 대상이던 대기업 약 200곳을 「소련 주식회사(SAG)」로 바꾸었다. 공장을 뜯어 가는 대신 현재 생산에서 배상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 회사들은 30만 명을 고용했고 1947년 점령지구 공업 생산의 20%를 차지했다. 1947년 5월 소련 각료회의 결정으로 세워지고 7월 작센의 아우에에 등록된 비스무트 주식회사는 소련 핵무기 계획에 결정적인 기업으로, 소련 주식회사와 별개로 소련이 직접 관리했다. 군정청에서 소련 주식회사를 맡은 부책임자는 1947년 5월부터 보그단 코불로프였다. 배상은 1953년 6월 봉기 뒤인 1954년 1월 1일에야 끝났다. 9 3

1945년 4월 18일 내무인민위원부 명령 00315호는 군사 재판 없이 「간첩·파괴분자·테러리스트·나치당 활동가」를 억류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점령지구에는 열 곳의 특별수용소가 세워졌고, 부헨발트와 작센하우젠처럼 옛 나치 강제수용소 자리를 쓴 곳도 있었다. 1945년 7월 4일 베리야는 이반 세로프를 점령군의 내무인민위원부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소련 공식 집계로는 독일인 122,671명을 포함해 157,837명이 수용되었고 그 가운데 적어도 43,035명이 죽었다. 실제 독일인 수감자는 이보다 3만 명가량 많았다는 추산도 있다. 수감자 가운데 나치당원의 비율은 시간이 갈수록 줄었고, 사회민주당원, 청소년, 귀환 포로가 끌려왔다. 수용소는 1948년 8월 굴라크 아래로 들어갔고 1950년 초 동독 정부에 넘겨졌다. 10 11 8

네이마크는 붉은군대 병사들의 대규모 강간이 독일 땅에 들어선 때부터 종전 뒤까지 이어졌다고 썼다. 그는 피해 여성이 200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독일 연구자들의 추계를 지지했고, 군정청과 독일 공산당 지도부가 이를 알면서도 막지 못하거나 막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의 결론은 강간, 약탈, 해체, 우라늄 채굴, 특별수용소가 점령지구 주민의 마음을 소련과 독일 공산당에게서 돌려세웠다는 것이었다. 8

토지개혁과 작센 국민투표

1945년 8월 초 공산당 기관지 『도이체 폴크스차이퉁』이 「융커」의 토지를 농민에게 넘기라는 운동을 시작했고, 9월 3일부터 11일까지 각 주와 지방 행정청이 거의 같은 내용의 토지개혁 시행령을 차례로 냈다. 첫 지역은 작센 지방이었다. 100헥타르가 넘는 토지를 가진 지주와 전범·나치 활동가로 분류된 사람의 토지가 보상 없이 몰수되었다. 몰수된 대농장은 7,160곳, 100헥타르 이하 농장은 4,537곳이었고, 국유지와 산림을 합쳐 329만 8천 헥타르, 당시 농지의 약 35%가 다시 분배되었다. 받은 사람은 새로 농민이 된 사람 183,261명, 동쪽에서 쫓겨 온 이주민 91,155명, 땅이 적은 농민 82,483명 등이었다. 1948년까지 새 농가의 43.3%가 이주민에게 돌아갔다. 12

대지주는 땅만 잃지 않았다.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고 살던 군(郡) 밖으로 추방되었으며, 상당수는 정치 경력과 상관없이 특별수용소에 갇혔다. 반파시즘과 대지주의 경제력 해체는 네 당의 공통 입장이었고, 오토 그로테볼도 9월 14일 사회민주당 간부들 앞에서 개혁을 지지했다. 그러나 보상을 요구한 기독교민주연합 의장 안드레아스 헤르메스는 군정청의 압력으로 물러나야 했다. 새 농가의 평균 면적은 10헥타르가 안 되었다. 농업 생산협동조합은 1952년에야 처음 생겼고, 집단화가 끝난 것은 1960년이었다. 12 13)

