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게오르기예비치 라콥스키

Христиан Георгиевич Раковский

발칸 혁명가에서 우크라이나 수반으로: 반대파 이론가가 된 외교관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 1938년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

불가리아 민족 출신으로 루마니아 시민권을 지닌 범유럽적 혁명가였고,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다. 1919–1923년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를 세웠고, 주영·주프랑스 소비에트 대사를 지냈다. 스탈린의 민족 정책과 당 관료화를 비판한 좌익 반대파의 이론가로 1927년 제명되었고, 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를 인정하고 1935년 복당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되었으며, 1988년 2월 4일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발칸에서 유럽으로: 범대륙적 혁명가의 형성 (1890–1917)

크러스툐 스탄체프는 오스만 제국령 코텔에서 태어나 불가리아 독립운동의 상징인 게오르기 라콥스키의 후손으로 자랐다. 1887년 '크리스티안 라콥스키'로 개명하고 1890년 제네바로 망명해 의학을 공부하며 플레하노프를 만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와 접속했다. 이후 베를린·몽펠리에에서 수학하며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포어베르츠》에 기고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도 교류했으며, 1896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분열 시기에는 볼셰비키의 경제 강령과 멘셰비키의 정치적 방법을 종합하려는 중재자로 활동했다. 그의 핵심 사업은 발칸 사회주의였다. 제네바에서 루마니아어 좌파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와 불가리아 마르크스주의 간행물들을 창간했고, 1910년 루마니아 사회민주당을 재건해 제1서기를 맡았다. 이어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그리스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묶어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하고 초대 서기가 되었다: 발칸 전쟁이 남긴 적대를 넘어서는 반전 연대의 시도였다. 1915년에는 국제사회주의 운동의 반전 좌파가 모인 치머발트 회의의 조직자로 참여했고, 러시아·프랑스·독일·루마니아에서 반전 활동과 선동으로 여러 차례 추방·구금되었다. 1916년 루마니아가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자 패배주의와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야시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5월 러시아 수비대에 의해 풀려났다. 이 광범위한 유럽 혁명 경험이 1917년 이후 소비에트 국가 건설자로서의 활동을 준비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의 수반: 1919–1923년 정부 건설

라콥스키는 1919년 1월 16일 게오르기 표타코프를 대신해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이 되었고, 3월 29일 내각이 인민위원회의로 개편되었다. 러시아어·우크라이나어 위키백과는 같은 직위의 임기를 다르게 제시한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제1대 의장 1919년 1월 29일~12월 17일, 제3대 의장 1920년 2월 19일~1923년 7월 15일이며, 1919년 1월 24일부터는 우크라이나 임시 노농정부 수반이었다. 재임 중 외무인민위원을 겸했고 1919년 1월~1920년 5월에는 내무인민위원을 겸했다. 1918년에는 오데사에서 '루마니아·우크라이나 반혁명 투쟁 최고 자치 위원회'(체카의 지방 기구)를 이끌었고, 룸체로트 위원이었다. 1918년 4월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와의 평화 교섭을 위해 쿠르스크에 파견되었고 9월에는 독일로 파견되어 요페·부하린과 함께 추방된 뒤 카우나스에서 구금되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백군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 격퇴에 참여했고, 1919년 3월 코민테른 창립 구성원으로 발칸 공산주의 연맹을 대표했다. 정부는 1919년 여름 우크라이나 통제를 상실했고 당내 자치파의 도전을 받았다. 1920년 3월 제4차 우크라이나당 대회에서 지도부가 재선되지 않았으나, 레닌이 라콥스키의 손을 들어주고 트로츠키·카메네프·요페 대표단이 키예프로 파견된 뒤 대규모 숙청으로 자치파 반대 세력이 제거되고 기존 지도부가 복위했다. 라콥스키는 우크라이나를 '국제주의의 실험실'이자 '세계혁명의 결정적 요인'으로 규정하며 혁명이 발칸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권 초기에는 우크라이나 민족문제를 부차적으로 보아 민족주의 운동을 반혁명으로 규정하고 '현 소비에트 권력 아래 러시아화의 위험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했으며, 1919년 2월 13일 키예프 시의회에서 '우크라이나어를 국어로 규정하는 것은 반동적이고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1920년 폴란드·우크라이나 공세를 처리한 뒤 집단화 조치를 취했고, 전기 작가 거스 페이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자치의 옹호자로 전환해 보로트비스트를 당 구조에 전면 통합하는 우크라이나화와 완만한 공산화를 주장했으며, 1920년대 초 공화국이 유럽 여러 나라와 독자적 무역 협정을 체결할 만큼 경제적 독립을 요구했다. 러시아 당과는 두 번째 내각의 독립 외무무역인민위원부가 중앙 통제하의 기구로 대체되면서 충돌했다. 제12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민족정책을 비판하고 1923년 6월 외국 기업의 우크라이나 지사 개설에 공화국 허가를 요구하는 결정을 관철했으나 한 달 만에 번복되었다. 1923년 7월 초 우크라이나 지도부 내에서 고립된 끝에 해임되어 블라스 추바르에게 자리를 넘기고 런던으로 파견되었다. 우크라이나인이었던 추바르는 이후 이 지역의 민족문제에서 '토착화'로 공식 규정된 스탈린의 견해를 대표하게 되었다.