공업에서는 군정청이 먼저 움직였다. 1945년 10월 30일 명령 124호가 수많은 기업과 공장주의 재산을 압류해 관리인에게 맡겼고, 1946년 5월 명령으로 압류 재산의 처분권이 주와 지방 행정청에 넘어갔다. 작센 공산당의 헤르만 마테른이 몰수를 주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고, 3월 울브리히트가 군정청의 승인을 알렸다. 작센에서 압류된 4,700개 기업은 몰수·반환·군정청 보유의 세 명단으로 나뉘었고, 투표일에는 몰수 명단의 1,861개 기업이 표결에 올랐다. 캠페인은 「사회주의」나 「국유화」라는 말을 피하고 「전범 처벌」과 「인민 소유」를 내세웠다. 14

1946년 6월 30일 작센 주민투표는 투표율 93.7%에 찬성 77.6%로 통과되었다. 나치 활동가로 지목된 14,228명은 투표권이 없었고, 법에 정해진 주민 발의 절차는 행정 명령으로 건너뛰었지만, 투표 자체는 대체로 바르게 치러졌다고 평가된다. 이는 소련 점령지구에서 열린 유일한 주민투표였다. 다른 네 주는 투표 없이 법령으로 같은 몰수를 했다. 압류 기업과 해체를 면한 공장 가운데 소련 주식회사로 가지 않은 것은 「인민 소유 기업」이 되었고, 군정청에 몰수된 공업은 점령지구 공업 생산의 약 60%였다. 14 1

1946년 4월: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창당

1945년 여름에는 두 노동자 정당 모두에 통합을 바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치 집권이 노동운동의 분열 때문이었다고 보는 사회민주당원들이 있었고, 오토 그로테볼이 이끄는 베를린의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도 처음에는 통합을 원했다. 그때 통합을 미룬 쪽은 오히려 군정청과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이 혼자 힘으로 가장 강한 당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계산이 바뀐 것은 1945년 11월이었다. 헝가리 총선에서 공산당이 17%, 오스트리아에서 5.4%에 그치자, 스탈린과 울브리히트는 「오스트리아의 위험」을 피하려고 그달 안에 강력한 통합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무렵 사회민주당원들은 군정청의 압박을 겪으며 통합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5 16

1946년 초 점령지구의 모든 주에서 통합에 반대하는 사회민주당원들이 체포되거나 협박을 받았다. 그로테볼은 2월 초 영국 군정의 크리스토퍼 스틸에게 사회민주당원들이 「러시아의 총검에 간지럽혀지고」 있으며, 나흘 전까지 저항하겠다던 사람들이 이제는 빨리 끝내 달라고 애원한다고 말했다. 서독 사회민주당의 에리히 올렌하우어는 1961년 1945년 12월부터 1946년 4월 사이 적어도 2만 명의 사회민주당원이 징계·투옥·살해되었다고 추산했다. 영국 역사가 개리스 프리처드는 이 수치가 과장일 수 있지만 체포에 대한 공포는 널리 퍼져 있었고, 수백에서 수천 명이 서쪽으로 도피했다고 본다. 서방 점령지구 사회민주당을 이끈 쿠르트 슈마허는 통합에 반대했다. 15 17

베를린은 네 나라가 관리했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다. 3월 31일 베를린 사회민주당은 당원투표를 실시했으나, 소련 점령 구역에서는 투표가 금지되어 서방 구역에서만 치러졌다. 투표권자 32,547명 가운데 23,755명이 참여해 82%인 19,529명이 즉각 통합에 반대했고, 두 당의 협력 관계에는 62%가 찬성했다. 반대파는 4월 7일 독자적인 베를린 사회민주당 조직을 세웠다. 4월 21일과 22일 베를린 소련 구역의 아트미랄스팔라스트에서 열린 통합대회는 만장일치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을 세웠다. 공동의장은 피크와 그로테볼, 부의장은 울브리히트와 막스 페히너였고, 모든 기관은 두 당 출신이 반씩 나누었다. 1946년 4월 공산당원은 62만 4천 명, 3월 말 사회민주당원은 69만 5천4백 명이었는데, 새 당의 당원은 129만 7천6백 명이었다. 수만 명의 사회민주당원이 새 당에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1946년 3월 7일에는 에리히 호네커를 의장으로 하는 자유독일청년단(FDJ)이 공식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비정치적인 통일 청년 조직을 표방하며 네 점령지구 모두에서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청년 조직이었다. 같은 해 사회민주당의 구스타프 다렌도르프는 사회주의통일당의 탄생을 「강제 통합」이라 불렀다. 각국의 사회민주당 흡수 과정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항목이 함께 다루는데, 소련 점령지구는 그 첫 사례였다. 18 15

1946년 10월 선거와 블록 정당의 길들이기

1946년 10월 20일 다섯 주에서 주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1990년까지 이 지역에서 자유·보통·비밀 선거의 외양을 갖춘 유일한 주의회 선거였다. 조건은 고르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통합 뒤 따로 출마할 수 없었고, 공산당 신문은 35만 부를 찍은 반면 다른 당 신문은 25만 부씩만 허용되었다. 튤파노프는 비밀 지시로 「시민 정당의 지부 결성을 형식상 금지하지는 말되」 여러 핑계로 그 수를 묶어 두라고 했고, 그에 앞선 지방선거에서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이 후보 명부를 낼 수 있었던 곳은 시·읍·면의 20%뿐이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통일당은 제1당이 되었을 뿐 어느 주에서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작센안할트와 브란덴부르크에서는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의 연립도 가능한 의석 분포였다. 19 15

같은 날 치러진 대(大)베를린 시의회 선거는 더 분명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투표율 92.3%에 사회민주당 48.7%, 기독교민주연합 22.2%, 사회주의통일당 19.8%, 자유민주당 9.3%였다. 1990년까지 베를린 전체에서 치러진 유일한 선거였다. 시의회가 1947년 에른스트 로이터를 시장으로 뽑자 소련 측은 승인을 거부했다. 군정청과 사회주의통일당은 선거 결과에 실망했고, 이후의 선거를 각 당이 따로 경쟁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일 명부에 찬반을 묻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20 19

블록에 남은 두 시민 정당은 지도부를 잇달아 잃었다. 헤르메스의 뒤를 이은 기독교민주연합의 야코프 카이저는 공산당이 내놓은 중공업 국유화와 토지 분배에는 찬성한 사람이었지만, 공산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947년 12월 에른스트 레머와 함께 군정청에 의해 물러났다. 직접적인 계기는 사회주의통일당이 주도한 독일 인민회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일이었다. 자리를 이은 오토 누슈케는 고분고분한 인물이었다. 자유민주당은 대다수 주 조직의 뜻을 거슬러 인민회의에 참여했다. 1948년 4월과 5월에 새로 생긴 민주농민당과 국가민주당도 블록에 들어왔다. 13) 21 6

1947~1949년: 경제위원회, 인민회의, 「새로운 형태의 당」

국가의 골격은 경제 행정에서 먼저 생겼다. 1947년 6월 11일 군정청 명령 138호로 독일경제위원회(DWK)가 세워져 산업·무역·교통·농림·연료 중앙행정청과 배상 납품을 조정했다. 미국과 영국 점령지구가 1947년 1월 「비존」으로 합쳐지고 12월 런던 외무장관 회의가 결렬되자, 1948년 2월 12일 소콜롭스키의 명령 32호가 경제위원회에 점령지구의 모든 독일 기관에 대한 명령권을 주었다. 위원장은 하인리히 라우, 부위원장은 브루노 로이슈너와 프리츠 젤프만으로 모두 사회주의통일당원이었다. 위원은 11월 27일 38명에서 101명으로 늘었다. 경제위원회는 경제를 넘어 사실상의 정부가 되었고, 1949년 10월 그 기구가 동독 임시정부로 넘어갔다. 22 3

정치 쪽 통로는 인민회의 운동이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의 주도로 1947년 11월 26일 시작된 이 운동은 런던 외무장관 회의에 맞추어 12월 6~7일 베를린에서 「통일과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제1차 독일 인민회의를 열었다. 대표 약 2,000명은 선거가 아니라 정당과 대중조직의 지명으로 뽑혔고, 대중조직 대표 대부분이 사회주의통일당원이었기 때문에 에리히 그니프케는 참가자의 62%가 사회주의통일당원이었다고 추산했다. 1848년 3월 혁명 100주년인 1948년 3월 17~18일의 제2차 인민회의에는 서방 지구 대표 512명을 포함해 1,898명이 참석해 마셜 플랜을 거부하고 독일 통일을 위한 청원 운동을 결의했으며, 400명으로 된 독일 인민평의회를 뽑았다. 인민평의회의 헌법위원회는 그로테볼이 이끌었고, 사회주의통일당이 1946년 11월에 만든 초안을 바탕으로 1949년 3월 19일 헌법안을 확정했다. 21 23 22