1922–1923년 민족문제 논쟁: 공화국 권한의 수호자

소련 결성 과정에서 라콥스키는 스탈린의 '자치화안'(각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시키는 방안)에 맞서 공화국들의 대등한 권한을 가장 일관되게 옹호했다. 1922년 3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라콥스키 동지를 우크라이나에서 해임하지 말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는 결의를 채택할 정도로 그의 위상은 확고했다. 1923년 4월 제12차 당대회에서 라콥스키는 스탈린의 민족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연방 인민위원부들의 권한 중 10분의 9를 박탈하여 민족 공화국들에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6월, 라콥스키의 주도로 우크라이나 당 중앙위원회는 외국 기업들이 우크라이나에 지사를 열려면 공화국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결정을 채택했으나, 한 달 만에 모스크바에 의해 번복되었다. 1923년 6월 제4차 민족공화국·지역 책임일꾼 협의회에서 스탈린은 라콥스키를 '연방주의, 민족일탈주의, 분리주의'라고 공개 비난했다. 한 달 후 라콥스키는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직에서 해임되어 주영국 대사로 발령받았다. 7월 18일 그는 스탈린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저의 런던 임명은 저 자신만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의 저의 해임을 위한 구실일 뿐입니다.' 이 논쟁은 훗날 좌익 반대파가 스탈린의 관료적 중앙집권화를 비판하는 이론적 출발점 중 하나가 되었다.

제3차 모스크바 재판 (1938년)

1937년 1월 27일, 라콥스키는 NKVD에 체포되었다. 내부 감옥에 수감된 그는 약 8개월 동안 독방에 갇혀 모든 혐의를 부인했으나, 결국 심문에 굴복했다. 1938년 3월 '반소비에트 우익-트로츠키 블록' 사건(이른바 '21인 재판')의 피고로 법정에 선 그는 부하린, 리코프, 야고다 등과 함께 일본·영국 스파이 활동과 반역 음모를 인정했다. 비신스키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음에도, 라콥스키는 베소노프, 플레트뇨프와 함께 사형을 면하고 20년형을 선고받은 단 세 명의 피고 중 하나였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빅토르 세르주는 라콥스키가 유럽이 보기에 명백히 거짓인 증언으로 의도적으로 재판을 조롱했다고 기록했다. 1941년 9월 11일 독일 침공 이후 오룔 근처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되었으며, 1988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에 의해 복권되었다.

← 카드로 돌아가기