그 사이 사회주의통일당 자체가 바뀌었다. 1948년 9월 15~16일 당 집행부 제13차 회의와 1949년 1월 제1차 당협의회는 사회주의통일당을 레닌식 「새로운 형태의 당」으로 개조한다고 결의했다. 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주집중제를 공식 원칙으로 채택했고 「분파와 그룹의 용인은 당의 성격과 양립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옛 사회민주당원과 공산당원이 반씩 나누던 원칙은 1949년 무렵 사실상 사라졌고, 1948년부터 1951년 사이 자기 목소리를 내던 사회민주당 출신들이 숙청되거나 투옥되었다. 네이마크는 사회주의통일당을 「새로운 형태의 당」으로 만든 소련 측 인물로 튤파노프를 꼽는다. 그의 선전국은 1946년이면 점령지구의 정치를 사실상 운영하고 있었다. 24 15 8

1949년 5월 15~16일 제3차 인민회의 대표 선거는 「나는 독일의 통일과 정의로운 평화 조약에 찬성한다. 나는 다음의 후보 명부에 동의한다」는 문장에 찬반을 묻는 방식이었다. 유권자 약 1,350만 명 가운데 400만 명 넘게 반대에 표시했고, 공식 찬성률은 약 66%였다. 빈 투표용지 약 100만 장이 찬성으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이 수치에도 의문이 남는다. 5월 29~30일 베를린에 모인 제3차 인민회의는 서독 기본법 공포 직후였는데, 점령지구 대표 1,400명과 서방 지구 대표 610명이 참석해 반대 한 표로 헌법안을 채택하고 제2차 인민평의회를 뽑았다. 21

1949년 10월: 늦게 온 국가

헌법은 준비되었지만 소련은 국가 수립을 서두르지 않았다. 1949년 9월 15일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독 총리로 선출된 이튿날, 피크·그로테볼·울브리히트 등 사회주의통일당 대표단이 비밀 협의를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들은 국가 수립 방안을 내놓았지만, 소련 측과 짠 세부 일정에 스탈린이 서면 동의를 내리기까지 열흘을 기다려야 했고 스탈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돌아온 뒤 예정되었던 선거는 1950년 중반으로 미뤄졌는데, 좋은 결과를 기대하던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25

10월 7일 인민평의회는 독일경제위원회 건물에서 마지막 회의를 열고 스스로 임시 인민의회로 바뀌어 헌법을 발효시켰고, 그로테볼에게 정부 구성을 맡겼다. 헌법 조문과 그 뒤 며칠의 절차는 베를린 봉쇄와 공수 항목이 자세히 다룬다. 10월 10일 저녁 피크·그로테볼·울브리히트는 카를스호르스트의 추이코프 사령부를 찾았고, 추이코프는 행정 기능을 새 정부에 넘겼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의 항복 문서가 서명된 곳이었다. 군정청은 이날 소련 통제위원회로 바뀌었다. 11일 피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그날 밤 공식 집계 20만 명의 자유독일청년단원이 운터 덴 린덴을 행진하며 호네커가 공화국에 대한 「청년의 서약」을 낭독했다. 12일 그로테볼 정부는 사회주의통일당과 네 블록 정당의 각료로 꾸려졌다. 25 3

이웃 나라들에는 1945년부터 자국 정부가 있었는데, 소련 점령지구는 왜 1949년 10월까지 경제위원회 같은 보조 기관만 가진 채 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점령지구는 독립국이 아니라 네 나라가 함께 결정해야 하는 독일의 일부였고, 소련은 배상과 루르 공업, 독일 전체에 대한 발언권을 걸고 있었다. 스탈린은 1945년 6월 통일 독일을 위해 일하라고 주문했고, 동독 수립 뒤에도 한동안 통일 독일의 선택지를 열어 두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이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한 것은 통일 협상이 막힌 1952년 7월이었다. 같은 해 3월 10일 스탈린은 중립 통일 독일을 제안하는 각서를 서방에 보냈다. 국가 수립의 순서도 이를 보여 준다. 서방의 런던 회의와 서독 기본법, 서독 정부가 먼저였고, 동독의 각 단계는 그 뒤를 따랐다. 5 26 27 25 21 22

해석의 갈래: 계획이 있었는가, 원치 않은 아이였는가

동독의 공식 역사서술은 사회주의통일당의 창당을 노동계급의 통일 열망이 이룬 「자발적 결합」으로 설명하고 「강제 통합의 전설」을 부정했다. 서독 역사가들 가운데서도 「강제 통합」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있었고, 헬가 그레빙은 2007년 이 말이 통합 과정의 복잡함을 담지 못한다고 썼다. 반면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는 2002년 이 말이 진실에 가깝다고 썼고, 일코사샤 코발추크는 통합이 결국 소련 점령 당국이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에게 가한 압력으로만 가능했다고 보았다. 튀링겐을 연구한 슈테펜 카헬은 오랜 협력 전통이 있던 그곳에서는 통합이 1948년의 스탈린화 전까지 실제 지지를 받았다고 보았다. 러시아 문서고가 열린 뒤의 연구들은 통합이 민주적 의사 형성의 결과가 아니었고 독일 자신의 이해가 중심에 있지도 않았다는 데 대체로 일치한다. 15

소련 문서를 처음으로 폭넓게 쓴 연구는 노먼 네이마크의 『독일의 러시아인들』(1995)이었다. 네이마크는 소련이 「구체적인 장기 목표」나 세부 계획을 갖고 독일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점령은 기회주의, 원칙, 「볼셰비키적 성향」, 서방과의 갈등이 뒤섞인 결과였다. 소련은 독일 전체에 대한 우위, 나치의 청산, 「민주적·반파시즘」 독일, 배상, 그리고 대중의 지지를 함께 원했지만, 군대의 행동과 여러 소련 기관의 독자 행동, 자발성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가 마지막 목표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동독은 「진흙 발」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1947~1948년의 소비에트화도 계획의 실행이라기보다 경제난, 소련과 사회주의통일당의 인기 하락, 동서 분열의 결과로 읽힌다. 8

빌프리트 로트는 1994년 『스탈린의 원치 않은 아이: 모스크바는 왜 동독을 원하지 않았나』에서 더 나아갔다. 그는 피크의 메모를 근거로 스탈린이 별도의 사회주의 국가를 원하지 않았고 통일된 민주 독일을 진지하게 원했다고 주장했다. 별도 국가를 밀어붙인 것은 튤파노프와 울브리히트의 독자적 행동이었고 이는 「객관적으로」 스탈린의 의도에 반했으며, 스탈린이 1948년 8월 2일 말했듯 서방이 소련을 자기 지구에 정부를 세우도록 몰아갔고, 아데나워가 총리가 된 뒤에야 스탈린이 동독 수립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격렬하고 긴 논쟁을 불렀다. 빙클러는 로트의 견해를 「기이하다」고 했고, 비판자들은 피크의 메모가 단어 몇 개뿐이라 해석의 여지가 크며 튤파노프에 대한 모스크바의 비판도 다르게 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몰로토프 문서를 본 페터 루겐탈러는 1952년의 스탈린 각서가 서독의 서방 통합을 흔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28 29

반대편 끝에는 게르하르트 베티히가 있다. 그는 「스탈린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는 결론 아래, 1945년 이후 스탈린이 약속한 「인민민주주의」가 철저한 소비에트화 계획과 모순되지 않았으며 서방이 볼셰비키의 민주주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소련의 독일 정책은 점령지구의 소비에트화를 확보하면서 서독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전술 변화와 선전의 연속이었다. 이 논쟁은 같은 사실, 곧 1945년 6월 스탈린의 통일 독일 발언, 1946년의 강제 통합, 1949년의 늦은 국가 수립을 서로 다르게 배열한다. 다툼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보다 스탈린이 무엇을 원했는가에 있다. 30 28

결과

1949년 10월의 동독에는 사회주의통일당이 지도하는 블록 정당 체제, 단일 명부에 찬반을 묻는 선거, 토지개혁과 몰수로 바뀐 소유 구조, 경제위원회에서 넘어온 중앙 행정, 그리고 소련 통제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점령 당국이 자리 잡았다. 소련 주식회사와 배상은 1953년까지 이어졌고, 특별수용소는 1950년 동독에 넘겨졌다. 스탈린은 1952년 3월 중립 통일 독일을 제안했고 그 진의는 지금도 논쟁거리이며, 사회주의통일당은 같은 해 7월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했다. 그 부담이 1953년 6월의 봉기로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베를린-카를스호르스트 브루흐뮐레 아트미랄스팔라스트 드레스덴 부헨발트 1 브루흐뮐레 3 아트미랄스팔라스트 5 라이프치거 슈트라세의 경제위원회 건물 2 베를린-카를스호르스트 6 베를린-카를스호르스트 4 드레스덴
  1. 11945.04.30동독소련
    울브리히트 그룹의 귀환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당 간부 열 명이 모스크바에서 날아와 5월 2일 브루흐뮐레에서 베를린 행정 재건을 시작했다.

  2. 21945.06.10동독소련
    군정청 명령 2호

    하루 전 세워진 소련군정청이 반파시즘 정당과 단체의 결성을 허가했다.

  3. 1945.06.11동독
    공산당 창당 호소문

    공산당이 독일에 소비에트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반파시즘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내걸었다.

  4. 1945.07.14동독
    반파시즘 블록 결성

    공산당·사회민주당·기독교민주연합·자유민주당이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통일전선을 만들었다.

  5. 1945.09.03동독
    토지개혁 시작

    작센 지방을 시작으로 100헥타르 넘는 토지를 무상 몰수하는 시행령이 11일까지 잇달아 나왔다.

  6. 1946.03.31동독독일
    베를린 사회민주당 당원투표

    서방 구역에서만 치러진 투표에서 82%가 즉각 통합에 반대했다.

  7. 31946.04.22동독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창당

    아트미랄스팔라스트의 통합대회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합치고 피크와 그로테볼을 공동의장으로 뽑았다.

  8. 41946.06.30동독
    작센 주민투표

    전범·나치 기업의 몰수가 투표율 93.7%, 찬성 77.6%로 승인되었다.

  9. 1946.10.20동독독일
    주의회·베를린 선거

    사회주의통일당은 어느 주에서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베를린에서는 19.8%로 3위였다.

  10. 1947.06.11동독소련
    독일경제위원회 설치

    군정청 명령 138호로 세워진 경제위원회가 1948년 2월 명령권을 얻어 사실상의 정부가 되었다.

  11. 1947.12.06동독
    제1차 독일 인민회의

    사회주의통일당 주도로 지명된 대표 약 2,000명이 베를린에서 독일 통일과 평화 조약을 요구했다.

  12. 1948.03.18동독
    독일 인민평의회 선출

    제2차 인민회의가 400명의 인민평의회를 뽑았고, 그 헌법위원회를 그로테볼이 이끌었다.

  13. 1949.01동독
    「새로운 형태의 당」

    사회주의통일당 제1차 당협의회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민주집중제를 채택하고 분파를 금지했다.

  14. 1949.05.15동독
    단일 명부 투표

    제3차 인민회의 선거에서 공식 찬성률은 약 66%였고 400만 명 넘게 반대했다.

  15. 51949.10.07동독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인민평의회가 임시 인민의회로 바뀌어 헌법을 발효시켰다.

  16. 61949.10.10동독소련
    군정청에서 통제위원회로

    추이코프가 카를스호르스트에서 행정 기능을 새 정부에 넘기고 군정청은 소련 통제위원회가 되었다.

관련 인물 24명

참여9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사회주의통일당 공동의장, 초대 총리오토 그로테볼1894–1964

점령지구 사회민주당을 이끌고 통합에 응했으며, 인민평의회 헌법위원회를 맡은 뒤 1949년 정부를 구성했다.

소련공산당 국제정보부 간부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

1945년 4월 25일 피크와 함께 귀국하는 독일 공산당 간부들의 임무를 정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원안드레이 즈다노프1896–1948

1945년 6월 4일 스탈린과 독일 공산당 지도부의 회동에 함께했다.

자유독일청년단 의장에리히 호네커1912–1994

1946년 3월 자유독일청년단을 창립했고, 1949년 10월 11일 「청년의 서약」을 낭독했다.

서독 초대 총리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

1949년 9월 15일 그가 총리로 선출된 이튿날 사회주의통일당 대표단이 국가 수립을 협의하러 모스크바로 갔다.

작센 파견 공산당 그룹 지도자안톤 아커만1905–1973

1945년 6월 11일 공산당 호소문을 써서 소비에트 체제 대신 「반파시즘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내걸었다.

작센 공산당 지도자헤르만 마테른1893–1971

대기업 몰수를 주민투표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사회주의통일당 부의장막스 페히너1892–1973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울브리히트와 함께 통합당의 부의장이 되었다.

기독교민주연합 대표오토 누슈케1883–1957

카이저의 뒤를 이은 고분고분한 후임이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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